개인의 발견 - 어떻게 개인을 찾아가는가 1500 - 1800
리햐르트 반 뒬멘 지음, 최윤영 옮김 / 현실문화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44
"나는 세계시민이 되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에게 속하기를 원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중 누구에게도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천국시의 시민 명단에 오르는 행운이 있으면 좋으련만."(에라스무스, 1522년 울리히 츠빙글리에게 씀)

49-52
"나는 나의 책이 나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나의 책을 만들지 않았다. 이는 바로 저자의 살이며 피인 책이며 오로지 나만 다루었고, 나의 인생의 한 부분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다루지 않았으며 다른 책들처럼 그 어떤 낯선 목적을 위해 쓴 것도 아니다."(몽테뉴, "엣세"를 쓴 배경에 대해)

52-53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정직한 마음으로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시작부터 내가 집안일이나 사사로운 일을 말하는 목적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당신에게 미리 밝힙니다. (후략)" (몽테뉴, "엣세" 1580년 서문)

71
학교는 개인을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교육했고 공들여 습득한 개인의 문화 기술로 ‘공공에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학교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을 ‘합리적으로’ 성찰하고 분석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서 근대의 개인화가 주제 혹은 문제로 부각되었다. 교회, 국가, 학교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하고 분석하도록 시켰다. 이러한 목표를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없었더라면, 다시 말해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었더라면, 현재 우리가 근대 초기의 자기통제나 자기인식과 주관적 독자성의 흔적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105
많은 일이 학교 영역에서 행해져서 학생의 연령에 맞춘 교재와 교육과정을 만들고 학급을 나누었으며 학교교육이라는 자산이 사회를 개선시키고 ‘바람직한 질서’를 공고히 한다고 인정받은 시기는 17세기였다. 그러나 이때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계몽주의 시기까지는 학교교육에서 인생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문화 기술을 주입시키는 것, 다시 말하면 읽고 쓰고 계산하는 것, 교리문답의 암기, 즉 기독교도덕의 암기와 엄격한 훈육, 신에 대한 외경, 복종 등만이 중요한 과제였다는 것이다. 가정교육과 가정 외 교육은 모두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전통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계몽된 교육자들조차 자신의 관심이나 소원은 억제해야 하고 자기애는 본래부터 죄악이므로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06
학생들은 "육체적이고 외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원한 행복을 향상시키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부모들은 아동들이 본인의 전체 행복을 책임질 수 없는 동안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자신의 안녕을 담당하고 제대로 해낼 수 있게 하는 의무를 진다."(Lawrence Srerne)

110
자신에 대한 의식과 개성은 자연적 천성이 아니라 사회적 ‘교육’의 결과였다. 그 가운데 외적 규범들은 모든 사회적 계층들을 구속했고, 이 규범들은 근대 초기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며 때로 단절되기도 했지만 오랜 과정을 통해서 ‘내면화되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원래 금지되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일들을 나중에는 자유의지로 하지 않게 되었다. 올바른 사회적 행동에 대해 후천적으로 인식을 얻게 되었고 이것이 삶을 통제했다. 규율화 과정은 이전의 인간의 독자성 사상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독자성(인간의 존엄) 사상, 즉 성찰적 독자성에 대한 전제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이 새로운 독자성은 이전의 독자성처럼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었다.

179
18세기에 자기, 자신의 삶, 자기감정과 느낌을 루소만큼 자기 일의 중심에 놓은 사람은 없었다. 루소의 극단적인 주관주의는 계급이나 궁정, 교회 및 종교 등 모든 전통과 결별을 고했다. 그는 자아를 인생의 중심으로 털어놓았다. "내가 고백을 하는 가장 본래의 목적은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나의 내면을 정확하게 토로하는 데 있다. 나는 내 영혼의 이야기를 약속했고, 이를 충실하게 쓰기 위한 다른 보조수단은 필요 없다. 나는 단지 지금까지 했듯이 내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209
17세기에 오면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도시 시민들과 귀족들이 글을 깨우치면서 그리고 계층에 따라 각기 가족의식이 형성되면서 편지 왕래가 촉진되었다.

209-210
16세기 사람들이 글을 말하는 것처럼 썼다면 17세기에는 형식을 갖춘 표준어가 발전했다. 계급간의 차이가 강조되고 ‘당신’이라는 존칭이 도입되었으며 호칭의 비중이 커지고 편지를 쓰는 사람은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었다.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이러한 인위적인 양식은 바로 ‘궁정식’ 사교 방식을 따른 것이다.

224
(근대 초기 사회에서) 결혼은 삶의 공동체와 노동 과정, 재산, 그리고 가정의 근간을 뒤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개인의 생각과 소망을 인정하는 제도였다. 결국 혼인은 각 사람의 개인적 목표이기도 했지만 신분 계층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려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할당된 자리는 제대로 된 사회의 가장자리였다.

252
"자기 생각이란 진리의 최고 시금석을 자기 안에서(즉 자기 자신의 이성 안에서) 찾는 것이며, 계몽이란 언제나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격언이다."(칸트, "생각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786)

253
계몽의 "표지"는 다른 모든 사람의 의견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신앙은 스스로의 연구와 노력으로 얻어낸 우리의 재산인 것이며 우리 정신의 형식에 밀착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생각이나 행동에서 우리의 모든 소질과 능력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계몽주의의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자유를 통한 자기 정신의 가장 고유한 형식을 거치지 않는 것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 사상가다."(아담 베르크, "계몽주의가 혁명을 유발하는가", 1795)

254
자기교육은 개인 홀로 하는 과정이 아니었고 이후의 신인문주의처럼 자기 자신 안에 목표를 두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교회와 궁정이라는 전통적인 문화 중심지 바깥에서 계몽주의식의 자기 형성은 글과 말을 통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만 완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기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매체는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하는 독서와 토론이었다. 이러한 자기교육 과정의 증거는 18세기에 오간 수많은 서신들에 남아 있다.

270-271
새로운 시민 개인, 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자기 주장은 18세기 영국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훨씬 적게 나타났다. 대륙에서는 영국보다 훨씬 늦게야 개인 삶의 감정이 문학에서 다루어졌는데, 이와 무관하게 ‘개인화 과정’ 자체는, 특히 독일에서, 훨씬 절제된 형식으로 나타났다. 독일의 발전에서 모범이 되었던 것은 도시귀족의 자제이자 바이마르의 추밀고문관이었던 괴테가 쓴 소설들인데, 여기에는 18세기 후반의 가능성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271
"현재의 나와 완전히 똑같게 나를 완성시키는 것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어렴풋한 소망이었다."(주인공 빌헬름 마이스터)(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306-307 옮긴이의 말
(전략) 근대화가 우리의 보편적 일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아직도 한국적 내지는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의 차이를 보여 주는 부분이 바로 이 ‘개인’이라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주체’의 죽음이 이야기된 지도 오래고 ‘개인’ 개념 자체도-별로 제대로 논의된 적도 없이-화두가 되지 않지만 서구와 한국의 차이는 개인화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워낙 급격하게 변모하기 때문에 10년 뒤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직 우리는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가족이나 학교, 사회, 출신 지역 등 집단의 정체성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역자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일어났던 근대화가 서구와 달리 자의든 타의든 언제나 집단적 가치가 강력하게 주장되는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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