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지음 / 생각의힘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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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생을 통틀어 성욕이 가장 충만한 시기라더니, 아무 맥락 없이 대뜸 "섹스!"를 외치는 녀석들도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지만 저런 방식으로 터져 나오는 건 안타깝다. 아직도 많은 교실에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처럼 여성을 성취의 보상으로 여기는 급훈이 걸려 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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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를 폭력적으로 대하거나 다른 여자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둘 중 하나다. 교실에서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상스러운 단어, ‘따먹다’가 수시로 귀에 꽂힌다. 아이들은 남성성의 본질이 거친 행동과 저속한 말에 있는 양 ‘수컷다움’을 경쟁적으로 전시한다.

9
교육부가 2년 동안 6억을 쏟아부어 만들고 2015년 3월에 배포한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는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망언이 담겨 있다. 성평등 감수성을 길러주기는커녕 성폭력과 성역할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조장하는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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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안다고 해서 손발이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관건은 도덕관념을 행동으로 발현하는 방법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선의와 양심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안하다. 그렇다고 강제력이 투입되면 왜곡된 진심과 얄팍한 가식이 번창한다. 규약의 내용은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성장 과정에서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말들, 머릿속에 규범으로는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만한 것들이었다. 그런 내용들이 활자가 되고 반복되자 심리적 구속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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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은) 여론이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미안하다는 식의 조건부 면피용 사과를 한다. 사법 처벌이 임박하면 돌연 태도를 바꿔 물타기를 시도한다. 옷차림, 입술 색깔, 대인관계 등 별별 트집을 다 잡는다. 소속 집단에 과한 저에성을 부여한 이들이 ‘00망신’을 들먹이며 달라붙고, 전선 고착화에 고무된 가해자는 협박을 반쯤 섞어 합의를 시도한다. 중년 남성들로 구성된 재판부는 가해자 쪽 주장을 대거 인용해 경미한 처벌을 내린다. 간혹 재판부가 압박을 느낄 정도로 여론이 분노하면 그제야 일반 시민들도 납득 가능한 판결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런 지난한 과정조차 피해자가 용기를 내야 가능한 일이다. 조사 과정에서 생각하기도 싫을 끔찍한 순간을 끝없이 소환해야 하고, 때로는 조사관에게 2차 가해를 당하기도 한다. 가해자를 직접 대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사건이 조직 내부에서 발생했을 경우 고립되는 건 보통 피해자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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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깜냥으로 남자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여자도 아닌데 웬 페미니즘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후배가 답했다.
"남자니까 잘 모르잖아요. 배워야죠."
각성이 일었다. 후배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니까 배워야죠’ 그 말이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남의 일이라 무심할 수 있지만 남의 일이라 배울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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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애가 있는 학생은 페미니즘도 쭉쭉 빨아들인다. 레베카 솔닛은 그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흑인 남성이 백인 남성보다 페미니즘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차별도 받아본 사람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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