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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평화권, 자결권, 발전권, 집단권, 환경권 혹은 연대의 권리를 내용으로 하는 ‘제3세대 인권‘이 논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가 진정으로 진일보하려면 인간의 권리를 넘어 생명권을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세상에는 수많은 인구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도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데, 한가롭게 동물권 이야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며칠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유기동물보호소를 운영하던 Paul ‘Pen‘ Farthing이 현지 직원들을 둔 채 개, 고양이 등 동물 150여 마리만 탈출시킨 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다만, 국내 언론과 다른 나라 언론들이 주목하는 포인트, 서술하는 방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가디언 ˝Ex-Marine Pen Farthing arrives in UK with dogs and cats onboard flight˝ (2021. 8. 29.)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1/aug/29/ex-marine-pen-farthing-arrives-in-uk-with-dogs-and-cats-onboard-flight

워싱턴포스트 ˝A Royal Marine rescued animals from Afghanistan in a mission dubbed ‘Operation Ark.’ His staff was left behind.˝ (2021. 8. 30.)
https://www.washingtonpost.com/nation/2021/08/30/pen-farthing-afghanistan-animal-rescue/

BBC ˝Afghanistan: Pen Farthing still working to rescue terrified staff˝ (2021. 9. 2.)
https://www.bbc.com/news/uk-england-essex-58420839

책을 조금 읽고 든 생각은, 동물운동에 대한 흔한(그리고 의도적인) 오해처럼 ‘인간으로서‘ 느끼기에 불편하거나 언뜻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 근본주의적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는(때로는 폭력적 수단을 옹호하는 견해까지도), 물론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진지하게 변화를 꿈꾸는 이들 가운데 결코 주류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피터 싱어는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쓴다. ˝종차별을 거부하는 일은 모든 생명의 가치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익과 동물의 이익은 - 그 이익이 어떤 이익이든 - 똑같이 중요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이익과 인간의 이익이 비슷할 경우 - 이를테면 신체적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 이러한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제한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 뿐이다. 단지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존재의 이익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물권에 관한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문득 든 것은, 존 스튜어트 밀을 읽으면서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공리주의적 관점에 따르게 되면 동물의 권리를 부정할 이유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1부 ‘동물운동의 이론적 토대‘ 중 Gaverick Matheny가 쓴 첫 번째 글 ˝공리주의와 동물 Utilitarianism and Animals˝에서는, 공리주의가 동물 처우에 대한 종차별적이지 않은 접근법을 가장 명쾌하게 옹호하는 윤리적 주장이라고 본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밀이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한 논리가 연상된다. 영미에서 동물운동이 가장 앞서 일어난 것도 그러한 철학적 배경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전 이코노미스트 동물권 입법 기사를 재발견하기도 했어서 미국의 동물법 개론서를 아마존에서 주문해 받았다. 조금 읽다보니 영국 문헌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학부 시절, 한 후배가 『실천윤리학』을 읽고 감동해서는 피터 싱어의 책들을 같이 읽자고 강력히 추천했는데, 당시에 편협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그 친구 제안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던 것이 반성되고 후회가 들곤 한다.)

아무튼 나는 아이와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한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바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맹자에 나오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니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니 하는, 그런 마음의 싹 말이다. 약자라고 해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잖는가.

얼마 전 10대 학생들이 60대 여성에게 담배를 사내라며 막말을 하고 행패를 부리는 영상이 충격을 주었다. 화가 나기 이전에 슬펐다. 우리는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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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이대로 혐오와 배제의 사회로 흘러가지 않게 막으려면 그러한 관점과 발언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한국 남성이 많아져야 한다.

어제 올라온 닷페이스, ˝이게 그렇게 불편하세요?˝ (2021. 8. 12.) 영상(권김현영 님도 나오신다)
#손가락논란 #페미
이 논란이 ‘개소리‘인 이유
https://youtu.be/uUplfLWq8hA
(알라딘 북플도 썸네일 기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래는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발췌.

한국 남자가 ‘믿고 있는‘ 현실과 실제 성 평등 관련 수치들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그들은 어떤 데이터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 남자들은 억울함과 피해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 P9

역할 모델이 없는 남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른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남성은 이 상태로 살아왔다. 혼자 벌어 가족을 건사하기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전업 주부를 증오하면서도 맞벌이 아내를 위한 가사 노동은 외면했으며, 직장이 구조조정 위기가 닥칠 때마다 여자가 먼저 해고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내가 네 팔자를 펴주겠다."거나, "결혼하면 아침밥은 차려줄 거지?"라고 프러포즈 하는 남자가 아직도 있다. 한국 여자들은 이제 이러한 표현을 낭만이 아니라 공포로 이해한다. 평생 동안 남자의 운명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50년 동안 아침밥을 차려줘야 할지도 모르는 ‘현실‘로 말이다. 이 상황에서 이성애가 위기에 빠진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결혼 제도가 와해되고, 생계 부양자로서 지위를 잃어도, 이성애를 통해 생물학적 남성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근근이 버텨 왔던 한국 남자들은 이제야 진정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한국의 남성성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 P10

이제 특권을 유지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을 잃어버린 한국 남자들은 사이버 공간을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남성으로 재주체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삼고 있다. 남성이 주권의 독점자일 수도, 생계 부양자일 수도 없는 사회 구조의 재편 속에서 남자들이 도달해야 하는 다음 언어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자기 연민도 자기 확신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엄기호의 주장이다). 두 언어 모두 스스로 보편성의 담지자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 P20

이성애자 남자는 자신의 성적 욕망이 여자에게 향해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만 해도 남자가 된다. 이성애주의에 기반한 강제적 이성애 제도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이성애의 정상성에 대한 강박적인 기준이 부과되며, 그 결과 이성애 규범에서 벗어난 남성성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위태로워진다.

단지 페니스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남자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닌 사회일수록, 페니스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 P22

지식이 아니라 무지가 특권이 되고, 서로 예의 바르게 구는 교양이 위선이 되고 무례와 범죄가 솔직함으로 둔갑하는 사회다. - P24

독자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강박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상호 의존과 보살핌 사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남자가 한국 남자의 지향이 되기를 바라며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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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묵향 > 싸움의 기술

3년 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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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쓴다.

  길게 쓰다 만 글들이 몇 개 있었는데, 다른 많은 일들에 전념하고 돌아와보니 어디에 저장해두었는지도 모르겠고, 찾은들 이어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순간순간 한계를 짜내야 하는 삶 안에서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따금 옛글에 "좋아요"를 눌러주시는 분들 덕분에, 내가 이전에 저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상기받는다.


  아이가 보통 깨는 시각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른 새벽 5시에 깼기에, 머리를 좀 씻을 생각으로 저 책을 잡아보았다.

  구색은 얼추 갖추었으나, 잘 간추린 책이라고는 보기는 어렵다.

  127쪽에 Mary Wollstonecraft의 사망연도가 1997년으로 되어 있는데, 당연히 1797년의 오기이다. 133쪽 Phillippa Foot의 이름 표기, 135쪽 Judith Jarvis Thomson의 이름 표기도 잘못되었다(그 밖에 아주 많지만 생략).

  포스트 페미니즘의 흐름을 크게 여성해방운동(MLF; 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 https://en.wikipedia.org/wiki/Mouvement_de_lib%C3%A9ration_des_femmes)의 두 분파, 즉 '평등'을 강조하는 '혁명적 페미니스트' → 영미 페미니즘과, '차이'를 강조하는 '정치와 정신분석'(Politique et psychanalyse, 줄여서 po et psyche) → 프랑스 페미니즘으로 대별하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요한 마디가 어떻게 페미니스트들에 의하여 재전유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다룰 내용이 방대해서 그런지, 다른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에 비하여는 실망스럽다.


  지은이 Sophia Phoca는, 런던예술대학(UAL, https://en.wikipedia.org/wiki/University_of_the_Arts_London)을 구성하는 Camberwell, Chelsea, Wimbledon의 미술대 학장님이다(https://www.arts.ac.uk/colleges/chelsea-college-of-arts/people/sophia-phoca). UAL은 Camberwell, Chelsea, Wimbledon 외에도 Central Saint Martins, London College of Communication, London College of Fashion 등 6개 학교가 연합한 종합 예술대학인데, 유럽에서는 가장 크고, QS World University Rankings 2020에서 Royal College of Art에 이어 Art & Design 분야에서 2019년에 이어 2위에 올랐다. https://www.topuniversities.com/university-rankings/university-subject-rankings/2020/art-design 3위가 미국 Parsons School of Design at The New School, 4위가 미국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RISD), 5위가 미국 MIT이다. UAL은 한국에서도 유학을 많이 가(고 싶어하)는 학교이다(학생들을 인터뷰한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https://youtu.be/lXyGLox_D04).

  Phoca 학장님은 위 책 외에 특별히 남긴 저서가 없다. 대학 프로필에도 The Routledge Reader on Feminism and Postfeminism (2007)에 기여하였다는 것과, 엘렌 식수(Hélène Cixous)를 인터뷰하였다는 정도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책에서는 특이하게도 '덕 이론'(Virtue Theory)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너스바움 Martha C. Nussbaum이 덕 이론 계열의 신세대(?) 철학자로 분류되는 모양인데, 나는 특히, '도덕적 객관성이나 선험적 견해는 모두 허구이고, 도덕적 고려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이해득실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 Phillippa Foot과,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로서 '도덕 역시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구성된 것이기에 사람들이 도덕에 대한 감정적 속박, 헌신에 관하여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즉 사람들의 동기와 욕망을 검토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Elizabeth Anscombe에 관심이 갔다. 대의명분이 정파의 이해득실을 은폐하고, 자신들과 추종자들의 정신분열을 봉합하는 알리바이로 전락해버린 시대 아닌가.


  어떤 책들이 나와있는지 보자.




  책에 언급되거나 소개된 책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책이 나오고도 20년이 지난 만큼, 새로 출간된 책들을 내 마음대로 덧붙였다. Juliet Mitchell의 선구적인 저서,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Psychoanalysis and Feminism』(1974)은 언제라도 번역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문화 연구와 문학 연구, 탈식민주의



 

  성, 퀴어 이론 등




  영화 연구




  예술 연구




  무용




  사상가별[이번 포스팅의 맥락상 지나치게 일반적(?)인 책들은 제외하고, 덕 이론 사상가들을 위주로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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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미지를 실수로 지웠다가 다시 넣었더니 썸네일 이미지로 다른 책이 뜬다.)


  이상하고 '후진' 생각과 실천들에 대하여 그것이 왜 이상한지를 설명하여 납득시켜 주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동시에 그런 차별적 인식은 우리 안에 너무 깊이, 켜켜이 뿌리박혀 있어서 끝없이 성찰하고 정정해 나가지 않으면 어느새 차별과 권력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예컨대, 어제 링크한  "조나단, 한현민, 라비 '흑형'이란 말에 상처 받는 이유", BBC News 코리아 (2019. 9. 4.) https://www.youtube.com/watch?v=QnTPdBMLzOo 영상을 보면, 한국에서 백인들에게는 "혹시 어디서 공부하시냐?"라고 묻지만, 흑인이나 동남아시아 사람들한테는 "혹시 어디서 일해요? 어느 공장?"이라고 묻는다는 장면이 있다. 유쾌하고 발랄하게 우리 내면의 그릇된 코드를 성찰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영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위와 같은 장면은 은연중에 노동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내포한 것일 수 있다. 예컨대, 같은 영상을 블루 칼라 노동자나 그 자식들에게 보여준다면 그 또한 상처를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페미니즘은 차별과 권력의 코드를 파헤치고 드러내는 최일선에 있는 사유로서, 우리의 일상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는 가장 실천적 투쟁이 된다.


  재작년 말에 양성평등 강연을 준비하면서 참고할 목적으로 절반을 읽다가 이번에 마저 읽었다(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557605). 최근 들었던 강연에서 참 인상 깊었던 대목 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 다수는 백주 대낮의 언론사 인터뷰나 설문조사에서 자신의 차별적 인식과 혐오 발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스란히 발화한다는 것이었다(자기 얼굴이 노출되는데도). [역시 어제도 링크한 세계가치조사 http://www.worldvaluessurvey.org/WVSContents.jsp를 보면, '다음 사람들을 이웃으로 맞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라별로 집계하고 있다. 질문한 항목은 약물중독자(Drug addicts), 다른 인종의 사람(People of a different race), AIDS 환자(People who have AIDS), 이민자/이주노동자(Immigrants/foreign workers), 동성애자(Homosexuals), 종교가 다른 사람(People of a different religion), 폭음자(Heavy drinkers), 비혼 동거 커플(Unmarried couples living together),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People who speak a different language), 전투적 소수자(Militant minority), 전과자(People with a criminal record),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Emotionally unstable people), 무슬림(Muslims), 유대인(Jews), 전도사(Evangelists), 출신국에서 오지 않은 사람(People not from country of origin, 맥락을 정확히 모르겠다), 정치적 극단주의자(Political Extremists)이다(이들 범주 하나하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위와 같이 범주화하는 것이 적확한지, 심지어 정의할 수나 있는 것인지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대중 인식 지형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이므로 그러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자). 우리는 다른 인종과 이민자/이주노동자, 성적 소수자, AIDS 환자 등 타인에 대한 배타성이 전반적으로 아주 높다(특히 AIDS 환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데, 이는 과학적이지도 않고 보건의료 관점에서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에서 AIDS는 더 이상 치명적이거나 전파되는 질병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한국에서 AIDS 환자는 병이 아니라 자살로 죽는다는 서글픈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더 큰 문제는 우리가 흔히 인종차별, 소수자 차별이 우리보다 심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에서도 그런 인식을 우리처럼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나라들에서 그런 말을 공적인 자리에서 서슴없이 하면 질 떨어지는 수준 낮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친구를 잃게 된다. 나아가 직장을 잃을 수 있고 법적으로 처벌받는 일도 생긴다. 지금 미국에서 각종 총기로 무장하고 거리에 나와서 "COVID-19에 관한 언론 보도는 모조리 '가짜 뉴스'이고 트럼프 대통령을 낙선시키고 우리 경제활동과 자유를 억압하려는 민주당의 '음모'"라는 식의 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적어도 낮에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든 리버럴이든, 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외국에서는 그 비슷한 취급을 받는 언행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뱉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좌파 정당은 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시류에 타협하는 모습이 보이고, 특히 남성 중에 차별적 태도를 곧잘 드러내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국뽕 마케팅'은 주의 깊게 자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당장 중국의 자화자찬이 엄청난 백래시를 맞고 있지 않은가. 트뤼도 총리가 여러 면에서 오락가락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음 연설은 우리가 곱새겨 볼 만하다. 캐나다 정부에서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차별 관행을 역사적, 공식적으로 사과한 연설이다. "Full Speech: Justin Trudeau offers formal apology to LGBTQ community for government discrimination," Global News (2017. 11. 29.) https://www.youtube.com/watch?v=xi23IL3b6cs]


  예비군 훈련과 민방위 훈련의 차이, 술집에서 '이모'라는 호칭, 아침드라마의 사회학과 같이 평소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에 대한 지적이 흥미롭다. 아무튼 대한민국 남성들이여, 우리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요, 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직면하자("남성들이여, 우리가 악어임을 받아들이자"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0398432). 그래야 우리도 더 행복해진다.


  곧 『민원을 제기합니다!』라는 신간을 내실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 책들이 인용되어 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쓴 리베카 솔닛의 책이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나와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어둠 속의 희망』과 『걷기의 인문학』은 각각, 2006년 창비, 2003년 민음사에서 나왔다가, 2017년 창비와 반비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추가) 가톨릭 교회에서 여성 사제를 허용할 때까지 신도들이 미사 참여를 보이콧하는 건 어떨까... 지은이처럼 그 때문에 이미 떠난 이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미사 전례에서 가부장제적 어휘들이 불편하다. 여성 사제 불허 방침이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한상봉, "여성사제, 여전히 남은 숙제", 가톨릭 일꾼 (2018. 12. 3.) http://www.catholicworker.kr/news/articleView.html?idxno=2463; "여성의 역할 존중하지만 여성 사제는 허용 안 돼", 가톨릭평화신문 (2016. 11. 13.)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59584&path=201611; 조광태, "여성+기혼 사제의 등장?…가톨릭 전통, 천년의 빗장 열릴까", UPI 뉴스 (2019. 10. 2.)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1910020062; 이미령, "가톨릭 구하려면 여성 사제 허용하라", 한국일보 (2019. 10. 23.)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231500342581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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