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 <여순병란>


남부군과 「여순병란」의 저자인 이 태 선생은 충북제천에서 출생하였고, 해방후 가장 최초로 설립되었던 전문언론인 양성기관인 조선신문학원을 졸업을 하고 서울신문과 합동통신사 기자를 역임하다가 6.25를 당하여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서 전주지사에 특파 되어 있던 중에 전북지역 빨치산으로 활동을 하였고, 이때 최후 빨치산인 남부군으로 소속되었다가 그후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고 또 민주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남부군>이나, <기다림>,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 이와 같은 저서가 있으며 최근에는 여수지역을 주제로 한 남부군의 형성과 몰락을 여순사건에 관계된 부분까지 총망라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여순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 <여순병란>을 집필하였다.


     




 

 이 책(남부군)은 6.25 전란 중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던 '남부군'을 주제로 한 체험적 수기이다. 남부군은 토벌당국에 의하여 남부군단 혹은 이현상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워지던 게릴라부대의 고유명사 이며  그 정식호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였다.  남부군은 당시 소위 '남한빨치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부대였고, 유일한 순수 유격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기 때문이다.  그 내력과 역정은 차차 이 기록에서 밝혀질 것이다. 남부군은 비극의 상징이기도 한 이름이었다. 남한 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었고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스러져갔으면서도 북한정권에 의해 버림받고 마는 비운의 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궤멸의 과정은 차차 이 기록에서 밝혀질 것이다.

 

 나는 기구한 운명으로 이 병단의 일원이 되었고 신문기자라는 전직때문에  전사편찬이라는 소임을 담당하면서  이 부대가 궤멸하는과정을 스스로 겪고 보며 기록해왔다.  그 경위도  이 기록에서 차차 밝혀질 것이다. 기록은 소재이지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소재에는 주관이 없다. 소재는 미화될 수도 비하될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분식된 것은 기록이 아니라 창작이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사실보도를 업으로 하는 기자였다. 되도록 객관적으로 모든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이 기록속에 적은 그대로의 연유로해서 내 손에서 떠나가버렸다.  나는 언젠가는 그러한 내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을 느끼며  체포된 직후 남원수용소에서 다시 그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아래에 적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 회상기에서 대학생이던 한 청년은 말한다. "대장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 주세요." 그 목소리는 언제나 생생하게 내 귓전에 남아 나를 재촉했다.  이 수기 속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빠를 학살당하고복수의 악귀가 된 한 소녀는  자신마저 박격포탄에 찢겨  겨울산에서 죽는다. 백설 위에 선지 피를 뿌리며 숨져가던 그녀가 마지막에 경련하는 입술로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를 나는 적어 남겨야 했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남원수용소에서 나는 보다 진실한 내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사실에 접근하고자 간신히 손에 넣은 몽땅연필을 들고  나 자신의 체험을 자세히 메모하는 한편  산중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은 얘기를 화선지 휴지조각에 메모했다. 이 회상기에 나오는 나 이외의 개인적인 기술들은 대부분 이 때 보고 들은 얘기들이다.

 

 얼마후  나는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나같은 입장의 사람들이 항용 겪어야 했던 여러 여건들로 해서 그 메모를 기록화할 엄두를 내지못한 채 그럭저럭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오히려 그 악몽같은 기억들에서 짐짓 멀어지고자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는지 모른다.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불여의 교통사고를 만나 생사의 경을 헤매는 몸이 되었다. 그것이 그동안 잠자던 마음의 부담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그 기구한 체험들을 기록 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그것을 쓸사람이  어쩌면 나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하나의 강박감이 되어 되살아났던 것이다.

 뒤에 적을 여러가지 어려움을 딛고 가까스로 원고의 정리를 마쳤지만 그러나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데는 유신과 5공화국이라는 암흑기로해서  또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생각하기조차 역겨운 경위로 해서  기록의 일부가  어떤 소설속에 표절되기도 했고 그 때문에 가까스로 만난 보완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이제 국가의 기밀도 공개하는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써 관조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나는 이 기록의 출판을 결심했다.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었으나 그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결과에 부끄럼을 느끼면서도...기록들에 의하면  49년 이래 5년여에 걸쳐 소백 지리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횟수 실로 10,717회, 전몰군경의 수는  6,333명에 달한다.빨치산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수 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령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 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 하나쯤은 남겨져야 하지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청산한 지금, 그렇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물론 공비토벌에 관한 군경측의 기록이 있고  빨치산측의 '수기'라는 것도 한 두 가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군경측 기록은 지나치게 국부적이거나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기가 적지않고 더러는 관계자의 무공을 내세우기 위한 터무니없는 과장이 눈에 띄었다.  빨치산의 수기라는 것도 어떤 특정지역의 인간관계에 얽힌 얘기, 그것도 어떤 목적의식 혹은 필자의 입장 때문에  의도적인 분식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저러해서 빨치 산이라는 이상사회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그려 놓은 기록은 사실상 전무했다. 전사는 패망한 쪽의 기록을 읽어야한다는 말도 있다.  비록 그것이 일그러진 세계의 기록이라 하더라도어디에도 정확히 적혀있지 않은 베일에 가리워진 전사를 조금도 에누리없이 기록해 두는 것도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지 않을까도  생각한것이다.

 

 다음에 나는 이 기록을 통해 북한정권에 의해서도 버림받은 채  남한의 산중에서 소멸돼

간 비극적 영혼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를 적어보고 싶었다.  북한정권은 그들에게 가혹한 희생만을 요구했을 뿐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를, 관심조차도  피력한 적이 끝내 없다. 이 더할 수 없는 잔학을 나는 고발하고 싶었다. 53년 7월, 그 민족적 비극을 마무리하는 휴전협정문서에는 각 상대방 후방에 남겨진 물자와 장비의 철거, 심지어 전사자의 시체발굴과 반출에 관한  조문까지 있었지만 후방에 남겨져 있는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다만 휴전협정 막바지에 유엔군측이 남한 후방의 게릴라의 안전철수를 요구했으나  북한측이 그것을 묵살하고만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무렵에도 남한의 산악에는 수백의 인간들이 일체의 정보로부터 차단된 가운데 절망적인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만일 북한당국이 인명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아니 추호의 동지적 정의라도 있었다면  그 절망속의 생명을 구출할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수백의 생명과 그후에도 토벌전에서 전몰한 상당수 전경대원의 희생을 막을 기회는 있었던 것이다.  

 

혹은 장차 재건할 지하당이나 게릴라의 뿌리로서 정전협정에 구애받지 않는 무력을 남겨두려 했음일까? 불원간 절멸할 운명에 있던 이들에게 아마도 그런 기대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남로당계의 유일한 거점인 남한 빨치산이 사멸되는 것을  북한당국은 막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남한 빨치산의 소멸과 함께  일체의 기반과 발언권을 상실한 월북 남로당계 간부들은 전쟁의 초연도 채 가시기 전에  무자비한 숙청으로 뿌리를 뽑히고 만다.  그리고 남한 빨치산은 도리어 그 숙청의 이유의하나로 꼽히게 된다.  어찌했든 정치적 목적 또는 무관심으로해서 만에 하나 살아남을 가능성없는 생명들을 방치했다는 것은 다시없는 배신이며 인간을 수단시하는 잔학행위라고 나는 생각한것이다.  몇 년을 진화해온 인간의 문명이, 몇십 년을 길러온 인간의 양식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벗겨지며 원시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이 기록에서 나는 극한상황에 즈음한 인간의 가식없는 심정 을, 어쩌다 이 죽음의 대열에 뛰어든젊은 지성들의 고뇌를, 그리고  빨치산도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었던 시와 낭만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은 주의 사상은 물론 전쟁 그 자체와도 아무 상관없는 벌 거벗은 '인간'의 모습들이었기때문이다.

 

'지리산'이라면  피비린내 나는 민족사를 연상하던 세대도 이제는 많지 않다.  지금은 국립공원 제1호로 젊 은 남녀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지리산 --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 피가 얼룩졌던 시절의 얘기는, 그들과  같은 또래의 청춘들이  30여년 전에 겪었던 일들은 이제 그들에겐 까마득한 전설이며 잊혀져야 할 얘기들 이다. 그러나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워 살랐던 핏빛 정열에 는 한가락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지난 은수를 다잡아 싣고 삭히며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찌도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 해 간다.

 여러해 전 어느 늦가을  나는 배암사골을 찾기 위해 반선부락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때마침 내린 가을비속 에서 나는 수많은 망령들의 호곡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 청년이 말했듯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젊은 넋들의 호곡소리를  나는 어둔 밤 골짝을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들은 것 같았다. 이튿날 깨어보니 지리연봉은 하얀 첫눈에 덮혀 있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 자신이 '여순병란'이란 책을 쓴 동기는 제가 6.25 전란중에 남부군이란 유격부대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사되신 분들 전부가 여순사건과 관계하신 분들이었습니다. 14연대라고는 하지만 그 속에는 4연대 출신이 많았고 전주의 3연대, 대구의 6연대, 혹은 마산의 15연대, 대전 2연대 출신의 사병도 있었습니다. 도중에 사병들이 자꾸 와서 그렇게 되었고 그러한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서 남부군 선발과정을 구성하고 이현상이라는 분 지휘하에 유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덕유산에서부터 그 부대에 제가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 『여순병란』에도 썼습니다만, 모두 나이가 스물서너살 정도의 젊은이들이였습니다. 그때 저는 27∼8세 가량 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른인줄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젖비린내 나는 젊은애들인 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그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나 하고 의혹을 품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서울에서 신문기자로 있을 당시에 자료를 많이 읽었고 또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예비식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나 조심스럽게 그 분들 얘기하는 것을 들었고 기억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와중에 나중에 보니까 지금 여기 팜프렛에도 나옵니다만 실제와 다른 풍설이 어떻게 기록으로 남아 가지고는 왜곡된 채로 정착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령, 김지회 문제라든가 또 남로당 제용섭이라던가 그밖에 많이 있습니다. 누가 더 큰 피해자이고 누가 더 큰 가해자인가 하는 이러한 문제들, 이것이 왜곡되어 왜곡된 상태로 현재 정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가 생각하기에 4·3사건이나 거창사건과 같은 사건은 그때 당시 신정북이라는 국회의원이 앞장섰기 때문에 일이 커져서 이 모양이 되었고, 4·3사건은 아시다시피 제주도 도민의 절반 이상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교포입니다. 일본어로 여러 가지 저술을 내어 그것이 다시 번역이 되어 들어와서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여순사건은 제주도 사건보다도 몇 갑절 희생자가 더 크고 비참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체계적인 뭐가 없다고 보아집니다. 이곳 전남지방에 이렇게 많은 문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학적으로 글이 승화된 것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 다만 거작 태백산맥이 있습니다만 태백산맥은 벌교라는 일부 지방의 얘기, 그 중에서도 비교적 변두리에 속하는 벌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사건의) 핵심인 순천과 여수를 중심으로 한 소설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여순사건은 동부 6군 구례 광양 화순 보성 순천 여수 이렇게 동부 6군이 중심지가 됩니다. 누구든 그러한 것들은 장차 유능한 젊은이가 그것을 파악해서 실록소설을 써주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고 사실은 제 자신도 자료를 만들었습니다만 개인적인 말씀을 약간 드릴려고 합니다. 제가 작년에 거의 3천장 분량을 책으로 1.2.3권을 내려고 했는데 컴퓨터를 두드리다가 허리를 다쳐서 황급히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어느 분이라도 나서서 대하 소설을 한권 써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결국 50년이라는 세월, 반세기라는 세월이 지났으니까 이제 화해를 해야 할 시기도 되었습니다. 서로 미움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꿔 화해할 시기가 되었는데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진실이 밝혀져야 합니다. 때렸다는 사람 맞았다는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른 상태가 되어서는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주 그야말로 어떤 보복적인 차원이 아니라 완전하게 투명하게 진술이 밝혀지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이렇게 하면서 화해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화해를 할 시기가 이미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은 화해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서 미약하나마 조그만 책을 썼습니다.                     1988. 7. 이 태

 

<여순사건과 독자와의 대담>

사회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사건 당시 저는 현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사정은 현지에 계셨던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실 터이고 다만 서울에서 제가 경험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순사건은 48년 10월입니다만, 아시다시피 해방은 45년 8월 15일 아닙니까? 사건이 일어난 것이 48년 10월이지만, 이 사병들이 입대한 것은 이미 1, 2년전입니다. 해방되고 1, 2년 만에 입대한 청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3년동안에 도저히 그 하나만 가지고서도 오늘 토론회에서 끝이 나지 않을 엄청난 사건들이 그 3년 동안 무더기로 쏟아졌습니다. 거기에 전부 영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당시 대한민국이 세워져 있고 국군이 있으니까 이 여순사건은 반란사건임은 틀림없습니다. 군대가 반란한 것인데 반란한 사람이 재미로 반란한 사람은 없습니다. 반란을 한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 반란을 했고 반란을 한 사병한테 말하라고 하면 그 나름대로 당위성이 다 있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것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었느냐는 규명을 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방직후에 그 혼란했던 사회현상을 알아야 할게 아닙니까? 나이 스물한두살 먹은 아이들이 총을 들고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던 혼란상황을 대략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문헌에 나와 있고 거의 다 아시는 내용들일 겝니다. 단지 제가 정리를 좀 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냉전논리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하는 말씀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구요. 어떤 사물이 어떤 것대로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면이 있습니다. 양을 강조하다보면 음쪽에서 그건 틀리다. 그렇게 나오고 서로 견해가 다르니까 그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책에도 썼습니다만 반란군쪽 입장에서 글을 서술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되어 있는데 불과 3년동안에 가장 큰 사건이 뭐냐하면, 건준과 인공문제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교과서에서도 긍정적으로 쓰기로 했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냉전논리가 지난번에 서울시경에서 정보 무슨 참고라는 쓴 것을 발견한 것이 있지요. 거기에 보면은 이승만과 한민당 이외에는 전부 좌익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좌익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반정부 하여튼 이승만 현 집권층에 반대하고 그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한민당에 반대한 사람들은 심지어 신익희씨 까지도 사상이 심하다고 하고 그렇게 좌익으로 몰리는 그러한 시대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건준과 인공은 건준은 아시다시피 여운형씨가 해방직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가지고 어차피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 우리가 일본에서 벗어나니까 빨리 우리가 건국을 서둘러야겠다. 반대 그 일본총독이 정무총감이 만나자는데 만나지 않았다는 송진우씨라든가 낭산 김진호씨 같은 분도 계십니다만, 여운형씨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운형씨에 대해서는 집안 여러 가지 인척관계에서 자세히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혼란속에서 그냥 해방이 되면 난리가 난다 이거예요. 일본사람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한 200만 정도의 일본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전쟁에 우리 힘으로 이긴 것도 아니고 미국 사람의 힘으로 이겼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평화적으로 살고 있는 일본 사람들을 다 때려죽이는 그런 혼란이 있어서는 안되겠거든요. 치안을 유지하고 보낼 사람은 보내고 그 치안의 공백상태를 메꾼다는 거기서 시작했던 것이 건준위인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우리는 해방이 되면 곧 그것이 바로 독립이라고 생각했지만 연합군 입장에서 볼 때에 해방은 그야말로 우리가 해방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단지 일본을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뿐입니다. 당시 한반도는 국제법상으로 엄연히 패전한 일본 영토의 일부였습니다. 당연히 점령되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고 남한은 미군이 들어왔는데 불행히도 당시 일본은 패전은 했다고는 하지만 정부가 있었습니다. 자기네들 정부가 있는데 히가시 기노미야라고 그때 일본도 혼란 시기니까 이 전후에 패전에 대한 반동도 나오고 하는 비슷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보통 민간인 가지고는 수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황족을 세워서 수습을 했습니다. 히가시 기노미야라고 그래 가지고는 맥아더 사령부를 세워서 통치를 했는데 맥아더 사령부는 동경에 진주한 맥아더 사령부는 그 일본 정부를 직접 완쿠션 해 가지고 일본 정부를 다스렸습니다. 군정 치하라고 하지만 일본 국민하고 진주군 미군정 당국하고 직접 충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일본) 정부를 통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가 소멸된 후에 한반도에는 완전히 공백상태가 되었습니다. 공백상태가 되어 가지고는 아무 것도 없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진주한 미군이 직접 군정을 시행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어요. 여기에 광주도 도청의 과장급까지 전부 미군 대위니 소위니 하는 사람들이 전부 통치를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정권이 없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여운형씨라든가 안재홍씨는 우리가 진주 미군에 대해서 우리도 자치정부가 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빨리 인공 만들기를 서둘렀습니다. 실제적으로 인공은 인민공화국 지금 이북에서 말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하고는 다릅니다. 인공이라는 것은, 인공을 만들어 가지고는 진주 미군이 들어왔을 때는 우리도 정권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를 통해서 해라, 하는 발언권을 내세우기 위해서 인공이라는 것을 갑작스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여수도 생겼고 순천도 생겼고 전라남도 반 이상이 생겼고, 전국적으로 생기고자 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인공들은 좌우익이 완전히 합작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친일파는 배제되었지만 시골에서 이른바 유지라는 분들은 좌익이나 우익이 전부 망라된 기구였습니다. 그때까지는 해방의 기쁨 때문에 그런 냉전논리가 아직 구석구석 침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소위 의사정부가 있었고 또 하나 상해에서 들어온 임정이라는 의사 정부가 있었습니다. 임정이 현재 헌법상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정통정부로 되어 있으니까 제가 말을 삼가 하겠습니만 망명정부는 우두머리 상부조직만 있었지, 아래톨이 하부조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은 면까지 조직이 전부 다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세금도 받고 식량도 배급도 하고 다 했습니다. 저는 불행히도 나이가 그렇게 되어서 일본군대에 끌려갔다 오는데 부산에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완장두른 사람이 전부 수제비국을 끓이고 그랬습니다. 저는 우리 정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들어오면서 '노'입니다. 그 사람들은 생각은 인민이 직접 참가하지 않은 정권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히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여기서 인공을 인식시킬려고 하는 세력과 인공을 부인하는 세력과의 충돌이 생기는 데 이것이 제1차적인 충돌입니다. 이때 한민당이라던가 하는 분들은 전부가 인공은 박멸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인공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좌우익이 합작한 그런 조직이니까 그 속에는 상당수의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었으니까요. 그런데 단 몇% 라도 좌익이 낀 정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그러한 이유였습니다. 당시에 한국의 해방 정국의 사정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기라성 같은 토착 좌익세력들이 감옥이나 지하에서 나오고 많은 청년들이 심지어 일본과 같은 나라들도 사회당 정권이 서고, 영국같은 중진국도 노동당 정권이 세워지는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생활도 어렵고, 그런 상태에서 백성 일변도의 나라를 만들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좌익의 교두보를 만들어 영수하던가 하면 나중에 다 먹힌다, 이러한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45년서부터 46·7년까지는 이 인공을 인정시킬려고 하는 싸움과 그것을 거부하여 파괴시킬려고 하는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공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국군준비대라는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장차 인공이 수립할 국가의 군대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습니다. 가장 짜임새 있는 사설 군대인데, 이것도 나중에 해산 당했습니다만, 거기에 많은 청년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인공과 국군준비대에 참여했던 많은 청년들이 좌익이라는 이름하에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전남지방만 해도 도처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심하게 일어났던 지역은 전남은 아닙니다만 남원에서 그 어떤 곳은 양쪽기구가 다 있었습니다. 경찰서와 군수가 있고 그 옆에 인민위원회와 보안대가 있고 간판을 양쪽에 걸어놓고 행정을 하고 이런 상태가 약 1년간 계속되었는데, 이런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좌익으로 몰렸고, 그러니까 이때 좌익이라는 것은 공산주의자라는 의미하고는 상당히 개념이 다릅니다. 반정부주의긴 해도 반권주의자들이라고 해야겠죠.두 번째 문제는 그러던 와중에 신탁통치 문제가 나왔어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문이지요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한반도에 어떤 중립국적인 남북을 통한 통일정부를 세우고, 누가 세우느냐 하면 미국과 소련이 만들고 그것을 미국과 소련, 중국, 영국 4개국이 5년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이예요, 공산측에서는 후견인이라 했어요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뒤에서 봐준다 그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똑같은 논리가 섭니다. 그렇게 하면 한반도 절반은 소련이 현재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미소 양국이 통일정부를 세운다면 좌익을 완전히 배제한 정부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얼마이든 간에 좌익이 끼어 드는 정부 밖에는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측에서는 반대했습니다. 또 좌익측에서는 다만 얼마라도 교두보만 생기면 탁월한 조직력과 뜨거운 정열로 언제가는 우리가 승리한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남로당에 대한 조공당, 근로인민당 이런 좌익세력들, 그러니까 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반대하는 세력들은 명분이 36년만에 우리가 독립이 되었는데 사실은 독립이 된 것은 아닙니다만, 해방이 되었는데 남의 나라 신탁하에 들어가서야 말이 되겠느냐라는 소박한 감정으로 반탁운동을 했습니다. 이때 반탁을 주장하는 청년과 찬탁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청년들 간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술을 먹다가도 술자리에서 신탁통치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결국 미소 현재 북쪽에는 소련이 남쪽에는 미국이 와 있으니까 한반도는 어차피 두 나라가 타협해서 중립정부를 세울 다른 방도가 없지 않으냐 하면 마구 맞고 심하면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반탁하는 사람은 애국자고 여운형씨 같은 분은 저격을 당해서 돌아가시면서 그때 미소 공동위원회가 있었는데 혜화동 로타리에서 돌아가시면서 미소 공동위원회는 어떻게 되어 가느냐 하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송진우 같이 우익측 사람들도 이 신탁통치를 안 받아드리면 나중에 큰 일이 난다 영구분단이 생긴다 이러한 말까지 했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은 전부 저격되어 죽었습니다. 오직 반탁, 무조건 반탁하는 사람들만이 애국자가 되고 찬탁하던 사람들은 전부 몰리는 형태여서 찬탁파 청년들이 국군준비대 국방경비대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왜 들어갔냐 하면 경찰에 수배를 받게 되니까 좌익으로서는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도망, 도망을 다니다가 들어간 데가 국방경비대 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경찰 예비대격인 성격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법적 근거는 없지만, 일제때 부터 그 관념이 경찰위에 있다 경찰에서는 손을 못댄다. 이러한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제 좌익이라 해도 경찰의 수배로서 잡으러 가더라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면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가 봤자 국방경비대에서 내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국방경비대는 점점 갈수록 좌익 반정부 청년들의 소굴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개념의 소위 좌익은 지금 생각하는 좌익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또 하나는 좌익 심히 생활이 곤란하고 여러 가지 통계에 의하면 전승국 패전국을 통틀어서 전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어려운 생활 상태에 있었고 그 다음이 한반도였다는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섰습니다마는 경상도같은 데에서는 1개군에 2백명 3백명씩 굶어 죽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상태에서 이 청년들이 그래도 이쪽은 곡창지대이니까 경상도보다는 나았으니까 공출 일제 때 이 공출 때문에 진저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미군정은 이 공출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소위 자유 시장원리에 맡기고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귀환 동포가 전부 비농가였지요 수백만이 몰려오고 이북에서도 150만명이라고 추정하지만 그런 월남동포가 있고 또 한국에 도시민들이 식량대책을 일제때부터 전장중에 배급을 줬는데 그것이 뚝 떨어지니까 아우성이 나거든요, 배급을 주기 위해서는 쌀을 농촌에서 수매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수매를 해야되니까 농민들 생각으로는 일제 때하고 똑같이 안느냐 무슨 해방이냐, 이런 생각이 납니다. 수매에 응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경찰관이 나가서 독려를 했습니다. 경찰관과 면지서에서 독려를 하니까 그 경찰관이라는 것이 일제때부터 경찰관이니까, 야! 이거 뭐 해방이 다 뭐냐 도로 들어왔지 않으냐, 그런데 값이 47. 8년에는 배급가격에 시장가격이 3배이상 즉 10만원 소위 암시장에 10만원 하는 것을 농민들에게 빼앗을 때에는 매수를 할 적에는 3만원에 매수를 했었습니다. 1/3로 농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뒷구멍으로 빼돌리면 10만원 벌 것을 7만원 손해를 봐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거부를 하지요 미군정에서는 그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 좌익의 농민조합까지도 미군정이 하는 것을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은 이거 도시민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별거 경품을 그때 무슨 광모 비누같은 것 귀중품을 여러 주더라도 농민들이 응하지 안했습니다. 농민들이라고 바보입니까? 쌀은 가지고 있으면 몇 곱절 올라가는데 왜 놓겠습니까? 안 내놓지요,


미군정은 답답하니까 동포애를 발휘해서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동포애가 어디 있습니까? 돈 앞에서 그것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습니다. 안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민에 대해서는 식량을 배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에서는 쌀 내놓으라고 데모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어요. 그때 샌드위치 신세였어요 미군이 그때 앞장서서 쌀 수매하고 데모막고 했던 사람들이 일제 때 이래 경찰관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반감들이 자꾸 쌓여 갑니다. 그때 그 경찰관에 대해서는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묘하게 군하고 일제때도 그랬습니다. 고스톱사건으로 일본에서 유명합니다만, 네거리에서 군인하고 경찰이 싸웠는데 군인이 옳다. 경찰이 옳다. 군인을 갖다가 경찰이 붙들어가서 뺨을 때렸어요, 일본서 얘기입니다. 전면 싸움이 올라가서 내무대신하고 육군대신간에 싸움이 되었습니다. 육군대신이 폐하의 병정을 때렸다고 내무대신이 경찰관도 폐하의 경찰관이다. 이래서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꼭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경찰관이 시골에서 어떻게 잘못 만나면 국방경비대한테 뚜드리고 패버리고 경찰관들이 집단으로 보복을 하고 경찰과 국군경비대 군인사이에 청년들 사이에 충돌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유명한 것이 영암사건이고 구례사건인데 영암사건은 47년인데 그 별것도 아닌 것 객담하다가 어떻게 시비가 붙어 사람이 10몇이나 군인이 죽었습니다. 군인이 수는 많았지만 무장이 형편이 없었고 기관총 같은 것은 경찰만 갖고 있었고 그러니까 당했지요. 이러한 울분이 국방경비대에 와 있는 청년들 속에서 자꾸 쌓이고 그랬어요, 경찰관에 대한 울분이 그러하고 있는 참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이 5.10 단선문제입니다. 5.10 단선 문제는 48년 5월 10일날 그러니까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지면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미국과 소련이 합작해서 한반도 통일정부를 만든다는 것이 무산되는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이것을 유엔의 결의에 맡긴다고 미국이 가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소련은 너희들 그것을 반대해 놓고서 한국독립문제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이미 명시돼 있는데 그것은 나두고서 왜 자기네들 표가 많이 있는 유엔에 가져갔다고 반대를 했거든요. 소련이 반대한 이상 이북에서는 유엔감시하에 통일선거를 실시할 가망성은 없고 그렇게 되면 이남만 성공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영구분단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사실은 그때 김일성이도 북한에서 분단국가 준비를 하고 있었던 증거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5.10 단선이 실시되기 이전에 이미 헌법을 만들고 그랬거든요, 그때 물론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서 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이러다가 남북분단이 되지 않겠느냐 큰일난다 해서 거기 격분해서 반대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독당같은 우익 김구씨가 영도하던 한독당같은 우익도 이것 5.10 단선을 남한만 단독정부를 세운다면 영구분단이다. 민족끼리 피를 봐야만 결말이 난다. 그걸 반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반대한 사람은 전부 빨갱이입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테러를 해도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김두한씨가 좌익청년들을 드라마센타 있는 데에서 패 죽이고 시체를 마루 밑구멍에 나 두고 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그런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부 애국자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좌익청년들 말하자면 신탁통치에 찬성했던 혹은 그 후에 남한 단독정부에 반대했던 청년들은 믿을 데가 없었습니다. 길가에서 맞아 죽어도 하소연할 때도 사법권에도 보호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퇴학을 맞았습니다. 직장에서 실직 당했습니다. 전부 이 사람들이 러시를 이루고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가장 많이 들어간 곳이 4연대입니다. 그래서 4연대에서 48년도 10월에 변란이 일어나는 데 그해 5월에 4연대 일개대대를 갖다가 여수에 짤려 놓고서 14연대를 신월리에다 창설을 하게 됩니다. 3개 대대씩을 그때 미군은 이미 철수하려고 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철수하는데 급하니까 빨리 군대를 전부 후방부대를 만들어 놓고 철수하다보니까 빨리하다 보니까 소위 전부 자기네들이 말하는 반대세력만 전부 갖다가 똘똘 뭉쳐져 물을 준 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분도 계시는 분도 있겠지만, 징병이 아니라 당시는 모병입니다. 길가에다 책상을 설치하여 종이를 내놓고서 사병 둘이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헌혈하라는 식으로 모병을 했지요, 그런 식으로 종이를 이렇게 주면서 한 장 써달라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성분도 안가리고 사지 육신만 멀쩡하면 다 입대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에 쫓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좋은 은신처가 어디 있어요. 의식주 해결하지요 경찰한테 수배 안 받지요, 마구 입대했지요. 일부는 그 면장이나 경찰서에서 사환하던 막 집어넣기도 하구요.


이렇게 해서 4연대가 형성되고 되고서는 47년 12월에, 48년 5월에 4연대 1개 대대를 뽑아서 신월리 14연대에 편성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책에도 썼습니다만, 지금도 아마 그럴겁니다. 일제 때도 그랬습니다. 군대에서 몇 명을 어느 부대에서 착출을 하라고 그러면은 그 군대에서 제일 말썽꾸러기 사람만 쏘옥 뽑아서 보내버립니다. 골치 아프니까. 그때 당시에 연대장이나 지휘관의 입장에서 볼 때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뭐냐하면 반정부적인 사람들, 말썽 자주 부리는 사람들, 고분고분하지 않고 소위 그때 당시 개념으로 좌익들. 색깔이 이상한 사람들 이런 부류들이 아주 골치 아픈거 거든요, 14연대 중에서 평소에 찍어 놓았던 사람들은 전부 뽑아서 여기로 보내버렸습니다. 4연대는 다소 (색깔이) 옅었어도 여기 14연대는 시뻘건 덩어리가 왔습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끓어 모았어요 들어오는 사람마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머슴살던 사람,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 다 오기는 옵니다만 그 사람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국방경비대 독립당시입니다. 병정들의 4분의 1이 완전 기역 니은 한글도 못 깨우치는 문맹자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구 들어오는데 소위 의식이 없지요, 그것을 리드한 사람들은 하사관들 소위 중학교나 당시 중학교는 6년제입니다. 고등학교와 나중에 분리하지만, 거기 고학년으로 있다가 소위 좌익으로 몰려서 군대로 뛰어들어온 청년들 이런 청년들이 요즘 말하는 의식화지요, 애들을 리드하지요. 그러니까 전부가 좌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교적 하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전부 따라갑니다. 전부 끼어 있었으니까요. 이래 가지고는 언제든지 불만 지르면 터질 수 있는 이러한 상태가 되 버렸습니다.


14연대가 그런데 그때 당시에 숙군이 시작되었습니다. 숙군은 물론 병장까지는 안가고 간부들 뿐입니다마는 장교도 떨고 사병도 하사관들은 떨었습니다. 숙군이라는 것이 국군전체가 25,000명인데 오천명이 숙군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방법이라는 것이 누가 귀뜸만 하면 뭐 이렇게 하고 그러면은 끌려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총살당하고 그러니까 전전긍긍 이런 상태에서 자구책으로 탈출이라도 해야겠다. 이러한 얘기가 나고 있는데 4.3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시는 이 제주도 4.3사건은 지역적으로 봐서 일반 그 서울이나 그쪽지방 사람들과 이쪽 지방사람들과는 정서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47년까지 제주도는 전라남도였습니다. 자기 도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형식적으로 도가 떨어져 나갔지요. 그러나 제주도는 오랫동안 전라남도의 일부였습니다. 그리고 여수라는 데는 바로 목포나 여수같은 데는 가까우니까 사람 왕래도 많고 그러니까 정서적으로 제주도 도민에 대해서 뭐 동정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다 갖다가 제주도에 대한 것이 신문에 나지 않더라도 그런 참상이 자꾸 들어온단 말이예요. 저도 그때 서울에 있었지만 정말 분개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용을) 썼다가 사실 말썽이 날까봐 써서 나중에 교정볼 때 지웠습니다. 어린애를 갖다가 총창으로 찔러 죽이고 절단하고 이런 사건도 있고 그러니까 그 사병들이 그 소위 반란한, 사실 민중은 반란한 것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를 갈고 저항을 하고 특히 육지에서 제주도의 진압차 700여명이라는 경찰관을 갖다가 조병옥 군정부장 경무부장이 투입하는데 이것이 대개 서북청년단이라든가 청년단 계열라인을 군복만 전부 옷만 경찰관 옷을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이 가서 별짓 다 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섬사람들이 응크리고 있지요 배타적이지요, 그렇게 해서 민란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정보가 자꾸 들어오니까 사람들 귀에 신문에 나지 않더라도 울긋불긋서요, 그때 10월 15일날 제주도 출동 준비하라는 1개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여기에 쓴 대로 지창수하고 하사관들이 매일 밤 모여서 소주 마셔가면서 단체 행동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일이 그렇게 되니까 야, 우리 어떻게 되는게 아니냐 저가 책을 썼습니다만, 처음에는 선상 반란을 할려고 그랬답니다. 배가 출항을 한 이후에 장교를 전부 쏴 죽이고 선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리려고 했데요. 거의 뭐 그때에 남부군에 있을 때 얘기를 들어보니까 가다가 추격당하면 어떻게 할려고 그랬냐고 들어보니까 이리로 해서 황해도 지구에서 중국쪽으로 빠져 올라가는 그런 계획도 세우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직전에 탄로가 난 걸로 알고 정보 착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탄로가 난 것이 아닌데 탄로가 난 것으로 해서 선상에다 모두 모아놓고 탄약도 안주고 하나씩 잡아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 큰일났다. 발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발각이 나는 줄을 알아 가지고 졸지에 영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중으로 결정했다고 그래요. 그래 가지고는 결국 그날 일어난 참사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니까, 그후에 사건들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니까 그 반란군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냐 하는 것은 생략하겠습니다.


                                           - 이공원씨의 소장(所藏) 자료 제공(전 여수까치신문 기자



 
 
노이에자이트 2014-07-16 14:19   댓글달기 | URL
이태 씨나 차일혁 씨 책에도 이현상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입니다.문제는 빨치산 내에서 이현상과 노선투쟁으로 맞선 방준표의 경우인데, 이현상과는 반대로 나쁜 놈 대접을 받지요.오마이 뉴스 사장인 오연호 씨가 젊은 시절 쓴 글 중에 방준표를 다룬 게 있죠.

이현상이 이승엽 계열이고, 남로당 주류에 충실했다 할까요...여하튼 방준혁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저는 빨치산 투쟁의 3대 거물로 이현상 남도부 방준혁을 꼽습니다.여기에 방준혁 계열인 박영발을 넣기도 하고요.이현상 남도부의 지명도가 워낙 높습니다만...

낭만인생 2014-07-16 15:30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 부분은 워낙 금시초문이라 이제야 공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을 다시 묻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일렬의 학살 사건 등을 심도깊게 다루었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숨많은 이들이 왜 입을 열어 아우성인지를 알려 준다. 이승만과 그 일당들은 여전히 '조용히 있으라'고 외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이 이유 없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체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여순사건을 읽으면서 그들의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주철희 박사의 <불량 국민들>은 지금까지의 여순 사건을 다른 눈으로 봐야 한다는 역사의식에서 쓴 책이다. 그는 오마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 왜 <불량국민들>이란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나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반란이란 이유로 묻혀 있다. 4·3사건, 5·18민주화운동도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여순사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이 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상당 부분이 왜곡과 조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권력자의 정치적 탐욕과 거기에 국가폭력이 난무했다는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둘째, 불량 국민으로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셋째, 여순사건은 여수와 순천 등의 전남동부지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왜곡과 조작, 국가 폭력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길 필요를 느꼈다."


- 사료가 방대하다. 몇 년 정도 준비했나?

"7년 정도 걸렸다. 역사적인 사료를 찾아 현장을 발고 뛰고 증언을 중심으로 주변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서울, 파주, 고창 등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준비했고 사건을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여순사건의 자료가 더 찾아 보았다. 있다.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에서 쓴 <다시쓰는 여순사건 보고서>다. 주승용 새정치민주연합 사무총장이 여순사건에 대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한 것은 그동안 도외시된 여순사건을 다시 조명하려는 의미다. 반드시 관철되어야 할 법안이다. 









다른 책도 보인다.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0여수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도서출판선인)에서 2009년에 출간 되었고, 동일한 출판사에서 홍영기의 <여순사건 자료집1>이 2001년에 출간 되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05회 여수 14연대 반란(1999.10.17)







 
 
 

불온서적을 사다


불온서적을 샀다. 불온서적을 인터넷 사전을 통해 알아보니 '불온한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책'이다. 

불온서적 (不穩書籍)

[명사] 불온한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책. 


여기서 멈출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불온은 뜻은 뭘까? 다시 질문한다. 온당하지 않음은 문자역 직역이다. 2번째 뜻 풀이가 제대로 된 듯하다. 결국 순응하지 않고 맞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싸가지 없는'이고, '예의 없는' 이란 뜻이 된다. 

불온2 (不穩)

[명사] 

1. 온당하지 않음. 

2.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 

[유의어] 불순1, 불온당


그렇다면 나는 불온서적을 산 셈이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사고 말았으니 말이다. 오늘 이후로 나는 불온한 경계대상이다. 보안사든지, 국정원이든지 어디서 나를 조사할 줄 모르겠다. 예수를 혁명가로 치켜세우는 <젤롯>도 구입했다. 이 책 역시 전통 기독교 안에서는 불온서적이다. 함께 구입한 존 캅의 <영적인 파산>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불온 서적이다. 이래저래 나는 불온한 존재가 되었다. 단지 책을 구입했다는 이유 만으로 말이다. 여기서 멈추면 그나마 다행인데 약간 섹시한 책도 구입했다. 차정식 교수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다. 섹시한 성경을 읽는 셈이다. 이것 역시 불온하지 않던가. 모든게 그렇다. 숨어서 하면 괜찮고 대놓고 하면 죄가 된다. 적게 죽이면 살인자고, 많이 죽이면 영웅이다. 뭐 이런거!













끔찍하게 위험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학문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반공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공포정치의 책임은 바로 오늘의 대통령 닉슨 본인에게도 있다. '빨갱이 잡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라네트 핸드 판사는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될 때 그 사회는 벌써 분행의 과정을 걷고 있다."고 미국국민이 영원히 기억하는 날카로운 경고를 한 바 있다.(35쪽)

냉전시대 대학가를 뒤 흔들어 놓았던 불온서적이란 바로 통치자의 가식과 거짓을 폭로하는 것이다. 임금의 이발사가 임금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강요당하듯 국민들은 전제국가의 폭압정치에 침묵을 강요 당하고 있다고 외친다. 리영희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차적 과업을 '냉정 용어를 정리 청소하는'(40쪽)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용어야 말로 정신의 실체이다. 빨갱이라는 말, 종북좌파라는 말로 국민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통치수단으로 삼으려는 거짓의 악당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유시민 <나의 한국 현대사>


돌베개가 한창이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 선주문 책을 출간하느라 여념이 없다. 초기 선주문하는 분들에게만 준다는 저자 사인본을 출고하는 장면을 페스북을 통해 알려 왔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저자 사인본이라면 나도 주문할껄~ 인생이란 알고나면 아쉬운 것이리라.



어쨋든 이번에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는 주문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권의 책이 도착했다. 사실 이번에 주문한 책은 3주 전부터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이다. 카드 한도가 차서 더이상 주문할 수 없어서 참고 또 참았다. 아내를 볶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장바구니에 그대로 방치할 노릇도 정말 아니다. 알라딘에 들어 올 때마다 장바구니에 담긴 책을 보니 숨이 턱턱 막힌다. 많은 인고의 신간이 흘러 드디어 한달이 넘어가고 아내가 큰 맘먹고 책을 주문해 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이렇게해서 유시민의 책은 이것으로 세 권이 된다. 년초에 주문했던 <청춘의 독서>, 이번에 주문한 <국가란 무엇인가?>, <운명이다>까지다. 아직 <그가 그립다>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주문도 못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전 유시민의 책은 몽땅 살 예정이다. 고마운 분이다. 정치세계를 떠나니 학자다움이 느껴지는 지성인이다. 앞으로 더욱 좋은 책을 펴내리라 기대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쓴 <성공과 좌절>도 함께 담았다. <진보의 미래>도 같이 왔다. 이래저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인 서재 한켠을 조금씩 비집고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불과 일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만 알았지 아무 것도 몰랐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앞으로 더 공부해야할 분이다. 

마음이 끌리는 건 <진보의 미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에 내려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위한 꿈을 책에 담기 위해 서거 직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책이다. 

"이 책의 연구는 그렇게 중단됐습니다."

그랬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마지막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것이다. 치졸하고 옹졸한 '놈'들. 아직 마무리 되지 못한 글이 덕지덕지 책 갈피 속에 붙어있고, 생각과 사상이 노트에 흐트러져있다. 그러나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울리고 마음을 쿵쾅거리게 한다. 몇 문장만 가져와 보자.

"반복되는 위기가 문제다. 경제 파탄은 약자에게 가혹하다."
"신 자유주의의 핵심은 성장을 위한 감세와 복지의 축소이다."
"한국은 아직도 보수의 나라다. 반공이 모든 것을 지배한 나라. 아직도 색깔 공세가 통하는 나라."

울컥하다는 표현만으로 부족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예언자다. 누가 말하든.


엄기호의 <단속사회>와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도 구입했다.  현 시대를 읽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두 책이다. 앞으로 이 책들을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를 좀더 깊이 파고들 예정이다. 아직 멀고먼 일이지만. 시작이 반이니 벌써 반은 온 것이다. 계속 가자.





이제야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나는 '바보다' 정말 바보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이 날센다하지 않던가. 끝을 보고야 말 것이다. 기다려라.





 
 
andy1116 2014-07-06 10:55   댓글달기 | URL
그가 그립다는 그냥 고인을 추억하는 여러 사람의 글모음이라 후순위로 내리셔도됩니다 나의현대사야말로 유시민의 야심작이죠. 우선순위로 올리시길 권유드립니다. 그리고 현대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홍구의 유신 추천합니다. 몇달전에 나온책인데 유신시절에대한 책으로 쉽게 읽히며 내용도 알찹니다.

낭만인생 2014-07-09 10:02   URL
조언 감사합니다.
 

정치, 기억을 조장하다


올해는 꼭 읽고 싶은 책들이다. 정치란 곧 기억을 조장 또는 조작 나아가 강제하는 것이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대한 거부반응은 결국 우파의 정치학이다. 백동춘의 주장처럼 그건 '강제된 앎'이다. 승자의 관점으로만 해석되는 역사, 강자의 원리로만 풀어내는 역사관이야말로 결국 왜곡된 정치 기억인 셈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억의 정치학>은 이 부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멀리서 들은 그의 주장은 현대를 읽은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허버트 허시는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를 통해 인종청소를 단행하는 무지한 행동이 왜 일어나는지 증명한다. 그것은 미움의 묵은 기억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제노사이드를 해결하는 방법을 또 다른 기억을 이용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생존자의 기억'과 '증언'을 보관하고 공유할 때이다. 미움의 기억이 아닌 '생존의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80년 광주 항쟁이 일어날 때 필자는 광주에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십대 후반이 되고서야 광주 항쟁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멀리서 아련하게만 보고 들었지 단 한 번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군부가 그동안 일관적으로 펴온 '조작된 기억 교육' 때문이었다. 이번 선거는 이러한 조작된 기억은 승자의 관점에서 일관적으로 주입해온 '강제된 앎'의 승리였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그들이 제공하는 인스턴트 정보 때문이다. 이곳에 익숙해 지면 날것의 사실을 왜면하고 '똘아이'로 본다. 자 보라, 죽음의 시체들을.






















권귀숙은 <기억의 정치- 대량학살의 사회적 기억과 역사적 진실> 이란 책에서 제주4.3항쟁을 다르게 듣고자 한다. 공동체의 집단 기억은 전승된다. 역사 기억은 대체로 남성들의 것이다. 제주항쟁 역시 다르지 않다. 권귀숙은 이러한 집단 기억의 왜곡을 여성의 증언을 통해 바르게 보기를 원한다. 제주에 거주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역사를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그녀는 최근에 주목받는 사회학에서 기억 이론'을 기반으로 증언을 재진술 한다. 그녀는 역사적 텍스트 자체보다 기억이 형성되고, 전수, 재현되는 사회적 과정을 무게 중심을 둔다. 




왜 4.3 다큐멘터리에서 사건 자체에 대한 증언·해설·설명 등을 주로 남성이 맡고 있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역할에 배치되어 있는가? 물론 남성을 국가의 중심에, 여성을 국가의 주변에 배치한 스토리 구성과 관련이 있다. 주변에 배치된 여성들이 사건의 중심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성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사회화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이나 사회화 문제 외에도 남성의 증언과 여성의 침묵은 젠더에 따른 기억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다. 4.3 증언에 관한 학술조사를 보면 실제로 여성이 사건 자체에 대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건의 중심이 아닌 일상생활이나 사건 이후의 생활사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다르게 말하면 여성과 남성이 기억하는 부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의 제작 목적이 4.3의 재해석에 있기 때문에 여성의 기억보다 남성의 기억과 증언이 더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즉 4.3 진상규명 운동이 사건의 원인, 과정, 피해 등 과거를 재조명하는 데 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의 증언이 더 필요햇던 것이다. - 본문 237쪽에서





 성공회대 교수인 박원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이란 책을 알아보는 가운데 서발턴이란 낯설은 단어를 발견했다. 서발턴, 처음 듣는 단어다. 찾아 보자. 

서발턴(하위주체) 또는 민중 또는 노동자

‘서발턴의 역사’ 엘리트 권력 향해 던지는 짱돌(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95480.html)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이후 25년

(http://greenbee.co.kr/blog/1802)

이 단어는 아마도 사회적 용어인 듯하다. 노동자이며 민중들을 표현할 때 서발턴이란 단어를 통해 억악된 실존을 우회적으로 설명하려는 듯 보인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더 알아 보았다. 서발턴(subaltern)은 영어가 아닌 독일어이다. 네이버 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subaltern [zup|al|tεrn]  [형용사]

1. (untergeordnet) 하위(下位)의, 직책이 아래인;종속되어 있는;자주성이 없는 

2. [멸어] 비굴한 


눈에 띄는 단어는 '비굴한'이란 단어다. 종속된 인간,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이전 책인 <여공 1970-그녀들의 반역사>를 집필하고 다시 박정희를 조명하는 것은 서발턴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다루기를 원하는 갈망 때문일 것이다. 


<여공 1970-그녀들의 반역사> 이후 5년만의 방황과 침묵을 깨고 출간한 김원의 역작.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는 바로 1960~70년대의 서발턴들을 불러내 그들의 삶을 재현한 작업이자 그 이론적인 고민까지 풀어낸 책이다. 저자는 이 서발턴들을 ‘유령’이라는 은유를 통해 호명한다. 


지배 담론은 물론 저항 담론인 민중사에 의해서도 배제되고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 이 유령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은 지배적인 앎에 의해 배제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한, 전체적 사실에 부수적으로 딸린 부스러기이자, 심지어 저항 담론에 의해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이 존재들을 역사학에서는 ‘서발턴’이라고 부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박정희 시대의 서발턴들은 아직도 담론과 재현의 바깥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 ‘더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을 다시 불러와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유령과 같은 그들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이야말로 근대 역사서사와 제도화된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시작이다. 또한 지금도 현실을 지배하려는 박정희라는 ‘아비’의 유산을 진정으로 부정하는 출발점이다.


저자는 단언컨대, 아직도 유령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양한 미래 역시 꿈꿀 수도 없음을 주장한다. 그 시대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누락된, ‘유령’들의 기억들을 다시 불러오지 않는 것은 기억을 침묵으로 정지시키고 상상력의 가능성을 제약하며, 미래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발턴들의 증언을 공유하라.


아마 이게 답일성 싶다. 그동안 승자의 논리에 의해 서발턴들의 증언이 침묵을 강요 당함으로 배제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그것들을 끄집어 내야 한다. 서발턴들은 연대하고, 자신들의 목적과 방향을 명료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언들이 필요하고 연대가 필요하다. 더이상 지배자들의 논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