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기만 해도 좋다!


믿지 않을 지 모르지만 난 책 사진만 봐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사진으로 담았다. 모두 네권이다. 두 권을 읽었고, 두 권을 읽을 계획이다. 특이한 책일 수록 좋고, 특별한 주제일수록 땡긴다. 특히 <월경독서>는 이상토 하다. 하여튼 읽고 싶다. 책은 나의 일부이며 전부이기에.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28회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 한다


진즉에 사고 싶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머뭇거렸다. 십년이 넘기고서야 두 권의 책을 구입했다. 물론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읽는 의무를 이미 마쳤다. 번역된 그의 책 중에서 두 권을 소장하고 있다. 한 권은 <독서의 역사>이고, 다른 한 권은 그의 첫 소설인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밤의 도서관><책 읽는 사람들>도 곧 주문할 생각이다

 













 

참 이상도하지. 그렇게 애타게 읽고 싶었던 책인데도 손에 들어오자 읽혀지지 않는다. 밀당에서 승리한 자의 교만일까. 종종 몇 군데를 읽기는 했지만 정식적으로 덤비지는 못했다. 무의하게 방치된 체로 일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났다. 우연히 독서에 관한 쓰기 시작하면서 망구엘의 책을 다시 정독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이다. 급하게.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스 힐먼은 어린 시절에 이야기를 직접 읽었거나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줄거리로만 듣고 자란 사람들에 비해 예지력이 훨씬 뛰어나고 정신 발달 상태도 더 낫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기막힌 문장이다. 희비가 엇갈리는 문장이 아니던가. 그저 한 숨이 나온다. 나는 어릴 적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교과서 외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했다. 학교에는 도서관이 없었고, 집에도 역시 책은 없었다. 누나가 한 명, 형이 두 명인데도 우리 집에 책은 없었다. 정말 없었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인가. 현재의 나의 어리석음은 모두가 책을 읽어 주지도 사주지도 않는 부모 탓이다. ‘잘하면 내 탓, 못하면 조상 탓이란 속담도 있지 않는가.

 

이십대 후반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벌어 들어간 대학. 죽도록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 들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쌓아 놓고 읽었다. 적게는 이틀에 한 권. 많게는 하루에 열권도 읽었다. 그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책은 10쪽 짜리도 있고, 그림만 잔뜩 있는 책도 있다. 그것도 한 권이다. 미친 듯이, 게걸스럽게, 괴물처럼 책을 씹어 먹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벌써 3년이 지났고, 졸업반이 되어 있었다. 수천 권을 읽었는데도 독서의 효력은 거의 없었다. 다만 어디선가 읽은 듯한 어렴풋한 기억과 잡다한 지식이 뇌에 부하를 일으켜 사고(思考)에 지장을 주었다. 그래도 좋았다. 읽는 다는 것은 곧 존재하는 거니까. 일찍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을 읽었더라면, 아니면 모티머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이라도 읽었더라면 좀더 많은 효과를 얻었을 터인데 아쉬움이 남는다.

 

애들러는 책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로 한정시킬 수 없다. 역사와 문화, 풍상까지 담고 있는 서사다. 독서와 책을 주제로 엮는 하나의 스토리.

 

나는 책을 읽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세부적인 사항을 속속들이 파악하려고 가슴을 죄며 사건과 인물들을 추적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면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어서기까지 이야기가 확대된다. ... 두 번째는 신중하게 탐험하는 방법이다. 복잡하게 뒤얽힌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텍스트를 샅샅이 조사하다 보면 단순히 단어의 발음에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아니면 그 단어들이 결코 드러내지 않는 어떤 단서에서, 그것도 아니면 스토리 자체에 깊숙이 숨어 있다고 의심은 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경이로워서 결코 직시 할 수 없었던 그 어떤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나는 아무래도 전자 인듯하다. 아직까지 신중하게 읽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했다. 서두도 없이 막무가내로 시작하는 <독서의 역사>는 독서에 미친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책을 읽고 있는 사진 한 장으로도 흥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진심으로 독서의 역사(歷史)’가 아니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당돌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독서의 역사 연대기는 결코 정치적 역사의 연대기가 될 수 없다.”

 

또 독서의 역사는 문학사의 연대순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순서가 결코 연대기가 아니다. 순서도 없고, 어디서 읽어야 할지도 감 잡을 수 없다. 나는 이런 식의 책이 싫다. 목차만 봐도 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하고, 소제목만 봐도 내용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도무지 잡을 수 없다. 내가 책을 사놓고도 몇 장 읽다 방치시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독서의 역사는 장을 뛰어넘기도 하고 대충 훑거나 선별해 읽고, 또다시 읽기도 하면서 판에 박힌 순서를 따르길 거부한다.”

 

나도 거부했다. 앞을 읽다 중간으로 가고, 마지막에서 갑자기 아무 곳을 펴고 읽었다. 망구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서술방식도 아무렇게 나열했다. 저자가 들으면 불쾌하겠지만 80쪽에서 묵독의 효능과 즐거움을 언급한다.

 

하지만 소리 없는 독서를 통해 비로소 독서가는 책과 단어와 아무런 제약이 없는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219쪽에서 시작하는 혼자만의 은밀한 독서에서 묵독이 다시 등장한다. 하여튼 이러한 분류 방식은 전체의 흐름 읽는 데 어려움을 주지만 퍼즐을 맞추는 재미를 깨닫는 순간 쾌감을 수백 배에 이른다. 스티프 피셔의 <읽기의 역사>가 첫 장에 집어 놓은 수메르 토판 이야기를 알베르토 망구엘은 중간에 삽입해 놓는다. 피셔가 증인으로서의 문자를 강조했다면, 망구엘은 독자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으로 판독한다. 독서가의 중요성은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문자 앞에 무지하다. 독서가가 낭독하는 순간 잠자던 문자의 의미가 되살아난다. 바알신의 죽음과 부활의 회귀와 같다.

 

이 시점에서 텍스트는 한 사람의 독서가가 읽어 줄 때까지 조용한 존재로 남는다. 기호를 읽을 줄 아는 눈이 서판에 새겨진 형상 앞에 서는 순간, 그 텍스트는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렇듯 모든 기록은 독서가의 아량에 크게 의존한다.”

 

역사는 쓰는 자와 읽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확실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러나 독자는 작가보다 위대하다. 읽어 주지 않으면 작기도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위대한 알베르토 망구엘도 내가 읽어 주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알베르토의 나에게 감사하게나.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27회 

살리는 공간 죽이는 공간


공간이 중요하다. 특히 독서하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독서와 공간에 관련된 책을 찾는 중에 중요하고 귀한 몇 권의 책을 발견했다. 간략하게 소개하고 싶어 올린다.


처음 책은 400페이지, 그 다음은 200페이지 내외. 독서는 진보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700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께는 기겁하게 한다. 독서가 답인데도 무섭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두꺼운 책 읽기를 가능케 하는 프로젝트가 준비 되었다. 강백향 선생의 <두꺼운 책읽기 프로젝트, 초등 공부에 날개를 단다>이다.

 

장서영의 <초등 적기독서>도 참 좋다. 둘 다 아이에게 맞는 책을 잘 골라 주라고 조언한다. 옳은 말이다. <우리 아이 공부가 안 되는 진짜 이유 난독증>은 난독증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대처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눈으로 읽지 못한다. 그런 소리로 읽을 수는 있다. 텍스트 시험이 아닌 구술시험을 치게 하면 좋은 성적을 거들 수 있다고 말한다. 궁금해지는 책이다.

 

<고전은 내 친구>는 아이들에게 고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책이다. 고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제거하고 진전한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해줄 고전, 그 위력과 탁월함을 경험해 본다면 고전은 참으로 위대한 책이 될 것이다. 시대의 한계,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뛰어넘어 인류의 고통의 문제와 난제를 해결해줄 고전의 힘을 체험해 보자.



















<작은 학교의 힘>

공교육은 이미 무너졌다. 왜 그럴까. 대안은 없을까. 있다! 작은 학교 소수의 학교를 만들고 그들과 소통하며 맞춤식 공부를 진행하면 된다. 학교 가진 문제와 애로점. 아이들을 이해 못하는 교사와 학부모의 어리숙함을 알려 준다. 아이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책이다. 요즘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는 놀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하고,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가 운영되지 않고 어른들의 입장에서 관리하기 편하고 성정 위주의 경쟁적 구조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 이들에게 학교는 즐겁다는 것을 알려주면 안 될까






<아버지 그림자밟기>

아들은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뒤통수를 보고 자란다. 허물을 나무라면 늘 하는 말이다. 모두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니 탓하지 말란 말이다. 이런 고약한 녀석들이 있다.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의 어릴 적과 사뭇 달라 과연 나의 아들인지 믿기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아버지가 싫었다. 일 년 단 한 번도 대화하지 않고 나의 사정을 묻지 않는다. 잘못하면 때리고 야단만 치신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야단만 치신다. 지금에 돌아보니 야단은 사랑이었고, 보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사랑과 좋아함에 대한 단어를 입술로 고백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난 절대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지.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이 말한다. 아빠는 맨날 때리기만 한다고. ? 때린다고? 그래요. 아이들에게 매를 든 것은 일 년 고작 2-3번이다. 그런데 매를 때린단다. 아이들은 나를 무서운 아빠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예전에 아버지를 생각했던 것처럼. 그럼 난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다는 말이다. 아 어쩌나. 아버지들은 누구나 이런 생각이 있을 것이다. 부족한 아버지의 자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다. <아버지 그림자 밝기>는 이러한 나의 초상을 그대로 닮았다. 아들과 소통하려는 아버지의 도전이 아름답다. 나도 저자를 닮고 싶다


책 읽는 가정이 책 읽는 아이로 만들었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 온다. 독서는 즐거움을 넘어 실용과 자기성찰의 불가피한 수단이다. 독서 없이 공부는 없다. 책을 읽으라고 말하지 말고 함께 읽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귀한 모델이 되었다. 이젠 아들이 나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지 않을까?


공간의 위대함을 알려준 명저. 지난달 기적이 도서관을 탐방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침묵의 도서관이 아니었다. 소파에 눕고, 이야기하고, 뒹굴고, 잠도 잔다. 공부와 독서, 놀이와 쉼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즐거운 도서관이었다. 아이들은 사진만보고도 가고 싶다고 한다.

둥그런 소파를 보던 둘째 말한다. "형 여기에 눕고 싶지 않나. 재밌겠제" 아이들은 저마다 우리 집도 저렇게 꾸미면 안 되냐고 묻는다. 돈이 문제지. 하여튼 만들어보자. 아이들과 우리는 함께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건축가 배병길 선생은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건축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의 학교 건물은 새장에 갇혀 모이는 받아먹는 새들처럼 학생이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받게 되는 구조이다. 창의성이나 다양성을 기를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83쪽)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충고다. 현대의 교육은 살리는 공간이 아닌 죽이는 공간이다. 두렵기 까지하다.


함께 읽으면 좋을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도 담았다. 두 권의 책은 공간이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윈스턴 처칠은 '사람은 건물을 만들고, 그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생각대로 건물을 만들지만, 결국 그 건물이 사람을 만든다. 건물의 역습이 두렵지 않는가.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26회

독서는 복불복이다


복불복 (福不福)

[명사] 복분(福分)의 좋고 좋지 않음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운수를 이르는 말.(네이버사전)




마침내 헤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1.2>를 모두 읽었다. 한 달간의 짧지 않는 시간 동안 명저가 가진 탁월함에 경탄하며 즐겼다. 좋은 책을 만나면 이런 행복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전설속의 책으로만 여겼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 왜 그 책으로 인해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나야 했는지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사람은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새로운 여명을 거절했던 남부 사람들과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고자했던 북부 사람들의 사상적 대립이다. 한 나라의 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었다. 마치 루터가 로마교회로부터 과감하게 일어서야 했던 것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노예제도를 새 시대에 담으려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의 종말을 알리는 책이다.




그리고 새로운 책이 도착했다. 존 밀턴의 <실낙원>이다. 모두 3권인데 재정상 2권까지 먼저 구입했다. 의도적이지 않지만 이러한 독서력에 따르면 영미고전을 섭렵하는 중이다. 얼마 전에 조나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고,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도 읽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도 차례로 읽고 있다. 연대기적 흐름을 따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손에 잡히는 재미를 따라가는 맛은 있다. 하나 둘씩 읽어가는 재미가 여간 큰게 아니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하지만 내가 보기에, 난세는 위대한 작가를 낳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책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온단 말인가. 시대가 낳은 위대한 작가, 위대한 작가들이 목숨을 줄여가며 써낸 책들은 나의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는 흡혈귀가 맞다. 이렇게 가다보면 머지않아 영미 문학이란 거대한 산을 오르는 준비 과정을 마칠 것 같다. 정복할 마음은 없지만 산책은 가능하지 않을까. 맛을 보는 것 말이다.





처음부터 무슨 책을 읽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다. 다만 영미 고전들을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는 작은 갈망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찰스 디킨스의 책들을 접하면서 이번참에 영미소설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당장 실행한 것은 아니다. 벌써 일년이 더 흘렀으니. 그런데도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들이 점차 하나로 모아진다. 서점에 들러도 영미 소설부터 찾게 되고, 눈에 보이면 손에 잡힌다. 


네 권으 책을 한 번 모았다. 어? 디자인이 비슷하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출판사가 같다. 네 권 모두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책들이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책을 고르는 방법이 결국 문학동네로 고르게 한 것 같다. 내가 고르는 기준은 이렇다.


1. 완역본

2. 번역자 

3. 양장우선


세 가지의 기준을 충족하면 책을 고른다. 책을 고를 때 번역자는 중요하다. 특히 소설이나 전문 서적은 번역자가 누구냐에 따라 번역이 반역이 되고, 번역이 새로운 창조적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번역자의 몪은 크다. 그리고 마지막, 양장본이 좋다. 가격이 얼마 더 비싸지만 양장으로 선택해야 책이 오래가고 보존이 쉽다. 사정상 이사를 자주가다보니 일반 페이백 책들은 찟어지고 구겨지고 상하기가 일쑤다. 가치가 적은 책은 다시 사면 되고, 버려도 죄지만 중요한 책들이 상하면 덩달아 나의 마음도 상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살때 약간의 부담이 더해지는 양장으로 구입하면 더 이득이다. 10번 가까이 이사를 다니면서 터특한 나만의 노하우다. 문학동네가 이 세가지 기준을 거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고 같은 출판사의 책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이 책 뿐 아니라 다른 책은 어떨까? 문학동네의 책을 더 찾아 보았다. 연금술사와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양장이다. 아무래도 판매량을 생각한 책인 듯하다. 알랭 드 보통의 책들도 대부분 양장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도 대부분 양장이다. 언뜻, 고전이나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양장타입이고, 일반 가벼운 소설들은 반양장을 선호하는 것이 뚜렷하다. 양장은 손이 많이가고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하니 출판사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독자들도 비싸더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책은 양장으로 구입하고 싶다. 


양장이든 아니든 선택은 출판사가 할 일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내가 좋아하고 가치있는 책이 페이페백으로 나온다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독서도 책도 복불복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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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읽을 책들도 골랐다. 아마도 여름이 오기 전 20권 정도는 소화할 생각이다. 어떤 책이 좋을까?


먼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자. 














톨스토이의 책은 몇 권 읽었지만 장편 소설을 아직 손도 못댔다. 영미문학은 아니지만 반드시 거쳐야할 중요한 책이다. 문학동네에서 친절하게 세 권의 양장으로 출간했다. 
















카프카와 제인 오스틴, 마지막으로 헤르만 헤세의 책들은 필독서들이다.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25회 

내 심장이 뛴다 <그리스인 조르바>

 

작년 그러니까 201310<그리스인 조르바>를 샀다. 워낙 유명하니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가. 얼마 전에 읽은 <여행 작가 한 번 해볼까?>에서도 언급하고, <알파레이디 북토크>에서도, 출처가 선명하지 않지만 다른 책에서도 그리스인 조르바는 귀가 따답게 읽으라고 잔소리 한다. 결국 작년 가을에 큰 맘 먹고 구입했다. 초반부는 ''라는 사람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지겨웠다. 무슨 설명이 그리 많은지. 이 따위 책은 읽으라고 권한단 말인가. 집어 치우라지. 고작 15쪽 읽고 보이지 않는 책장 한 쪽에 밀어 넣었다. 시간은 흘러 벚꽃이 만개한 사월의 어느 날 운명처럼 조르바를 발견했다.

 

순전히 하얀 표지 때문이다. 착시현상이 일어 날 것 같지 않는가. 벚꽃이 아닌가하는. 순전히 개인적인 기억의 데자뷰일 뿐이다. 나는 늘 하얀색을 벚꽃이라 우긴다. 아내는 분홍색도 아닌 분홍톤이란다. 색에 유난히 민감한 아내는 조금이라도 다르면 억지로라도 시켜서 교정해 준다. 가로수 아래 시에서 심어 놓은 꽃이 좋아. "와 온톤 빨간색이다" 아내가 떫은 표정으로 염장을 지른다. "분홍색!" "분홍색이나 빨간색이나. 거기서 거기지" "아니에요. 달라요!" 늘 이런 식이다. 단세포 생물인 나에게 분홍이고 뭐고 복잡할게 뭐람. 그냥 빨강이면 빨강이지. 하여튼 이런 식의 대화가 자주 오간다. 오늘도 어김 없이.

 

새하얀 옷을 입은 벚꽃 같은 책을 꺼내 지난 번에 표시해둔 뒷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검게 그려진 밑줄을 보니 기억이 되살아 났다. 6개월은 순식간이다. 밑줄친 덕분에 기억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또렷한 의식으로 읽어 나갔다. 기억은 하나도 다르지 않는데 느낌이 너무 다르다. 물컹물컹 씹혀지는 문장들이 마시멜로를 먹는 듯하다. 아니면 초장에 생선회를 찍어 먹는 느낌이기도 하고. 후각과 청각이 요동친다. 예를 들어 보자.

 

카페 안은 발효시킨 샐비어 술과 사람 냄새가 진동한다.”

 

코끝이 화끈거리지 않는가. 비오는 카페 안이라. 창문은 대부분 닫혀있어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런 곳에서 발효시킨 술 냄새라. 생각만 해도 역겹다. 시선 처리는 어떻고. 문장이 아닌 영화를 보는 듯한 절묘한 서술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잊게 한다.

 

북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로코 바람이, 유리문을 닫았는데도 파도의 포말을 조그만 카페 안으로 날렸다.”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대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보여주는 문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선이 만나자 그 낯선 사람은 힘차게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탁자 사이를 지나 내 앞에 우뚝 섰다.”





만남! 그리고 묻는다.

 

여행하시오?”

 

그는 여행 중이었다. 그 와중에 조르바를 만났다. 기적은 언제나 운명이다. 그 항구에서 예전에 떠나보낸 친구를 회상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조르바에게서 자유를 발견한다. 줄기 세포와 같고, 태곳적 때 묻지 않는 대지와 같은 남자였다. 그를 만난 주인공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와 동행을 시작한다. 아직 시작도 못했으니 더 이상 풀 수가 없다. 다만 뭔가 신선한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도 열심히 조르바를 따라 크레타로 들어갈 참이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시다.

 

조르바는 앞서 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뒷따라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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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을 더 찾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집에 한 권 있다. 어딘가 낯익더라니. 최후의 유혹은 예전에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는 책이다. 조야하긴 했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와 통찰이 담겨 있다.















<수난>도 역시 인간의 고뇌다. 예수의 사후 인간들이 짊어진 고뇌의 의미를 찾아간다. 카잔차키스의 빼어남은 역시 기행문이다.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이가 담겨있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도 기행 소설이다. 카잔차키스는 여행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분명하다. 이번참에 이 책들을 몽땅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