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趙廷來), 그는 뜨거운 남자이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지만, 그를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소설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씩 공부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중이다. 먼저 위키백과부터 뒤졌다.

 

"조정래(趙廷來, 1943년 8월 17일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서울 보성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표작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의 역사소설이 있다.조정래의 작품은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미쳤는데, 실제로《태백산맥》의 경우 무혐의 처분을 받을 때까지 11년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논쟁을 일으켰다. 현재는 모교인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7년 《오, 하느님》(문학동네)을 저술하였다."


작년 처음으로 읽은 책은 그의 글쓰기 책이다. 


<황홀한 글감옥>이란 책인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책이다. 특히 날마다 출근하듯 글쓰라는 이야기와 운동 부분에서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의혹이 일었던 것은 태백산맥과 같은 장대한 대하소설을 책상에 앉아서 그것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지금 2권을 읽고 있는데, 한국근현대사를 꿰뚫고 있는 그는 역사의식과 통찰력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역시 대가다운 힘이 느껴졌다. 아마도 책을 쓰기 전 수많은 정보수집과 여행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태백산맥을 쓰기 전 여수 순천 벌교를 끊임없이 탐방했을 것이다.





조정래의 대표적인 책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다. 

《아리랑》은 조정래가 쓴 역사소설이다. 해냄 출판사에서 전집으로 출판했으며, 프랑스어로 편역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전라북도 김제시를 배경으로 일본의 수탈과 우민화교육에 대해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일제에 협력한 친일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고발,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에 대한 언급은 역사소설로서 아리랑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이다.(위키백과:아리랑)


역사적 연대기로 본다면 일제시대를 다룬 <아리랑>에서 해방후 한국전쟁 전 일어난 여순사건과 빨치산을 다룬 <태백산맥>,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현대사의 아픔을 다룬 <한강> 순이다. 모두 인물도 다르고, 사건 전개도 다르지만, 조정래라는 한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 현대사를 조밀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번에 출간된 <정글만리>의 경우는 소설이기 보다는 보고서에 가깝다. 출판사 소개에 의하면 중국 다시보기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가진 사회주의나 공산국가로서의 중국이 아닌 중국식 자본주의에 주목한 것이다.

작가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어 G2로 발돋움한 중국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등의 다섯 나라 비즈니스맨들이 벌이는 숨막힐 듯한 경제전쟁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꽌시(關係)' 없이는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그곳에서 성공을 좇는 이들의 욕망과 암투가 다종다양한 중국식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와 더불어 급속한 개발이 빚어낸 공해 문제, 중국 특유의 '런타이둬(사람이 많다)' 이면에서 벌어지는 인명경시의 세태,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뒤로하고 대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한 저소득 농민공들의 모습 등은 과속 성장의 폐해를 드러내며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한다. 또한 거대 비즈니스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한국와 일본의 비즈니스맨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과거사와 그 저변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까지를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허수아비 춤과 인간연습, 오 하느님의 경우 단권으로된 장편 소설이다. 대하드라마를 쓴 대작가라 장편 소설이 작게 보인다. 해냄에서 출간한 초기 대표작품 세트와 명문장 모음으로된 10권짜리는 꼭 사고 싶은 책이다. <불놀이, 대장경, 상실의 풍경, 비탈진 음지, 어떤 솔거의 죽음, 황토, 유형의 땅, 외면하는 벽, 그림자 접목, 감동의 명문장>이 들어가 있다. 2013년에 다시 인쇄된 것이라 보기에도 딱 좋다. 















아직 알아가는 중이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책 값만 해도 만만치 않으니 두고두고 공부할 것이다. 



 
 
 

태백산맥, 그 장엄한 막이 열리다.


조정래 작가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있다. 몇 달 동안 한국 현대사를 나름 공부하면서 많은 회의와 아픔을 겪었다. 미안하고 화가났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무지하고, 민중의 아픔을 몰랐던 것이 미안하고,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저지른 악을 알고나니 화가 난다. 어쩔때는 화가나서 참을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 전에 사두고 읽지 않고 있던 <태백산맥>을 꺼내 들었다. 우연이라면 우연일 것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인 만남이다. 여순사건의 자료를 찾는 중 어떤 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감상문을 올려 놓은 것을 읽었다. 한국 현대사의 원류를 다루는 소설인지는 알았지만 바로 '그 사건'이란점은 놀랐다. 당장 꺼내 읽기 시작했다.


과연 그랬다. 여순사건 직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류는 빨치산 이야기지만 벌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민중들의 고통한 한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들려 준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때론 걸죽한 농담도 농밀하게 담겨있다. 정하섭과 무당 소화의 첫날밤 이야기는 첫 권부터 혼란에 빠드렸다. 너무 야~~~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야함이었다. 



"그녀(소화)는 벽을 바라보고 앉아 소리 없이 저고리를 벗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 더움 속의 몸짓은 그를 흡입하는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이었다. 그의 전신의 피가 뜨거운 기름으로 변했다.  수천의 불꽃은 일시에 그녀를 향해 뜨거운 혀를 내밀었다."(92쪽)





 
 
 

한국교회와 반공주의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눈에 들어온 주제는 <한국 개신교와 반공주의>다. 강인철 교수에 의해 이미 책으로 나온 주제이기도 하지만, 보수교회 안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주제이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 않다. 안타깝게 이 책은 이미 절판되었다. 


2007년에 출간되 책임에도 절판된 것은 그만큼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책이기도 하다. 다시 개정되어 재판되길 소망한다. 아직 중고도 잘 나오지 않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책이다. 무슨 내용인지 사뭇 궁금하다. 일단 인터넷을 검색해 가며 자료를 찾아 보았다. 


일단 위키백과의 <반공주의>를 참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분에 이런 글이 나온다. 종교와의 유착과 자본주의에 대한 독선을 전제로 한다. 또. 사회적 불평등이나 갈등을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외부의 선동으로 돌리며, 사회문제 해결에는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 정말 기막힌 통찰이다.


반공주의는 대개 종교와의 유착 및 자본주의에 대한 독선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비판받는다. 반공주의자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의 원인을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외부의 선동 등으로 돌리면서 노력하기만을 강요하고 사회문제의 해결에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를 비판할 경우 거의 대부분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적 명분을 내세워 무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반공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 자체를 혐오하는데 정작 자유주의가 극대화되어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을 경우 환경파괴 및 경제공황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이 21세기 들어 설득력을 얻으면서 반공주의는 전세계적으로 퇴출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그동안의 반공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으며 반공주의자들이 비판하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나 레닌이 지향했던 이상향과는 전혀 관계없는 좌파 파시즘 체제로서 반공의 진실은 우파 파시즘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중간부분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반공주의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직접 읽어 보자.


대한민국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전 1920년대인 자유시 참변 이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에서 시작되어 해방 직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소련군들의 종교의 자유 탄압,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북위 38도선 기점으로 남북을 분할하는 신탁통치 찬성 등으로 견고하게 형성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공산당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조봉암 등이 공산당을 탈퇴하였고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대한민국에서 반공정책이 더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반공은 남한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는 권력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반체제세력에게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통치했을 시절, 공산주의자와 그에 가담한 자들은 국외로 추방되거나 처벌받았다. 하지만, 진보주의자 들은 인혁당 사건 날조 의혹이나 동백림 사건 과장 의혹 등, 독재, 군사정부의 반공주의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며,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민간인 집단 살해의 원인은 지나친 반공주의 정책에 있다는 견해도 있다.


우연찮게 알게 된 '반공주의' 안에 이렇게도 많은 사연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을 위시로한 현 정부의 정책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 용산참사에서도 그랬고, 제주 강정 마을뿐 아니라, 세월호 침몰 사건 후 정부가 보여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모습은 반공의 맨 얼굴을 보고야 만 것이다. 그동안 내가 왜 그들의 편에서서 그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대변해 주었던 말인가?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김좌진 장군과 김두환, 그리고 김을동'의 관계를 다룬 적지 않는 개인 블로그와 신문기사 등을 읽었다. 김두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용감하고 의리있는 조선의 깡패가 아니었다. 그는 살인자였고, 포악한 테러리스트였다. 자, 그럼 그런 주장들이 얼마나 많고 논리적인지를 살펴 보자. 

     ■김을동...김좌진장군의 손녀가 절대로 아니다.

좀더 명확하고 근거가 있는 글은 아래의 글이다. 일독을 권한다.

     ■김좌진 장군과 아무 관계도 없는 김두한, 김을동 

새누리파인 조선일보는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을 기정 사실화 하고 기사를 썼다. 

     ■영화 '장군의 아들' 김두한, '김좌진 장군 아들 + 김을동 의원 아버지' "진짜?"


김두환이 반공주의와 연관되는 것은 야인시대에서는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의 아버지로 알려진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원에게 살해 당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일본이 공산당으로 속여 죽인 살인이다. 이 사실을 김두환이 알게 되고 결국 잠시 사회주의에 가입한 김두환이 우익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설이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좌익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은 길거리 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소식통이라할 수 있는 조선 최고의 보스인 김두환이 모를리가 없는 것이다.  아래의 사이트에 가면 김두환의 포악이 그대로 그려져있다. 

   ■야인시대 김두환을 미화하지 말라.


김두환은 전화기적 인물이다. 그가 만약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면 감히 우파에게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두환이 김좌진 장군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더 고민할 문제이다. 


한국개신교가 반공주의에 물든 이유를 밝힌 자료와 책이 있다. 그 첫째가 앞서 소개한 강인철의 <한국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이고, 이지영의 201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석사 논문인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 발전과정 연구>가 있다. 김경재의 <분단시대 한국교회 보수적 반공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 대립의 비판적 성찰>이란 소 눈문에서 한국 교신교의 반공주의를 논한다. 


반공주의를 공부하기 위해서 몇 권의 책을 추려 보았다. 먼저 문학적 측면에서 <반공주의와 한국 문학의 근대적 동학1.2>가 있고, <반공주의와 한국문학>도 있다. 


















윤충로의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 국가 형성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은 한국 반공을 연구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확실한 자료이다. 표지의 사진은 여순사건 이후 좌파에 부역한 민간인을 찾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 때 백두산호랑이로 이름붙여진 김종원 대위에게 책임을 맡긴다. 그는 일본도를 가지고  좌익에 부역한 양민들의 목을 쳤다. 







김기협의 <해방일기> 또한 귀한 자료다. 한국의 현대사를 읽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식민지에서 해방 된후 분단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분단이란 아픔을 겪으면서 다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대야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러나 민족주의나 사회주이 또는 자본주의 개념이 아니다. 알라딘 저파파일에 소개문이다.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정경모의 <찢겨진 산하- 김구, 여운형, 장준하가 말하는 한국 현대사>는 한국근대사상의 중요한 네 명의 인물을 다룬 책이다. 1992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어 번역된 책이다. 20년만인 2002년에 다시 재판되어 출간되었다. 저자인 정경모는 1924년 서울에 태어난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교 의학부와 서울대학교 의대를 다닌다. 다시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다. 미국 유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쳥이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 소환되어 문익환, 박형규 등과 함께 근무한다. 휴전회담 당시 통역을 맡았고, 한국에서 지내다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계속하여 일본에서 40년이 넘도록 망명생활을 한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 책은 김구, 여운형, 장준하라는 한국근대사의 걸추란 세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한다. 김구와 여운형은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다 결국 암살 당한다. 장준하는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민주화를 이끌다 역시 암살 당한다. 그들이 사후 세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픽션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현대사를 참으로 예리하다. 좌우합작과 반민특위 활동, 이완용과 이광수, 윤치호 등의 친일파에 대한 평가, 함석헌 등의 60여명에 이르는 인물도 언급한다. 기존 역사가 강대국이란 거시적 관점에서 해석한 반면, 정경모는 친일 행위와 농지 소유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모순을 통해 바라본다. 



그럼 왜 한국 보수 기독교가 반공주의자들이 되었을까? 


1. 공산주의는 신을 부정한다. 

막스가 말하길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다. 유물론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좋게 보지 않는다. 이것이 첫 이유다. 


2. 북한의 지주들과 엘리트는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조선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가장 부흥을 한 곳은 개성과 원산, 평양 등의 북한이다. 남한의 전통적 신학교는 '평양 신학교'에서 그 전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와 정권을 잡을 때 기독교인들과 엘리트를 숙청하고 재산을 빼앗고 탄압한다. 결국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70%가 남하하게 되고, 그들이 미군정이 지배하는 남한에서 터를 잡는다. 이때부터 남한의 기독교는 북한을 용공세력으로 몰고, 반공주의에 몰두 한다. 


3. 이승만의 친미 반공 정책

남하한 기독교인들인은 기독교적 미국와 쉽게 손을 잡는다. 결국 매우 적은 수였음에도 기독교인들은 미군과 이승만과 손을 잡고 남한의 반공주의자가 된다. 김일성에게 당한 보복심리와 사회주의가 갖는 유물론적 성향 등이 어우러져 극단적 반공주의자가 된다. 이것으로 중보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밀려나고 극단적 성향의 친미파와 친일파의 성향으로 굳어진다.







 
 
2014-07-21 19:05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두환이 아니라 김두한이에요
 

여수 이야기


네어버 캐스트에서 작가 한강의 인터뷰를 읽었다. <소설가 한강의 서재는 부스다>는 제목으로 올라온 인터뷰는 한 작가의 소박한 고백이 담겨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소설가가 있는 데 모두 알기는 불가능하다. 소설가도 아닌 내가 그들 이름을 몽땅 머릿속에 담는다는 것을 애초부터 불가능하지 않던가.



앞 부분만 소개하면 이렇다.


저에게 서재는 '전화 부스다.'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유리문을 닫으면 바깥세계가 보이긴 하지만 소리는 차단되잖아요. 그곳에서 수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며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는 그런 공간인데요. 서재는 대부분 죽은 사람들 또는 지금 옆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꽂아놓고 펼쳐보는, 세계의 한가운데지만 조금은 떨어져 있는 그런 곳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했던 유년의 책 읽기'에서 어릴 적 집에 책이 많았다는 이야기, 책을 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시골인데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들은 책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정말이지 책 한 권 없었고, 책 읽는 아버님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유년 시절 심심해서 책 밖에 읽을게 없었다는 이야기는 부러움을 넘어 시기심을 일으킨다. 유년시절의 독서가 얼마나 좋은 자양분인지 아는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난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백지처럼.


그곳에서 우연히 <여수의 사랑>이란 책을 보았다. 여순사건을 공부하면서 여수와 순천에 관련된 책을 찾아가며 발견한 것이다. '여수'란 검색어 들어왔다. 1995년에 책을 다시 재판한 책이다. 소개글을 보아도 '상처'란 단어만 보이진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시도했다. 다행히 소개한 글이 있다. 여수에 하멜 등대가 있다. 그곳에서 얽힌 사랑 이야기다. (시놉시스를 소개한 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순사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글쎄 이게 무슨 조우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하나 더 있다. 박윤신이 지은 <여수 14연대 반란>이다.  





이병주의 <지리산1.2>도 찾았다. 해방후 한국전쟁과 휴전협정까지의 혼란기를 정리한 소설이다. 이 책도 여순 사건을 어느 정도 다루고 있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역시 빨치산과 거창 양민학살을 다룬 책이다.












여순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책이 있다면 단연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여순사건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이야기를 주도면밀하게 파헤친다. 













여순 사건 전후로 일어나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생존해 가는 안타까운 민중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태백산맥」은 그 구성(plot)에서 두 가지의 특성을 지닌다.

1948년 10월 이른바 여·순 사건을 앞둔 어느 날 미명에 햇솜 같은 흰 꽃의 무리를 이루고 있는 갈대밭의 풍경으로부터 시작해서 1953년 잔비 토벌이 끝나가던 늦은 가을 어느 날 새벽에 갈대가 누렇게 변한 벌교의 포구를 배경으로 막을 내린다.


5년에 걸친 긴 비극을 마치 하룻밤 사이에 우리들 주변에서 있었던 악몽인양 착각하게 만드는데 이 점이 바로 시간적 구성의 특색이다.

다른 또 하나는 공간적 구성의 특징으로써 「태백산맥」을 「아리랑」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아리랑」은 1890년대 김제, 군산, 만경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그 무대가 하와이, 러시아, 중앙아시아, 일본 등 세계로 넓혀 전개되다가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찾으면서 여러 무대에서 각각 끝을 맺는데 반해

「태백산맥」은 벌교에서 시작하여 만주, 서울, 부산, 강원도까지 배경이 넓혀지지만 소설의 중심공간은 항상 벌교라는 제한된 공간에 두고 있고 결국 벌교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작가는 "나는 그저 민중의 편에서 그들의 질곡된 삶을 통해 역사를 복원하려고 노력했을 따름이다. 작품 가운데 내가 지향하는 인물은 없지만 굳이 어느 한 인물을 지적하라면 서민영 같은 사람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태백산맥」은 작가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지난 1994년 자유총연맹 등 반공 단체들에 의해 이적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방과 함께 검찰에 고발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백산맥」이 거두고 있는 분단 문학으로서의 소설적 성과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함께 민족사회의 내재적 모순을 비판하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공감을 얻었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지리산 이야기에서 가져옴)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

이현상의 시체는 스님의 독경 소리와 함께 하얀 재로 변해갔다. 지리산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했던 그는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나는 이현상의 뼈를  내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 나는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부치는 나의 조사(弔辭)였다. 지리산에서 숨져간 수많은 원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기를 기원하는 나의 외침이기도 했다. 한많은 그의 인생이 한 줌 재가 되어 섬진강을 흘러 내렸다... 중략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중에서


여수 이야기를 하려다 너무 돌아왔다. 결국 여수라는 항구도시는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를 잇는 민족사의 굴절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여수 이야기는 또 다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빨치산'이다. 그동안 승자들의 억악되고 강제된 전승으로 왜곡된 빨치산 이야기는 현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태 <여순병란>


남부군과 「여순병란」의 저자인 이 태 선생은 충북제천에서 출생하였고, 해방후 가장 최초로 설립되었던 전문언론인 양성기관인 조선신문학원을 졸업을 하고 서울신문과 합동통신사 기자를 역임하다가 6.25를 당하여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서 전주지사에 특파 되어 있던 중에 전북지역 빨치산으로 활동을 하였고, 이때 최후 빨치산인 남부군으로 소속되었다가 그후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고 또 민주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남부군>이나, <기다림>,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 이와 같은 저서가 있으며 최근에는 여수지역을 주제로 한 남부군의 형성과 몰락을 여순사건에 관계된 부분까지 총망라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여순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 <여순병란>을 집필하였다.


     




 

 이 책(남부군)은 6.25 전란 중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던 '남부군'을 주제로 한 체험적 수기이다. 남부군은 토벌당국에 의하여 남부군단 혹은 이현상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워지던 게릴라부대의 고유명사 이며  그 정식호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였다.  남부군은 당시 소위 '남한빨치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부대였고, 유일한 순수 유격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기 때문이다.  그 내력과 역정은 차차 이 기록에서 밝혀질 것이다. 남부군은 비극의 상징이기도 한 이름이었다. 남한 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었고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스러져갔으면서도 북한정권에 의해 버림받고 마는 비운의 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궤멸의 과정은 차차 이 기록에서 밝혀질 것이다.

 

 나는 기구한 운명으로 이 병단의 일원이 되었고 신문기자라는 전직때문에  전사편찬이라는 소임을 담당하면서  이 부대가 궤멸하는과정을 스스로 겪고 보며 기록해왔다.  그 경위도  이 기록에서 차차 밝혀질 것이다. 기록은 소재이지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소재에는 주관이 없다. 소재는 미화될 수도 비하될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분식된 것은 기록이 아니라 창작이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사실보도를 업으로 하는 기자였다. 되도록 객관적으로 모든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이 기록속에 적은 그대로의 연유로해서 내 손에서 떠나가버렸다.  나는 언젠가는 그러한 내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을 느끼며  체포된 직후 남원수용소에서 다시 그 작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아래에 적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이 회상기에서 대학생이던 한 청년은 말한다. "대장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 주세요." 그 목소리는 언제나 생생하게 내 귓전에 남아 나를 재촉했다.  이 수기 속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빠를 학살당하고복수의 악귀가 된 한 소녀는  자신마저 박격포탄에 찢겨  겨울산에서 죽는다. 백설 위에 선지 피를 뿌리며 숨져가던 그녀가 마지막에 경련하는 입술로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를 나는 적어 남겨야 했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남원수용소에서 나는 보다 진실한 내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사실에 접근하고자 간신히 손에 넣은 몽땅연필을 들고  나 자신의 체험을 자세히 메모하는 한편  산중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은 얘기를 화선지 휴지조각에 메모했다. 이 회상기에 나오는 나 이외의 개인적인 기술들은 대부분 이 때 보고 들은 얘기들이다.

 

 얼마후  나는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나같은 입장의 사람들이 항용 겪어야 했던 여러 여건들로 해서 그 메모를 기록화할 엄두를 내지못한 채 그럭저럭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오히려 그 악몽같은 기억들에서 짐짓 멀어지고자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는지 모른다.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불여의 교통사고를 만나 생사의 경을 헤매는 몸이 되었다. 그것이 그동안 잠자던 마음의 부담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그 기구한 체험들을 기록 해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그것을 쓸사람이  어쩌면 나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하나의 강박감이 되어 되살아났던 것이다.

 뒤에 적을 여러가지 어려움을 딛고 가까스로 원고의 정리를 마쳤지만 그러나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데는 유신과 5공화국이라는 암흑기로해서  또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생각하기조차 역겨운 경위로 해서  기록의 일부가  어떤 소설속에 표절되기도 했고 그 때문에 가까스로 만난 보완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이제 국가의 기밀도 공개하는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로써 관조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나는 이 기록의 출판을 결심했다.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었으나 그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결과에 부끄럼을 느끼면서도...기록들에 의하면  49년 이래 5년여에 걸쳐 소백 지리지구 공비토벌전에서  교전횟수 실로 10,717회, 전몰군경의 수는  6,333명에 달한다.빨치산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수 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령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 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 하나쯤은 남겨져야 하지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청산한 지금, 그렇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물론 공비토벌에 관한 군경측의 기록이 있고  빨치산측의 '수기'라는 것도 한 두 가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군경측 기록은 지나치게 국부적이거나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기가 적지않고 더러는 관계자의 무공을 내세우기 위한 터무니없는 과장이 눈에 띄었다.  빨치산의 수기라는 것도 어떤 특정지역의 인간관계에 얽힌 얘기, 그것도 어떤 목적의식 혹은 필자의 입장 때문에  의도적인 분식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저러해서 빨치 산이라는 이상사회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그려 놓은 기록은 사실상 전무했다. 전사는 패망한 쪽의 기록을 읽어야한다는 말도 있다.  비록 그것이 일그러진 세계의 기록이라 하더라도어디에도 정확히 적혀있지 않은 베일에 가리워진 전사를 조금도 에누리없이 기록해 두는 것도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지 않을까도  생각한것이다.

 

 다음에 나는 이 기록을 통해 북한정권에 의해서도 버림받은 채  남한의 산중에서 소멸돼

간 비극적 영혼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를 적어보고 싶었다.  북한정권은 그들에게 가혹한 희생만을 요구했을 뿐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를, 관심조차도  피력한 적이 끝내 없다. 이 더할 수 없는 잔학을 나는 고발하고 싶었다. 53년 7월, 그 민족적 비극을 마무리하는 휴전협정문서에는 각 상대방 후방에 남겨진 물자와 장비의 철거, 심지어 전사자의 시체발굴과 반출에 관한  조문까지 있었지만 후방에 남겨져 있는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다만 휴전협정 막바지에 유엔군측이 남한 후방의 게릴라의 안전철수를 요구했으나  북한측이 그것을 묵살하고만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무렵에도 남한의 산악에는 수백의 인간들이 일체의 정보로부터 차단된 가운데 절망적인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만일 북한당국이 인명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아니 추호의 동지적 정의라도 있었다면  그 절망속의 생명을 구출할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수백의 생명과 그후에도 토벌전에서 전몰한 상당수 전경대원의 희생을 막을 기회는 있었던 것이다.  

 

혹은 장차 재건할 지하당이나 게릴라의 뿌리로서 정전협정에 구애받지 않는 무력을 남겨두려 했음일까? 불원간 절멸할 운명에 있던 이들에게 아마도 그런 기대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남로당계의 유일한 거점인 남한 빨치산이 사멸되는 것을  북한당국은 막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남한 빨치산의 소멸과 함께  일체의 기반과 발언권을 상실한 월북 남로당계 간부들은 전쟁의 초연도 채 가시기 전에  무자비한 숙청으로 뿌리를 뽑히고 만다.  그리고 남한 빨치산은 도리어 그 숙청의 이유의하나로 꼽히게 된다.  어찌했든 정치적 목적 또는 무관심으로해서 만에 하나 살아남을 가능성없는 생명들을 방치했다는 것은 다시없는 배신이며 인간을 수단시하는 잔학행위라고 나는 생각한것이다.  몇 년을 진화해온 인간의 문명이, 몇십 년을 길러온 인간의 양식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벗겨지며 원시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이 기록에서 나는 극한상황에 즈음한 인간의 가식없는 심정 을, 어쩌다 이 죽음의 대열에 뛰어든젊은 지성들의 고뇌를, 그리고  빨치산도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었던 시와 낭만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은 주의 사상은 물론 전쟁 그 자체와도 아무 상관없는 벌 거벗은 '인간'의 모습들이었기때문이다.

 

'지리산'이라면  피비린내 나는 민족사를 연상하던 세대도 이제는 많지 않다.  지금은 국립공원 제1호로 젊 은 남녀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지리산 --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 피가 얼룩졌던 시절의 얘기는, 그들과  같은 또래의 청춘들이  30여년 전에 겪었던 일들은 이제 그들에겐 까마득한 전설이며 잊혀져야 할 얘기들 이다. 그러나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워 살랐던 핏빛 정열에 는 한가락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지난 은수를 다잡아 싣고 삭히며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찌도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 해 간다.

 여러해 전 어느 늦가을  나는 배암사골을 찾기 위해 반선부락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때마침 내린 가을비속 에서 나는 수많은 망령들의 호곡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 청년이 말했듯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젊은 넋들의 호곡소리를  나는 어둔 밤 골짝을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들은 것 같았다. 이튿날 깨어보니 지리연봉은 하얀 첫눈에 덮혀 있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제 자신이 '여순병란'이란 책을 쓴 동기는 제가 6.25 전란중에 남부군이란 유격부대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때 상사되신 분들 전부가 여순사건과 관계하신 분들이었습니다. 14연대라고는 하지만 그 속에는 4연대 출신이 많았고 전주의 3연대, 대구의 6연대, 혹은 마산의 15연대, 대전 2연대 출신의 사병도 있었습니다. 도중에 사병들이 자꾸 와서 그렇게 되었고 그러한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서 남부군 선발과정을 구성하고 이현상이라는 분 지휘하에 유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덕유산에서부터 그 부대에 제가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 『여순병란』에도 썼습니다만, 모두 나이가 스물서너살 정도의 젊은이들이였습니다. 그때 저는 27∼8세 가량 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른인줄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젖비린내 나는 젊은애들인 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그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나 하고 의혹을 품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서울에서 신문기자로 있을 당시에 자료를 많이 읽었고 또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예비식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나 조심스럽게 그 분들 얘기하는 것을 들었고 기억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와중에 나중에 보니까 지금 여기 팜프렛에도 나옵니다만 실제와 다른 풍설이 어떻게 기록으로 남아 가지고는 왜곡된 채로 정착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령, 김지회 문제라든가 또 남로당 제용섭이라던가 그밖에 많이 있습니다. 누가 더 큰 피해자이고 누가 더 큰 가해자인가 하는 이러한 문제들, 이것이 왜곡되어 왜곡된 상태로 현재 정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가 생각하기에 4·3사건이나 거창사건과 같은 사건은 그때 당시 신정북이라는 국회의원이 앞장섰기 때문에 일이 커져서 이 모양이 되었고, 4·3사건은 아시다시피 제주도 도민의 절반 이상이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교포입니다. 일본어로 여러 가지 저술을 내어 그것이 다시 번역이 되어 들어와서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유독 여순사건은 제주도 사건보다도 몇 갑절 희생자가 더 크고 비참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체계적인 뭐가 없다고 보아집니다. 이곳 전남지방에 이렇게 많은 문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학적으로 글이 승화된 것이 없다고 봤기 때문에 … 다만 거작 태백산맥이 있습니다만 태백산맥은 벌교라는 일부 지방의 얘기, 그 중에서도 비교적 변두리에 속하는 벌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사건의) 핵심인 순천과 여수를 중심으로 한 소설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여순사건은 동부 6군 구례 광양 화순 보성 순천 여수 이렇게 동부 6군이 중심지가 됩니다. 누구든 그러한 것들은 장차 유능한 젊은이가 그것을 파악해서 실록소설을 써주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고 사실은 제 자신도 자료를 만들었습니다만 개인적인 말씀을 약간 드릴려고 합니다. 제가 작년에 거의 3천장 분량을 책으로 1.2.3권을 내려고 했는데 컴퓨터를 두드리다가 허리를 다쳐서 황급히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어느 분이라도 나서서 대하 소설을 한권 써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결국 50년이라는 세월, 반세기라는 세월이 지났으니까 이제 화해를 해야 할 시기도 되었습니다. 서로 미움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꿔 화해할 시기가 되었는데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진실이 밝혀져야 합니다. 때렸다는 사람 맞았다는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른 상태가 되어서는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주 그야말로 어떤 보복적인 차원이 아니라 완전하게 투명하게 진술이 밝혀지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이렇게 하면서 화해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화해를 할 시기가 이미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은 화해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서 미약하나마 조그만 책을 썼습니다.                     1988. 7. 이 태

 

<여순사건과 독자와의 대담>

사회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사건 당시 저는 현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사정은 현지에 계셨던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실 터이고 다만 서울에서 제가 경험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순사건은 48년 10월입니다만, 아시다시피 해방은 45년 8월 15일 아닙니까? 사건이 일어난 것이 48년 10월이지만, 이 사병들이 입대한 것은 이미 1, 2년전입니다. 해방되고 1, 2년 만에 입대한 청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3년동안에 도저히 그 하나만 가지고서도 오늘 토론회에서 끝이 나지 않을 엄청난 사건들이 그 3년 동안 무더기로 쏟아졌습니다. 거기에 전부 영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당시 대한민국이 세워져 있고 국군이 있으니까 이 여순사건은 반란사건임은 틀림없습니다. 군대가 반란한 것인데 반란한 사람이 재미로 반란한 사람은 없습니다. 반란을 한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 반란을 했고 반란을 한 사병한테 말하라고 하면 그 나름대로 당위성이 다 있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것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었느냐는 규명을 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방직후에 그 혼란했던 사회현상을 알아야 할게 아닙니까? 나이 스물한두살 먹은 아이들이 총을 들고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던 혼란상황을 대략적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문헌에 나와 있고 거의 다 아시는 내용들일 겝니다. 단지 제가 정리를 좀 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냉전논리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하는 말씀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구요. 어떤 사물이 어떤 것대로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면이 있습니다. 양을 강조하다보면 음쪽에서 그건 틀리다. 그렇게 나오고 서로 견해가 다르니까 그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책에도 썼습니다만 반란군쪽 입장에서 글을 서술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되어 있는데 불과 3년동안에 가장 큰 사건이 뭐냐하면, 건준과 인공문제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교과서에서도 긍정적으로 쓰기로 했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냉전논리가 지난번에 서울시경에서 정보 무슨 참고라는 쓴 것을 발견한 것이 있지요. 거기에 보면은 이승만과 한민당 이외에는 전부 좌익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좌익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반정부 하여튼 이승만 현 집권층에 반대하고 그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한민당에 반대한 사람들은 심지어 신익희씨 까지도 사상이 심하다고 하고 그렇게 좌익으로 몰리는 그러한 시대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건준과 인공은 건준은 아시다시피 여운형씨가 해방직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가지고 어차피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 우리가 일본에서 벗어나니까 빨리 우리가 건국을 서둘러야겠다. 반대 그 일본총독이 정무총감이 만나자는데 만나지 않았다는 송진우씨라든가 낭산 김진호씨 같은 분도 계십니다만, 여운형씨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운형씨에 대해서는 집안 여러 가지 인척관계에서 자세히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혼란속에서 그냥 해방이 되면 난리가 난다 이거예요. 일본사람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한 200만 정도의 일본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전쟁에 우리 힘으로 이긴 것도 아니고 미국 사람의 힘으로 이겼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평화적으로 살고 있는 일본 사람들을 다 때려죽이는 그런 혼란이 있어서는 안되겠거든요. 치안을 유지하고 보낼 사람은 보내고 그 치안의 공백상태를 메꾼다는 거기서 시작했던 것이 건준위인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우리는 해방이 되면 곧 그것이 바로 독립이라고 생각했지만 연합군 입장에서 볼 때에 해방은 그야말로 우리가 해방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단지 일본을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뿐입니다. 당시 한반도는 국제법상으로 엄연히 패전한 일본 영토의 일부였습니다. 당연히 점령되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고 남한은 미군이 들어왔는데 불행히도 당시 일본은 패전은 했다고는 하지만 정부가 있었습니다. 자기네들 정부가 있는데 히가시 기노미야라고 그때 일본도 혼란 시기니까 이 전후에 패전에 대한 반동도 나오고 하는 비슷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보통 민간인 가지고는 수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황족을 세워서 수습을 했습니다. 히가시 기노미야라고 그래 가지고는 맥아더 사령부를 세워서 통치를 했는데 맥아더 사령부는 동경에 진주한 맥아더 사령부는 그 일본 정부를 직접 완쿠션 해 가지고 일본 정부를 다스렸습니다. 군정 치하라고 하지만 일본 국민하고 진주군 미군정 당국하고 직접 충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일본) 정부를 통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가 소멸된 후에 한반도에는 완전히 공백상태가 되었습니다. 공백상태가 되어 가지고는 아무 것도 없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진주한 미군이 직접 군정을 시행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어요. 여기에 광주도 도청의 과장급까지 전부 미군 대위니 소위니 하는 사람들이 전부 통치를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정권이 없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여운형씨라든가 안재홍씨는 우리가 진주 미군에 대해서 우리도 자치정부가 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빨리 인공 만들기를 서둘렀습니다. 실제적으로 인공은 인민공화국 지금 이북에서 말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하고는 다릅니다. 인공이라는 것은, 인공을 만들어 가지고는 진주 미군이 들어왔을 때는 우리도 정권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를 통해서 해라, 하는 발언권을 내세우기 위해서 인공이라는 것을 갑작스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여수도 생겼고 순천도 생겼고 전라남도 반 이상이 생겼고, 전국적으로 생기고자 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인공들은 좌우익이 완전히 합작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친일파는 배제되었지만 시골에서 이른바 유지라는 분들은 좌익이나 우익이 전부 망라된 기구였습니다. 그때까지는 해방의 기쁨 때문에 그런 냉전논리가 아직 구석구석 침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소위 의사정부가 있었고 또 하나 상해에서 들어온 임정이라는 의사 정부가 있었습니다. 임정이 현재 헌법상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정통정부로 되어 있으니까 제가 말을 삼가 하겠습니만 망명정부는 우두머리 상부조직만 있었지, 아래톨이 하부조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은 면까지 조직이 전부 다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세금도 받고 식량도 배급도 하고 다 했습니다. 저는 불행히도 나이가 그렇게 되어서 일본군대에 끌려갔다 오는데 부산에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완장두른 사람이 전부 수제비국을 끓이고 그랬습니다. 저는 우리 정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들어오면서 '노'입니다. 그 사람들은 생각은 인민이 직접 참가하지 않은 정권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히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여기서 인공을 인식시킬려고 하는 세력과 인공을 부인하는 세력과의 충돌이 생기는 데 이것이 제1차적인 충돌입니다. 이때 한민당이라던가 하는 분들은 전부가 인공은 박멸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인공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좌우익이 합작한 그런 조직이니까 그 속에는 상당수의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었으니까요. 그런데 단 몇% 라도 좌익이 낀 정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그러한 이유였습니다. 당시에 한국의 해방 정국의 사정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기라성 같은 토착 좌익세력들이 감옥이나 지하에서 나오고 많은 청년들이 심지어 일본과 같은 나라들도 사회당 정권이 서고, 영국같은 중진국도 노동당 정권이 세워지는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생활도 어렵고, 그런 상태에서 백성 일변도의 나라를 만들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좌익의 교두보를 만들어 영수하던가 하면 나중에 다 먹힌다, 이러한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45년서부터 46·7년까지는 이 인공을 인정시킬려고 하는 싸움과 그것을 거부하여 파괴시킬려고 하는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공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국군준비대라는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장차 인공이 수립할 국가의 군대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습니다. 가장 짜임새 있는 사설 군대인데, 이것도 나중에 해산 당했습니다만, 거기에 많은 청년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인공과 국군준비대에 참여했던 많은 청년들이 좌익이라는 이름하에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전남지방만 해도 도처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심하게 일어났던 지역은 전남은 아닙니다만 남원에서 그 어떤 곳은 양쪽기구가 다 있었습니다. 경찰서와 군수가 있고 그 옆에 인민위원회와 보안대가 있고 간판을 양쪽에 걸어놓고 행정을 하고 이런 상태가 약 1년간 계속되었는데, 이런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좌익으로 몰렸고, 그러니까 이때 좌익이라는 것은 공산주의자라는 의미하고는 상당히 개념이 다릅니다. 반정부주의긴 해도 반권주의자들이라고 해야겠죠.두 번째 문제는 그러던 와중에 신탁통치 문제가 나왔어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문이지요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한반도에 어떤 중립국적인 남북을 통한 통일정부를 세우고, 누가 세우느냐 하면 미국과 소련이 만들고 그것을 미국과 소련, 중국, 영국 4개국이 5년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이예요, 공산측에서는 후견인이라 했어요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뒤에서 봐준다 그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똑같은 논리가 섭니다. 그렇게 하면 한반도 절반은 소련이 현재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미소 양국이 통일정부를 세운다면 좌익을 완전히 배제한 정부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얼마이든 간에 좌익이 끼어 드는 정부 밖에는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익측에서는 반대했습니다. 또 좌익측에서는 다만 얼마라도 교두보만 생기면 탁월한 조직력과 뜨거운 정열로 언제가는 우리가 승리한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남로당에 대한 조공당, 근로인민당 이런 좌익세력들, 그러니까 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반대하는 세력들은 명분이 36년만에 우리가 독립이 되었는데 사실은 독립이 된 것은 아닙니다만, 해방이 되었는데 남의 나라 신탁하에 들어가서야 말이 되겠느냐라는 소박한 감정으로 반탁운동을 했습니다. 이때 반탁을 주장하는 청년과 찬탁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청년들 간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술을 먹다가도 술자리에서 신탁통치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결국 미소 현재 북쪽에는 소련이 남쪽에는 미국이 와 있으니까 한반도는 어차피 두 나라가 타협해서 중립정부를 세울 다른 방도가 없지 않으냐 하면 마구 맞고 심하면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반탁하는 사람은 애국자고 여운형씨 같은 분은 저격을 당해서 돌아가시면서 그때 미소 공동위원회가 있었는데 혜화동 로타리에서 돌아가시면서 미소 공동위원회는 어떻게 되어 가느냐 하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송진우 같이 우익측 사람들도 이 신탁통치를 안 받아드리면 나중에 큰 일이 난다 영구분단이 생긴다 이러한 말까지 했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은 전부 저격되어 죽었습니다. 오직 반탁, 무조건 반탁하는 사람들만이 애국자가 되고 찬탁하던 사람들은 전부 몰리는 형태여서 찬탁파 청년들이 국군준비대 국방경비대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왜 들어갔냐 하면 경찰에 수배를 받게 되니까 좌익으로서는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도망, 도망을 다니다가 들어간 데가 국방경비대 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경찰 예비대격인 성격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법적 근거는 없지만, 일제때 부터 그 관념이 경찰위에 있다 경찰에서는 손을 못댄다. 이러한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제 좌익이라 해도 경찰의 수배로서 잡으러 가더라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면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가 봤자 국방경비대에서 내주지도 않고 그러니까 국방경비대는 점점 갈수록 좌익 반정부 청년들의 소굴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개념의 소위 좌익은 지금 생각하는 좌익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또 하나는 좌익 심히 생활이 곤란하고 여러 가지 통계에 의하면 전승국 패전국을 통틀어서 전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어려운 생활 상태에 있었고 그 다음이 한반도였다는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섰습니다마는 경상도같은 데에서는 1개군에 2백명 3백명씩 굶어 죽었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상태에서 이 청년들이 그래도 이쪽은 곡창지대이니까 경상도보다는 나았으니까 공출 일제 때 이 공출 때문에 진저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미군정은 이 공출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소위 자유 시장원리에 맡기고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귀환 동포가 전부 비농가였지요 수백만이 몰려오고 이북에서도 150만명이라고 추정하지만 그런 월남동포가 있고 또 한국에 도시민들이 식량대책을 일제때부터 전장중에 배급을 줬는데 그것이 뚝 떨어지니까 아우성이 나거든요, 배급을 주기 위해서는 쌀을 농촌에서 수매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수매를 해야되니까 농민들 생각으로는 일제 때하고 똑같이 안느냐 무슨 해방이냐, 이런 생각이 납니다. 수매에 응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경찰관이 나가서 독려를 했습니다. 경찰관과 면지서에서 독려를 하니까 그 경찰관이라는 것이 일제때부터 경찰관이니까, 야! 이거 뭐 해방이 다 뭐냐 도로 들어왔지 않으냐, 그런데 값이 47. 8년에는 배급가격에 시장가격이 3배이상 즉 10만원 소위 암시장에 10만원 하는 것을 농민들에게 빼앗을 때에는 매수를 할 적에는 3만원에 매수를 했었습니다. 1/3로 농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뒷구멍으로 빼돌리면 10만원 벌 것을 7만원 손해를 봐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거부를 하지요 미군정에서는 그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 좌익의 농민조합까지도 미군정이 하는 것을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은 이거 도시민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별거 경품을 그때 무슨 광모 비누같은 것 귀중품을 여러 주더라도 농민들이 응하지 안했습니다. 농민들이라고 바보입니까? 쌀은 가지고 있으면 몇 곱절 올라가는데 왜 놓겠습니까? 안 내놓지요,


미군정은 답답하니까 동포애를 발휘해서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동포애가 어디 있습니까? 돈 앞에서 그것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습니다. 안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민에 대해서는 식량을 배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에서는 쌀 내놓으라고 데모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어요. 그때 샌드위치 신세였어요 미군이 그때 앞장서서 쌀 수매하고 데모막고 했던 사람들이 일제 때 이래 경찰관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반감들이 자꾸 쌓여 갑니다. 그때 그 경찰관에 대해서는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묘하게 군하고 일제때도 그랬습니다. 고스톱사건으로 일본에서 유명합니다만, 네거리에서 군인하고 경찰이 싸웠는데 군인이 옳다. 경찰이 옳다. 군인을 갖다가 경찰이 붙들어가서 뺨을 때렸어요, 일본서 얘기입니다. 전면 싸움이 올라가서 내무대신하고 육군대신간에 싸움이 되었습니다. 육군대신이 폐하의 병정을 때렸다고 내무대신이 경찰관도 폐하의 경찰관이다. 이래서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꼭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경찰관이 시골에서 어떻게 잘못 만나면 국방경비대한테 뚜드리고 패버리고 경찰관들이 집단으로 보복을 하고 경찰과 국군경비대 군인사이에 청년들 사이에 충돌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유명한 것이 영암사건이고 구례사건인데 영암사건은 47년인데 그 별것도 아닌 것 객담하다가 어떻게 시비가 붙어 사람이 10몇이나 군인이 죽었습니다. 군인이 수는 많았지만 무장이 형편이 없었고 기관총 같은 것은 경찰만 갖고 있었고 그러니까 당했지요. 이러한 울분이 국방경비대에 와 있는 청년들 속에서 자꾸 쌓이고 그랬어요, 경찰관에 대한 울분이 그러하고 있는 참에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이 5.10 단선문제입니다. 5.10 단선 문제는 48년 5월 10일날 그러니까 미소공동위원회가 깨지면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미국과 소련이 합작해서 한반도 통일정부를 만든다는 것이 무산되는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이것을 유엔의 결의에 맡긴다고 미국이 가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소련은 너희들 그것을 반대해 놓고서 한국독립문제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이미 명시돼 있는데 그것은 나두고서 왜 자기네들 표가 많이 있는 유엔에 가져갔다고 반대를 했거든요. 소련이 반대한 이상 이북에서는 유엔감시하에 통일선거를 실시할 가망성은 없고 그렇게 되면 이남만 성공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영구분단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사실은 그때 김일성이도 북한에서 분단국가 준비를 하고 있었던 증거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5.10 단선이 실시되기 이전에 이미 헌법을 만들고 그랬거든요, 그때 물론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서 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이러다가 남북분단이 되지 않겠느냐 큰일난다 해서 거기 격분해서 반대하는 청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독당같은 우익 김구씨가 영도하던 한독당같은 우익도 이것 5.10 단선을 남한만 단독정부를 세운다면 영구분단이다. 민족끼리 피를 봐야만 결말이 난다. 그걸 반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반대한 사람은 전부 빨갱이입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테러를 해도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김두한씨가 좌익청년들을 드라마센타 있는 데에서 패 죽이고 시체를 마루 밑구멍에 나 두고 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그런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부 애국자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좌익청년들 말하자면 신탁통치에 찬성했던 혹은 그 후에 남한 단독정부에 반대했던 청년들은 믿을 데가 없었습니다. 길가에서 맞아 죽어도 하소연할 때도 사법권에도 보호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퇴학을 맞았습니다. 직장에서 실직 당했습니다. 전부 이 사람들이 러시를 이루고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가장 많이 들어간 곳이 4연대입니다. 그래서 4연대에서 48년도 10월에 변란이 일어나는 데 그해 5월에 4연대 일개대대를 갖다가 여수에 짤려 놓고서 14연대를 신월리에다 창설을 하게 됩니다. 3개 대대씩을 그때 미군은 이미 철수하려고 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철수하는데 급하니까 빨리 군대를 전부 후방부대를 만들어 놓고 철수하다보니까 빨리하다 보니까 소위 전부 자기네들이 말하는 반대세력만 전부 갖다가 똘똘 뭉쳐져 물을 준 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분도 계시는 분도 있겠지만, 징병이 아니라 당시는 모병입니다. 길가에다 책상을 설치하여 종이를 내놓고서 사병 둘이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헌혈하라는 식으로 모병을 했지요, 그런 식으로 종이를 이렇게 주면서 한 장 써달라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성분도 안가리고 사지 육신만 멀쩡하면 다 입대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에 쫓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좋은 은신처가 어디 있어요. 의식주 해결하지요 경찰한테 수배 안 받지요, 마구 입대했지요. 일부는 그 면장이나 경찰서에서 사환하던 막 집어넣기도 하구요.


이렇게 해서 4연대가 형성되고 되고서는 47년 12월에, 48년 5월에 4연대 1개 대대를 뽑아서 신월리 14연대에 편성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책에도 썼습니다만, 지금도 아마 그럴겁니다. 일제 때도 그랬습니다. 군대에서 몇 명을 어느 부대에서 착출을 하라고 그러면은 그 군대에서 제일 말썽꾸러기 사람만 쏘옥 뽑아서 보내버립니다. 골치 아프니까. 그때 당시에 연대장이나 지휘관의 입장에서 볼 때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뭐냐하면 반정부적인 사람들, 말썽 자주 부리는 사람들, 고분고분하지 않고 소위 그때 당시 개념으로 좌익들. 색깔이 이상한 사람들 이런 부류들이 아주 골치 아픈거 거든요, 14연대 중에서 평소에 찍어 놓았던 사람들은 전부 뽑아서 여기로 보내버렸습니다. 4연대는 다소 (색깔이) 옅었어도 여기 14연대는 시뻘건 덩어리가 왔습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끓어 모았어요 들어오는 사람마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머슴살던 사람,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 다 오기는 옵니다만 그 사람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국방경비대 독립당시입니다. 병정들의 4분의 1이 완전 기역 니은 한글도 못 깨우치는 문맹자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구 들어오는데 소위 의식이 없지요, 그것을 리드한 사람들은 하사관들 소위 중학교나 당시 중학교는 6년제입니다. 고등학교와 나중에 분리하지만, 거기 고학년으로 있다가 소위 좌익으로 몰려서 군대로 뛰어들어온 청년들 이런 청년들이 요즘 말하는 의식화지요, 애들을 리드하지요. 그러니까 전부가 좌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교적 하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전부 따라갑니다. 전부 끼어 있었으니까요. 이래 가지고는 언제든지 불만 지르면 터질 수 있는 이러한 상태가 되 버렸습니다.


14연대가 그런데 그때 당시에 숙군이 시작되었습니다. 숙군은 물론 병장까지는 안가고 간부들 뿐입니다마는 장교도 떨고 사병도 하사관들은 떨었습니다. 숙군이라는 것이 국군전체가 25,000명인데 오천명이 숙군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방법이라는 것이 누가 귀뜸만 하면 뭐 이렇게 하고 그러면은 끌려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총살당하고 그러니까 전전긍긍 이런 상태에서 자구책으로 탈출이라도 해야겠다. 이러한 얘기가 나고 있는데 4.3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시는 이 제주도 4.3사건은 지역적으로 봐서 일반 그 서울이나 그쪽지방 사람들과 이쪽 지방사람들과는 정서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47년까지 제주도는 전라남도였습니다. 자기 도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형식적으로 도가 떨어져 나갔지요. 그러나 제주도는 오랫동안 전라남도의 일부였습니다. 그리고 여수라는 데는 바로 목포나 여수같은 데는 가까우니까 사람 왕래도 많고 그러니까 정서적으로 제주도 도민에 대해서 뭐 동정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다 갖다가 제주도에 대한 것이 신문에 나지 않더라도 그런 참상이 자꾸 들어온단 말이예요. 저도 그때 서울에 있었지만 정말 분개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용을) 썼다가 사실 말썽이 날까봐 써서 나중에 교정볼 때 지웠습니다. 어린애를 갖다가 총창으로 찔러 죽이고 절단하고 이런 사건도 있고 그러니까 그 사병들이 그 소위 반란한, 사실 민중은 반란한 것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를 갈고 저항을 하고 특히 육지에서 제주도의 진압차 700여명이라는 경찰관을 갖다가 조병옥 군정부장 경무부장이 투입하는데 이것이 대개 서북청년단이라든가 청년단 계열라인을 군복만 전부 옷만 경찰관 옷을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이 가서 별짓 다 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섬사람들이 응크리고 있지요 배타적이지요, 그렇게 해서 민란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정보가 자꾸 들어오니까 사람들 귀에 신문에 나지 않더라도 울긋불긋서요, 그때 10월 15일날 제주도 출동 준비하라는 1개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여기에 쓴 대로 지창수하고 하사관들이 매일 밤 모여서 소주 마셔가면서 단체 행동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일이 그렇게 되니까 야, 우리 어떻게 되는게 아니냐 저가 책을 썼습니다만, 처음에는 선상 반란을 할려고 그랬답니다. 배가 출항을 한 이후에 장교를 전부 쏴 죽이고 선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리려고 했데요. 거의 뭐 그때에 남부군에 있을 때 얘기를 들어보니까 가다가 추격당하면 어떻게 할려고 그랬냐고 들어보니까 이리로 해서 황해도 지구에서 중국쪽으로 빠져 올라가는 그런 계획도 세우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직전에 탄로가 난 걸로 알고 정보 착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탄로가 난 것이 아닌데 탄로가 난 것으로 해서 선상에다 모두 모아놓고 탄약도 안주고 하나씩 잡아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 큰일났다. 발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발각이 나는 줄을 알아 가지고 졸지에 영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중으로 결정했다고 그래요. 그래 가지고는 결국 그날 일어난 참사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니까, 그후에 사건들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니까 그 반란군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냐 하는 것은 생략하겠습니다.


                                           - 이공원씨의 소장(所藏) 자료 제공(전 여수까치신문 기자



 
 
노이에자이트 2014-07-16 14:19   댓글달기 | URL
이태 씨나 차일혁 씨 책에도 이현상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입니다.문제는 빨치산 내에서 이현상과 노선투쟁으로 맞선 방준표의 경우인데, 이현상과는 반대로 나쁜 놈 대접을 받지요.오마이 뉴스 사장인 오연호 씨가 젊은 시절 쓴 글 중에 방준표를 다룬 게 있죠.

이현상이 이승엽 계열이고, 남로당 주류에 충실했다 할까요...여하튼 방준혁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저는 빨치산 투쟁의 3대 거물로 이현상 남도부 방준혁을 꼽습니다.여기에 방준혁 계열인 박영발을 넣기도 하고요.이현상 남도부의 지명도가 워낙 높습니다만...

낭만인생 2014-07-16 15:30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 부분은 워낙 금시초문이라 이제야 공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