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6회 

위험한 여자들의 누드 책 읽기



홀딱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여인이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조용히 앉아 책을 읽기가 불가능하다. 주변을 서성이는 아들이 다가와 "아빠, 이상한 책 보지 마세요!' 할 것 같다. 아빠의 체면이 구겨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몰래 불수도 없다. 의도하지 않게 책 읽기 자체가 불안하다. 중요한 부분을 가리기는 했지만 과하다 싶은 그림들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다. 책 제목에 끌려 샀지만 마음 편하게 읽을 수가 없다. 그녀들은 왜 이런 모습으로 책을 읽는 것일까? 저자인 슈테판 볼만은 어떤 의도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것일까




-데오도르 루셀(1847-1926)


결국 화장실로 숨어 들어갔다. 은밀하게 책을 일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화장실이다. 한 곳 더 있다. 그곳은 차 안이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실오라기 걸치지 않는 누드의 여성들의 책 읽기를 훔쳐 볼 수 있다. 책 읽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죄 짓는 기분이다. 부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는 책 읽기가 아닌 그림 읽기임을 보여 준다.

 

고작 17쪽 읽었다. 한쪽 페이지 전체를 그림으로 채웠다. 그곳엔 1760년경에 앙투안 보두앵이 그린 "책 읽는 여자"가 그려져 있다. 피상적 훑어보기에서는 찾지 못했던 묘한 장면이다. 여인은 가슴을 드러낸 채 왼쪽에 읽던 책을 내려놓았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다. 곧바로 외출해도 될 완벽한 준비를 마친 후작부인은 정신이 잃은 표정이다.

 

"코르셋 단추를 풀고 황홀한 상태로 안락의자에 누워 있는 여인의 치마 밑으로 루소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16)

 

루소가 말하는 한 손으로 책 읽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니 알 길은 없지만, 그림은 여전히 불안하게 한다. 나태함과 나른함, 적어도 황홀경에 빠져 길을 잃은 여인의 모습이다. 여인의 좌우에 책이 있다. 왼쪽은 <여행의 역사>라는 큼지막한 책이 펼쳐져 있고, 여인이 읽다 황홀경에 빠진 왼손에 들려진 책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다. 폐쇄(閉鎖)된 공간에서 갑자가 누군가 들어와도 바로 정색할 수 있는 옷차림은 속이기 위한 것이다. 왼손에 들려진 손바닥만 한 책은 은밀함을 말한다. 그녀는 분명 조용히 책을 읽었을 것이고, 아무도 자신의 공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짐작컨대 외설적인 책인 분명하다.


감각적 몽상에 압도된 음탕한 자세의 여인을 그림으로써 그는 점점 위선적으로 변모해가는 고객을 고려했다. ... 그녀 자신의 세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방탕함이 기꺼이 휩쓸려 갈 준비가 된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지닌 세계상이 중요하다.”(18)


이 그림은 의도된 것이다. 고객이 앙투안 보두앵에게 주문한 것이다. 고객이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음탕한 그림을 요구한 것일까? 18세기는 16세기에 발병된 인쇄술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거대한 크기의 책뿐 아니라 소책자도 만들어 냈다. 작은 크기는 휴대성의 편리함뿐 아니라 은밀함까지 보장해 주었다.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여자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은밀한 독서로 펼쳐 나갔다. 아직은 아니지만, 은밀한 독서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준 셈이다.

 


 



"독서는 유쾌한 고립 행위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의 바르게 자신을 접근하기 힘든 존재로 만든다."(47) 독서는 책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현실세계에서의 도피이자 단절이고, 고립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독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결국 침대라는 유일한 피난처로 숨어 들어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곳, 들어와서도 안 되는 곳이다. 침대는 세상의 짐과 의무를 벗어내는 공간이자 휴식처다. 그들은 정말 옷까지 홀랑 벗어 버렸다. 남성이 공개적 책 읽기에 집중했다면-남자는 과시적이므로-여성들은 내밀한 책 읽기에 빠져들었다. 그곳에서는 딸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고, 첩도 아니다. 자유인이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장 자크 에네르가 그린 '책 읽는 여자'. 막달라 마리아는 언제나 그림의 즐거운 주제였다. 그녀는 창녀였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이다. 장 자크 에네르는 막달라 마리아의 벌거벗은 모습과 흐릿하게 흐트러뜨린 기법은 몽환적 책 읽기를 연상케 한다.

 

 

데오도르 루셀(1847-1926)이 그린 '책 읽는 여자'는 창녀다. 의자에 걸쳐진 옷은 기모노다. 이 그림은 1887년 새로운 고향인 런던에서 전시했다. 2.5제곱미터의 어마어마한 크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네의 그림인 <올랭피아>와 연관 시켰다. 올랭피아는 잠시 후 방문 하게 될 손님을 기다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잠시 틈을 타 독서를 즐기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독서가 종종 식탐과 성적 타락과 결부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침대에서 은밀하게 독서하는 여자들은.

 


 



 

스티븐 로저 피셔는 <읽기의 역사>에서 토마스 칼라일의 부인인 제인 칼라인의 말을 빌려와 "남에게 빌려온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남몰래 간통하는 느낌"(381)이라고 말한다알베르토 망구엘도 침대에서의 책읽기는 곧바로 '은밀함'으로 끌고 간다.

 

"그런 책 읽기는 욕망과 죄스럽기까지 한 나태의 영역인 침대 시트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금지된 장난을 하는 듯한 스릴이 느껴지기도 한다……책을 침대로 가져간다는 일상적인 문구도 나에게는 언제나 관능적인 기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227)

 

여성들의 누드 책 읽기는 종속된 인간에서 자유로운 주체로의 엑소두스(Exodus)결국 염려한 일을 일어나고야 말았다여성들은 더 이상 침대에서 책을 읽고 싶지 않다이젠 독립적 존재로서 거리에서 커피숍에서 버스에서 학교에서 당당하게 책을 읽는다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은 옷에 걸쳐진 모든 짐을 벗어 버렸기 때문이다.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5회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벌써 몇 권을 읽은 것일까?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 종종 책을 몇 권 읽었는지 망각한다. 아니다. 세어보는 것을 잊는다. 세는 것도 귀찮다. 그냥 읽는다. 새벽에, 아침에, 오전에, 오후에,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책은 이별을 고하지 않는다. 그나마 일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는 방치현상이 일어난다.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가는 엄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아이는 떼를 쓰며 엄마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러나 더 나은 만남을 위해 대가는 지불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일하는 내내 아이가 생각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일과를 마치자 곧바로 아이를 찾으러 간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아이를 안는다. 뽈도 비비고, 냄새고 맡고, 머리도 쓰다듬는다. 아이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나에게 책이 그렇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 주고 싶다.

 

작년, 201364일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기 시작할 즈음 스티븐 그린브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주문했다. 근대를 탄생시킨 한 권의 책 이야기가 궁금해서. 표지가 요염하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La nascita di Venere>을 표지로 삼았다. 보티첼리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르네상스 운동의 핵심이다. 그려진 시기는 1446년으로 현재 피레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 설명을 덧붙이자면,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베누스 여신이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하여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베누스는 조개에서 태어나 미의 상징으로 육지에 올라온다. 1500년 전에 벌거벗은 여인이 오른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을 살포시 누르고, 오른쪽 가슴은 그대로 드러낸다. 금발이고 야윈 몸매이며 당시의 비현실적인 그림과 다르게 현실적이다.

 

책 사냥꾼에 매료되어 주문했는데, 표지는 전혀 딴판이다.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매치가 되지 않는다. 40여 쪽을 읽다가 재미가 없어 읽기를 중단했다. 싫어서가 아니다. 더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이 읽어달라고 아우성 친 탓이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잊히고 망각 되었다. 망각은 필연이지만 발견은 우연에 속한다.

 

어느 날, 정확하게 삼일 전 퇴근하고 서재를 둘러보다 연하늘색 책이 눈에 뛰었다. 십 개월이 지난 책인데 어제 읽다만 책처럼 다시 집어 들었다. 줄을 긋는 습관이 있어서 표시해 놓지 않아도 다음 읽을 쪽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사들은 독자이자 사서, 책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서방의 책 생산자가 되었다.”(41)

 

다시 찾아낸 책 사냥꾼 포조를 뒤따라갔다. 수도원에 침입하여 책을 필사하고 손에 넣기까지의 이야기다. 아니다. 포조가 죽은 뒷이야기도 후반부에 넣었다. 중세말의 책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줄 알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설 때쯤 그가 실존 인물이었고, 아직도 그가 찾아낸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인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 책으로 논픽션 부분의 퓰리처상을 받았고, 전미국도서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중세말의 카톨릭의 부패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잔혹한 풍자가 여기저기 발견된다. 가장 거룩한 체 하지만 가장 비종교적인 존재들 속에서 필사가로 교황의 비서로 살아가는 포조. 자신이 섬기는 교황들이 수차례 쓰러지고 사라지는 대격변의 상황 속에서 비굴하게 살아간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오직 책, 책뿐이었다.

 

교황과 그의 궁정인 전체가 로마에서 달아나야만 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포조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등바등 살았다. 치료법도 없는 세상살이의 고통과 끝없이 닥쳐오는 북음에의 위험에 맞서 있는 힘껏 싸웠다.... 포조를 구원해 준 것은 집착에 가까운 열망, 책에 대한 열정이었다.”(191)

 

아직 인쇄기가 발달되지 않는 시기에 필사가의 역할을 지대했다. 필사가는 곧 지식층이었고, 모국(母國)의 언어뿐 아니라 외국에 능통해야 했는데 특히 라틴어는 최고의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필사하기 위해서는 수주에서 몇 개월이 필요하다. 한 권의 책값이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수 백 만원에 이른다. 모든 것이 수공이기에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은 많은 노력과 고통이 뒤 따른다. 그런 책을 허접한 종이에 필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고 간직할 수 있는 양피지에 기록했다. 수 십 마리의 양이 죽어야 한 권이 책이 완성된다. 고급인력의 일당과 수 십 마리 양의 생명을 앗아가는 책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다.

 

오래된 수도원을 돌며 수백 년 전의 책을 찾아 탐험을 한다. 상상하면 신난다. 배고프고 강도의 위협과 생존의 위기를 겪는 일이지만. 그가 찾아낸 책은 에피쿠르스를 계승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이다. 신의 시대였던 중세에,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며, 원자라는 물질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과정만이 사실로 규정한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간도 창조의 목적도 아니라고 말한다. 파격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르네상스 운동과 근대적 과학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표지에 있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La nascita di Venere>가 바로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사제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사고의 축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에 일어나는 과학적 발견과 계몽주의 사상은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후세가 아닌 현세만이 진리임을 말한다.



논픽션이라 그런지 자질그레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책 이라면 환장하는 나야 좋지만,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기엔 그리 매력적인 흐름은 아니다. 르네상스와 근대의 기원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는 멋진 책이다. 

 

330페이지 정도의 많지 않는 분량이다. 그럼에도 고대 헬라와 로마, 중세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초전이었던 존 후스 등 새로운 사상에 젖어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은연중에 무신론이 근대의 정신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보여 준다.

 

며칠 전에 읽은 <책쾌 송신용>도 조포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환경에서 잊혀져가는 우리나라의 책들을 발굴하고 필사하여 널리 소통시킨다. 한 권 값이 결코 싸지 않았는데도 많은 이들이 책을 사고파는 삶을 이어간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책은 한 사람이 쓰지만, 시대를 담고 정신을 빚는다. 책을 매개(媒介)로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고,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고, 현재가 미래로 이어진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책이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다. 읽지 않고 소통은 불가능하다. 제발 책 좀 읽어라.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4회 

근대는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되었다

 


스티븐 브린블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교황청의 필사가로 있던 포조가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고 붕괴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한 권의 책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는 역사상 유명했던 책 사냥꾼(book-hunter)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lrerum natura)]을 찾아 세상에 퍼뜨린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저자인 루크레티는 고대 헬라철학의 한 분파였던 에피쿠르스학파의 의 후계자이다. 이 책은 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세계에 경험하게 된다는 종교적 공포는 인간생활의 적이며, 쾌락과 미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러 뒤엉켜 있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루크레티의 사상적 배경은 현세적 쾌락을 추구했던 에피쿠르스학파의 원자론이다. 원자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가장 작은 것이다. 원자들은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영속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여 일탈의 결과로서 물질이 생성 된다고 보았다. 근대에 들어서 원자론은 막스주의 사상적 기원이 되며, 행동주의 심리학이 뒤따른다. 주인공인 포조는 동반자인 니콜리에게 이 책을 필사하게 함으로써 중세 천 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이단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르네상스 운동을 발흥시키며, 종교개혁과 인문학적 정신을 배양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술에 스며들어 보티첼리와 다 빈치에게 영감을 주었고, 몽테뉴는 이 책에 심취하여 종종 읽었다고 전해진다. 갈릴레오, 프로이트, 다윈, 아인슈타인 등과 같은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저자인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의 권위자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기원전 4세기의 에피쿠르스와 기원전 1세기의 루크레티우스, 15세기 포조 브라촐리니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을 박학다식의 풍성한 역사적 배경과 다이나믹한 필체로 그려 낸다. 근대의 탄생을 위한 정신적 기원이 된 이 책은 신에게 종속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독립적인 자유를 소유한 존재로서 인간을 이야기 한다.


 

주인공인 포조가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의 필사가로 있을 당시 젊은 인문주의자였던 라포 다 카스틸리온키오가 [로마 교황청의 탁월함과 존엄성(De Curiae Commodis)]이 유행했다. 키케로 풍의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타자의 입을 통해 고발하는 형식이다. 라포는 상상 속 대담자인 안젤로를 통해 교황청의 도덕적 타락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교황청은 범죄의 소굴이며, 가족 잔혹행위, 사기, 속임수가 횡행하는 곳으로 치부한다. 상대 대담자로 라포 자신이 나와 교황청을 옹호하는 변론을 전개한다.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야한 농담이 책 전반에 흐르며, 교황에 대한 조롱과 타락상을 고발한다. 주인공인 포조의 눈으로 볼 때 교황청의 사무국의 모든 사제와 수도사들은 모두 전부 위선자였다.’ 중세적 경건으로 포장된 교황은 포조의 눈에는 그저 욕망의 육체일 뿐이었다. 결국 그로 하여금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lrerum natura)]을 찾아 떠나게 한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영향을 받은 보티첼리의 그림. 고대 신화적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으며, 

루크레티우스가 계절의 부활을 노래하던 것에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 - 두 아이를 MIT 장학생, 최연소 행정고시 합격생으로 키운 연우네 이야기
이채원 지음 / 다산에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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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란 포기하는 것이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25억이란 빚더미 아래에서 탁월한 자녀양육의 모범을 보인 저자에게 박수를!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3회 

예수는 누구인가?


내일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가 마지막 공생애를 마치고 남은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기 위해 종려잎을 꺽어 환영했다하면 종려 주일로 부른다. 예수에대한 논쟁이 뜨겁다. 알고보명 케케묵은 논쟁이지만 늘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예수가 역사의 화두요 모든 종교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예수는 구원자. 구세주. 하나님. 신앙의 대상이다. 따라야할 삶의 모범이기도 하다. 가장 보수적인 목사로서 고 옥한흠 목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 개신교회가 믿고 추구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역시 동일한 개신교 목사로서의 보수적 관점을 지행하는 조정민 목사의 <Why Jesus>도 함께 보면 좋다. 미국의 저명한 복음주의 목사인 스풀라울의 <예수는 누구인가?>와 존 오트버그의 <예수는 누구인가?> 도 전형적인 개신교 보수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예수는 신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구원자로서 예수는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철저하게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관점이다. 여기에 토를 달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 예수의 상이 바뀌고 있다. 여전히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후광이 사라진 것이 특징이다. 즉 멀리서 사람의 예배만을 받으시는 근엄한 예수가 아닌 인간의 친구이며 상담자이며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안의 예수다. 그레고리의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는 이미 많은 이들이 읽은 책이다. 예수와 함께 식사하면서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풀어 나간다. <예수님의 차려주신 밥상>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폴 영의 <오두막>은 내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그리고리의 책이 코믹하다면 영의 책은 진지하고 깊다. 자신의 딸이 죽어간 오두막에서 버림받은 딸에 대한 원한이 신에게 미친다. 결국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 멀리서 구경하는 신이 아닌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예수는 점더 나아간다. 행명적이며 정치적 예수가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십자가는 원래 정치범 처단 방법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로마를 거역한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빌라도는 풀어 주고 싶었지만 황제에게 반역한 예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젤롯은 초대교회 당시 혁명적 사상을 추구했던 유대인 분파이며 '젤롯당'으로 불렸다. 예수의 제자였던 요한이 그 당인 것으로 추측된다. 김규향의 <예수전>은 인간 예수로서의 면이 크게 부각된다. <예수 이야기>는 어떤가? 조반니 파파니 역시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규정한다. 정치적 예수는 예수의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상이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포기하고 도망가 버렸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다행이다. 더큰 문제는 다음의 책들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경이로운 판매부수를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떠나는 고전적 판타지다. 그러나 예수에대한 이야기로 둔갑하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예수가 결혼했고, 자녀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얼마 전 예수의 아내가 있었다는 콥트어 문서가 발견되면서 다시 예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들로 신은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믿으며,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이라고 깍아 내리든지, 육체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십여년 전에 발견된 <유다복음>은 더 가관이다.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공으로 돌린다. 즉 자신이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속죄제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유다복음은 구원의 축을 예수에게서 자신-유다에게로 돌려 놓는다. 
















김기현 목사는 <가룟 유다 딜레마>를 통해 유다복음의 실체를 밝힌다음, 우리 안에도 유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발터 옌스의 <유다의 재판>은 유다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전개 된다. 재판의 형식을 빌어 논증한다. 결국 예수의 공은 유다에게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학적으로 우승꽝 스러운 주장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장이다. 특히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다와 협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유다에게 '네가 나를 팔아야 내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구원이 수단이다'는 식이다. 일리가 있는 말인듯 하지만, 보수적 개신교 안에서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결국 유다는 우리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신이 되려는 욕망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꺼지지 않는 유다와 예수 논쟁은 예수에 대한 부정이 아닐 것이다.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반감이며, 진정한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회초리다. 교회는 새겨 들어야 한다. 예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