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에 대한 책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다. 간략한 소개서부터 사전식의 책, 연구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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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 - 도발적인 이슬람 선교 읽기
김동문 지음 / 대장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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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는 삼의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는 관계의 방정식을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그 말은 맞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닌 적이 훨씬 많다. 삼의 차이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삼의 차이를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표현도 쓴다. 30cm도 되지 않는 짦은 거리지만 그곳이 절대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해와 오해는 단지 3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 차이는 불가능한 숫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동 선교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 3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20년 전에 선교학을 공부했다. 그 당시 한창 인기를 얻었던 선교 주제는 텐트 메이커, 또는 자비량 선교였다. 그러나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자비량은 가난한또는 불가능이 되었고, 텐트 메이커는 비즈니스라는 단어로 탈바꿈했다.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선교인데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시간차를 두고 변하기를 거듭한다. 백 년 전, 우리나라 초창기 미국과 호주 선교사님의 선교 방법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현저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 년 전에 배운 선교의 방법은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의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에서는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 통했던 선교 방식이 동남아 선교에는 거의 먹혀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20년 전 선교사가 아직도 선교사이고, 20년 전 교인이던 현지인들이 아직도 교인으로 남아 있다. 즉 자립이 거의 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론으로만 공부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는 선교의 종말 시대에 도래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독교적 소명을 희석시킬 수 있는 오해의 언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럼, 진정 선교는 무엇일까? 여기 한 권의 책을 통해 선교에 대한 생각들을 재정립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동문, 선교학과 출신이지만 선교학에 문외한에 나에게 이 이름은 선교학과 관련되어 알게 된 이름이 아니다. 수년 전 로고스서원 북토크에서 <오감으로 성경 읽기>(포이에마) 저자 특강이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다. 목회자로, 설교자로 부름받았다는 생각에 성경해석에 관련된 세미나는 가능한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에 그날도 참석했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물건들과 기구들을 보여 주었다. 등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추야자를 왜 꿀이라고 부르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날 생소했던 기억은 PPT나 강의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리화된 성경 해석에 함몰되어 손과 눈, 코와 입으로 맛보고 느끼는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어 시간 넘게 진행된 특강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구절은 삶의 맥락이었다. 성경을 삶의 맥락이나 상황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풍성한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정말 그랬다. 사도요한도 살아있는 말씀이며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고백한다. 사도적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말하고, 듣고, 식사하고, 동행하고, 보아야 한다. 권위는 이론이 아닌 실제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을 깊이 아는 것은 성경 속 삶으로 들어갈 때 가장 정확하다. 선교는 어떨까? 서구적 전통에 따른 강압적인 문화 이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삶 속을 들어가야 한다. 내부자의 관점이 아니라면 이해는 불가능하다. 한국교회가 이슬람에 대한 지독한 오해를 갖고 있는 이유는 외부자의 관점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는 강제한다고 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하고, 삶의 맥락 속에서 평등하게 바라볼 때 시작된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를 제목으로 정했다. 책의 목차를 살피고, 몇 곳을 골라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독하며 읽어 나갔다. 마지막, 저자 후기를 읽었을 때 소스라치게 돌랐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공명(共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슬람 세계의 내면을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282)


여기서 사람은 학문적 해석이나 정의가 아니다. 저자는 다시 이어간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우리와 같은 성정의 또 다른 우리의 이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최근에 들어오는 이슬람에 대한 소식들은 한결같이 IS와 연관되어 있거나, 개신교 기독교를 화형 시키고 고문하고 잔혹하게 살인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사실 확인을 해보면 열의 아홉은 거짓이며,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 타당성 없는 추론이나 과장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이슬람 혐오(嫌惡)를 나타내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잘못이다. 이러한 왜곡된 퍼나르기식의 거짓 뉴스들은 이슬람 선교 현장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독한 싸움을 하는 선교사들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교학의 관계 맺음은 가 아닌 . 이 책은 외부자의 시각으로 선교를 보지 않고 내부자의 시각으로 중동 선교를 고민한 선교 읽기다. 한국인으로서 내부자의 시선을 갖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의 삶의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교학 책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이 책의 중요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자.


전체는 6장으로 구분했다. 크게 1.2장은 선교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서론 부분에 해당되고, 3-6장은 본론이자 결론이다. 이곳에서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이해를 촉구한다. 특히 1장과 4장은 이슬람에 선교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중요한 장이니 꼭 읽어야 한다. 5장과 6장은 본론이면서 결론에 가깝다. 5장에서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6장은 이슬람 선교에 대한 오해와 재고(再考)이다.


1선교, 선교하는 삶 다시 읽기는 책의 서론에 해당된다. 기존에 선교라는 단어, 호칭들이 갖는 의미와 오해, 왜곡들을 살피고, 선교사가 누구인지 살핀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슬람포비아!’라는 생소한 단어를 언급한다. 이 단어는 레드 콤플렉스처럼, 이슬람 혐오를 나타내는 단어다. 이슬람 혐오는 이슬람 공포에 기인한다. 이슬람 공포는 한국 보수교단의 이슬람에 대학 억측과 왜곡의 결과이다. 저자는 여기서 이슬람을 규정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이슬람을 보기 원한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단어는 인격적 복음’(17)이다. 그렇다. 선교는 인격적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국내 교회가 성장에 함몰되어 진정한 전도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칫 선교도 선교비를 지원하는 교회가 요구하는 성장으로 인해 거짓된 성장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선교의 진정성을 잃어 버리기 일쑤다. 저자는 과감하게 선교사는 자신이 섬기는 선교지 주민들을 보도록 돕는 도우미’(34)라고 소개한다. 또한 교회는 겸손해 져야 하고, 선교사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에 당당해지라고 충고한다. 이곳에서 왜곡된 선교에 대한 쏠림 현상을 바로잡아 준다. 필자의 마음을 울린 곳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겉모습의 동화 그것을 넘어서는 삶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현지인의 신발을 신고 현지인의 안경으로 그들이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 것 같다. 현지인의 신발과 현지인의 안경이 뜻하는 것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위장된 동화를 뜻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43)


위장과 진실의 차이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은 성장의 도구로 볼 뿐이다. 사랑은 그들을 존재로 인정한다.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성정을 지닌 한 인격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44)이다. 2한국교회 선교 다시 읽기는 한국교회 안에 내재된 선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수정해 준다. 특히 3무 선교(무자. 무모. 무례)가 선교의 위기를 부른다는 말은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한다. 3무 선교는 한국식 믿음에 근거한다. 덮어 놓고 믿어야 한다는 신앙관과 맥을 같이 한다 불도저식 선교는 오랫동안 현지를 지켜온 선교사들에게 치명적 위협이 되고, 혼란과 분란을 일으킨다. 심지어 현지인들이 예수 안 믿는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비웃는 행동은 진정 선교가 무엇인지 단 한 번고 고민하지 않는 어리석고 무례한 태도이다. 저자는 무지 대신 지식과 지혜를, 무모 대신 지혜를, 무례 대신 여유와 겸손을 갖자고 말한다.(68)


3장과 4장에서는 이슬람에 수많은 오해를 언급한다. ‘이슬람이 유대교보다 기독교 이해에 더 가깝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인 저자의 증명들은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천지 창조나 삼위일체 등은 유대교와 이슬람이 동일하다. 그러나 메시아는 이슬람에게만 있다. 유대교는 예수가 없다. 이슬람은 예수는 선지자다. 유대교는 개신교를 부정한다. 이슬람은 동일하게 계시의 종교로 받아들인다. 같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독교와 이슬람은 많이 닮아 있다. 유대교에 비해서. 저자는 바른 선교를 하고 싶다면 그들을 이해하라고 한다. ‘한글판 꾸란 해설서라도 읽어’(117) 보라고 충고한다. 필자는 선교사는 아니지만 그동안 이슬람에 대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중동 선교사로 자원하는 사람들이라면 꾸란은 읽고 가야 하지 않을까? 문득 칼빈의 후예임을 자랑하면서도 단 한 번도 <기독교강요>를 읽지 않은 어느 목사의 자화상이 그려진다.


나가면서

말미에 성경을 읽을수록 중동이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표현이 가슴을 놀래 킨다. 저자의 바람대로 성경은 중동의 이야기다. 중동 이해 없이 바른 성경 읽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읽기 위해서라도 중동으로 가야 한다. 성경 읽기는 곧 중동 읽기다. 선교는 중동 읽기다. 삶의 맥락이 축출된 강압적 선교는 재고(再考) 되어야 한다.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 유학생들은 사람이다. 그들도 진리를 알고 싶고, 기독교도 궁금해한다. 그들도 배고프고, 울고, 사랑하고, 감동한다. 그들도 사랑받아야 하고,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짓된 뉴스에 속아 중동 사람들을 악마화하고, 터부시한다면 중동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중동을 품었다. 중동은 이미 한국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 책은 선교학 책이라고 보기엔 너무 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중동 관련 선교학 책보다 강열하고 뜨겁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중동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중동인, 그들도 사람이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문득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린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중동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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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해야 할 사명, 전도
최종상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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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는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이유도 전도 때문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이며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전도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시대의 탓일까요? 아니면 저만의 자만일까요? 문득 드는 생각은 그동안 전도가 교회의 성장을 위해 수단화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전도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교회 성장이 욕망과 맞물리면서 전도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직도 교회는 전도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보다 교회를 성장 시키기 위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야 말로 진정한 전도(傳道)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1979년부터 로고스, 돌로스 선교선을 타고 세계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최종상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런던 신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고, 튀빙겐 대학과 더럼대학에서도 틈틈이 공부한 진리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현재 유럽의 재복음화를 위해 영국에 있는 남노스 유럽 선교회를 설립하고 교회 개척학교 학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선교 현장에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교회 개척을 가르치고 선교하는 저자에게 전도는 무엇일까요?


전체를 3부로 나누었습니다. 1부는 복음과 전도라는 제목으로 3장을 할애하여 전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2부에서는 전도의 실제라는 제목으로 4장을 할애하여 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사례와 현장에서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를 다룹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지도자와 전도라는 제목으로 목회자는 전도하는 사람이며, 전도 중심적인 선교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는 길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24:24)를 전했습니다. 바울 자체가 모두 도를 전하는 삶이었습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길이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도는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자랑하며 선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며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기대다. 전하는 것,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목적이다. 모든 성도는 택하심 받은 족속과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정해야 한다.”(53)


그리스도인의 존재 목적이 전도이며, 전도가 삶의 이유인 것입니다. 2장에서 저자는 전도가 교회 성장이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67)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교회 성장을 위해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고, 굳이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또한 전도는 교회로 인도해 오는 것만이 아니’(68),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혼자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전도는 영혼 추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70)고 말합니다. 전도는 씨를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습니다.


2부로 넘어가면서 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 줍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바울의 전도 중요한 몇 가지를 언급합니다. 자신에게 가까운 곳부터 전도해야 하고, 더 나아가 멀리 있는 곳까지 나가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배를 타고 전도하던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줍니다. 전혀 뜻밖의 사람,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복음을 전했을 때 의외로 영접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돌로스 단장을 했을 때보다 로고스 기름찌기를 퍼 나르던 때 더 많은 전도했다고 회상하면서 시간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일단 전하라고 귀띔합니다. 6장 보여지는 전도에서는 찔리는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삶은 따르지 않으면서 복음만 전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오늘날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228)고 말합니다. 복음이 삶으로 드러날 때 가장 강력한 전도가 되는 것이죠.


불신자를 예수께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자석은 성도들의 사랑이다. ... 우리에게 불신자들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려는 의향이 있다면, 서로 사랑으로 보듬고 더욱 조심하여야 하리라.”(229)


3부에서 존 드레셔의 고기 잡는 이야기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다양한 이론과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진작 중요한 고기 잡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부는 아닌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삶은 이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는 전도하지 않고 전도하는 방법만 가르쳐 준다지만 실제로 전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전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경험과 삶 속에서 얻어낸 전도 방법들과 성경에서 찾아낸 전도 이론들은 배울 점이 많습니다. 전도는 성장의 도구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기뻐하십니다. 전도는 정보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삶이 있어야 하고, 노하우도 필요합니다. 전인격적인 삶이야말로 전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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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인물에게서 듣다 : 구약 성서 인물에게서 듣다 1
이상명 지음 / 홍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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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좋고 내용도 좋은데, 깊이는 별로 였던 책. 그러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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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일상
김병년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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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묵상이 무엇일가요? 히브리인들은 묵상을 중얼거림으로 이해했습니다. 중거림으로 반복해서 고백하고 다시 되새기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깊이 알고 암기할 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오래전 성경 묵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누군가로부터 '아직도 묵상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제 묵상은 철지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진짜 묵사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봅니다.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21장의 작은 이야기들로 묶여 있습니다. 1부에서는 나의 여정이란 제목으로 묵상과 일상의 이야기를 묶습니다. 2부는 한 구절하나의 묵상이란 제목으로 한 단어한 구절한 인물 묵상 법을 소개합니다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특히 하게 다가왔습니다. 3부에서는 묵상과 일상이란 제목을 달았지만 일상보다는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오가는 성경적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4부는 묵상과 기도인데 기도와 관련된 묵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마지막 5부에서는 묵상과 자녀교육이란 제목으로 가족과 성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한 마디로 이 책은 단순한 묵상 법을 소개하기보다는 묵상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빈곤은 내 삶에 오래도록 결핍감을 안겨 주었다우리 아버지는 당신 술을 사 드셔도 아들 책은 사 주신 적이 없다집에 책이라곤 단 한 권도 없었다.”(21)


저자는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위의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순간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릴 만큼 마음이 저려 옵니다저도 어릴 적집에 책이 없었습니다아버님이 술 고래는 아니었지만 공부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책 없이 보낸 유년 시절의 추억은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에서 만났다.”(23)는 저자의 표현은 낯설면서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성경과 얽히고 설킨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문득그리스도인은 성경과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한 단어한 구절로 묵상하기가 궁금해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동일한 단어를 다른 문맥에서다른 성경에서 읽을 때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먼저 아브라함을 묵상하다 경외라는 단어에 붙들립니다경외라는 단어가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죠경외는 직역하면 두려움이란 뜻이지만 성경은 두려움을 감정적인 차원이 아닌 삶의 우선순위로 확장시킵니다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경외한다고 칭찬받았습니다저자는 경외를 사람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인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경외감은 내가 느끼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하나님이 내 삶을 보고 판단하시는 감정이다하나님이 내 삶을 보고 베푸시는 인정이다.”(48)


결국 경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법정적 의미를 갖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성도는 묵상하는 자로 태어났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묵상은 얻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에도 동의합니다고넬료의 삶을 통해 경건한 경외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말을 형성한다.”(53저자의 말은 묵상과 삶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우리는 종종 묵상만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제가 보기에 그것은 오해합니다묵상은 근원적으로 을 말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인들에게 말이 곧 존재이며존재는 곧 행위였습니다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말씀하시면 성취되는 것을 압니다묵상은 삶을 변혁 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묵상에서 일어나는 경외감은 우리를 순종으로 이끌고수고로 이끌고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한다경외가 자라 가는 인생은 묵상에서 성공하는 인생이다.”(54)


이렇게 보니 경외라는 한 단어를 통해 성경 전체를 통찰하고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움을 줍니다성경이란 역사와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며 존재를 규명합니다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경외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9장 묵상과 축구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타인 줄 알았습니다.축구가 아니라 추구로 읽었습니다그런데 진짜 축구였습니다.(82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요?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의 저자인 폴 마샬은 놀이는 그 자체를 위한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82)고 말합니다취미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이 영역으로 들어온다.’(83)는 저자의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그렇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해야 합니다그것이 예배이든취미이든직장이든 말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88)에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것묵상이 주는 맛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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