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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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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미국)를 뒤 흔들었던 위대한 부흥사 조지 위필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져 없어지고 싶다.

 

이곳에 열정이 있고, 열정은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긍휼에서 나온다. 긍휼은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져 없어지길 바란다. 기독교 상담학의 전문가인 하재성 목사의 새 책이 나왔다. '긍휼, 예수님의 심장'이란 멋진 제목으로 말이다. 쌍수들고 환영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필자에게 하재성 목사는 초면이다. 오래전부터 예수의 공생애와 삶을 읽으면서 긍휼이란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자의적인 갈망이었고, 내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가늠쇠로 보았다. 성경공부를 하고,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 갈수록 알 수없는 갈증은 더해갔다.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것은 관계에 대한 열망이다. 오랫동안 함께해도 교인들은 타인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영아시절, 엄마는 늘 내가 혼자였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낳고나서 어머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서 나를 안아주지 못했다. 그 후로도 나를 잘 안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고마워하신다. 혼자서도 잘 커줬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나는 늘 외로웠다. 유년시절의 특이한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가족들이 외계인이든지. 지독하게 외로웠고, 친구들과 비교의식에 휩싸여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공부는 상위권이었지만 열등감을 치유해 주지는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폭력과 술에 빠져 살았다. 악몽의 이유는 나는 버려진 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의 외로움을 모른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긍휼에서 시작된다. 긍휼이 없는 기적은 사탄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적을 행한 적이 없으셨다.”

그 모든 기적의 이야기 핵심은 ... 굶주려 기력이 쇠해가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솟구치는 사랑이다. 그분의 심장이 박동할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밀어내며 읽어간다.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기적의 동인(動因) ‘긍휼(矜恤)’을 발견한다. 성인이 되고나서 나를 혼자 두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지 않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무척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나는 마을의 자랑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엄친아였다. 공부, 외모, 성격,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자랑이 버거웠고, 한편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를 혼자 있도록 버려둔 야속한 엄마가 미웠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끔찍이 아꼈다. 안타깝게 그것을 몸으로 표현할 힘이 없었다. 나는 성인 되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고,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나를 향한 엄마의 긍휼도 안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페이지와 단락에 감추어진 문장이 빛을 발한다. 울컥한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의 그 모든 기적의 목적은 하나, 곧 긍휼이었다.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가 모든 기적의 목적이었다. 긍휼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36)

 

거친 호흡을 내쉬며 나 혼자 노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머니를 상상해 보았다. 안아주고 싶고, 볼에 키스해 주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큰 애가 태어나 혼자 노는 모습을 보면 나는 애가 탄다. 달려가서 와락 안아준다. 아이는 싫다고 바동거린다. 손에 있던 장난감을 놓기 싫은 것이다.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나를 힘껏 안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럴 힘이 없었다. 약한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엄마를 오해했다.

 

사마리아 여성을 찾아간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사회적 의미를 상실’(44)했고,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녀는 외진 시간에 우물을 찾는다. 우물에는 물도 있지만 여인들의 수다도 있다. 남편, 시어미니 말도 하고, 자식 자랑도 한다. 얼마 전 구입한 자동차 이야기도 할 것이다. 소통과 공유의 공간이다. 필요를 넘어 은근한 경쟁과 암묵적 투쟁도 있다. 여인은 그곳에 갈 수 없고,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배제 당했고, 고립되었다. 나처럼 그녀도 늘 혼자였다. 서글프게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려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 곳에서 다시 심장의 박동수를 높이는 문장을 발견한다.


그녀는 마치 부상당한 야생 기러기와 같았다. 자신을 치료해주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덫에 걸리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이리저리 퍼덕이고 있다.”(45)

 

순간, 저자인 하재성 목사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어릴 적 깊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저자 스스로 공개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으나 몇 곳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10장은 생명우선이란 제목으로 마가복음 3:1-6까지 다룬다. 그곳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장면이다. 3:5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분노하시고’ ‘슬퍼하셨다는 표현. 감정이다.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는 인간들의 완악함에 분노하심과 동시에 슬퍼 하셨다. 저자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언제나 감정이 실려있다고 말한다. 유교문화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무시한다. 어쨌든 분노는 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행동한다. 불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복음서는 이차적 문자로만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곳에 감정의 기복과 굴곡이 엄연히 존재한다. 예수의 분노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휼을 막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의 가식 때문이었다.

 

이처럼 완고한 그들의 마음을 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고통스럽게 요동하였다. 한 영혼이 회복되는 과정을 털끝만큼의 긍휼도 없이 감시하고 있는 그들 때문에 주님의 분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무감감한 탈속의 성인이 아니셨다. 주님의 가슴에서 뜨거운 분노의 불이 일어났다.”(175)

 

그 분노는 예수 자신을 닳아 없애는 것이다.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예수는 어리석었다. 그는 분노하지 말았어야 했다. 분노는 스스로를 죽임으로 타인을 더 구할 수 있는 여지를 꺾어 버렸다. 예수의 분노는 정의를 만’(180)든다는 저자의 말에 백배 공감한다. 바로 그 정의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은 본능적으로 빛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죄의 오물을 들추어내는 진리의 예수를 미워했다. 그럼에도 분노함으로 그들의 악이 얼마나 끔찍하고 악랄한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를 향해 점점 더 나아갔다. 그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는 선택했다.

 

그러나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 때,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자신이 몸이 부서지기까지 아이를 가슴에 품은 엄마의 마음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의 분노로 연약한 영혼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자신은 십자가 앞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다. 연약한 영혼을 지켜주시고,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그 진노의 처소로 담대히 나아가셨다.”(180)



 
 
 

긍휼의 뜻은 타인의 아픔을 괴로워하여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처음은 공감하고, 그 다음은 긍휼히 여기고, 그 다음은 행동한다. 

기독의 정신은 긍휼이고, 예수의 모든 기적의 이유와 방향, 목적은 긍휼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돈과 명예에 찌들리고, 성적 타락에 빠진 한국교회 목사들은 새겨 들어야 한다. 

그대들에게 긍휼은 있는가?



























 
 
 

Martyn Lloyd-Jones의 신간이 나왔다. 복있는사람에서 중요한 설교를 묶에 영광, 능력, 위로, 회개란 주제로 묶어 냈다. 그리 두껍지 않는 분량으로 묶었다. 그동안 로이드 존스의 책을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몇몇의 설교들은 그동안 책으로 출간된 이력이 있는 것들이라 아주 새롭지는 않다.




복있는사람에서 이사야 40장 설교집을 펴낸 것이다. 다른 어떤 책이 있는가 살펴보니 몇 권의 책이 더 보인다. <로이드존스의 영광>은 로이드존스가 사역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행한 이사야 40장 설교 9편을 묶은 것이다. 


두 번째 책인 <마틴 로이드 존스 능력>은 로마서 1장을 본문으로 영국 에든버러의 자유 교회 대학(1941년)에서 전한 다섯 편의 강의를 묶은 것이다.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설교로서 가장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인간의 빈약한 영적 현실과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대조하며 복음으로 돌아가야 할 절실한 필요를 직면하게 한다.


세 번째 책인 <로이드존스 위로>는 요한복음 14장을 본문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1951년)에서 전한 여덟 편의 설교로, 삶의 두려움과 불안의 실체를 조명하고,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는 유일한 해결책인 복음의 진리를 강력히 선포한다. 이 책에서 로이드 존스는 요한복음 14장을 주의 깊게 살펴 나가면서, 삶의 본질적인 두려움과 시대가 주는 불안의 실체를 조명하고, 참된 평안을 주는 유일한 해결책은 불변하는 복음의 진리임을 제시한다.


마지막 시리즈인 <로이드존스 회개>시편 51편을 본문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1949년)에서 4주간 전한 설교. 참된 기독교적 체험의 진수라 할 수 있는 회개의 본질을 명확하게 깨달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유투브에 들어가면 로이드존스의 육성 설교 동영상을 들을 수 있다. 아래는 'The Everlasting Gospe'이란 제목으로 행한 설교의 동영상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nmvsZWgclf0





 
 
 

한국교회, 가나안 성도에게 묻다!


가나안성도? 웬 뜬금 없는 말인가? 하수상하여 뜻을 물으니 거꾸로 읽으란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성도가 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하나는 '교회를 안가도 성도인가?'라는 질문과, 안나가는 성도를 통해 교회 밖 성도라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다. 그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맞는 시대적 요청이자 변화라고만 치부하게에 왠지 불안하고 어색하다. 교회 밖에도 성도, 즉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 안의 성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직설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굳이 교회를 다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의존적 신앙을 가진 교회 안 성도들에게 치명적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과장하면, 헌금, 봉사, 예배 참석 등을 하지 않아도 구원 얻을 수 있으며,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탓에 교회가 곧 국가였던 중세나 봉건사회는 안나가 성도의 출현은 불가능했고,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더 이상 가나안 성도를 배타적 시각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의 시대에,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 탈근대라는 사회적 현상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제 문제를 조금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한국이라는 나라에만 일어나는 유일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  3세기 교부였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곧 구원이라는 획일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고,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정하는 교회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 밖은 곧 성경 밖이고, 이단들을 의미했다. 3세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논쟁으로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분열되고 시끄러웠다. 이단에 대한 과감하고도 단호한 주장을 감행한 키프리아누스는 결국 다른 주교들로부터 파문의 위협을 받았고, 너무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키프리아누스의 과격함은 당시 일어났던 핍박으로 인한 배교의 문제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가나안성도와는 사뭇 다른 예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앞으로 일어날 교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적 선언이었다.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로마의 멸망은 곧 교회의 기회였다. 로마의 멸망으로 치안과 문화적 공백이 일어나자 교회는 그 공백을 메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회는 교회가 권력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쌓게 된다. 중세는 국가 위의 교회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대통령 선언시에 성경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은 중세적 영향이다. 국가는 나라 아래 있고, 교회가 국가의 수장을 결정하는 권력을 쥐게 된다. 카놋사의 굴욕은 국가의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첨예화된 다툼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나가려했고, 결국 영국의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해 국가 위에 군림하던 교회는 국가 안에, 또는 국가 아래 내려앉는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탈교회화의 현상 중 하나였고 시민정신의 도래, 근대적 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지도 구분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 당시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바로 재세례파다. 철저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한 재세례파는 부모의 권위를 거부하여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국가의 교회 통치를 또한 거절한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이들은 결국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핍박을 받아야 했고,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와 칼빈을 추종하던 재세례파는 개혁자들과 등을 지게 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지 못한 개혁가들로 인해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기회의 땅이 주어진다. 바로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아메리카로의 이주이다. 미국의 독립은 곧 교회의 독립이며, 관용과 자유의 땅으로서의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교회는 시대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카톨릭에서 교단 중심의 교회인 장로교단이 부흥하게 되고, 현재는 장로교단은 축소되고, 더욱 개교화된 회중교회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오순절교회의 출현과 회중교회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백을 메꾸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조직을 갖추게 된다. 결국 교회는 더욱 탈권위적 현상으로 인해 개교회화, 개인화가 일어난다. 조지 마스던은 그의 책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칼빈주의는, 미국 건국 운동의 기원을 이룬 17세기의 청교도에서, 그리고 대각성 운동 이후 회중주의로부터 분리한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침례교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침례교는 교회를, 회심을 체험한 개개인들의 자발적 협의체로 보는, 개인주의적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중앙 집권화에 대한 반대와, 칼빈주의적 신조주의는 제한을 받는다."(조지 마스던, p235)

 

 

거두절미하고,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적 시대의 산물이며, 교회는 이제 그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중세적-봉건적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권위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이 키프리아누스나 되는 것처럼 교회 밖 성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며, 저주하기까지 한다. 이런 극렬한 반응은 무례한 기독교로의 귀결로 이어진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기독교는 가나안 성도는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를 묻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만을 트집 잡아 무례하게 정죄한다


2012년 김진호는 그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그는 1부에서 한국 교신교회의 과거를 추억하며 '시민 K, 교회에 나가다'를 탐색한다. 2부에서는 한국 개신교회의 오늘을 살피면서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풀어 간다. 그는 1부에서 '반공주의'와 한국교회의 은밀한 결탁을 추적한다. 현재 한국의 원로? 들은 대부분 월남자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과 적의가 있다.

 

"월남자 기독교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이북신도대표회'의 중심에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한국 선교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미국 북장로회가 한 목사의 든든한 후견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미국 정계의 보수, 반공주의적 인사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p72)

 

70-80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한 한국교회는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물질주의에 빠지고, 한경직 목사를 위주로 한 권력에의 결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뉴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교회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우민화 정책을 추구한 한국교회는 깨어나는 시민정식을 억압한다. 탈권위적 시대에 권위적 목회를 지향한 한국교회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침몰하기 시작한다. 장년성도에 비해 주일학교 학생수가 200%이상이었던 80년대에 비해, 현재는 고작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인 고령화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주일학교 학생이던 이들이 교회의 중직이 되고, 실제적인 일들을 처리하면서 당시의 추억을 되살려 주일학교를 되살리려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을 무지 속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불안해한다. 목회자들은 신처럼 떠받들던 이전의 교회는 탈권위적 사상을 현대 시민들에게는 우격다짐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90년대 이후 드러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성적 타락과 금권주의, 성장주의 등은 교인들에게 더 큰 실망과 아픔을 주었고, 결국 교회 안에 구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하고, 도리어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강제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점점 이웃 없는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 ... 시민 K는 이처럼 신이 된 자본, 자본이 된 신의 사회를 지향하는 교회를 떠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p175)

 

가나안 성도의 출몰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교회는 배타적 강제로 가나안 성도를 부정하기를 중지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가나안 성도에게 물어야 한다. 진지하게,

"당신은 왜 교회에 '안나가'십니까?"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분명 교회의 위기다. 그러나 토인비의 주장처럼 '도전'에 바르게 '응전'하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다. 이제 그들은 인정하고, 어깨동무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오감으로 성경 읽기
김동문 글.사진 / 포이에마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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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비린내가 납니다.


예수는 부활을 경험하신 자신을 보고도 비린내 나는 고기 잡으러 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만나러 갈릴리 새벽녁에 제자들을 찾아 간다. 밤이 맞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한다. 여명이 밝아오는 수간에도 제자들은 허탈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해야했다. 그 때 누군가 다가와 소리친다. 

"고기가 있소?"

"아뇨. 없습니다."

"그럼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보시오!"

"그럴까요?"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21:6)


예수는 떡과 고기를 준비해 놓고 제자들을 불렀다. 아침을 같이 먹자고. 비린내 풀풀 나는 이른 아침은 예수와 제자들은 함께 갈릴리 호수가에 앉았다. 


성경에서 비린내가 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왜 물고기에서 나오는 비린내를 맡지 못했을까? 텍스트에 천착하라는 주해가들의 이야기는 귀전에 흘리고 정제된 성경 만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똥 냄새도 맡지 못했고, 우슬초의 신맛을 맛 보지 못했다. 에서가 입고 털 옷의 촉감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고도 우리는 성경을 읽었다고 자부했다. 밋밋하고 재미 없는 성경 읽기를 때문에 성경의 맛을 잃어 버렸다. 유대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에 꿀을 발라 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우린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생생한 성경 읽기를 회복 하도록 돕는다. 삶의 정황 속에서 말씀으로 살아가셨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성경을 삶으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개념화되고 교리에 종속된 성경 읽기가 아닌 민낯의 성경을 체험해야 한다. 


김동문선교사는 한국외대에서 아랍어를 전공했고, 총신 신학대학원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을 배웠다. 이후 이집트와 요르단 등 아랍과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이 아는 중동과 중동 현장에서 보고 체험한 중동이 너무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생활을 성경 읽기와 접목한다. 성경은 단순히 문자로만 읽어서는 안 된고 삶의 정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 그 곳에서 일어났던 사람들의 소리, 냄새, 촉감 등을 상상하며 읽어야 제대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음식 냄새 못지 않게 중요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는 기름, 즉 '향유'입니다. 그 시절 향수는 아주 귀했는데, 이는 천연 식물성 재료를 이용하여 향유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켤 때 사용하던 연료로서의 기름 냄새도 일상에서 맡을 수 있는 대표적인 냄새이지요. .. 질이 좋지 않는 기름을 사용하여 불을 밝힐 때는 그을음과 격한 냄새가 같이 납니다." 61쪽



아직 등잔을 밝힐 때 기억이 난다. 기름에 따라 냄새가 달랐고, 빛의 색도 달랐다. 너무 어려 무슨 기름을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할머니는 그 등불 아래서 항상 바느질을 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하여 중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등잔에서 빛만 생각하고,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 하여튼 이 책은 우리가 간과하고 놓치기 쉬운 성경 속 정황들을 찾도로 도와 준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회자나 신학생, 교사들과 성경을 재미있게 읽고 픈 교인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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