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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3회 

예수는 누구인가?


내일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가 마지막 공생애를 마치고 남은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기 위해 종려잎을 꺽어 환영했다하면 종려 주일로 부른다. 예수에대한 논쟁이 뜨겁다. 알고보명 케케묵은 논쟁이지만 늘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예수가 역사의 화두요 모든 종교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예수는 구원자. 구세주. 하나님. 신앙의 대상이다. 따라야할 삶의 모범이기도 하다. 가장 보수적인 목사로서 고 옥한흠 목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국 개신교회가 믿고 추구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역시 동일한 개신교 목사로서의 보수적 관점을 지행하는 조정민 목사의 <Why Jesus>도 함께 보면 좋다. 미국의 저명한 복음주의 목사인 스풀라울의 <예수는 누구인가?>와 존 오트버그의 <예수는 누구인가?> 도 전형적인 개신교 보수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예수는 신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구원자로서 예수는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철저하게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관점이다. 여기에 토를 달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와 예수의 상이 바뀌고 있다. 여전히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후광이 사라진 것이 특징이다. 즉 멀리서 사람의 예배만을 받으시는 근엄한 예수가 아닌 인간의 친구이며 상담자이며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안의 예수다. 그레고리의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는 이미 많은 이들이 읽은 책이다. 예수와 함께 식사하면서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풀어 나간다. <예수님의 차려주신 밥상>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폴 영의 <오두막>은 내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그리고리의 책이 코믹하다면 영의 책은 진지하고 깊다. 자신의 딸이 죽어간 오두막에서 버림받은 딸에 대한 원한이 신에게 미친다. 결국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 멀리서 구경하는 신이 아닌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예수는 점더 나아간다. 행명적이며 정치적 예수가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십자가는 원래 정치범 처단 방법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로마를 거역한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빌라도는 풀어 주고 싶었지만 황제에게 반역한 예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젤롯은 초대교회 당시 혁명적 사상을 추구했던 유대인 분파이며 '젤롯당'으로 불렸다. 예수의 제자였던 요한이 그 당인 것으로 추측된다. 김규향의 <예수전>은 인간 예수로서의 면이 크게 부각된다. <예수 이야기>는 어떤가? 조반니 파파니 역시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규정한다. 정치적 예수는 예수의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상이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포기하고 도망가 버렸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다행이다. 더큰 문제는 다음의 책들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경이로운 판매부수를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떠나는 고전적 판타지다. 그러나 예수에대한 이야기로 둔갑하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예수가 결혼했고, 자녀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얼마 전 예수의 아내가 있었다는 콥트어 문서가 발견되면서 다시 예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지주의자들로 신은 육체를 입을 수 없다고 믿으며,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이라고 깍아 내리든지, 육체를 입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십여년 전에 발견된 <유다복음>은 더 가관이다.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공으로 돌린다. 즉 자신이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속죄제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유다복음은 구원의 축을 예수에게서 자신-유다에게로 돌려 놓는다. 
















김기현 목사는 <가룟 유다 딜레마>를 통해 유다복음의 실체를 밝힌다음, 우리 안에도 유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발터 옌스의 <유다의 재판>은 유다복음과 같은 맥락에서 전개 된다. 재판의 형식을 빌어 논증한다. 결국 예수의 공은 유다에게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학적으로 우승꽝 스러운 주장들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장이다. 특히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다와 협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유다에게 '네가 나를 팔아야 내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러니 너는 구원이 수단이다'는 식이다. 일리가 있는 말인듯 하지만, 보수적 개신교 안에서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결국 유다는 우리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신이 되려는 욕망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꺼지지 않는 유다와 예수 논쟁은 예수에 대한 부정이 아닐 것이다.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반감이며, 진정한 예수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회초리다. 교회는 새겨 들어야 한다. 예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벌써 매일성경이 나왔다.


온 가족이 함께 매일성경으로 큐티합니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네요. 

재미난 사실 하나. 아이들과 함께 큐티하니 소통이 됩니다.






 
 
 

사순절에 읽으면 좋은 책들


사순절이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사순절이 어떤 의미일까? 예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고 몸으로 살아가려시는 최소한의 몸부림은 아닐까?


 첫잭으로 톰라이트의 책을 권한다.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조용히 사순절을 목상하도록 배려했다.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역시 고난 주간에 읽으면 좋을 책이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는 십자가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깊이 파헤친다. 마지막으로 로이드 존스의 <십가자>는 십자가에 대한 성경적 해석으로 가장 탁월한 책이다. 


















절판된 책이지만 고난에 대한 묵상집으로 크룸마허의 <고난받는 그리스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떤 형제에게 이 책을 권했다. 며칠 뒤에 하는 말이 '너무 지루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많이 놀랐다. 이렇게 탁월한 책을 지루하다고 생각하디니. 누구나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던 책이다. 이 책은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하루 하루 조금씩 씹어 먹어야 한다. 소처럼 되새기면 더 좋은 책이다. 그렇지 않는가. 하루에 많은 양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영의 양식도 한꺼 번에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도 읽으면 좋다. 존 폭스는 종교개혁 당시 특이한 위치를 점유한다. 메리 여왕 시절의 핍박을 피해 대력으로 넘어가 개혁주의자들과 교제를 나눈다. 


존 낙스가 메리 여왕에 대하여 물리적인 힘을 가했다면, 폭스는 학자다움을 견지하며 박애와 긍휼을 중요시 했다. 그는 <순교자 열전>을 통해 물리적 힘으로 종교를 핍박하고 억압하는 것의 위험과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이 후 <순교자 열전>은 존 번역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모든 집에 의무적으로 배치되는 교과서가 되었다. 아쉽게도 현대는 존 폭스의 책이 등한시 되고 있다. 


이번에 포이에마에서 열심을 하대 폭스의 순교사를 현대적 감각에 맞추어 다시 펴내었다. 사순절을 보면서 신앙의 본을 배우려면 이 책의 순교자들을 읽기를 바란다. 존 폭스의 순교사는 일부의 편집자들이 중요한 사화를 추려 출간한 책이 몇 권 있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란?

 

세상의 모든 책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다시 읽고 싶은 책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 나 같은 사람은 책을 두 번 읽기 힘들다. 아무리 중요한 책이라도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런데 두 번 아니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읽을 때 다르게 읽혀지는 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헬렌 세페로의 <내 영혼을 위한 일기쓰기>란 책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다. 언제 샀는지, 왜 샀는지 알 길이 없는 살렘 왕 멜기세덱과 같은 책이다.

 

일기쓰기에 관한 책이다. 일기, 듣기만 해도 거부감이 일어난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숙제였던 일기, 글쓰기의 재미를 몽땅 빼앗아간 도둑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일기야말로 초등학생이 가장 먼저 배워야할 것 중의 하나다. 독서와 일기야말로 어릴 적부터 몸에 깊이 배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숙제라니. 듣기만 해도 싫어지다니. 이거야 말로 가장 모순(矛盾)이 아닌가. 나 뿐 이겠는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기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이들이 없다. 대한민국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라면.

 

싫음은 곧 망각이며, 망각은 곧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알게 되고, 결국 탁월한 전문가가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쓰기 싫었느니 누가 일기쓰기에 대가가 될 것인가.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 책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일기쓰기에 대한 기억을 살려 낸다. 따분한 이론 서적이 아니다. 소설처럼 읽혀지고, 일상 속에서 글감을 찾아낸 글쓰기로 이어가도록 만드는 가교(架橋).

 

일기쓰기는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일기는 자기만의 독백(獨白)이며 발설(發說)이다. 언어가 아닌 글로 표현할 뿐 자기 독백과 다르지 않다. 상담사의 역할을 조언을 해주기보다 먼저 경청(傾聽)하는 사람이다. 들어주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말하려 할 때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그러니 먼저 들어주어야 말할 수 있다. 일기쓰기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답은 밖에 있지 않다. 안에 있다. 문제가 안에서 발생했다면 답도 여전히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친구에게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면 스스로 답을 찾는 이치(理致).

 

때로는 친구나 상담가 또는 영적 지도자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의 핵심을 파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기야말로 그런 영적 친구요 상담가가 될 수 있다.”(59)

 

글을 통해 자신을 발설하고 객관화(客觀化) 시킴으로 자신을 직시(直視)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게 하고 바른 답을 찾게 해 준다. 글이란 참 묘한 것이다. 생각만으로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던 것들이 글로 표현되는 순간 답이 된다. 문장은 불가피학 논리적이다. 처음 시작하는 일기쓰기는 어수선하고 중구난방(衆口難防)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체계를 갖추게 되고 절제와 인내, 논리와 사유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일기를 쓰노라면, 종이에 뭔가를 적음으로써 어수선한 것들이 정리되고 우리의 삶과 주변 세상을 좀더 명확하게 분별하게 된다.”(27)

 

일기는 여기서 나간다. 섬세한 안목을 갖게 해 준다. 속도는 피상성의 폐해(弊害)로 귀결(歸結)된다. 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주변을 보는 것과 3킬로미터의 속도로 보는 것은 다르다. 깊이보고 자세히 보려면 천천히 가야하고 때론 서야하고,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후 곧바로 십자가로 가지 않았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부모와 30년을 함께 살았고, 3년의 공생애 동안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외로운 자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씀하시고, 대화하시고 논쟁하셨다. 때론 거저 주시고, 때론 목숨을 요구하는 결단을 촉구했고, 때론 거절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올랐다. 즉 이 땅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구체적인 것,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의 세세한 다양성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형체 없는 추상적 존재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탄생과 사역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성이라는 현실속으로 들어오셨다. ... 영성훈련에서 구체적인 사물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을 사랑의 눈길로 오랫동안바라보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48)

 

단순하게 시작된 일기쓰기에 깊은 철학과 자기 확장의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자기를 찾는 여정은 곧 하나님께 머묾이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펼치는 것이다. 일기쓰기는 이러한 부르심의 소명을 도와주는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일기는 역사다. 수년전에 읽었던 위지안의 <내가 살아갈 이유>도 결국 일기다.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허투르지 않게 일기에 담았다. 책을 읽으면서 삶의 소중함을 더욱 깊에 체득했다. 


우리에겐 소중한 것이 있다. 그러나 건강할 때는 소중한줄 알면서도 소중하게 다루지 못한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일기는 이러한 오류를 잡아 준다. 진정한 가치에 시간을 투자하게 한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전정한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 가장 고귀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 내가 수단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도록 하는 것. 일기가 이것을 도와 준다. 난 그렇게 믿는다.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1회

루이스의 서재를 읽다



 











남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호기심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수년 전에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그곳에 보니 이유는 단 한다세기의 천재로 알려진 그의 뇌는 어떻게 생겼을까였다그건 두 가지 내재된 이유 때문이다하나는 아인슈타인의 뇌가 일반 사람과 다르다면 천재는 곧 뇌가 된다또는 생물학적으로 천재는 탄생하게 된다만약 다르지 않다면 우리도 천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교육학자들은 후자를 기대할 것이고생물학자들은 전자를 기대할 것이다결론은 어떻게 났을까미안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왜냐고아인슈타인의 뇌가 특이하긴 하지만 특이함이 천재성을 말하는지는 아무도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도루묵이다이런 연구가 하나 둘인가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호기심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

 

루이스의 서재에 대한 호기심은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뇌에 대한 호기심만큼은 되지 않을까서재는 사유(思惟)의 궤적(軌跡)을 살피는 일종의 역사학이다아니면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發掘)작업 쯤 될 것이다루이스의 책은 열권이 넘게 읽었다아직 그의 소설들을 읽지 않았지만기독교 변증과 논증에 관련된 책은 거의 읽은 셈이다아직도 그의 작품의 깊이는 다 헤아릴 수 없다그만큼 생각의 폭과 깊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그의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책은 무엇이 있을까그의 천재성이 독서(讀書)를 통해 이루어진 것을 믿기에 서재는 살피는 것은 곧 그의 생각의 연유(緣由)를 묻는 것이다.

 

표지에 ‘C. S. 루이스를 만든 작가와 글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나의 추측이 그리 엇나가지 않아 보인다분명 그렇게 생각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제임스 스튜어트 벨은 머리말의 제목을 위대한 사상가는 과거의 위대한 업적에서 태어난다.’로 잡았다책은 이미 과거다모든 영향 받음도 역시 과거다루이스 역사 여러 곳에서 다른 학자들이 책을 읽음으로 지독한 불신에서 지적인 회심을 했다고 밝힌다몇 명의 저자의 이름을 들어보면조지 맥도널드길버트 체스터턴새뮤얼 존슨에드먼드 스펜서존 밀턴 등이다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현재의 루이스를 있게 한 정신적 스승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봄으로써 우리는 루이스의 영성 형성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까지 바꿔 갈 수 있을 것이다.”(7)

 

그렇다우리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루이스의 서재를 탐하게 한다나도 변화될 수 있다는 일말(一抹)의 희망 말이다실제로 루이스는 여러 곳에서 고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끊임없이 역설(力說)한다이런 이야기도 있다고전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십 페이지 고전을 읽기 전에 수천 페이지의 난해한 주해서를 읽는다루이스는 이들을 어리석은 이들이라고 평한다나도 종종 이러 오류를 범한다성경을 읽기 전에 그 어려운 주석들을 읽다 그만 지치고 만다그냥 읽으면 될 일인데 말이다하여튼그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의 탁월함의 근원을 파헤치는 흥분된 탐험이 될 것이다.



몇 개의 문장을 발췌 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곳에는 화합도 없고사랑의 기쁨도 없습니다조화도 없고존재의 유익도 없습니다하나가 되려면 적어도 둘이 필요합니다개체 수가 많을수록 화합은 더 커지고 더 아름답습니다따라서 더 풍요롭고 더 신성합니다.”-조지 맥도널드

 

사도 바울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복음을 설교하지 않았다목회를 하기 위한 힘을 얻으려고 먹었다그가 사랑한 것은 빵이 아니라 복음이었다진정한 사랑은 보상을 요구하지 않지만 보상받아야 마땅하다누구도 사랑의 값을 치르겠다고 나서지 않지만사랑하는 사람은 응분의 보상을 받으며그 사랑이 꾸준할 때 사랑으로 보상받기 마련이다.”-성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

 

우리는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만드시도록 돕지 않는다그분께 더 나은 재료를 드릴 뿐이다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뿐인 좋은 것을 만드신다당신은 당신일 뿐당신과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당신 배경의 장점만이 아니라 장점까지 지금의 당신을 빚어내는 재료로 쓰였다.”-오스틴 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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