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inumsa님의 "[리스트 담기] 민음사 역사책 리스트 담기 이벤트 (총 10분)"

http://blog.aladin.co.kr/Pansees/6913074 정말 멋진 이벤트입니다. 저의 정신적 멘토에 정약용을 낳은 조선의 성리학과 정도전의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6월에 관심있게 읽고 싶은 책


6월이다. 한국전쟁. 육이오를 알고 싶다. 그래서 골라본 책들이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진부하고 답도 없는 질문은 생존에 관련된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가장 간단한 답부터 말한다면 '탐욕' 때문이고, 좀더 나아가 '교만' 때문이고, 더 나아가면 생존 때문이다. 순서를 굳이 말한다면 '생존'이야 말로 전쟁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수단이다.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살인은 생존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살인은 정신착란이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 공포가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 즉 내가 먼저 그를 죽이면 더이상 날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자가당착이 바로 살인이다. 


전쟁처럼 오래된 전설도, 역사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로마와 다른 나라의 전설에도 전쟁과 살인은 중요한 화제의 테마였다. 영웅은 전쟁을 통해 탄생된다. 전쟁설화는 현재를 충동질하는 정신적 지주 노릇을 톡톡히 한다. 얼마전 번역된 '쌍전'은 이것을 진정성있게 해부하고 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통해 중국과 중국 주변국가들을 지배해온 정신을 리얼하게 '까발린다.' 오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의 교활함과 무자비함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실감있게 읽기 위해서는 삼십육계도 읽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삽십육계 병법의 마지막 방법을 '줄행랑' 이다. 무조건 도망치고 보는 것이다. 모택동이 그렇게 좋아했던.. 사실 좋아하지 않았지만 즐겨썼던 방법이다. 공산주의 비겁함은 비로 이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떤 역사가를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전쟁사이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살육과 피비린내나는 전쟁들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이 세계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고, 유부녀와의 바람피우는 것 또한 한시대와 전설을 장식하는 전쟁의 시작이기도 한다. 트로인 전쟁이 바로 그 바람둥이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한 사람의 부주의함이 온 나라와 백성들이 얼마나 피를 보아야하는지는 사뭇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무책임한 한 사람의 행동이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쟁사가들은 1차 세계대전을 일컬어 어처구니 없는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한방의 총소리가 세계를 흔드는 시작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불이 지필 모든 준비는 끝이났으니 성냥 하나만으로도 세계를 충분히 뜨거워 질 수 있었다. 2차 대전은 어떤가! 1차세계대전의 산업화의 새로운 변혁으로 인한 모순이라면, 2차대전은 몇 사람의 비겁한 행동과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박정희, 그는 썩은 한국을 개혁하고 싶었다. 그는 분명 한국을 지금까지의 역사를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를 원했다. 불가피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박정희 전대통령은 군사력을 동원해 대통령이 되었고, 자신만의 권력집단을 만들어 냈다. 

 

 

 

 

 

 

 

 

 

 박정희를 이어받은 사람은 또 다른 군사 쿠데타를 동원해 정권을 쟁취한 전두환이었다. 그의 첫번재 적은 광주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수많은 논문과 사건보고서가 아직만 진작 중요한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고있다. 이 어찌 된 일인가? 전두환 대통령은 전의 박정희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는 프로파간다를 너무나 절적하게 이용할 줄 아는 영약한 존재였다.

 

 

 

 

 

 

 

 6공화국의 출범은 새로운 정치개혁이나 모습이 아니었다. 전두환이 물려준.. 정말 물려준 나라였다. 노태우 대통령을 사람들은 '물태우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왜일까? 물처럼 확고함이나 강직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이었고, 사람들을 적절하 다룰줄 아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김영상과 김대중은 시대를 전혀 다르게 이끌어 간다. 김영삼은 노태우와 분명 다르지만 정치노선에 있어서는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기 진보를 외친 그였지만 대통령을 되어보고자하는 그의 욕심은 결국 보수진영과의 위험한 결탁을 시도한 것이다. 초심일관은 분명 힘든 것이다. 경제나 정치에서도 여전히 다르지 않다. 군사정권을 끊고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지만 과거의 전재를 그대로 답습한 점에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진정한

 

 

 

 

 

 

 

 

노무현, 그는 실패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공이다. 진보의 역설은 이곳에 존재한다. 존보는 힘을 버리고 응집력을 버리고 개체로의 환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는 항상 실패한다. 그래서 성공한다. 대통령의 권위를 버리고 오로지 한 인간이고 싶었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스스로 과거의 짐을 버리고 싶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지만, 그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사도 세자의 죽음, 그 비밀은?

 

사도세자(1735-1762)의 영정 



아래는 박영규님의 쓴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의 일부분이다. 이곳에서 저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조울증, 즉 미친결과로 보고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때문인지 2세 때 벌써 세자로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딸 효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고 한다.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명선습]을 독파했다. 서예를 좋아했고,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10세 때는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1749년 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했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했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했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인해 그는 정신질환 증세를 부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히기는 힘들지만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고 한다. 이 같은 현상은 현대에 조울증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사도세자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의 명을 거부하자 그는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사도세자는 어릴적부터 똑똑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울대 정별설 교수는 아버지인 영조가 절대권력으로 인해 미친 아들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정별설교수는 어릴 적 사도세자는 똑똑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부를 싫어하고 시와 여행을 즐긴 것으로 본다. 부인 홍씨의 한중록은 자신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관이 없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한중록이 혜경 홍씨가 죽고 나서 즉 사도세자의 아들인 중조의 시대가 열리면서 편집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노론의 입지를 강화 시키고 사도세자의 죽임이 노론과 별 상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권력이 아니라면 다른 사유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조울증, 즉 미쳤기 때문이다.

 

 

 

 

 

 

 

 

무사 박동수에서 나오는 사도세자는 중국에 대항하여 조선의 명예와 자존심을 세우려는 북벌지계의 첨병으로 나온다. 사도세자가 북벌지계를 주장함으로 중국과 정면으로 대치하게 된다. 노론이 청의 사조를 받고 조선을 지키려 하는 것과 반한다. 

 사도세자가 칼로 베어버린 '삼전도비'는 청태조가 자신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병자호란 때 청에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도의 요구에 따라 세운 비석이다. 그 때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졌다. 높이는 3.95m로 폭은 1.4m로 사람의 두배 반에 해당하는 적지 않는 비석이다. 원제는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사진출처는 (http://kbsam93.blog.me/90117886573)이다.

 

 

 

탕평책을 편 영조는 노론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정순황후 김씨와 숙의 문씨는 노론세력을 지지했고, 이에 반하는 사도세자를 제거하려 하였다. 사도세자는 당시 힘이 없었던 소론과 남인과 친하게 지냈고, 영조 몰래 소론과 남인이 주로 사는 관서지방을 빌미로 삼아 세조를 공격했다. 사도세자는 역사 문헌에 조울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노론을 제지하려는 영조의 정치적 수단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영조가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신하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고, 사람들의 말에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하들의 청이 들어오면 함부로 거절하지 못한 영조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임으로 정치적인 입지를 강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와 아내 혜경 홍씨 등 모두 그의 적이었고, 노론과 관계된 인물들이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노론을 극히 싫어했던 사도세자는 그들의 원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처지였던 것이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죽고 만다. 

  

 

 

 

 

 

 

 

그렇다고 한다면 '무사 백동수'에 나오는 사도세자는 그동안 권력에 의해 감추어진 사도세자의 진실을 밝혀주는 픽션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비록 완전학 역사적 사실을 따르지는 않지만, 그의 정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