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씨와 연애하기 - 케냐에서 날아온 특별한 말씀 묵상
이상예 지음 / 세움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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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 권의 성경 묵상 집을 소개할까 합니다. 케냐 선교사님으로 사역하고 계시는 이상예 선교사님의 <로고스 씨와 연애하기>(세움북스)입니다. 이상예 선교사님은 아내이자 엄마이고, 선교사입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중 신학 공부를 하다 정체성이 흔들려 고민을 하다 성경 묵상을 통해 소명을 되찾은 경험이 있습니다. 성서유니온선교회의 <어린이 매일성경> 고학년용을 집필하고 있으며,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은 지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상예선교사님의 묵상집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녀는 왜 선교사가 되었을까요? 하필이면 케냐 선교사로 말입니다. 서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고스(Logos, 말씀)씨와 연애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즉 말씀 묵상을 하다 케냐 선교사의 소명을 발견하고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낯선 땅에서 나그네(외국인)로 살아가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로고스 씨 없이 사는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그네가 되기로 했습니다.”

 

이 책은 자신의 소명의 원천이요, 삶의 근거가 되는 말씀 묵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묵상도 마찬가지죠. 권태가 끼어들고, 실망도 찾아오고, 미움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으로 화해합니다. 말씀은 삶의 중심이 되어 선교사님을 인도해 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묵상은 조금씩 엇나가는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 줍니다.

 

이상예 선교사님은 묵상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았고, 날마다 묵상함으로 큰 죄에 빠지지 않게 삶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씀 묵상이 주는 기본적인 도움입니다.

 

이 책은 네 가지 큰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낢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 가려는 몸부림입니다. 일상,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현장이며 사역터입니다. 일상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공동체, 관계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사랑은 공동체를 통해 증명되며,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돈독해 집니다. 선교와 사역,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부르심의 현장입니다. 이상예 선교사님은 이러한 네 가지 핵심 주제를 묵상의 방향으로 정하고 차곡차곡 풀어 나갑니다.

 

제가 이상예 선교사님의 묵상집에 푹 빠진 이유는 신학적 바탕이 깊이 스며들어 있으면서도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풀어 나가는 것 같은데 어느새 성경의 사건과 인물이 지금 저의 환경과 모습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예를 들어 첫 장 솔로몬 행각 거닐기에 보면 두 단락으로 나누었습니다. 앞 단락은 가슴에 돌을 품고 다니는 유대인과 그들을 거절치 않고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뒷단락에서 마음속에 숨겨둔 나의 상처 이야기로 슬며시 바꾸어 놓습니다.

 

그분이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을 때, 나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뒤에 남기시는 발자국마다 양에 대한 사랑이 묻어 있었다. ... 그분이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따뜻했다. 다시 한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한동안 상처를 핥은 후에 지나갔다. 진물이 꾸덕꾸덕 마르기 시작했다.”(23)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의 치유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존의 교훈식의 묵상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상예 선교사님은 깊은 성경의 우물에서 시원한 생수의 언어를 퍼내는 언어의 마술사입니다. 몇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과학적, 지시적인 언어로 포획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적인 언어로 만날 수 있는 인격이시기 때문이다.”(20)

 

낮의 아들이 되지 못함은 두 마음 때문이다. 빛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서있다.”(43)

 

염려는 흔한 인생의 재료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여러모로 마음을 써서 걱정하는 일은 케냐의 옥수수나 수쿠마(케일 종류)처럼 예사롭다.”(72)

 

형이상학적 신학의 교리들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언어들로 풀어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상예선교사님의 묵상집을 읽고 있으면, 나도 그곳에 있는 것처럼 동화되고, 남이 아닌 나의 이야기로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선교현장인 케냐의 사진들은 낭만적이면서도 애정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사진도 이상예선교사님이 직접 찍은 것들입니다. 표지에 <묵상, 시가 되고 수필이 되고 노래가 되다>라고 적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말이 진심임을 알게 됩니다.

 

제가 손을 크게 다쳐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 책을 읽었는데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내와 사별한 후 고작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라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갈등과 우울감에 빠진 나에게 소명을 일으켜 세워주고 살아갈 힘을 주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말씀 속으로 빠져들길 원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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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실천학 그리스도교문헌총서 3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지음, 남성현 옮김, 가브리엘 붕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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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실천학

 

저자인 '에바그리오스'는 금시초문이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정체불명의 저자가 운구일까였다.  저자를 알기 위해 책을 조밀하게 읽어 나갔다. 역자인 남성현의 역자서문을 통해 에바그리오스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안토니오스의 사막 영성과 바실리오스의 수도원 영성을 조화시키고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 시킨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제자이자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안토니오스적 영성을 체험한 사막의 교부이다.(10) 역자의 주장의 의한다면 에바그리오스는 영성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분명하다.

 

요컨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부정신학이 뿌리라면, 안토니오스적인 마귀와의 투쟁과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스토아적인 체계는 줄기에 해당되며, 에바그리오스의 영성신학은 열매라고 할 수 있다.”(11)

 

에바그리오스의 행보를 보면 극단에서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던 초대교회 말기의 신학을 집대성한 어거스틴을 닮아 있다. 에바그리오스의 헬라어 원문을 싣고, ‘스위스에서 30여년 이상을 은거한 수도자이자 에바그리오스와 사막영성 연구에 일평생은 헌신한가브리엘 붕게가 주해를 달았다. 부제를 영적인 삶에 대한 백계(白誡)’로 정한 것은 아마도 일백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톨리오스에게 헌정된 이 책은 수도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사막에 홀로 사는 수덕가들인 은수자들을 위한 책’(32)이다. 중세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가 있다면 초대교회에는 에바그리오수의 <실천학>이 있다. 두 책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에바그리오스는 인간의 심연(深淵)에 숨겨진 타락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그는 인간의 심연에 에크하르트가 영혼의 불꽃이라고 불렀던 초인격적인 부분을 에바그리오스는 지성’(nous)이라고 지칭하며, 지성을 통해 영혼이 움직인다. 에바그리오스가 난해한 것인지 해제가 난해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영혼에 대한 이해는 꼭 필요한 것 같다. 해제에 의하면 에바그리오스는 이성적 영혼을 삼분(三分)하여 이해력’ ‘화처’ ‘욕처로 구분한다. 이해력은 이성적인 부분에 속하고 비이성적인 부분은 다시 화처욕처로 세분화 시킨다. 화처(火處)와 욕처(欲處)로 구분한다. ‘화처는 육체적인 본성에 속하며 욕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다.’(36)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갈망 또는 욕망에 해당하는 단어일 것이다.

 

화처의 본래적인 기능은 마귀들과 싸우고 영적 기쁨을 얻도록 애쓰는 것이다. 천사들은 우리에게 영적 기쁨과 뒤따르는 지복을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화처의 방향을 돌려 마귀들을 이끌어 겨냥하도록 이끈다.”(24143)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화처는 중립적이며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다. 붕게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해한다.

 

화처의 고유한 기능은 덕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에바그리오스가 말하듯이 영적인 기쁨과 뒤따르는 지복을위해 싸우는 것이다.”(144)

 

()냄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다. 바른 화를 낼 필요가 있다. 예수도 화를 냈다. 그러나 화는 본질적으로 파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바른 화냄은 악을 향해야 한다. 에바그리오스는 시험을 받을 때에, 그대를 조여 오는 자에게 화를 내’(42, 193)라고 조언한다. 마귀에게 화를 냄으로 적(마귀)심으려고 하는 심상을 교란 시’(193)킬 수 있다.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롭게 될 수도 있고 해롭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옳은 일일까? 예수는 자신의 길을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화를 내셨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에바그리오스는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미세한 파동들을 감지하며 관찰한다. 10장에서 슬픔이 욕망이 좌절 된 후 찾아온다고 말하며 앞선 생각을 뒤따라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 영혼이 이런 기억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따르기 시작하여 내적으로 그것을 기뻐하면, 생각은 영혼을 사로잡아 슬픔 속에 빠뜨린다.’(94)고 알려준다. 마음이 행동을 지배한다. 잠언 기자도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16:32) 성도가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잘 감지하고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마음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곧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시작이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실천의 끝은 사랑이다. 앎의 끝은 신학이다. 실천의 시작은 신앙이요 앎의 시작은 본성적인 관상이다.”(84, 307)

 

 

그렇다. 마지막은 사랑이다. 사랑은 시작이고 이유이고 과정이고 결론이다. 이 책은 한 편의 추리소설이다. 에바그리오스라는 낯선 인물을 대면하여 찾아 나가는 여정이 결코 녹록치 않았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축복을 얻었다. 아쉬운 점은 낯선 단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부족했고, 문장이 직역을 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길고 난해하다. 이 부분만 해결이 된다면 깊은 영성신학으로 이끄는 수단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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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선교적으로 읽으면 두 모델이 보인다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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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이 알려주는 풀뿌리 선교모델

 

손창남은 산교학쪽으로는 저명인사다. 그는 이번 책뿐 아니라 선교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인도네시아 사역을 정리한 <족자비안 나이트>를 비롯하여, 한국에서 사역을 정리한 <쏘라비안 나이트>가 있고, 전문인 사역과 텐트 메이커 등의 선교관련 전문 서적인 <직업과 선교>도 있다. 경영학을 전공한 저자가 교수라는 직업으로 인도네시아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동거 동락한 선교적 삶을 살았다. 이 책은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본 사도행전이다. 기존의 성경 강해로서의 관점은 아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준 진정한 선교적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저자는 '풀뿌리 선교 모델'이야말로 초대교회가 실천했던 선교적 삶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는 선교의 두 모델이 등장한다. 13장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기 전과 후의 모델이다. 받기 전은 이름 모를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 이야기고, 13장 이후 누가는 바나바와 사울, 특히 사울의 사역에 집중한다. 두 사역은 완전히 다른 사역이다. 그렇다고 극단적 분리 모델은 아니다. 서로 혼재해 있고 보완하고 공유한다. 저자는 두 모델이 중요하긴 하지만 선교적 모델로서는 교회 파송 형식의 바나바 사울 모델이 아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던 풀뿌리 모델을 지향한다.

 

풀뿌리 모델은 현대 선교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평신도 선교이고, 자비량 선교이며, 전문인 선교이다. 텐트 메이커로 불리는 스스로 직업을 가지면서 일상 속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현장 사역이 책 전반에 녹아 있다. 이론과 현장이 겸비된 저자의 선교관은 배타적이고 권력과 탐욕에 일그러진 한국교회에 바른 선교모델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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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험하는 고독과 침묵
루스 헤일리 바턴 지음, 윤종석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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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헤일리 바톤은 두 번째로 읽는다. 작년 5월에 출간된 <영혼의 리더십>은 광야 경험이 영적 생활에 얼만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성취와 목표에 목마른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곳이다. 


광야는 여정이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이를 수 없다. 광야는 없는 곳이다. 먹을 것이 없고, 길이 없고, 사람이 없다. 곧 생존이 불가능한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존재의 기저를 들여다본다. 나는 누군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등등 많은 질문을 통해 현실과 직면한다. 즉 삶의 가치를 다시 묻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서문에서 팡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맞다. 조용하지 못함이 불행이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목적지향, 성과주의가 지배한다. 모든 것이 수치화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현대인들이 어떤 가치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인감됨을 배우는 학교까지 수치화 된다. 불행한 일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까지 가치보다 성과에 함몰되더 있다는 것이다. 부흥과 성장이라는 종교적 단어로 위장한 성과주의는 큰 교회 목사는 영한 목사라는 엉터리 수식도 만들어 낸다. 성장=물량=성적수준으로 환원된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저자는 광야로 나가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성과는 필요 없다. 그건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이다. 진정한 가치는 영적인 것이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안식을 얻는다. '몸의 안식' '생각의 안식' '영혼의 안식'이다. "고독의 시간에 하나님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우려면 우선 우리의 몸에서 시작해야 한다."(88쪽) 몸과 영혼은 다르지 않다.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몸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격하시키'(91쪽)려 한다. 몸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생각은 안식은 몸의 안식처럼 '그저' 되는 것이 아니다. 동상이몽일나 말이 있듯, 몸은 쉴지언정 생각은 분주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불안과 걱정이다. 이것조차 내려 놓아야 한다. 


"침묵의 도가니 안에서 정식적인 궁지의 벽은 더 이상 우리가 인간의 무력함에 꿰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안 그 자체가 된다. 결국 고요함과 확신에서 나오는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존속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매번 거기서 얻고 또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깊은 안식이다."(107쪽)


고독과 침묵은 물리적 단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계과 존재의미까지 포함한다. 언어를 넘어선 침묵은 고독의 양식을 먹어야하고, 결과적으로 또 다른 무언의 언어 속으로 들어간다. 그건 하나님을 기다림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자신과의 직면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다. 


"기다림이란... 하나님이 매우 안전하게 느껴져 더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거나 그분 앞에서 숨지 않는 것이다."(141쪽)


온전히 맡기는 것. 어쩔 수 없음을 넘어 완전한 신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 장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제목을 붙인 것을 결국 섬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말한다. 광야에 길이 있다. 하나님 자신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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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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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기독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그 이전에도 보수 기독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기에 역부족했지만, 세월호 이후 그들의 약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보수교회는 처음 예수가 보여준 초대기독교의 진정성을 상실한 함량부족과 그릇된 재료를 사용하는 불량식품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사도바울의 권면을 망각한 탓이요, 예수 가르쳐준 교훈을 따르는 제자 삼는 일을 버렸기 때문이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며,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수를 따르기보다, 권력과 명예, 쾌락과 돈을 따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와 무신성으로 가득 찬 파렴치한 정치의 합작품’(133)인데도 놀랍게도 한국 보수교회는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했고,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교란시켰다. 국무총리 후보로 나온 문창극 후보의 모교회 강연이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고 있을 때, 다수의 보수교회 교인들은 문창극을 추켜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경제를 좀먹는 벌레 취급이 되었고, 애국심이 전혀 없는 불온한 국민이 되었다. 세월호 침몰이 하나님의 뜻이니 잠잠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고통 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거했던 예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하고 옹호하기 위해 안달이 난 듯 하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신을 인간 자신이 변호해줘야 하다니.’(118) 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일인가.

 

 

저자는 하나님의 뜻이란 고상한 명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고통 받는 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한국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인과응보의 논리에 함몰된 보수 기독교는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잘못 때문으로 정죄한다. 그들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외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존재이다. 그러나 고통이 그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보다 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수많은 죄악을 지었음에도 건강하고 평안하며 떵떵 거리며 산다.(39) 하나님은 왜 그들은 벌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릇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고통은 현실의 감춰진 부조리와 모순이 드러나는 틈이다.”(120) 고통은 인간의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욥의 고난을 보라. 한 순간의 전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욥의 분노를 일으켰고, 심지어 하나님께 정죄 받았다. 고난은 인간의 얕은 체험이나 지식을 풀 수 없는 신비다. 욥기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시지만 답하지 않으신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

 

고통당하는 이들을 쉽게 위로하지 말라. 어설픈 위로는 더욱 큰 아픔을 준다. 그들에게 굳이 하나님을 해명하거나 변호하지도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다만 그들의 아픔을 나누려는 겸허함만 있으면 된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제럴드 싯처는 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상실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해 놓고 그날 사고로 돌아가 보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고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하나님 앞에서 울다)

 

아무도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충분히 절규하도록 도와야하고, 충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신의 슬픔에 충분히 슬퍼하는 자만이 오히려 스스로 눈물을 닥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116) 이다. ‘고통당하는 자의 무능과 약함에 함께 동참함으로 부조리와 모순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북돋워줘야 한다.’(121) 하나님의 창조적 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폭력적 무력이 아니며,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 속에 갇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창조의 모험을 감행하시는 분이다.’(107) 하나님의 창조적 모험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

 

교회도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쪽)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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