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선교적으로 읽으면 두 모델이 보인다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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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이 알려주는 풀뿌리 선교모델

 

손창남은 산교학쪽으로는 저명인사다. 그는 이번 책뿐 아니라 선교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인도네시아 사역을 정리한 <족자비안 나이트>를 비롯하여, 한국에서 사역을 정리한 <쏘라비안 나이트>가 있고, 전문인 사역과 텐트 메이커 등의 선교관련 전문 서적인 <직업과 선교>도 있다. 경영학을 전공한 저자가 교수라는 직업으로 인도네시아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동거 동락한 선교적 삶을 살았다. 이 책은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본 사도행전이다. 기존의 성경 강해로서의 관점은 아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준 진정한 선교적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저자는 '풀뿌리 선교 모델'이야말로 초대교회가 실천했던 선교적 삶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는 선교의 두 모델이 등장한다. 13장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기 전과 후의 모델이다. 받기 전은 이름 모를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 이야기고, 13장 이후 누가는 바나바와 사울, 특히 사울의 사역에 집중한다. 두 사역은 완전히 다른 사역이다. 그렇다고 극단적 분리 모델은 아니다. 서로 혼재해 있고 보완하고 공유한다. 저자는 두 모델이 중요하긴 하지만 선교적 모델로서는 교회 파송 형식의 바나바 사울 모델이 아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했던 풀뿌리 모델을 지향한다.

 

풀뿌리 모델은 현대 선교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평신도 선교이고, 자비량 선교이며, 전문인 선교이다. 텐트 메이커로 불리는 스스로 직업을 가지면서 일상 속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현장 사역이 책 전반에 녹아 있다. 이론과 현장이 겸비된 저자의 선교관은 배타적이고 권력과 탐욕에 일그러진 한국교회에 바른 선교모델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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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험하는 고독과 침묵
루스 헤일리 바턴 지음, 윤종석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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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헤일리 바톤은 두 번째로 읽는다. 작년 5월에 출간된 <영혼의 리더십>은 광야 경험이 영적 생활에 얼만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성취와 목표에 목마른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곳이다. 


광야는 여정이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이를 수 없다. 광야는 없는 곳이다. 먹을 것이 없고, 길이 없고, 사람이 없다. 곧 생존이 불가능한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존재의 기저를 들여다본다. 나는 누군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등등 많은 질문을 통해 현실과 직면한다. 즉 삶의 가치를 다시 묻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서문에서 팡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사실에서 비롯된다."


맞다. 조용하지 못함이 불행이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목적지향, 성과주의가 지배한다. 모든 것이 수치화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현대인들이 어떤 가치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인감됨을 배우는 학교까지 수치화 된다. 불행한 일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까지 가치보다 성과에 함몰되더 있다는 것이다. 부흥과 성장이라는 종교적 단어로 위장한 성과주의는 큰 교회 목사는 영한 목사라는 엉터리 수식도 만들어 낸다. 성장=물량=성적수준으로 환원된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저자는 광야로 나가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성과는 필요 없다. 그건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성이다. 진정한 가치는 영적인 것이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안식을 얻는다. '몸의 안식' '생각의 안식' '영혼의 안식'이다. "고독의 시간에 하나님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우려면 우선 우리의 몸에서 시작해야 한다."(88쪽) 몸과 영혼은 다르지 않다.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몸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격하시키'(91쪽)려 한다. 몸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생각은 안식은 몸의 안식처럼 '그저' 되는 것이 아니다. 동상이몽일나 말이 있듯, 몸은 쉴지언정 생각은 분주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불안과 걱정이다. 이것조차 내려 놓아야 한다. 


"침묵의 도가니 안에서 정식적인 궁지의 벽은 더 이상 우리가 인간의 무력함에 꿰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안 그 자체가 된다. 결국 고요함과 확신에서 나오는 힘을 얻게 된다. 우리는 존속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매번 거기서 얻고 또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깊은 안식이다."(107쪽)


고독과 침묵은 물리적 단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계과 존재의미까지 포함한다. 언어를 넘어선 침묵은 고독의 양식을 먹어야하고, 결과적으로 또 다른 무언의 언어 속으로 들어간다. 그건 하나님을 기다림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자신과의 직면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다. 


"기다림이란... 하나님이 매우 안전하게 느껴져 더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거나 그분 앞에서 숨지 않는 것이다."(141쪽)


온전히 맡기는 것. 어쩔 수 없음을 넘어 완전한 신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 장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제목을 붙인 것을 결국 섬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말한다. 광야에 길이 있다. 하나님 자신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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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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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기독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그 이전에도 보수 기독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기에 역부족했지만, 세월호 이후 그들의 약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보수교회는 처음 예수가 보여준 초대기독교의 진정성을 상실한 함량부족과 그릇된 재료를 사용하는 불량식품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사도바울의 권면을 망각한 탓이요, 예수 가르쳐준 교훈을 따르는 제자 삼는 일을 버렸기 때문이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며,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수를 따르기보다, 권력과 명예, 쾌락과 돈을 따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와 무신성으로 가득 찬 파렴치한 정치의 합작품’(133)인데도 놀랍게도 한국 보수교회는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했고,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교란시켰다. 국무총리 후보로 나온 문창극 후보의 모교회 강연이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고 있을 때, 다수의 보수교회 교인들은 문창극을 추켜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경제를 좀먹는 벌레 취급이 되었고, 애국심이 전혀 없는 불온한 국민이 되었다. 세월호 침몰이 하나님의 뜻이니 잠잠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고통 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거했던 예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하고 옹호하기 위해 안달이 난 듯 하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신을 인간 자신이 변호해줘야 하다니.’(118) 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일인가.

 

 

저자는 하나님의 뜻이란 고상한 명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고통 받는 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한국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인과응보의 논리에 함몰된 보수 기독교는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잘못 때문으로 정죄한다. 그들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외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존재이다. 그러나 고통이 그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보다 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수많은 죄악을 지었음에도 건강하고 평안하며 떵떵 거리며 산다.(39) 하나님은 왜 그들은 벌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릇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고통은 현실의 감춰진 부조리와 모순이 드러나는 틈이다.”(120) 고통은 인간의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욥의 고난을 보라. 한 순간의 전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욥의 분노를 일으켰고, 심지어 하나님께 정죄 받았다. 고난은 인간의 얕은 체험이나 지식을 풀 수 없는 신비다. 욥기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시지만 답하지 않으신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

 

고통당하는 이들을 쉽게 위로하지 말라. 어설픈 위로는 더욱 큰 아픔을 준다. 그들에게 굳이 하나님을 해명하거나 변호하지도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다만 그들의 아픔을 나누려는 겸허함만 있으면 된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제럴드 싯처는 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상실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해 놓고 그날 사고로 돌아가 보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고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하나님 앞에서 울다)

 

아무도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충분히 절규하도록 도와야하고, 충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신의 슬픔에 충분히 슬퍼하는 자만이 오히려 스스로 눈물을 닥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116) 이다. ‘고통당하는 자의 무능과 약함에 함께 동참함으로 부조리와 모순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북돋워줘야 한다.’(121) 하나님의 창조적 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폭력적 무력이 아니며,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 속에 갇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창조의 모험을 감행하시는 분이다.’(107) 하나님의 창조적 모험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

 

교회도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쪽)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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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의 사랑 - 롬 8:1-39 복음주의 설교자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4
존 파이퍼 지음, 이선숙 옮김 / 좋은씨앗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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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존 파이퍼의 신간이 나왔다. 그동안 좋은씨앗에서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집을 독점적으로 출간해 왔는데. 이번이 네 번째 책이다. 작년(2014) 1월에 로마서 강해 1권이 <복음과 하나님의 의>란 제목으로 출간 된 이후 그해 6월에 2집인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이 출간 되었고, 3권이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이란 제목으로 12월에 출간 되었다. 그 후 4개월이 지나 4권인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출간 되었으니 넉 달에 한 권씩 출간된 셈이다. 이번 책은 로마서 8장만을 다루었는데 6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앞으로 3권이 더 추가되어 7권가지 출간계획이라고 하니 존 파이퍼의 시대가 열린 것은 아닌지 착각이 될 정도다. 좋은씨앗은 디자인과 추천인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책의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존 파이퍼를 기다린 독자들에게 좋은씨앗의 출간 소식은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탁월한 복음주의 설교자요 강해자인 그는 미국의 로이드 존스로 통한다. 로이드 존스는 복음 중의 복음으로 불리는 로마서를 13년 동안 강해했다. 존 파이퍼 역시 베들레헴 교회에서 16년 동안 로마서를 설교했다. 한국에 번역된 로이드 존스의 책을 대부분 읽은 필자로서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는 비교와 보완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준다.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목사들이라면 로마서 전체를 설교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그건 꿈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로마서는 아무나 덤빌 수 있는 만만한 성경도 아니고, 탁월한 강해자들이 설교를 해온 터라 비교 당할 수도 있어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존 파이퍼는 벧엘신학교에서 강의하는 교수로 시작했지만, 로마서 말씀을 연구를 토해 목회자로 부름을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강의실을 떠나 강단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1980년 메네아 폴리스의 베들레헴 침례교회를 맡아 33년간 목회자로 섬겼다. 그는 무엇보다 설교자로의 큰 짐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로이드 존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아 스스로 청교도의 후예로 청교도들을 사랑했다. 이러한 신학적 성향은 설교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모토를 성경강해와 신앙생활에 적용하며 살아 왔다. 특히 로마서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전환점을 가져다줄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서 8(41)을 시작하면서, 로마서 8:11-7장까지의 요약이며,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16)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정죄는 예수 안에서 일어난다.(51)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리심을 입는다. 죄 없으신 예수의 죽음은 완전한 대속제물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 당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것을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576)로 바꾸어 말한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8:2성화로 해석하는 부분은 굉장히 특이하다.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켰다고 하는데,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없고, 성화시킬 수도 없다.(63) 성화는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셈이다. 부활주일 설교에서 성령을 받은 또 다른 세 가지의 증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영으로써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175) 결국 이러한 행위는 악과 싸우는 것이며,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켰음을 알려주는 표지인 셈이다.

 

과연 존 파이퍼다. 말씀을 조밀하게 파고드는 그의 능력은 수많은 시간을 말씀과 씨름하지 않으면 토해낼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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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돌려드립니다
권일한 지음 / 좋은씨앗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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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의 혁명은 성경에 있다.

 

사탄의 주요한 작전은 성경을 빼앗는 것이다. 성경을 빼앗으며 구태여 전쟁할 필요가 없다. 알아서 타락할 것이고, 자연히 신을 망각 할 테니 말이다. 기독교이 역사는 성경을 빼앗는 역사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교회는 핍박과 이단을 통해 성경을 빼앗았다면, 중세는 권위적 제도로 인해 성경을 빼앗겼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모토는 '만인제사장설'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신자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위가 있다.

 

그동안 사제들에 의해 제한되고 통제돼 성경 읽기는 종교개혁자들의 피를 통해 다시 일반 신자들에게 돌아갔다. 저자는 1'우리는 왜 성경을 빼앗겼는가?'에서 조목조목 지적한다. 어쨌든 성경은 다시 우리의 손에 돌아왔다. 그런데 현대를 보라 성경은 넘쳐나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다. 최고의, 최장의 베스트셀러가 '성경'이다. 어느 책도 성경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성경만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단 한 번도 베스트셀러를 놓친 적이 없는 책 중의 책이다.

 

그러나 현대인을 성경을 읽지 않는다. 소유할 뿐 거들떠보지 않는다. ? 사탄의 계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탄은 풍족하게 함으로 소중함을 잊게 하고, 넘쳐나게 함으로 가치를 떨어뜨린다. 성경을 읽지 않음으로 현대는 중세보다 더한 암흑의 시대가 되었고, 무지해졌다. 혹여나 성경을 읽고 있으면, 이단이나 광신자로 오해 하고, 목사의 설교에 토를 달면 불신분자가 된다. 참으로 기이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반(거꾸로)종교개혁이 아니던가. 그래서 말인데, 진짜 성경을 읽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바로 지금이야 말로 성경을 통해 진정한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 저자인 권일한은 신학자도 목사도 아니다. 그는 평범한 신자이다. 그가 성경읽기에 관한 책을 썼다. 그 자체만으로 기이한 일이고,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칭송할만하다. 필자도 성경을 수 십독 했다. 책을 많이 오래 읽다보면 감이 생기는데, 그 감은 읽은 자만이 아는 감이다. 권인한 선생은 성경의 ''을 아는 사람이다.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을 잇는 영적 통찰력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다. 특히 3'성경, 이렇게 읽어라'는 저자가 직접 체험하고, 익힌 성경 독서법이다. 평신도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깊이 우러나오는 사색과 성경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사유가 가득하다.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곳은 38편이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적용하라'는 제목에서부터 아우라가 느껴진다. 성품. 전인격적 변화를 두고 한 말이다. 말씀이 지식이나 정보를 넘어, 전인격적 삶의 변화와 성품까지 변화를 이루도록 읽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4'공동체에서 서로 말씀을 나누라'는 꽤나 도전적이고 적절한 조언이다. 나눔은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허물과 부족을 채워 주기도하고, 단편적 관점을 다양한 이해로 되돌려 준다. 저자는 책벌레답게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독서를 주장한다. 성경 읽기도 결국 거룩한 독서가 아니던가. 마지막으로 '책벌레 선생님과 함께 성경 읽기'는 이론이 아닌 실용적 측면에서 성경을 읽고 나눔을 할 수 있는 교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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