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 - 도발적인 이슬람 선교 읽기
김동문 지음 / 대장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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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오해는 삼의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는 관계의 방정식을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그 말은 맞기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닌 적이 훨씬 많다. 삼의 차이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삼의 차이를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표현도 쓴다. 30cm도 되지 않는 짦은 거리지만 그곳이 절대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해와 오해는 단지 3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 차이는 불가능한 숫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동 선교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 3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20년 전에 선교학을 공부했다. 그 당시 한창 인기를 얻었던 선교 주제는 텐트 메이커, 또는 자비량 선교였다. 그러나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자비량은 가난한또는 불가능이 되었고, 텐트 메이커는 비즈니스라는 단어로 탈바꿈했다.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선교인데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시간차를 두고 변하기를 거듭한다. 백 년 전, 우리나라 초창기 미국과 호주 선교사님의 선교 방법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현저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 년 전에 배운 선교의 방법은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의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에서는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 통했던 선교 방식이 동남아 선교에는 거의 먹혀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20년 전 선교사가 아직도 선교사이고, 20년 전 교인이던 현지인들이 아직도 교인으로 남아 있다. 즉 자립이 거의 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론으로만 공부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는 선교의 종말 시대에 도래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독교적 소명을 희석시킬 수 있는 오해의 언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럼, 진정 선교는 무엇일까? 여기 한 권의 책을 통해 선교에 대한 생각들을 재정립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동문, 선교학과 출신이지만 선교학에 문외한에 나에게 이 이름은 선교학과 관련되어 알게 된 이름이 아니다. 수년 전 로고스서원 북토크에서 <오감으로 성경 읽기>(포이에마) 저자 특강이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다. 목회자로, 설교자로 부름받았다는 생각에 성경해석에 관련된 세미나는 가능한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에 그날도 참석했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물건들과 기구들을 보여 주었다. 등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추야자를 왜 꿀이라고 부르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날 생소했던 기억은 PPT나 강의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리화된 성경 해석에 함몰되어 손과 눈, 코와 입으로 맛보고 느끼는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어 시간 넘게 진행된 특강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구절은 삶의 맥락이었다. 성경을 삶의 맥락이나 상황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풍성한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정말 그랬다. 사도요한도 살아있는 말씀이며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고백한다. 사도적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말하고, 듣고, 식사하고, 동행하고, 보아야 한다. 권위는 이론이 아닌 실제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을 깊이 아는 것은 성경 속 삶으로 들어갈 때 가장 정확하다. 선교는 어떨까? 서구적 전통에 따른 강압적인 문화 이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삶 속을 들어가야 한다. 내부자의 관점이 아니라면 이해는 불가능하다. 한국교회가 이슬람에 대한 지독한 오해를 갖고 있는 이유는 외부자의 관점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는 강제한다고 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하고, 삶의 맥락 속에서 평등하게 바라볼 때 시작된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를 제목으로 정했다. 책의 목차를 살피고, 몇 곳을 골라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독하며 읽어 나갔다. 마지막, 저자 후기를 읽었을 때 소스라치게 돌랐다.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공명(共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이슬람 세계의 내면을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282)


여기서 사람은 학문적 해석이나 정의가 아니다. 저자는 다시 이어간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우리와 같은 성정의 또 다른 우리의 이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최근에 들어오는 이슬람에 대한 소식들은 한결같이 IS와 연관되어 있거나, 개신교 기독교를 화형 시키고 고문하고 잔혹하게 살인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사실 확인을 해보면 열의 아홉은 거짓이며,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 타당성 없는 추론이나 과장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이슬람 혐오(嫌惡)를 나타내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잘못이다. 이러한 왜곡된 퍼나르기식의 거짓 뉴스들은 이슬람 선교 현장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독한 싸움을 하는 선교사들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교학의 관계 맺음은 가 아닌 . 이 책은 외부자의 시각으로 선교를 보지 않고 내부자의 시각으로 중동 선교를 고민한 선교 읽기다. 한국인으로서 내부자의 시선을 갖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의 삶의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교학 책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이 책의 중요한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자.


전체는 6장으로 구분했다. 크게 1.2장은 선교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서론 부분에 해당되고, 3-6장은 본론이자 결론이다. 이곳에서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이해를 촉구한다. 특히 1장과 4장은 이슬람에 선교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중요한 장이니 꼭 읽어야 한다. 5장과 6장은 본론이면서 결론에 가깝다. 5장에서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6장은 이슬람 선교에 대한 오해와 재고(再考)이다.


1선교, 선교하는 삶 다시 읽기는 책의 서론에 해당된다. 기존에 선교라는 단어, 호칭들이 갖는 의미와 오해, 왜곡들을 살피고, 선교사가 누구인지 살핀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슬람포비아!’라는 생소한 단어를 언급한다. 이 단어는 레드 콤플렉스처럼, 이슬람 혐오를 나타내는 단어다. 이슬람 혐오는 이슬람 공포에 기인한다. 이슬람 공포는 한국 보수교단의 이슬람에 대학 억측과 왜곡의 결과이다. 저자는 여기서 이슬람을 규정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이슬람을 보기 원한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단어는 인격적 복음’(17)이다. 그렇다. 선교는 인격적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국내 교회가 성장에 함몰되어 진정한 전도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칫 선교도 선교비를 지원하는 교회가 요구하는 성장으로 인해 거짓된 성장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선교의 진정성을 잃어 버리기 일쑤다. 저자는 과감하게 선교사는 자신이 섬기는 선교지 주민들을 보도록 돕는 도우미’(34)라고 소개한다. 또한 교회는 겸손해 져야 하고, 선교사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에 당당해지라고 충고한다. 이곳에서 왜곡된 선교에 대한 쏠림 현상을 바로잡아 준다. 필자의 마음을 울린 곳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겉모습의 동화 그것을 넘어서는 삶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현지인의 신발을 신고 현지인의 안경으로 그들이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알 것 같다. 현지인의 신발과 현지인의 안경이 뜻하는 것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위장된 동화를 뜻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43)


위장과 진실의 차이는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은 성장의 도구로 볼 뿐이다. 사랑은 그들을 존재로 인정한다.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성정을 지닌 한 인격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44)이다. 2한국교회 선교 다시 읽기는 한국교회 안에 내재된 선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수정해 준다. 특히 3무 선교(무자. 무모. 무례)가 선교의 위기를 부른다는 말은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한다. 3무 선교는 한국식 믿음에 근거한다. 덮어 놓고 믿어야 한다는 신앙관과 맥을 같이 한다 불도저식 선교는 오랫동안 현지를 지켜온 선교사들에게 치명적 위협이 되고, 혼란과 분란을 일으킨다. 심지어 현지인들이 예수 안 믿는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비웃는 행동은 진정 선교가 무엇인지 단 한 번고 고민하지 않는 어리석고 무례한 태도이다. 저자는 무지 대신 지식과 지혜를, 무모 대신 지혜를, 무례 대신 여유와 겸손을 갖자고 말한다.(68)


3장과 4장에서는 이슬람에 수많은 오해를 언급한다. ‘이슬람이 유대교보다 기독교 이해에 더 가깝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인 저자의 증명들은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천지 창조나 삼위일체 등은 유대교와 이슬람이 동일하다. 그러나 메시아는 이슬람에게만 있다. 유대교는 예수가 없다. 이슬람은 예수는 선지자다. 유대교는 개신교를 부정한다. 이슬람은 동일하게 계시의 종교로 받아들인다. 같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독교와 이슬람은 많이 닮아 있다. 유대교에 비해서. 저자는 바른 선교를 하고 싶다면 그들을 이해하라고 한다. ‘한글판 꾸란 해설서라도 읽어’(117) 보라고 충고한다. 필자는 선교사는 아니지만 그동안 이슬람에 대한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중동 선교사로 자원하는 사람들이라면 꾸란은 읽고 가야 하지 않을까? 문득 칼빈의 후예임을 자랑하면서도 단 한 번도 <기독교강요>를 읽지 않은 어느 목사의 자화상이 그려진다.


나가면서

말미에 성경을 읽을수록 중동이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표현이 가슴을 놀래 킨다. 저자의 바람대로 성경은 중동의 이야기다. 중동 이해 없이 바른 성경 읽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읽기 위해서라도 중동으로 가야 한다. 성경 읽기는 곧 중동 읽기다. 선교는 중동 읽기다. 삶의 맥락이 축출된 강압적 선교는 재고(再考) 되어야 한다.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 유학생들은 사람이다. 그들도 진리를 알고 싶고, 기독교도 궁금해한다. 그들도 배고프고, 울고, 사랑하고, 감동한다. 그들도 사랑받아야 하고,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짓된 뉴스에 속아 중동 사람들을 악마화하고, 터부시한다면 중동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중동을 품었다. 중동은 이미 한국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 책은 선교학 책이라고 보기엔 너무 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중동 관련 선교학 책보다 강열하고 뜨겁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중동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중동인, 그들도 사람이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문득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린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중동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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