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난하다. 가뭄에 목말라 허덕이던 지난 주와 다르게 이번주는 연일 비다. 여름을 알리는 비일까? 가끔 삶이 무겁다는 생각보다 밀도가 높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피하게 천천히 가야할 때가 온다. 허송세월 보내는 듯하고, 삶이 퇴행하는 것 같지만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흐른다. 보내고 나면 모두 지혜를 주고 소망을 준다. 오늘 점심을 먹기 위해 텃밭에 나가에 상추게 제법 자랐다. 잎다리를 몇깨 뜯어 비빔밥에 넣었다. 매일보면 크지 않아 보이던 상추가 이틀만에 보니 제법 자랐다. 관심이 사랑이라지만, 때론 적당한 무관심도 좋은 것 같다. 



지난 주부터 교리 서적을 주로 읽어보고 있다.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탁월하고 정밀하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고 있다. 로버트 쇼는 섭리에 대해 피조물을 보존하고 통치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실 섭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정의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만물을 움직이신다. 모호하고 아이러니가 가득해 보이지만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일정한 법칙과 원리가 지배한다. 




어제부터 읽고 있는 새뮤얼 볼턴의 <크리스천, 자유를 묻다>에서는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성경적으로 탐색한다. 2장에서 새뮤얼 볼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어려움도 극복한다. ... 하나님은 자녀에게 사랑의 영을 주신다. 사랑의 영이 주어진 까닭에, 무거운 짐처럼 여겨졌을 일이 즐겁고 기쁘게 행할 수 있는 일로 바뀐다."(41쪽)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란 진리에대한 종속이며, 사랑하는 것에 천착하는 것이다. 루터가 노예의지론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자유는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이며 자발적이다. 그런면에서 의지의 자유는 노예가 아들로서의 자유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성도를 지키시는 교리다. 한 번 택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엄밀하게 죄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지만, 이웃과 사회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사랑은 이웃 사랑이 있지 않는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자유는 관계적이며, 절대와 상대의 간극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된다. 새물얼 볼턴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율법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율법에 순종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141쪽)


율법을 행위나 삶으로 읽어보자. 훨씬 쉽게 이해된다. 자유는 삶이 배제되지 않는다. 즉 절대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늘 상대적이다. 다만 존재의 자유는 절대적이며 독립적이다. 존재의 자유는 삶의 자유 속에서 운명지어진다는 점도 잊으면 안된다. 사랑은 늘 타인을 향하는 것이기에. 


여름이 왔다. 아카시아 꽃이 천지다. 오늘도 하나님의 섭리의 시침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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