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35회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벌써 몇 권을 읽은 것일까?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 종종 책을 몇 권 읽었는지 망각한다. 아니다. 세어보는 것을 잊는다. 세는 것도 귀찮다. 그냥 읽는다. 새벽에, 아침에, 오전에, 오후에,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책은 이별을 고하지 않는다. 그나마 일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는 방치현상이 일어난다.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가는 엄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아이는 떼를 쓰며 엄마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러나 더 나은 만남을 위해 대가는 지불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일하는 내내 아이가 생각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일과를 마치자 곧바로 아이를 찾으러 간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아이를 안는다. 뽈도 비비고, 냄새고 맡고, 머리도 쓰다듬는다. 아이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나에게 책이 그렇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아 주고 싶다.

 

작년, 201364일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기 시작할 즈음 스티븐 그린브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주문했다. 근대를 탄생시킨 한 권의 책 이야기가 궁금해서. 표지가 요염하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La nascita di Venere>을 표지로 삼았다. 보티첼리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르네상스 운동의 핵심이다. 그려진 시기는 1446년으로 현재 피레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 설명을 덧붙이자면,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베누스 여신이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하여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베누스는 조개에서 태어나 미의 상징으로 육지에 올라온다. 1500년 전에 벌거벗은 여인이 오른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을 살포시 누르고, 오른쪽 가슴은 그대로 드러낸다. 금발이고 야윈 몸매이며 당시의 비현실적인 그림과 다르게 현실적이다.

 

책 사냥꾼에 매료되어 주문했는데, 표지는 전혀 딴판이다.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매치가 되지 않는다. 40여 쪽을 읽다가 재미가 없어 읽기를 중단했다. 싫어서가 아니다. 더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이 읽어달라고 아우성 친 탓이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잊히고 망각 되었다. 망각은 필연이지만 발견은 우연에 속한다.

 

어느 날, 정확하게 삼일 전 퇴근하고 서재를 둘러보다 연하늘색 책이 눈에 뛰었다. 십 개월이 지난 책인데 어제 읽다만 책처럼 다시 집어 들었다. 줄을 긋는 습관이 있어서 표시해 놓지 않아도 다음 읽을 쪽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사들은 독자이자 사서, 책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서방의 책 생산자가 되었다.”(41)

 

다시 찾아낸 책 사냥꾼 포조를 뒤따라갔다. 수도원에 침입하여 책을 필사하고 손에 넣기까지의 이야기다. 아니다. 포조가 죽은 뒷이야기도 후반부에 넣었다. 중세말의 책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줄 알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설 때쯤 그가 실존 인물이었고, 아직도 그가 찾아낸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인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 책으로 논픽션 부분의 퓰리처상을 받았고, 전미국도서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중세말의 카톨릭의 부패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잔혹한 풍자가 여기저기 발견된다. 가장 거룩한 체 하지만 가장 비종교적인 존재들 속에서 필사가로 교황의 비서로 살아가는 포조. 자신이 섬기는 교황들이 수차례 쓰러지고 사라지는 대격변의 상황 속에서 비굴하게 살아간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오직 책, 책뿐이었다.

 

교황과 그의 궁정인 전체가 로마에서 달아나야만 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포조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등바등 살았다. 치료법도 없는 세상살이의 고통과 끝없이 닥쳐오는 북음에의 위험에 맞서 있는 힘껏 싸웠다.... 포조를 구원해 준 것은 집착에 가까운 열망, 책에 대한 열정이었다.”(191)

 

아직 인쇄기가 발달되지 않는 시기에 필사가의 역할을 지대했다. 필사가는 곧 지식층이었고, 모국(母國)의 언어뿐 아니라 외국에 능통해야 했는데 특히 라틴어는 최고의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필사하기 위해서는 수주에서 몇 개월이 필요하다. 한 권의 책값이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수 백 만원에 이른다. 모든 것이 수공이기에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은 많은 노력과 고통이 뒤 따른다. 그런 책을 허접한 종이에 필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고 간직할 수 있는 양피지에 기록했다. 수 십 마리의 양이 죽어야 한 권이 책이 완성된다. 고급인력의 일당과 수 십 마리 양의 생명을 앗아가는 책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다.

 

오래된 수도원을 돌며 수백 년 전의 책을 찾아 탐험을 한다. 상상하면 신난다. 배고프고 강도의 위협과 생존의 위기를 겪는 일이지만. 그가 찾아낸 책은 에피쿠르스를 계승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이다. 신의 시대였던 중세에, 세상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니며, 원자라는 물질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과정만이 사실로 규정한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간도 창조의 목적도 아니라고 말한다. 파격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르네상스 운동과 근대적 과학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표지에 있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La nascita di Venere>가 바로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사제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사고의 축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에 일어나는 과학적 발견과 계몽주의 사상은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후세가 아닌 현세만이 진리임을 말한다.



논픽션이라 그런지 자질그레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책 이라면 환장하는 나야 좋지만,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기엔 그리 매력적인 흐름은 아니다. 르네상스와 근대의 기원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는 멋진 책이다. 

 

330페이지 정도의 많지 않는 분량이다. 그럼에도 고대 헬라와 로마, 중세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초전이었던 존 후스 등 새로운 사상에 젖어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은연중에 무신론이 근대의 정신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보여 준다.

 

며칠 전에 읽은 <책쾌 송신용>도 조포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환경에서 잊혀져가는 우리나라의 책들을 발굴하고 필사하여 널리 소통시킨다. 한 권 값이 결코 싸지 않았는데도 많은 이들이 책을 사고파는 삶을 이어간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책은 한 사람이 쓰지만, 시대를 담고 정신을 빚는다. 책을 매개(媒介)로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고,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고, 현재가 미래로 이어진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책이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다. 읽지 않고 소통은 불가능하다. 제발 책 좀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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