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찾아야할 인생의 질문들


어떤 노인이 길을 가고 있었다. 길을 잘 모르는지, 눈이 잘 안보이는지 길을 더듬거리며 방황하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르신 왜 이렇게 길에서 방황하십니까? 제가 댁으로 모셔다 드릴까요?"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그래주게나, 내가 지금을 나를 잊어 버렸다네 내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댜 주게나!" 나를 잃어버린 노인에 대한 일화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성공를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진작 어디로 가야할지, 달리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마치 송충이들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가다 죽음의 행렬을 하다 모두 굶어 죽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할 때이다.


<무지개 원리>로 유명한 차동엽신부가 '잊혀진 질문'이란 책으로 다른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 죽으면서 유언조로 남긴 24가지 질문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많은 질문이 있지만 상당 부분이 종교와 인생에 대한 질문들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주고자 차동엽신부가 펜을 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천주교가 국교인 나라들이 왜 공산주의가 되었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한다. 어쩌면 이 책은 현대적의미의 신존재 증명이다. 잊혀진 질문이란 기계화되고 문명화된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존재에 대한 되물음이다. 






사람은 누구인가? 창조론과 진화론은 일찍부터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는 중요한 두 시각이었다. 저자는 신부이기에 창조론에 입각한 논리를 펼쳐나간다. 그러면서 진화론을 배제하지 않는다. 창조되었지만 진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창조론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으로서의 존귀함을 잃어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놓치기 때문입니다."(111쪽) 저자가 첫장을 열면서 고통의 문제, 눈물의 이유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인간의 존귀함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아파해야 한다. 모든 것이 완전한 것인양 자신의 상처를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는 강자를 원한다. 아픔은 약자의 몫이요 비겁하고 핑계대는 무능한 사람들의 몫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눈물을 찾아야 하고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을 봐야하고, 주변에 널부러진 연약한 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함께 하고 흘러야 할 것을 촉구한다. 인간이 누구인가? 그것이 첫번째 잊혀진 질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는 곧 고독이다. 실존은 고독을 전제로한 인간상을 들려준다.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이다. 이러한 고독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도심 한 복판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외롭다. 수많은 사람이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찾아오는 고독은 무엇때문일까? 

독일작가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의 말처럼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엄습하게 마련이다.'(125쪽) 그렇다 외로움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독은 고독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고독한 존재로 인정하고 스스로 '고독의 시간'을 갖는다면 고독은 독이 아닌 에너지가 된다. 자신하여 고독의 시간을 갖음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반성의 시기이다. 현대인은 이 고독을 잃어 버렸다. 이것이 두번째 질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은 고독한 존재로 살아야 하고, 고독한 사람들을 찾아가 고독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이란 말 그대로 서로 기대며 의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찾아야 한다. 맹자는 사람들이 집에서 닭이나 개가 나가면 찾으러 가면서 마음이 도망가면 찾으러 가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자기찾음의 수고가 없어지고 있다. 자기 찾음이란 무엇일까? 목적을 다시 정하는 것이다. 현대문명은 스펙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경쟁하고 싸워야 하기 때문에 좋은 싸움의 무기인 '스펙'을 쌓아야 한다. 이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욕망으로 채우도록 촉구하는 저주이다. 자기 찾음보다 이 땅에서의 물리적인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를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저자는 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은 존재할까?'라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하였듯이 종교는 어쩌면 생명과 인생이란 판돈을 걸고 하는 내기일 수도 있다. 파스칼은 내기의 달인답게 이렇게 답한다. 만약 신이 없다면 없는 것으로 끝이난다. 그러나 만약 정말 신이 있다면 신에게 걸지 않는 자는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 


신은 어디 있을가?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인 아유수비츠를 경험했던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한다.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한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던 소년이 이렇게 물었다. 지금 신은 어디 있는가? 그 때 내 안에서 이렇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바로 저기 저 어린아이가 달려 죽어가는 그 곳에 내가 있다."

신은 여기에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신은 있다. 종말은 머나면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고 그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잊혀진 질문이요, 찾아야할 질문이다. 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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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11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말하곤 합니다.
길바닦에 떨어진 돈은 얼른 주으려하면서
길바닦에 떨어진 개념을 주우려하지 않는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