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
어떤 사람은 삶을 지루해한다.
우리는 왜 삶을 사는가? 왜 청춘이라고 규정지은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구겨 넣으라고 주문하는 것일까?
삶은 은유가 아니다. 삶은 진짜다.
버닝에는 많은 메타포와 은유가 등장하는 듯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사실적이었다. 일부러 아름답게 꾸미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난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벤이 '진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린 것이던, '비닐하우스'를 메타포로 사용하여 '여성/사람'을 죽인 것이던 상관이 없다.
'사람'이던 '남의 소유의 비닐하우스'던 '지저분하고 눈에 거슬린다.'라는 판단을 하고 없애버리는 것이 싫었다.
비가 판단을 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은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말을 내뱉었지만 '지저분하고 눈에 거슬린다.'라는 판단이다. 무언가를 판단하고 없애버리려는 오만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개츠비처럼 돈이 많은데 어떤 이유로 돈이 많은지 모르겠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 무료해하며 하품을 하는 오만한 사람. 그게 벤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벤을 삶의 의미를 찾는 Great Hunger의 메타포로 사용했다면 나는 이 영화가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고 삶이 무료하며 오만한 사람은 Great Hunger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가 Great Hunger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아인은 Little Hunger도 Great Hunger도 아닌 그저 외로운 사람 같다는 느낌이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이야기했던 해미는 진짜로 종수의 같은 동네에 살던 사람이었을지 아니면 그저 종수에게 접근했던 어떤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해미는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했지만, 해미의 가족은 집에 우물이 없었다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대사보다 벤(스티븐 연)의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너무 먼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과 상관없이 종수의 파주 집, 외양간에 혼자 남아있던 송아지는 왜 거기 혼자 있었을까?
송아지가 있었다면 어미 소도 있었을 텐데, 어미소는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가 끝날 무렵 송아지가 간 곳은 도축장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축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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