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급우들에게 고고한 인상을 주려고 칸트를 읽는 여고생이 나오는 소설 제목이 뭐더라. 나에게 리처드 도킨스는 소녀의 칸트와 같았다. 당시 누군가 ‘인생의 책’을 물으면 ‘이기적 유전자’를 꼽곤 했는데, 그건 나쁘지만 섹시한 체취 때문이었다. 서가에서 처음 이 책을 꺼냈을 때 심장이 뛰었다. 책 뒷 표지에 뭐라고 써 있었냐면, “인간은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기계이다.” 오, 그 다크한 매력이란. 카드빚 내서 명품 걸치듯 도킨스를 사 모았다. 알고나 읽었던가, 낮에는 잡일로 몸 팔고, 밤엔 술집에서 술 팔던 스무살 무렵이었다.  


어쨌거나, 내 인간관의 많은 부분은 도킨스로부터 왔다. 나는 ‘이 책의 영향으로’ 시니컬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계보를 따지자면 도킨스는 '악마의 사도'였고, 나는 도킨스의 사도였다. 술자리가 거나해지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는 개똥철학 시간이 돌아오면, 심연으로 통하는 캄캄한 구멍을 열어 도킨스를 소환했다. ‘어차피 인간이란 DNA를 보관하는 캡슐일 뿐이야. 너네 성격과 태도와 활동은 다 너네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프로그램일 따름이지. 너네가 의지라고 생각하는 건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소환된 거인은 천진한 꼬마가 개미굴 짓밟듯 조무래기들을 짓밟았다. 그런 소란을 즐겼다. 


하지만 명품을 둘렀어도 살림은 그대로였다. 읽어도 마음이 공허했다. 좋은 책은 삶을 바꾼다던데, 왜지? 왜 마음에 악다구니만 그득해지는 걸까. 그런 의문이 패퇴한 수두 바이러스처럼 피부 표층에 잠복하고 있었다.  



#. 2


십년 쯤 지났다. 나는 제법 말쑥한 회사원 코스프레를 하고 어느 알라디너 모임에 초대받아갔다. 저녁을 먹고 막걸리 집으로 옮겨 술을 마셨다. 알라디너들답게 주로 책과 관련한 얘기가 오갔다. 그 자리에서 마태우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번역 문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솔깃해서 몇 마디 장단을 맞췄던가. 


술이 불콰해졌을때, 별안간 그의 말 한마디가 창처럼 찌르고 들어왔다. 맥락은 놓친지 오래였지만, 끄덕거리던 고개는 일시정지. 보통 술자리에서 싸움은 그렇게 일어난다. 


“..그러니까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한 건 미잘님의 잘못이 아니예요.” 


하, 이보시오 의사양반. 내가 바보라니! 나는 사나운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여길 봐요. 미잘님, 그건 미잘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콱, 상을 엎으려고 시도했으나, 생각보다 무거웠고, 그래서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상대는 의학박사가 아닌가. 게다가 나는 평화주의자다.  


“알았어요.”


“그건 미잘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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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미잘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가 네 번째로 같은 말을 했을 때 마침내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술에 젖어 말랑말랑해진 의식의 표층을 비집고 바이러스가 열꽃을 피웠다.


“Don’t fuck with me!!”


주점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내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미잘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내가 무너진 건 그 그윽한 깊이 때문이었던가. 주르륵 하고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건 미잘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목으로 차오르는 복받침이 거대한 무게가 되었고, 장마에 둑 터지듯 쏟아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의 가슴팍에 안겨있었고. 술집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박수는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그날 도킨스를 언팔했다. 어차피 그가 뭐라고 찌끄리던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사실이다. 허영을 내려놓으니까 체증이 내려가듯 가슴이 후련했다. 



#. 3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마태우스와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었다. 


“저는 술을 먹지 않았어요. 아내가 음주측정기를 샀거든요.” 


“알았어요.”


“그런데 이건 아셔야 돼요. 저는 술을 먹지 않았어요. 아내가 음주측정기를 샀거든요.” 


“알았어요.”


“저는 술을 먹지 않았어요. 아내가 음주측정기를 샀거든요.”


“으아악!!!” 



#. 4
















지난 주 금요일, 점심나절에 반디앤루니스에 놀러갔다가 확장된 표현형이 새 번역으로 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호. 


퇴근하는 길에 북플로 오늘 나온 글을 검색했는데, 마태우스님이 몇몇 책을 나누고자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http://blog.aladin.co.kr/747250153/8639431) “갖고 싶은 책이 있으면 제목과 이유를 써주세요. 선착순입니다.” 그 다섯 권 중 한 권이 ‘확장된 표현형’이었다. 올린 지 5분여 밖에 안 되는 따끈따끈한 글이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후속편이면서 도킨스 자신이 훨씬 더 아낀다는 이 책이 번역이 엉망이라 읽히지 않는 그간의 현실이 전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무식해서 이해를 못하는 건가?”라며 자신을 탓하기도 했지요. 십년도 넘게 발번역인 채로 남아있어야 했던 저간의 사정을 알고 나니 안타까움이 몇 배로 더 커졌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처럼 원서를 읽을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다들 속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드디어, 제대로 번역된 <확장된 표현형>이 나왔습니다. 앞부분을 조금 읽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드디어 이해가 됩니다. 도킨스는 물론 한국의 독자들에게 경사스러운 일이지요.


다시 도킨스를 읽을 때가 온 것인가. 댓글은 운명적이었다.





#. 5


까지만 쓸까 했는데, 이 글로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 오해가 생길까봐 잇는다. 


#. 5-1


사실 ‘이기적 유전자’는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이해가 1도 없어도 어찌어찌 페이지는 넘어가는 과학교양서다. 이 책이 어렵다는 편견의 절반은 발번역 때문이다. 


방금 랜덤으로 펼친 이기적 유전자 개정판(이전 버전이다) 369페이지의 문장은 이렇다. 


하나 불안한 긴장이 이기적유전자 이론 핵심을 교란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 근본적 담당자로서 생물 개체 몸과 유전자 사이 긴장이다. 


힙합하냐. 원문은 이렇다. 


An uneasy tension disturbs the heart of the selfish gene theory. It is the tension between gene and individual body as fundamental agent of life.  


다음은 나의 번역이다. 


불편한 긴장이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핵심을 교란하고 있다. 그 긴장은 유전자와 생명을 구성하는 근본 물질로서의 개별적 신체 사이에서 발생한다. 


여기에서 역자는 'agent'를 사전 1번 항목인 ‘대리인’으로 번역했다. ‘물질’(player의 느낌의..)로 번역하는 게 맞다. 아마 도킨스는 ‘DNA modifying agent’따위의 용례를 생각했을 것이다.  


몇 줄 아래로 내려가면 이런 구절이 있다. 


정자나 난자에 실려 거대한 유전적 산거(散居) 또는 분산 집단의 다음 여정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거의 서로 알지도 못했을 대항적인 유전적 담당자의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합의 산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지와 감각기관의 협조를 조정하는 충실한 뇌를 가지고 있다. 생물의 몸은 그 자체로서 매우 훌륭한 주체인 것처럼 보이며 또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 


히에엑!? 


원문은 이렇다. 


A body doesn't look like the product of a loose and temporary federation of warring genetic agents who hardly have time to get acquainted before embarking in sperm or egg for the next leg of the great genetic diaspora. It has one single-minded brain which coordinates a cooperative of limbs and sense organs to achieve one end. The body looks and behaves like a pretty impressive agent in its own right. 


나의 번역이다. 


생물의 신체는 전쟁 중인 유전체들이 맺은 느슨하고 일시적인 연합체가 아니다. 유전체들은 위대한 유전적 디아스포라의 다음 여정을 위해 정자나 난자에 실리기 전에는 서로 알지도 못했다. 신체는 팔다리와 감각기관의 협업을 조율해내는 하나의 확고한 뇌를 가진다. 신체는 꽤 정당한 자격을 가진 인상적인 대행자처럼 보이며 그렇게 행동한다. 


1. 원문에 ‘대항적인 유전적 담당자’로 해석될 여지는 어디에 있는가. 2. '산거'가 뭔지 아시는 분? 디아스포라(diaspora)를 번역한 '산거'는 국어사전에 없다. 중국과 일본에서만 드물게 쓰는 말이다. 굳이 번역하고자 할 때는 ‘이산’이란 말을 쓴다. 아마 저자는 디아스포라가 뭔지 몰랐을 거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선 어떻게 번역을 했는지 찾아보다가 일역이 ‘산거’로 되어있는 걸 발견했겠지? 일문판을 구할 수 없어 가설로 놔두기로 한다. 3. 그 밖에도 자잘한 오역과 문제점들은 셀 수도 없다.    


이 책의 번역은 대체로 이 모양이다. 그때 마태우스님은 이런 점이 못내 아쉬웠던 것 같다. 다행히, 이런 문제들은 새로운 역자 두 명이 추가된 30주년 기념 전면개정판에서 상당부분 해소됐다. 하지만 아예 갈아엎고 새로 번역한 것은 아니고 기존 판본을 교열해 문장을 정돈하고 문제 있는 부분을 수정하는데 그쳤기에 아직도 난해한 감이 있다. 확장된 표현형도 같은 번역자가 번역을 했기 때문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개정판의 구체적인 번역과 내용에 대해서는 읽고 리뷰로 남기기로 한다. 

 


#. 5-2


첫머리에 ‘이 책의 영향으로’ 시니컬한 소년이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간의 삶 자체가 유전자의 농간이라고만 주장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도킨스의 표현방편일 뿐이지(영장류 학자 Frans de Waal등이 언급한다.), 유전자가 인간의 윤리기준에서 볼 때 정말로 이기적 의사를 갖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DNA에 각인된 생존본능이 생물 개체의 삶으로 상당부분 표현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률로 기준했을 때 이기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간이기에 유전자의 굴레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유전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래 전, 지적인 허영심을 명품이라도 되는 양 뽐내던 나는 이 책을 오독했다. 내가 무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번역이 엉터리였던 탓도 있다. 마태우스님을 만나서 이 책을 새로 읽게 됐고,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도킨스의 이론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유전자 결정론도, 환원주의도 아니다. 우리 의지의 무가치함을 역설하는 니힐리즘도 아니다. 도킨스는 본성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통해 본능조차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다. 



#. 6


모름지기 책을 선물 받았다면 리뷰로써 보답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진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용기를 내 도킨스의 새로운 저작에 도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분의 은혜인 따름에야. 

 

이도 늦었으나, 우선 고맙다는 말이라도 남기는 게 베푸신 홍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리라. 계신 곳을 향해 삼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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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6-08-11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archive.org/stream/TheSelfishGene/RichardDawkins-TheSelfishGene_djvu.txt
이기적 유전자 개정판 원서 전문은 여기서 무료로 볼 수 있다. (1976년 출간된 버젼.)

한수철 2016-08-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생각해 보면 저도 과거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다가 결국 포기했던 것 같은데- 어지간히 읽었다면 아주 기억이 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제 잘못이 아니었겠구만요?

아무튼 두 분의 대화 및 행동양식 덕분에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덕분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6-08-11 08:29   좋아요 0 | URL
그것이 어찌 한수철님의 잘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It`s not your fault!! 히히.

한수철 2016-08-11 23:31   좋아요 0 | URL
^^

그건 그렇고 저

프사의 아름답고 시크하게 정지된, 동작선을 구현한 여성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뷰리풀말미잘 2016-08-12 11:21   좋아요 0 | URL
http://blog.aladin.co.kr/Escargo/8689028

다이애나 리그라는 영국 배우입니다. : )

레논 2016-10-1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뿐만이 아닙니다. 칼 세이건의 저서도 그렇고, 폴 데이비스의 저서도 반드시 원서를 참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과거 70~80년대는 일본어번역본을 재번역함에 있어서의 오류가 많았고, 90~00년대는 비전공자인 전문번역가가 하였기에 그랬었죠. 간혹 교수가 대학원생 여럿에게 시킨 번역도 많았고요. 전문번역가 양성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뷰리풀말미잘 2016-10-18 08: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레논님, 번역이 참 학문적으로 중요한 기초 작업이기도 한데 중요성에 비해서 괄시받고 있는 것 같아요. 80년대에 김용옥이 그렇게 번역 번역 외쳐댔던 것도 말씀하신 맥락이겠죠. 승정원 일기 같은 중요한 사료들도 번역이 안 되고 있잖아요.

말씀하신대로 원서를 참고해야 올바른 독해가 가능할텐데, 제가 읽는 게 느리고, 엄청나게 귀찮은 작업이라서 거의 포기하는 편이예요. 좋아하는 소설만 원서 발견하면 일단 사 두긴 합니다.

웬만큼 번역을 해도 돈도 안 되고, 고용이 보장도 잘 안되니까 전문번역가로 나서는 사람이 잘 없는 것 같아요. 딱한 현실입니다.

2016-10-24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5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