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5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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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시간이 멍하게 밍밍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마치 하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창밖 구름과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헤아리는 시들 같다. 시인이 첫 시에 앞서 '한 판 넋두리를 쏟아놓은 기분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의 여운이 시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작가의 도가 사상을 향한 사랑과 존경이 뚝뚝 묻어나는 시들 또한 가득하다. 노자와 장자를 소환하는 시들은 무와 허를 사유하고, 도가 사상을 통해 세상을 관조한다. 이 시집을 읽기 전에는 《노자 도덕경》을 읽기 전이었기에,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노자 도덕경》, 《장자》와 함께 시집을 다시 읽어보는 경험도 좋을 듯 싶다.


 시인 최승자는 이성복, 황지우와 함께 시의 해체를 도모한 삼인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시인이다. 이 책이 내게는 최승자 첫 시집이었지만, 그녀의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을 인생 시집으로 꼽는 이들을 많이 봐왔기에 그녀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책 속 김소연 시인 평론에서도 《이 時代의 사랑》이 '여성이 주체로서 탄생하는 고통스러운 장관을 처음 목격'할 수 있는 시집이며, 24살의 최승자가 술 아니면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들 수 있던 시절에 쓴 시가 담겨 있는 시집(특히 3부)이라고 언급한다. 《빈 배처럼 텅 비어》가 내 크나큰 기대보다는 못했다는 감상을 느껴 헛헛한 마음이었기에, 《이 時代의 사랑》에 다시 기대를 걸어보고자 한다. 다음 최승자 시집은 단연코 《이 時代의 사랑》으로 하겠다.


 《빈 배처럼 텅 비어》에서 특히 좋았던 시들은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여기 있으면>, <한 세기를 넘어>,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임시 거처>, <아침이 밝아오니>, <모국어>다. '하릴없이 살아 있'어 고작 21세기 '쉬파리'밖에 못 되는 내가 자꾸만 '농담'처럼 지껄이는 '슬픔의 제사상'. 최승자가 '모국어'로 써내려간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요약한다면 바로 이런 문장이 아닐까.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_<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 없이도 계속될
억겁의 시간을 생각해보면
나는 한 마리의 쉬파리이다

이리 날다 저리 날다
이리 불리다 저리 불리다
나의 임시 거처인
21세기로 되돌아옵니다

_<나의 임시 거처>

아침이 밝아오니
살아야 할 또 하루가 시큰거린다
"나는 살아 있다"라는 농담
수억 년 해묵은 농담

_<아침이 밝아오니>

누구에게나 모국어는 슬픔의 제사상

_<모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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