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골든아워 1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3 골든아워 1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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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교수가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외상외과 현장을 담아 써내려간 기록들이 《골든아워》 1권에 담겼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외상외과 의료진들은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환자들을 다시 삶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해적의 총에 부상당한 석해균 선장을 이송하여 치료하는 과정이 1권의 하이라이트.

봄이 싫었다. 추위가 누그러지면 노동 현장에는 활기가 돌고 활기는 사고를 불러, 떨어지고 부딪혀 찢어지고 으깨진 몸들이 병원으로 실려 왔다. 봄기운에 밖으로 이끌려 나온 사람들이 늘었고, 늘어난 사람만큼 사고도 잦아 붉은 피가 길바닥에 스몄다. 병원 밖이 형형색색 꽃으로 물들 때, 나는 무영등* 아래 진득한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마취과 기계들이 뿜어내는 기계음이 귓가에서 계속 울려댔다. 비릿한 피 냄새가 폐 속에 깊이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매년 봄마다 중국발 황사가 시작되면 매캐한 바람이 숨을 더 틀어막았다. 봄은 내게 피와 죽음의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  광원(光源)을 집중시켜서 목적하는 부위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빛을 비추는 전등 장치. 주로 수술실에서 쓴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통상적인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 외래 진료와 정규 수술을 근간으로 하는 대부분의 의료 분야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 형성은 중요하다. 관계가 초기에 제대로 형성되어야만 치료를 진행해나갈 수 있다. 환자는 첫 담당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담당의를 바꾸는 편이 낫다. 의사도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환자의 몸에는 칼을 대기 어렵다.

수술 시 혈액은 필수적인데 피의 주요 세포 성분은 아직까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인공 혈액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답보 상태로, 의학의 정체구간이다. 결국 중증외상 환자는 수술 시 남의 피를 받아 넣어야만 한다. 물론 타인의 피는 짧으면 수일, 길어야 한 달이면 자신의 골수에서 만들어진 제 피로 갈음되지만, 거의 죽다 살아난 중증외상 환자들이 사고 전과 달리 좋은 방향으로 인성 변화를 보일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선한 의지와 함께 기증된 선한 이들의 좋은 피가 수혈받은 사람에게 정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나는 검사 결과를 설명한 끝에 사회생활로의 복귀를 이야기했다.
― 이제 몸이 허락하는 한 가벼운 일은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전보다는 아직 많이 힘들 테니 무리는 하지 마세요.
나는 약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이제는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이세요?
남자가 여자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둘은 마주 보며 엷게 웃었다.
― 전에 하던 일들이 좀 그런지라…….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다시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 고향에 내려가려고요. 이 친구하고 함께요. 농사라도 작게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이젠 다르게 살아볼 생각입니다.
도시의 밤거리가 익숙하던 두 사람이 흙을 만지는 고된 노동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으나, 나는 그런 우려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그래요, 처음엔 좀 힘들 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좋아질 겁니다.
―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외래 진료실을 떠날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모든 환자가 수술 이후 큰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로 수술을 받고 비교적 쉽게 회복되는 환자들 가운데 불사조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하는 이들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정말 사선을 넘어온 환자들은 분명 어떤 변화를 보인다. 극심한 신체 변화가 마음에 영향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변화의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중환자실에 머무는 동안 집중치료 시 사용되는 고농도의 안정제와 진통제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사선을 넘나든 사람은 변할 수 있다’라는 점은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환자가 어떤 사람이든 적절한 수술적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도시를 떠난 두 사람의 소식은 그 뒤로 전해 듣지 못했다.

윤한덕에게 나는, 그를 수없이 찾아와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는 민원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였고 전공의 수련 기간 중 외과계 중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죽어나가는 모습을 너무 많이, 지겹게 봐왔다고 했다.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각 임상과목 간의 협진은 고사하고, 생명이 위급한 외과계 응급환자가 병원 문턱을 넘어온 이후에도 적절히 치료받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윤한덕은 그때의 응급실을 ‘지옥’ 그 자체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밀어 넣었을 것이었다. 지옥을 헤매본 사람은 셋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화염을 피해 도망치거나 그 나락에 순응하거나, 그 모두가 아니라면 판을 뒤집어 새 판을 짜는 것. 떠나는 것도 익숙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나 세 번째 선택은 황무지에 숲을 일구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윤한덕은 셋 중 마지막을 택했고,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를 맡아 전국 응급의료 체계를 관리하고 있었다.

육군 보병사단의 대위라고 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맑았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보아온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목소리는 크지 않아도 울림이 있어 그 음성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정경원을 보면서 욕심이 동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으나 그런 마음을 애써 눌렀다. 좋은 사람은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정경원에게 그간의 내 경험과 암흑 같은 미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내가 두서없는 말들을 끝냈을 때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나는 내 업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을 뿐 내가 하는 일에 ‘소명’이나 ‘사명’ 같은 단어를 대입해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병원이다. 신의 존재는 나에게 멀었고 그리스도적인 삶이 외상외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경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곧은 심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를 이 사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거듭 설득했으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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