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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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한 송이가 녹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아주 짧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길 수도 있을 것 같아. 순간과 영원은 같다고 한 것 같기도 한데,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나도 생각나지 않아. 아니 어디서 들은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어. 순간은 아주 짧지만 그때는 자기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기도 하지. 좋은 순간뿐 아니라 나쁜 순간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잖아. 어떤 때를 되풀이해서 생각하는 일이 여기에 나오던가. 맞아, 비슷한 말 이 소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 나와. 희곡을 어떻게 써야 할지 k가 자꾸 생각하고, 열일곱해 전에 알게 된 k가 다니는 직장 선배 경주 언니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자꾸 생각한다고 해. 어떤 이야긴지 정리해야 할 텐데. k가 예전에 다닌 회사는 여자는 결혼하면 일을 그만둬야 했어. k가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한 사람이 그러지 않으려고 시위를 하지만 잘 안 돼. k가 쓰는 희곡과 예전 일은 상관없지 않겠지만 그걸 어떻게 이어서 말하면 좋을지. 생각나는 건 k가 자신은 ‘아픔 밖에 있다’고 한 말이야. 이건 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회사가 하는 남녀차별 때문에 싸운 사람 많겠지. 남녀차별은 회사에서만 하는 건 아니지만 남녀차별을 크게 말하지 않고 잠깐 생각하게 해. 소설 속에서 남녀차별이 일어난 때는 오래 전이야.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 그래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군. 자신이 힘들지라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도 나중에 아쉬워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봐. 이런 이야기가 아닌가. 죽은 사람을 잠시라도 생각하자일까. 처음에는 그쪽으로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어. 아쉬워하는 건 황정은이 쓴 <웃는 남자>일지도 모르겠어. 버스 사고가 났을 때 도도는 디디가 아닌 자기 가방을 잡은 자신을 탓해. 디디는 죽었어. 도도가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디디 아버지는 함께 일하던 사람이 사고가 나고 병원에 실려갈 때, 그 사람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자 아무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 이 말은 세월호 때문에 한 말일까. 도도가 생각하는 게 하나 더 있군. 도도는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그걸 타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쓰러져. 도도는 버스가 왔으니 버스를 탄다고 생각해. 버스는 또 올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도도처럼 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그런 일을 마주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나도 있군.

 

 이 책을 보고 소설가는 왜 소설을 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 쓰고 싶어서,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고.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아.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소설로 쓰려고 할까, 누군가의 삶을 말하고 싶기도 하겠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 김경숙 소설 <맹지>에서 ‘나’는 소심한 사람인데 화를 내기도 하더군. 실제 그런 사람 있을 거야. <이모>(권여선)와 <임시교사>(손보미)에 나오는 이모와 P부인은 어쩐지 비슷해. 비슷한 건 결혼하지 않고 식구를 위해 돈을 버는 거야. 이모는 시간이 흐른 뒤에 식구와 연락을 끊고 잠시 혼자 살지만 암으로 죽어. P부인은 임시교사로 지내다 그것을 할 수 없게 되고는 보모를 해. 그때 P부인은 잠깐 기대를 했던가봐. 아이 엄마가 아이를 맡기면서 P부인한테 ‘내 집처럼 생각하세요’ 하는 말을 했거든. 정말 P부인이 그렇게 하니까 아이 엄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지.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하는 말이다 생각하는 게 좋겠어. 이모와 P부인은 좀 다르기도 하네. 이모는 식구를 떠나 살고 싶었지만, P부인은 식구 안에 들어가고 싶어했어.

 

 황순원문학상이 있다는 건 이 책이 나왔을 때 안 것 같아. 어느새 열다섯번째인데,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니. 한강 소설이 상을 받아서 더 알려진 건 아닐까 싶기도 해. 작가 이름으로 주는 상에 어떤 특성은 있을까. 어떤 기간(거의 한해) 동안 나온 단편소설에서 고르는 거겠지. 김솔이 쓴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는 한국 사람이 나오지 않아. 전에 만난 것도 그랬는데, 김솔은 늘 이렇게 쓰는 걸까. 겨우 두편 보고 어떻다 생각하면 안 되겠지. 한국 사람이 쓰는 소설이라고 해서 한국 사람만 나오라는 법은 없군.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기호)에 나오는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한테 화를 내는가’ 하는 말을 보니,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이 생각났어. 권순찬은 어머니가 진 사채빚 칠백만원을 갚았는데, 어머니가 칠백만원을 갚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알게 돼. 권순찬이 어머니한테 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권순찬은 어머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겠지. 돈을 받으러 간 곳에는 사채업자는 없고 가난한 사채업자 어머니만 있었어. 권순찬은 사채없자가 오기를 기다렸어. 그걸 안타깝게 여긴 아파트 사람은 사채업자 어머니를 돕는다면서 돈을 모아서 권순찬한테 주지만 권순찬은 받지 않아. 그건 나도 그럴 것 같아. 권순찬이 돈을 받지 않고 여전히 아파트 앞에 있자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해. 얼마 뒤 권순찬은 남자들한테 끌려가고 더는 오지 않아. 제목에 나오는 착한 사람들은 정말 착한 걸까. 그저 착하게 보이려는 것뿐인 것 같아. 자신이 그런 일을 겪으면 다를 텐데.

 

 김애란 소설 <입동>에서 부부는 자기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사고로 잃어. 어렵게 가진 아이였는데 그렇게 되다니. 둘레 사람은 부부 마음을 모를 거야. 부부가 슬픔에 빠진 모습을 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지 않았을까. 보상금 받은 것도 안 좋게 본 것 같아. 세상에는 아이를 사고로 잃고 사는 사람이 많겠지. 2014년 4월 16일에는 더했지. <어제의 일기>(정소현)는 사고로 머리를 다치고 기억을 잘 못하게 된 상현이 중학교 친구 율희를 만나고 그때 일을 생각하는 거야. 잊고 있던 일을 시간이 흐른 뒤에 생각하는군. 율희는 죄책감 때문에 상현한테 이런저런 물건을 준 건 아닐지. 상현은 중, 고등학생 때 아이들한테 괴롭힘을 당했어.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그것을 참기보다 목숨을 끊으면 더는 그런 일이 없겠다 생각하고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려. 상현은 죽지 않고 장애인이 돼. 상현은 나름 잘 살고 있었는데, 율희나 다른 동창은 상현을 불쌍하게 여겨. 아니 상현이 그렇게 된 건 자신들 탓이 아니다 생각하려 한 거군. 자신이 본 일이 아닌 일은 그대로 믿지 않는 게 좋을 듯해. 중학생 때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까.

 

 조해진 소설에 나온 서 군은 서경식 님 형일까 했는데 맞더군. 고모는 서 군이 간첩으로 잡혀간 걸 자신 탓으로 여겼어. 고모는 서 군이 맡긴 원고를 서 군이 다니는 대학에 가서 서 군을 아는 사람한테 맡겼어. 그 뒤 서 군은 간첩으로 잡혀가. 아니 어쩌면 그전이었을지도.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이 짧다 해도 한 사람은 상대를 좋아할 수도 있겠지. 둘 다 같은 마음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어지러운 때가 아니었다면 고모는 서 군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았을 거야.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어. 고모가 서 군을 좋아해서 그동안 혼자 산 건 아니겠지만. 죄를 갚는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닐지. 고모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고도 서 군만은 잊지 않았어. 고모와 서 군이 만나기는 하는데 제대로 만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그래도 고모 마음은 좀 편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이제야 할 말을 했으니까, 아니 말보다 오래전에 건네지 못한 것을 건넸다고 여겨설지도. 대체 무슨 말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쓴 나도 그래. 소설 제목을 ‘사물과 작별하기’라고 했다면 더 나았을 텐데 싶어. 사물이라고 했지만, 이건 어떤 때나 기억일지도 모르겠어.

 

 

 

희선

 

 

 

 

☆―

 

 “모든 게 화무십일홍인 거라. 후회하고 원망하고 애끓이면 뭐해.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다 지나가. 어차피 관 뚜껑 닫고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

 

 (……) 이해할 수 없이 복잡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다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제의 일들>에서, 356~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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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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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는 모두 집에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옷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바느질 품을 파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게 일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느질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기계 때문에 사라지리라 생각한 것에서 아직도 남은 게 많을 겁니다. 얼마 없어서 그것을 별나게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손으로 하면 더 멋지게 보일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바느질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저는 보통인 것 같아요. 아주 못하지도 아주 잘하지도 않는. 지금 생각하니 옛날에 태어났다면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할 일이 얼마 없었잖아요. 바느질도 거의 여자만 했습니다. 수놓기도 그렇군요. 다른 나라도 옛날에는 바느질과 수놓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겠습니다. 입는 옷이 다르니 그랬겠네요. 지금은 퀼트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느질은 단순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수행과도 닮았어요.

 

 같은 일 하나를 되풀이하는 건 좀 지루하고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으면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거 생각하지 않고 일을 했겠습니다. 지금도 아주 다른 건 아니지만. 자기도 모르게 한가지 일을 몇시간 동안 하겠지요. 책을 읽을 때는 한시간에 한번은 잠깐 쉬어야 합니다. 저도 그걸 알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집중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책 읽으면서 잠깐 다른 생각도 합니다. 책을 오래 읽어서 안 좋아지는 건 눈 하나일까요. 오래 책을 보다 고개를 들면 다른 게 잘 보이지 않더군요. 책읽기는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군요. 이건 일이라 말할 수도 없는 거네요. 바느질하는 걸 보니 책읽기가 생각났어요. 책읽기뿐 아니라 소설(글)쓰기도 떠올랐습니다. 누비 바느질 한땀 한땀이 소설 한자 한자 같았어요. “천년을 해도, 만년을 해도 늘지 않는 게 바느질이지. 바느질에는 뾰족한 수라는 게 없어.  (511쪽)” 하는 말은 글쓰기와 닮았지요. 여기 나오는 사람에서 한사람 금택은 바느질 한땀 뜨는 게 무척 힘들다고 했어요. 글을 쓰다 알맞는 말을 찾으려고 밤을 새우는 사람도 있다지요. 얼마나 거기에 빠지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 하나에 빠져서 하는 것도 멋지다고 봅니다. 바느질은 좀 힘들겠지만, 이걸 할 때는 중간중간 쉬고 가볍게 운동도 해야 해요. 이 말은 금택과 화순 어머니 수덕한테 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일을 집중해서 하는 사람을 보면 귀기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금택은 어머니가 처음부터 누비 바느질을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바느질을 잘 못한 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어요. 어머니한테도 바늘에 찔리고 누비 바느질을 잘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수덕은 그 일을 금택이나 화순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금택은 어머니한테서 누비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했는데 배우지 못하고, 화순은 어머니와 금택을 떠나려고 대학을 먼 곳으로 가지만 바느질을 해요.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 많은 걸 금택한테 의지하면서도 바늘땀만은 자신이 떴습니다. 어머니는 금택과 화순이 자신처럼 바느질하고 살지 않기를 바란 건지 스스로 배우길 바란 건지. 어머니는 말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화순은 대학에 다니고 이론을 배워서 혼자 했어요. 금택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몰래 누비저고리를 지었어요. 바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어머니 수덕이 한 건 누비 바느질로 주로 누비저고리를 지었습니다. 제가 아는 누빔질은 간격이 넓었는데 인터넷에서 누비저고리를 찾아보니 누빔질 사이가 좁더군요. 그냥 저고리를 짓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겁니다. 그걸 수덕은 서른해 동안 했네요.

 

 여기에는 수덕 금택 화순 세사람뿐 아니라 한복 짓는 사람과 바느질 품을 파는 사람 수의 짓는 사람 수놓는 사람도 나옵니다. 책 제목처럼 바느질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군요. 시대는 60년대부터예요. 한국에 재봉틀이 들어온 건 언제인지. 그게 들어오고 많은 딸이 봉제공장에서 일했습니다. 70년대에는 공기도 좋지 않은 곳에서 종일 일해서 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지요. 재봉틀 때문에 바느질은 뒤로 밀려났습니다. 그래도 수덕은 바느질로 쌀을 사고 딸 둘을 키웠어요. 시간이 흐르고 어떤 사람은 한복을 짓다 명장이 됐습니다. 장인이나 명장 이름은 좋지만 그렇게 되려면 같은 일을 아주 오래 해야 합니다. 수덕은 어떤 마음으로 바느질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봉제공장에 다니다 재봉틀에 손을 다치고 바느질을 배웠습니다. 재봉틀 바늘은 무섭지만 바늘은 무섭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수덕은 누비 바늘을 받고는 그 바늘이 자신을 삼킬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수덕이 누비 바늘에 사로잡힌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홀로 두 아이를 키우려고 누비 바느질을 했지만 그것을 좋아한 것이겠지요. 딸인 금택과 화순은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 다르면서도 비슷한 길을 갔습니다.

 

 금택과 화순은 성이 다릅니다. 둘은 어머니한테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요. 한번 버림 받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요. 수덕이 금택과 화순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았는지, 아니 몰랐겠습니다. 알았다면 자기 일만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말했겠지요. 예전에는 거의 다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 않군요. 수덕이 말을 좀더 했다면 좋았을 텐데 싶습니다. 금택은 자신이 어머니 딸이 아니다 여겼거든요. 금택과 화순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바느질하는 것이라 해야 할까. 금택은 어머니처럼 되고 싶어하더군요. 저는 그걸 보면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가끔 어떤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것을 훔치고 싶다고도 하잖아요. 이상하게 저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괜찮은 건 아니고, 제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요. 금택을 보고 자신을 좋아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깐 하고, 다른 사람이 되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바느질은 소설쓰기와 닮았습니다. 김숨이 바느질하는 사람 이야기를 썼지만 소설쓰기도 말한 것 같아요. 김숨은 바늘땀을 뜨듯 소설을 쓰겠습니다. 이것을 보고 지금까지 잘 몰랐던 것을 알기도 했어요. 바느질이라는 깊은 세계. 무엇이든 깊이 파고들면 다른 걸 볼 수 있겠군요. 하나를 평생해도 잘 모르고 별로 늘지 않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자신을 자로잡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사는 게 좀 낫겠지요.

 

 

 

*더하는 말

 

 아무리 세상이 빨리 돌아간다 해도 모두가 그 속도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바느질은 천천히 하는 거군요.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인공지능이 글을 쓸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요. 앞으로 없어지는 것이 많겠지만 살아남는 것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글쓰기도 남지 않을까요. 글은 머리로만 쓰는 게 아닙니다. 몸으로도 써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다니. 자신이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쓰는 게 몸으로 쓰는 거겠지요.

 

 

 

희선

 

 

 

 

☆―

 

 “누비 바느질이나 배워보든가.”
 .
 .
 .

 

 “얼마나 배워야 하는데요?”

 

 “못해도 10년은 배워야 그냥저냥 지을 수 있지. 남보다 잘 지으려면 어디 10년으로 되나. 평생을 해도 끝이 나지 않지.”  (5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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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6 02:02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478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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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 북회귀선 툰드라 캄차카 반도 일각고래 북해 인도양 날짜변경선. 난 이런 말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여기에는 내가 모르는 말이 더 있을지도 모를 텐데 다 적지 못했다. 난 어딘가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국경을 넘을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겠다. 국경을 넘는다고 크게 바뀌는 건 없겠지만. 선 하나로 나라가 바뀌는 건 신기할 것 같다. 그 선은 보이지 않겠구나. 어딘가에서는 그것을 쉽게 넘을 수 있겠지만, 어딘가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시에 저런 말을 쓴 건 허연이 그런 곳에 갔다 와서겠지. 어딘가에 다녀온 일과 자기 삶을 이어서 쓰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시인은 그런 걸 잘할지도 모르겠다. 시인만 그런 건 아니구나. 소설가도 다른 나라에 다녀오거나 어딘가에 다녀오면 그 경험을 소설로 쓴다. 경험한 대로는 아니지만. 바로 쓰는 사람도 있고 시간이 흐른 뒤에 다른 것과 함께 떠올라서 쓰는 사람도 있겠지. 별일 없는 일상도 시나 소설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것을 잘 보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내는구나.

 

 어딘가에 꼭 갔다 와야 좋은 건 아닐 거다. 그래도 많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하겠다. 본다 해도 그것을 말로 나타내기는 어려울 거다. 어딘가에 가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했다. 난 좋아하는 것도 많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얼마 없고 친구도 별로 없고……, 별로 없는 것만 말하다니. 뭐든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 내가 가진 게 얼마 없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친구가 많으면 모두한테 마음 쓰기 힘들지 않을까. 하고 싶은 게 많아도 다할 시간이 없어, 할 거다. 내가 게을러서 그렇구나. 부지런한 사람은 사람도 부지런히 만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시간을 쪼개서 즐겁게 하겠다. 그렇게 해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쉽게 지치는 사람도 있다. 몸보다 마음이. 어느 하나만 좋은 건 아니다. 이건 다들 아는 거구나. 자신한테 맞는 걸 알고 그렇게 살면 되겠지. 자신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잊지 않으면 더 좋겠다. 내가 잊어버려서 이런 말을 했나보다.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가 뭍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다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로 나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자세>, 23쪽

 

 

 

 처음 이 시를 보았을 때는 ‘기다림’이라는 말이 먼저 보였다. 지금은 북극곰과 늙은 바다코끼리가 보인다. <동물의 왕국>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다. 갑자기 그런 거 찍으려면 시간 많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극곰이 늙은 바다코끼리가 죽기를 기다리는 영상 있을까. 사흘 밤낮을 기다려도 죽지 않는 것도 있다니. 그 뒤에 북극곰은 무엇을 먹었을까. 새끼도 있는데. 지는 것도 받아들이기, 이건 배워야 하는 자세다. 늘 지기만 하는 사람은 마음 안 좋겠다. 아니 삶은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면 괜찮겠지.

 

 

 

 살고 싶을 때 바다에 갔고, 죽고 싶을 때도 바다에 갔다. 사라질세라 바다를 가방에 담아 왔지만 돌아와 가방을 열면 언제나 바다는 없었다  (<조개 무덤>에서, 66쪽)

 

 

 

 바다를 어디에 담아오면 사라지지 않을까.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사진으로 담으면 사라지지 않겠다. 실제 보는 바다와는 다르겠지만. 동영상으로 담으면 파도소리는 들을 수 있겠다. 살고 싶을 때와 죽고 싶을 때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지. 아니 둘 다를 좋아하겠다. 바다는 바다대로 좋고 산은 산대로 좋다.

 

 시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건 늘 그렇구나. 평소에 보기 어려운 일 같기도 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허연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잘 모르는 것뿐이다. 알듯말듯한 그런 느낌이다.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도 있는 것 같고 남보다 빨리 기대를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시에는 아픈 마음을 더 쓰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만난 기쁨을 쓰기도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일을 쓰기도 한다. 자신의 아픔을 시로 쓰면 그게 덜할까. 조금은 낫기도 하겠지. 시를 생각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밤이 깊어 간다. 여린 짐승들의 머리 위로 꿈들이 떠다니고, 그 꿈들은 언젠가 달렸을 그 국도를 찾아 헤맨다. 왜 길들을 잃었을까. 여린 짐승들은 원래 길을 잃게끔 되어 있었던 것일까. 여린 짐승들을 위한 표지판은 따로 없었던 것일까. 여린 짐승 몇이 잠들어 있는 밤이다.  (<안개 도로>에서, 24~25쪽)” 여린 짐승은 힘없는 짐승이기도 하겠지만, 사람 같은 느낌도 든다. 허연은 사람을 여린 짐승이라 생각하는 건 아닐지. 아픔 슬픔 죽음 같은 것은 자신한테 닥치치 않으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시로 적겠다. 어떤 일을 썼는지 내가 다 알아보는 건 아니고 감정만 느낄 뿐이다. 그거라도 느끼면 다행일지도. 한사람이 겪은 일이라고 해서 그 사람만의 일은 아니다. 똑같지 않다 해도 사람은 비슷한 일을 겪는다. 시를 보고 여러 감정에 공감하는 것도 괜찮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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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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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부터 여기에 많은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작가가 한 말에서는 51명이라고 했다. 책을 보기 전에 세어 봤다면 오십이 아니잖아, 했을지도 모를 텐데. 51명 이름이 차례에 나오지만 그것보다 더 많을 거다. 제목으로 쓰인 사람과 상관있는 사람도 있으니. 난 사람이 많이 나오면 잘 못 보기도 한다. 아니 보는 건 괜찮은데 책을 읽고 어떻게 쓰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이건 별로 안 좋은 버릇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보면서 한두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다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책 속에 나오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산다. 많은 사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늘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생각하지 않았을 때가 더 많았을 거다. 나 또한 드러나지 않게 사는 사람이다. 그림 퍼즐에서 한 조각이라도 없으면 그림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세상에 나 한사람이 없다고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니 조금 슬프구나. 그래도 한사람이 그렇게 하찮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이 소설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많은 사람 이야기다.

 

 세상 사람은 서너 사람만 거치면 거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 나오는 사람을 보면 그 말이 떠오른다. 모두 다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둘 아니 서너 사람을 건너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모두 병원과 상관있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사무원 그리고 아픈 사람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 식구 친구 친척도 있다. 병원을 중심이라 말하기는 어려울까.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도 의사 간호사 말고 더 있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는 사람, 시신을 옮기는 사람. 시신을 옮기는 사람 이야기는 어쩐지 슬프다. 본래는 두사람이 2교대로 해야 하는데, 한사람이 일을 그만두고 한사람만 남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뭐라 말하면 그 일을 못하게 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쉬지 않고 혼자 일했다. 아무리 병원이 힘들다 해도 한사람한테만 일하게 하다니. 어쩐지 그런 병원 정말 있을 것 같다. 그나마 그걸 알게 된 인사과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뒤에는 바뀌었겠지. 그러기를 바란다.

 

 아쉽지만 여기 나온 사람 이야기 다 기억하지 못한다. 읽을 때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 텐데. 한사람 한사람 이야기가 재미있고 따듯하고 슬프기도 하다. 사람한테는 저마다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뿐 아니라 나이 많은 사람도. 식구가 나올 때는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건축현장이 위험해서 아들이 다른 일을 하기를 바라는데 아들은 건축가가 되고 싶어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그 일을 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게 좋아서였다. 그러면 그 말을 하면 좋을 텐데. 얼마전에 본 《보건교사 안은영》에도 건물을 짓는 곳에서 크레인에 깔려 죽은 사람이 나왔다. 사고가 나지 않게 하려면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 돈을 아끼려고 오래되고 낡은 기계를 쓰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건물 짓는 거 하니 층간 소음 때문에 안 좋은 일을 겪는 사람이 생각난다. 그런 거 보니 요즘 아파트 괜찮을까 싶다. 아직 이사할 계획도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전투기 조종사였던 사람이 닥터 헬기를 조종하고 여러 사람을 구하고 그 헬기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 잠깐 나오면 그 사람이 조종하는 거겠지 생각했다.

 

 누군가한테 친절을 베풀면 보답이 돌아오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남한테 잘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남한테 친절하면 자기 마음도 좋지 않는가. 가깝지 않고 일할 때 잠깐 만난다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이 베푼 친절이 자신한테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자기 둘레 사람한테라도 갈 거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람은 아픈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갔다. 나중에 그 할아버지가 그 사람한테 장학금이라고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 돈을 맡겨두었다. 앞에서 말한 닥터 헬기를 조종하게 된 사람은 군에서 다른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하지 않게 했다. 그 일을 고맙게 여긴 사람이 닥터 헬기 일을 그 사람한테 말했다. 캐디로 일하는 사람은 손님이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어서 보답하려다 다쳤다. 그 손님은 나중에 그 사람한테 자신과 일해보자고 한다. 손님이었던 그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에서 가장 잘한 일이 처음 결혼한 사람과 헤어진 거였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그렇게 됐는데 자기 사업을 하고 잘됐다. 잠시 아픔이 있었지만 나중에 잘되기도 하는구나. 두번째로 결혼한 남편과 딸하고도 잘 지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은 우리와 그렇게 멀지 않은 사람이다.

 

 소설 속 사람이 한곳에 모이기도 한다.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했는데 괜찮게 끝났다. 현실에서도 그런 걸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내가 모르는 거고 실제로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고가 일어나도 사람이 죽지 않으면 크게 말하지 않겠다. 큰 사고가 일어나도 모든 사람을 빨리 구하면 좋겠다. 시간이 흐르고 사고가 난 곳이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고 예전에 무슨 일이 하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 그건 바로 앞만 보기 때문이다. 지금을 생각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멀리까지 내다봐야 하는 일도 있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구나.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니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희선

 

 

 

 

☆―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이설아>에서, 266쪽)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상에게 화내는 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달라지면 어쩌지?  (<김시철>에서,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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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베르트와 나무

  고규홍

  휴머니스트  2016년 05월 02일

 

 

 

 

 

 

 

 

 

 

 

 

 

 

 

 사람은 눈으로 많은 걸 본다. 그래선지 자신이 보지 않은 건 믿지 않기도 한다. 자기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믿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데 의지할 것 같다. 말로 여러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더 빨리 알기 쉽기도 하고, 말로 듣고 상상할 때보다 실제 보고 덜 감동하기도 한다. 그건 소설을 영상으로 만들었을 때 자주 느낀다. 소설보다 영상을 먼저 보면 좀 다르지만. 영상을 보고 소설을 찾아보는 사람은 많다. 나도 그런 편이다. 반대로 소설을 보고 영상을 보는 사람은 적을 것 같다. 지금 세상에 볼 게 많기는 해도 모두가 보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보기 듣기뿐 아니라 다른 감각도 쓸 거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만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건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세상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몸에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장애가 있기도 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한사람 한사람 다 다를 거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도 사람 수만큼 있겠다.

 

 앞에서 넓게 세상이라 했는데, 이 책은 나무를 만나는 이야기다. 눈이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 김예지와 나무 인문학자 고규홍이 함께 나무를 만난다. 함께라고 했지만 고규홍이 김예지가 나무를 만나게 돕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김예지한테 나무는 장애물이다. 지금까지 김예지는 나무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어쩌면 이건 김예지만 그런 건 아닐 거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은 나무, 숲을 보고 마음을 위로받기도 한다. 보이는 사람한테는 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나무가 많은 숲에 가면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나무를 보면 그 자리에 있지만, 나무 속은 움직일 거다. 그걸 들을 수도 있다니. 난 한번도 못 들어보고, 나무 가까이에 가지 않고 멀리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만 나무를 만지고 냄새 맡는 건 아니다. 어린이도 그렇게 나무를 만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든 나무든 어린이 마음으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이겠지.

 

 

 

                      

 

 

 

 

 김예지는 두살 때 눈이 보지이 않게 됐다. 난 내가 두살 때 무엇을 봤는지 잘 모른다. 많은 사람이 그럴 것 같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빛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빛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느낌이 다를 거다. 보이는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아주 캄캄하다 생각한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살아난다. 이렇게 말했지만 그런 게 어떤지 잘 모른다. 숲에 가면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난 한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은 없다. 나무 벌레 새 소리가 들릴까.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언제 숲에 갈지. 숲이라기보다 산에 가야 한다.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사람이 민병갈이라고 해서 한국 사람인가 했는데 미국 사람이었다. 예전에 이름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다. 김예지는 그곳에 가서 나무를 보고 사진도 찍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진을 못 찍을 건 없기는 하다. 김예지 자신은 그것을 느낌으로만 알겠지만, 그걸 보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겠지.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많은 악기를 나무로 만든다. 예전에도 생각했는데 나무로 악기를 맨 처음 만든 사람 대단하다. 아주 오래전에는 두드리기만 하지 않았을까. 김예지가 치는 피아노도 나무로 만든다. 고규홍과 나무를 만난 일은 김예지한테 좋은 경험이 되었겠다. 나무로는 악기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만드는데, 나무는 사람이 만드는 것에서 무엇이 되는 걸 가장 좋아할까. 그냥 나무로 살다 나무로 죽는 게 낫다 말할지도. 아니 이 생각은 별로다. 나무로 살다 나무로 죽는 것도 괜찮고 다른 모습이 되는 것도 괜찮다. 사람도 다 생각이 다르고 다르게 산다. 김예지는 음악을 듣는 것과 나무를 보는 게 닮았다고 했다. 책을 읽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도 비슷하다.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것을 바탕으로 책을 보고 느끼기도 한다. 음악도 비슷하다. 나무를 보는 것도 다 똑같지 않을 거다.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다. 이 말 처음 하는 건 아니구나. 알아도 잘 잊어버린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대중음악이다. 고전음악은 잘 모른다. 그런 것도 관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텐데. 나무는 관심을 갖고 잘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을 찾아서 듣지 않는다 해도 들리면 무슨 곡일까 하는 생각은 해봐야겠다. 잘 모르지만 슈베르트 음악과 나무 어울릴 것 같다. 아니 나무는 어떤 음악과도 잘 어울릴까. 김예지가 나무를 만나는 모습 보기 좋았다. 수목원 같은 데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도 나무를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더하는 말

 

 슈베르트와 나무 뭘까 싶겠다. 내가 말한 건 겨우 슈베르트 음악과 나무가 어울리겠다뿐이라니. 고규홍과 눈이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 김예지가 나무를 보고 나중에 연주회를 연다. 그때 김예지가 연주하는 게 슈베르트 곡이다. 김예지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고규홍은 나무 사진을 보여준다. 피아노 연주회를 본 적은 없지만 영상을 보여주기도 할까. 난 그 말을 봤을 때 고전음악에 맞춰 자연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떠올랐다. 실제 연주를 들으면서 나무 사진을 보면 훨씬 좋을 것 같다. 숲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면 더 멋지겠지만, 그건 좀 힘들겠지.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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