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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양장)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소설Y
구병모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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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마법사 이야기를 좋아했다. 요술 지팡이에서 튀어나오는 오색찬란한 불꽃, 저주에 걸려 공중으로 훌쩍 떠오르거나 폭발하는 물건들, 그것들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에는 늘 큰 위험이 따르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마법’처럼 다시 평온이 찾아오면 다 함께 와하하 웃고 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라면 전생에 글자를 배우지 못하고 죽어서 한 맺힌 사람처럼 몽땅 찾아 읽었다. 집에 혼자 있는 날이면 부엌 서랍에서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꺼내 쥐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방방 뛰어다니다가, 밤에는 아무도 몰래 그 젓가락을 베개 밑에 넣어두고 잠들 정도였다. 나도 어쩌면 마법사가 아닐까? 누구나 가졌을 법한,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소망으로 나날이 살이 찌고 뼈가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는 조금 다른 마법사 이야기였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어딘가 낯설고 음침한 기분이 들었다. ‘위저드’라는 단어에 꽂혀서 무심코 책을 펼쳤다가 읽기를 조금 망설였다. 이 마법사는 요술 지팡이도 없고(이게 핵심인데!), 마법의 주문을 외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신비한 마력이 담긴 빵을 만들어 파는 제빵사다. 언젠가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새가 인간으로 둔갑해 함께 일하는 빵집에서, 악의와 몽환을 철저히 숨긴 채 소름 끼치도록 평범한 외형을 두르고. 두꺼운 고서들이 담긴 책장의 먼지 냄새나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눅눅한 냄새, 신비한 동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숲의 무시무시한 냄새가 아니라 달큼하고 고소한 빵 냄새라니. 하지만 나는 마법과 모험에 집착하는 열네 살의 나이였음에도 그 소설을 도무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상야릇한 빵 냄새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아니면 책에서 정말로 빵 냄새가 솔솔 풍겨서였을까? 오감을 자극해 생생하게 펼쳐지는 장면 속으로 여기저기 던져놓는 구병모 작가의 문장들에 한동안 속수무책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어린 시절 품었던 남모를 소망의 주어를 난생처음으로 수정해 보기도 했다. 마법사는 어쩌면 내가 아니라 구병모 작가가 아닐까?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마는 이야기에 익숙해진 나머지, 나는 주인공이 불행해지는 꼴을 견딜 수 없었다.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성장하는 주인공이 마침내 웃는 모습이라도 보는 것이 힘겨운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읽어온 독자들의 특권이 아닐까, 하는 오만한 생각도 가졌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끄트머리에서 양 갈림길처럼 나눠진 두 개의 결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껏 단일한 해피엔딩만을 고수해왔기에 책을 덮고 나서는 두 결말 중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행복해진다는 건가, 아닌 건가? 10년이 넘게 흘러 다시 책을 집어 든 지금, 나는 그때의 불평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징벌 같은 불행이 내려지기를, 마법사는 계속해서 빵을 굽고 세계의 균형을 지키기를, 주인공은 낙인이나 오해 같은 인생의 어떠한 오점도 묻지 않은 채 표백된 듯 말끔한 인생을 살기를 누구보다도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개의 결말을 다시금 읽고 난 뒤 알게 되었다. 어딘가에 확실한 행복을 맡겨놓은 것처럼 구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걸. 그건 현실에서도 보장되지 못하는 것이니까. 반면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열광하던 이야기의 성질이 조금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지금의 나는, 뭐든지 해결해 줄 것 같던 마법이 한계에 부딪혀 영영 소용없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다. 

환상을 다룬 이야기는 끝내 세상이 환상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는 걸 이제 안다. 그래서 희망찬 결말에 기대를 걸거나 맹목적으로 낙관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이루게 해준다는 말을 가장 경계하는 일은 어른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배운 쓰라린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른이 된(혹은 여전히 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도 나는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마법의 존재를 마치 부서진 머랭 쿠키 조각처럼 남겨두었고, 그것이 이 희망 없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나가게 해줄 단 한 번의 기억이라면, 그러니까 길을 지나다 무심코 맡은 빵 굽는 냄새로 마법사를 소망했던 어린 시절의 불평이 떠올랐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린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능청스레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사는 동안 겪는 모든 일들이 정말 내가 조정한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날은 어처구니가 없거나 억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땐 그저 마법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되는 일이다. 물질세계와 비물질 세계의 불균형으로 인해 숨이 붙어있는 모두가 그 책임을 조금씩 나눠지고 있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악마의 시나몬 쿠키가 효능을 제대로 발휘했고 또 누군가 타임 리와인더로 시간을 되돌렸기에 같은 실수나 행운을 두 번씩 반복하는 것이라고. 마법처럼 힘겨운 나날이 찾아오면, 다시 마법처럼 선택을 내려 현재 상태를 뒤집어버리면 된다고. 그러면 삶은 달고 둥근 대보름빵처럼 어떻게든 데굴데굴 굴러갈 것이라고. 마법이 끝내 실패하는 이야기에서도 여전히 마법을 긍정하는 어른은 Y든 N이든 모든 알파벳을 총동원한 수많은 미래라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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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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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혼자 제주를 찾았을 때 제법 과감해지기로 했다. 빼곡한 계획표를 버리고 자유롭게 방황했다. 무섭게 짓누르는 폭양 아래서 오래도록 걸었다. 손선풍기의 미약한 바람에 의지해 한참 걷다 한 책방을 발견했다. 아늑하고 깔끔한 그곳은 뼈가 시큰거릴 정도로 시원했다. 여유롭게 책장을 구경하고 고른 책을 계산하려고 하자 사장님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매대 옆에 놓인 브로슈어를 힐긋거리고 있을 때였다.


“4·3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묻힌 곳이 어딘 줄 알아요?”

 

나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공항 활주로 아래요.”

 

온몸이 세차게 얼어붙었다. 에어컨의 냉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답하거나 고갯짓을 하지도 못했다. 설렘을 가득 싣고 비행기가 가뿐하게 미끄러졌던 어제의 그곳이 떠올라서였다. 솜처럼 가벼웠던 마음 위로 무거운 돌들이 굴러떨어졌다. 나는 배낭에 꽂고 다니던 동백꽃 모양의 배지가 생각났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밤, 인적이 드문 마을과 도로, 거칠 것 없는 들판과 그 너머를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가 전혀 생경했다. 검은 파도를 한참 바라보다 속절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4·3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한강 작가의 신간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여름의 냉기가 기억을 휘감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그 무게의 감각이 남아있었다. 4·3에 대한 마음의 무게가 짧은 탄식에서 끝나지 않도록, 마모되기 쉬운 기억들에 둔감해지지 않도록, 책은 가장 정확한 순간에-올해가 가기 전에-나를 찾아왔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꿈을 꾸는 듯했다. 주인공 경하의 서사는 환상적인 악몽을 통과하는 것 같다. 경하가 오랜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아 제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죽음과 삶을 오간다.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하얀 고난을 몸부림치는 장면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스스로 잘 호흡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감각을 요동치게 하는 문장들이 얇고 날선 바늘로 온 신경에 세밀화를 그려냈다. 허기와 어둠과 고독 속에서 죽어갈지 모르는 인선의 새 아마를 위해 경하와 나란히 눈보라를 헤치듯 이야기--를 통과했다.

 

2부에서 경하는 삶과 죽음 그 어딘가에 놓이게 된다. 먼 서울의 병원에서 위독한 상태로 짐작되는 인선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뜻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둘은 초연하다. 누가 삶에 남아있는지, 혹은 죽음의 빗금 너머에 있는지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선은 자신의 방에 모아둔 기사 스크랩과 사진, 자료들을 보여준다. 점차 쇠약해지다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채 푹 꺼져버린 불씨처럼 곁을 떠난 어머니, 그의 유산. 인선은 정심의 삶으로 제주에서 벌어진 절멸의 역사에 불빛을 비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다중의 화자에게로 이야기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소설이다. 경하에게서 인선으로, 그리고 정심으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본질을 묻는다. 책을 읽으며 경하가 되어보려고 했다. 정심의 사진들을 묵묵히 바라볼 수 있을까? 목격한다는 것은 기억의 책임을 나눠 갖는 일이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이가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움에 책을 떨쳐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내 몫을 다해보고 싶었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다시 길을 잃은 기분이 되었다. 이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빛 한 점 없는 눈보라 속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경하처럼, 나는 오래전 책방에서 느낀 냉기의 한가운데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꺼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촛불을 들고 어둠으로 나아갔던 인선과 경하를 목격해버린, 존엄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통곡 속에서도 숨죽여 삶으로 손짓했던 정심의 얼굴을 알아버린 지금, 무거운 질문 앞에 겸허해지기로 했다.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몫은 삶과 죽음 그 어디에서든 너머로 손을 뻗는 것, 다름 아닌 사랑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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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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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평생 나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 싶어 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은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다." p.68 


주인공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집착에 가까운 보호를 받고 성장한다. 모든 등하굣길을 동행하는 것은 물론, 어머니가 쳐둔 물리적-감정적 경계 안에서만 안온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상은 때로 조급한 마음을 가지게 하고, 억눌려있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아늑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렸을 적 경험했던(목격했던) 고독과 죽음, 연민, 공포, 소스라침, 다정함, 그리고 증오의 감정들은 삶을 구성하는 파편들이 되어 주인공과 함께 자라난다. 그중 '증오'가, 부디 상대에게 피해를 끼쳤으면 하는 마음이, 현재의 '나'를 숨겨진 무언가로 이끌어간다.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증오'의 감정은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향해있다. 어릴 적,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두고 떠난 아버지에게서 '나'는 무엇이든 추궁하고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반면 소설이 현재 속에서 흘러가면서도 과거의 기억들을 들추어낼 때마다, 전혀 새로운 감각들이 해설된다. 주인공이 미처 생각지 못한 '단어'와 '단서'들이 곧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고, 현재의 사건들이 과거의 사건과 밀접하면서도 간접적인 연결고리들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물줄기와 현재의 물줄기가 동시에 흐르는 듯한 느낌은 기묘하면서도 흥미로웠고, 점점 '나'가 알고 싶어 하는 비밀에 가닿을수록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이 소설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는 꽤 밝고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있을 줄 알았다. 분홍, 빨강, 노랑 등의 색깔들이 이루고 있는 각각의 균형 위로 푸른 잎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표지. <작은 동네>라는 제목이 풍기는 분위기마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나 모든 '첫 경험'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반면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는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꼈다. 내가 예상했던 '추억의 방울방울'들은 무겁게 내려앉은 낡은 '먼지'의 풍경이 되었고, 가볍게 튀어 오르리라 생각했던 감정들은 주인공이 겪는 성장통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조각들을 이루어갔다. 전혀 뽑힐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던 나무가 송두리째 뽑히는 장면을 목격하며, 이 세상의 이치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는 주인공의 생이 조금 가혹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을 읽는 초반부에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라는 소설이 떠올랐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읽을 때까지는 전혀 결이 다른 소설이라고 여겨졌다. 오히려 '손보미'라는 작가만의 색깔이 강렬하게 드러난다고 느꼈다. 그의 첫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을 재밌게 읽은 경험이 있어 이번 소설이 더욱 기대되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이었다. 나는 주로 이 책을 지하철에서 읽었고, 주변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문장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흡수되는 경험을 했다. 삶과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오랜 고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지만, 대충 너무 재밌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뜻).


반면 과거를 술회하는 방식에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과거의 '나'가 바라보는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하지만,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나'는 현재에 위치해있다. 그렇다면 과거에 대한 1인칭의 서술이 온전한 '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나'의 관점이 현재의 '나'라는 인물을 통과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둘이 뒤섞인 채로 우리는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았을까? 얼마나 '받고 있을'까? 현재는 과거의 편린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모자이크일까?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현재에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에서, 부디 '나'가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고통의 균질화. 우리를 살게 하는 건 '고통의 균질화'라고. 우리 모두 다 함께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우리들을 계속 살게 하는 거라고. 언젠가 어머니와 내가 뉴스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물속에 갇혀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걸 보게 된 이후로는 그런 단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내가 결혼을 한 후 어머니는 이렇게만 말했다. "지금의 너를 봐, 넌 얼마나 행복하니?"  p.52


"이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들-자식이 죽은-이 너무 많다. 심지어는 그 아이들이 무슨 이유로 죽어야 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이야기들에 익숙해져야만 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이 삶, 이 세상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p.80


"그 세계는 온갖 일들-멋지고 근사하고 추악하고 불경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p.109


"얘, 생각해봐.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언제나 우리가 그 일을 선택할 가능성은 백 퍼센트인 거야. 내 말 알겠지?" p.235


"가증스럽게 축적된 고통. 그것은 추잡한 세계, 내가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세계의 모습 같았다." p.240


"그러니까, 삶의 어떤 부분들은 아무리 내 이름을 지워도 결국은 내게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이러한 종류의 상징들이 으레 그렇듯-진부하고 손상되기 쉬운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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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박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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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여러 차례 나누어 읽어야 했다. 한 번 읽을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책을 덮어도 오래도록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서, 책을 다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떤 단어로 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안타까움으로도, 분노로도, 절망이나 좌절, 혹은 증오의 감정으로도 설명해내기 어려웠다. 그저 참담한 마음이 되어 읽어나갔다. 그대로 덮어버리는 것은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게 되어버린 이상,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은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 입양되어 폴란드에 살고 있는 .’ 한국으로부터 날아온 편지에는 자신의 입양 서류와 함께 친모의 검안서, 사망과 관련된 수사 요약 보고서, 그리고 복지시설의 입소 카드가 들어 있다. 오래전 사망한 그의 친모 은희와 알고 지내던 미연이 아우슈비츠로 향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만, 미연을 만나고도 스치듯 헤어져 결국 준이 한국으로 향한다. 내년 총선 전까지 형제복지원사건의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를 위해 그의 증언을 설득하는 병호와 자신의 기원으로 다가서는 ’, 그와 동행하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증언자 미연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캄캄한 진실로 나아간다.

 

<은희>1975년부터 1987년까지 벌어진 형제복지원사건을 다룬다. 거리의 부랑인들을 데려가 개조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형제복지원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남은 참혹한 인권유린의 역사다. 사회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거나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무고하게 끌려간 그들은 형제복지원이라는 복지시설에서 존엄을 짓밟혔다. 철저한 군대식 구조가 자리 잡은 폐쇄 공간에서 그들은 어떤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맞는 공포와 맞지 않으려는 불안으로 서로를 감시하는 수감자들이었고, 권력을 얻기 위해 서로를 물고 뜯어야 하는 지옥 속 피해자들이었다. 복지원장의 구속 이후에도 수감자들은 시설에서 곧바로 나오지 못했고, 가까스로 탈출한다 해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의 폭력은 오래도록 남아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 남아있다.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적나라했다. 책 앞부분에 경고문이라도 붙여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다.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은 항상 고통을 감수해야하는 것일까.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읽기에 어느 정도의 수위가 반영되어야 할 것인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폭력과 고통에 외면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가슴 속이 참혹해지는 걸 견디는 시간 사이에서 나는 한 단어를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애도.’ 애도는 무엇일까. 존엄이 짓밟히며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야 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과,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은 500여 명의 사람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감히 그럴 수 있다면, 역사를 기억하는 것.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 피해자들의 쉬는 숨이 오늘은 한결 더 편해지길 기도하는 것. 인간의 존엄과 권리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인간되기를 고민하는 것. 인간을 생각하는 것. ‘은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내게 <은희>를 읽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대신 잊지 못할 기억을 지키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절삭된 삶을 가져본 적 없었을 테니까. 집이 한번 무너져본 이들은 어느 날 또 다시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어느 날, 어떤 이유도 없이, 또 다시 감금되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미연을 따라다녔다.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창문을 모두 잠갔고, 텔레비전 속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서야 잠이 들었다. 미연은 공포를 딛고서 비틀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량품 같은 삶, 정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삶이 뭔지 미연은 알 것 같았다.” p.79

         

가방에서 과도를 꺼내 손에 쥐었지만 누구를 찔러야 할지 막막했다. 국가, 사법부, 원장, 소대장, 조장, 아니면 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거지를 치워 깨끗한 사회를 조성하려 했던 보통 사람들, 1년 남짓 소대장 아래서 다른 수용자를 감시하고 밀고한 자신. 그 누구를 죽여야 할까.” p.101

    

모든 사망자는 죽음의 원인이 밝혀진 채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쩌다 시작된 생일지라도 타살과 그렇지 않은 죽음을 구분하여 사회적 장례를 치르는 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다. 하늘이 사람의 시작을 내어놓는다면, 사람이 그 끝을 치러야 한다고,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고.”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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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문지 스펙트럼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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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스펙트럼 #문지스펙트럼서포터즈 #첫사랑

 

분명한 목적 없이 서점으로 들어온 당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을 때우다 신간코너를 발견한다. 여러 책들 틈에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신간이 보인다. 사뮈엘 베케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근데 제목이 첫사랑.’ 당신은 책이 무슨 줄거리인지 예측하는 것보다 자연스레 과거를 살피게 된다.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일까. 당신은 책을 들어 이리저리 살핀다. 작고 가벼워 단숨에 읽을 만한 것 같다. 무덤덤한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 당신은 오래도록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점원의 눈치를 받는다. 결국 계산대에서 구입. 흥분과 기대의 마음으로 책을 펼치는데, 당신은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이 든다. 사기를 당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대체 뭔가?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하면 다시 대사들을 늘어놓고, 쉼표의 개수를 새고 있자면 슬슬 눈이 감기고, 점점 길을 잃는 기분이 들던 차에 소설이 한 편 끝나버린다. 여간 뜻대로 되지 않는 첫사랑. 여간 뜻대로 되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은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일상의 틈바구니로 들어서고, 길게 하품을 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집 <첫사랑>은 흔하지 않은 독서법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은 난감해진다.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문장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내용은 눈으로 읽으면서도 모르겠다. 조금 위축되어 보이고 그로테스크해보이는 이 인물이, 그래서 사랑하는 건가 아닌가. 왜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을 보여주지 않는가. 내가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가. 하지만 옮긴이의 말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음이 오히려 작가가 원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 이해를 포기하는 것. 이해에 가닿는 것. 그것들 사이에서 보이는 여러 반응들은 그 자체로 온당하고, 올바른 독서와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은 의미가 없다.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든, 다 읽든 혹은 중간에 덮고 다시는 열지 않든, 그대로 괜찮다.

 

사뮈엘 베케트가 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던 당시, 그때는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도저히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공연장을 나왔었다. 함께 공연을 보던 친구들은 몇을 제외하고 1막이 끝나자마자 모두 도망쳤고, 나는 그래도 뭔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계속 자리에 남아있었다. 3시간 동안 졸면서, 저 둘이 하는 얘기가 결국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했다. 둘에 대한 해석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류중이다. 다시 그 연극을 볼 엄두는 나지 않아서, 아마 큰 계기가 없는 이상 계속 그럴 것이다. 그나마 <첫사랑>은 다시 읽어볼 의사가 있다. 이해되지 않으면 어떤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조차도, 여간 뜻대로 되지 않는 생의 한 단편이다. 언제는 모든 게 뜻대로 되던 적이 있던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알면 좋을 것.

 

1. 옮긴이의 말을 먼저 볼 것.

2. 책을 읽기 전에 충분한 숙면을 취할 것.

3. 덮어도 좋고, 다시 읽어도 좋고, 너무 목매지 말 것.

4. 그 어디에도 환상을 품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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