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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이승우, <한 낮의 시선>, 사람의 아들들. (추천0 댓글0 먼댓글0)
<한낮의 시선>
2010-01-15
<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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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부정할 수는 있다. 그는 성령으로 수태된 처녀에게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였으며, 단지 마호메트나 자라투스트라와 같은 예언자 중의 한 명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예수의 역사적인 실존 자체까지 부정할 수도 있다. 그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들이 없으니, 그는 성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화적 인물일 수도 있다. 나는 물론 믿는다. 신을 잊고 신앙적으로 불온하게 생활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압도적으로!) 더 많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이십 몇 년간 믿어왔던 것을 이제와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신성이나 실존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신성을 부정하고 실존을 부정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삶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신화적 인물로서든 문학적 인물로서든 그의 삶은 분명히 있다. 그렇게 '쓰여져'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 오디세우스가 있듯, 괴테의 소설 속에 베르테르가 있듯, 성서 속에는 예수가 있다. 현실로서는 실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텍스트로서는 명백히 실재한다. 이 텍스트 속에서 그가 이룬 삶과 서사는 오디세우스보다는 양적으로 빈약하고 베르테르만큼 섬세하게 아름답진 않을지라도, 텍스트를 넘어 현실 삶의 한 부분에 넓게 자리잡고 뿌리내릴 수 있었을만큼 강한 파급력을 지녔다. 그만큼 강렬하다. "인간 구원의 이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신형철, '끝없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 <문학동네 2009 여름>,)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많은 이적들을 내보였고 누구보다 과격한 방법- 행동으로 시대의 정신과 체제를 꿰뚫고 지나갔지만, 그가 이룬 서사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클라이막스이자 완결점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 그는 말이나 기적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간 구원의 이념을 제시한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구원의 이념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과업을 위해 피해갈 수 없는 불가결한 요소였다. 최후의 만찬 중 유다가 예수에게 '인자를 팔 자가(예수를 그 적들에게 넘길 자가) 나입니까' 하고 묻는데, 예수는 이에 대해 '네가 말하였도다' 라고 대답한다(마태복음 26:25). 지젝은 예수의 모호한 대답을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로 읽는다(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는 죽어야 했고 유다는 배신해야만 했다. 이러한 독법은 '다 이루었다'는, 예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과도 이어질 수 있다(요한복음 19:30). 이루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
복음서 곳곳에 나와 있듯, 예수가 이루려 했던 것은 그의 뜻이기 보다는 아버지의 뜻이였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을 이루고 죽기 직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한다(누가복음 23:46). 그가 남긴 서사는 모두 아버지를 위한 것이였고, 그의 삶은 죽어 아버지에게 돌아가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였다. 이것은 그가 이 땅에 내려오기 전부터 예언된 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신의 아들' 아닌 '사람의 아들'로 이땅에 내려와서였을까. 예언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그가 확신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의 아들로서 감당하기에는 그 길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것인지 그는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고 싶다 고뇌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는 이렇게 외친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8:46)."
예수라 하더라도 이럴진대. 하물며 성령이 아닌 호르몬으로 잉태된 사람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에게로 이르는 길은 얼마나 아득한 길일 것인가. 

 

불러일으키다니! 나는 무의식중에 불러낸 하나의 단어에 움찔했다. '불러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불러내진 것들은 불러내질 때까지 누군가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부름에도 즉각 반응하는 것이다. 심지어 불안은 누군가를 불러 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승우, <한 낮의 시선>, 8p

아버지들은 아들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건 그들의 권리고 또 의무지요. 그런데 아들의 권리나 의무는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아버지를 사랑하든 안 하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든 안 했든, 그런 맥락과 상관없이 아들은 아버지를 찾고 받아들여야 하는 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추구하고 화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 그건 순전히 아들의 몫이에요. 아버지는 이미 이 땅에 없잖아요. 그래서 일방적이고요. 아버지는 화해할 의무도 없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는데, 아들은 아버지와의 화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발견해내고, 불러내고, 자기 안에서 화해의 논리를 개발하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좌담 '구심력과 원심력, 그리고 가족의 와해(이승우, 한창훈, 이문재)', <문학동네 2009 여름>, 94p, 이승우의 말. 

 

태어난 모든 것들의 안에는 '아버지'가 웅크리고 있다. 아버지가 '없을'수는 없다. 어쨌거나 있는 것이므로, 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태어난 사람의 아들로서,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작가의 소설은 아버지를 불러일으킨다. 나를 사랑하거나 그렇지 않는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추구하거나 화해하고 용서해야할 아버지를 불러일으킨다. 이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승우의 소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시작한다.
작품 <한 낮의 시선> 속의 화자 '나'는 아버지 없이도 큰 불편 없이 살아왔다. 스물 아홉이 될 때 까지도 '적극적인 예나 적극적인 아니오'에 능숙한 어머니(15p)의 의사에 따라 사는 동안 아버지의 필요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름조차도 모르는 아버지는 아예 없다고 생각했다(24p). 그러나 그의 안에 웅크리고 있던 아버지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버지는 원인 모를 불안의 형태로, 또 꿈으로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는 아버지를 찾아 낯선 도시로 향한다.
휴전선에 가까운 인구 3만의 도시, 이곳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의 도시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어머니의 집은 아늑했으나, 아버지의 세계는 광야의 영역에 속한다(55p). 광야에서의 그는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측량기사처럼, 아버지가 있는 곳에 찾아가 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돈다. 아무도 그와 아버지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근처까지 갔다 되돌아오길 반복하다가, 서로 원하지 않았던 순간에 아버지와 조우하게 된다. 마침내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지도 어떤 충격을 받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111p). 오히려 그에게 아버지를 부정하길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그럴것이, 아버지는 애초부터 그를 부르지조차 않았다. 부르지 않은 아버지에게 그가 부름받아 간 것이다. 이 호출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각의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서 오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호출이다. 터키 작가의 책에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키스를 하려고 달려드는 남자에게 "아버지가 같은 지붕 아래 있는데 키스를 할 순 없어."라고 대답하는 것 처럼,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억압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심지어 그의 억압의 수단'이고, 그는 그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찾아간 것이다(66~67p). 

작품 속 그의 아버지가 그를 부른 적이 없듯, 나의 아버지 또한 나를 부르지 않았다. 위치의 이동을 요구하는 부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억압이나 강요를 부르는 행위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부름 때문에,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괴로웠던 적은 이제까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의 속내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나 가족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예나 적극적인 아니오'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족들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더욱 많은 열정을 들이는 사람이고, 그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받지는 못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간혹 섭섭하고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아예 내팽겨친 것은 아니니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하는 편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버지에겐 당신의 삶이 있고, 내 삶을 가꾸는데 아버지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에 강한 거부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와 나의 가는 길이 아예 다르니 신념으로 마주쳐 맞서려 들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맞서거나 받아들이려 해 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어느새 괴롭다. 아버지를 받아들여야겠다 일부러 결심하고 노력한 적은 없다. 굳이 받아들일 필요 없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따로 살아가면 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어느새 괴로워졌다. 어찌 된 일일까. 맞서거나 받아들이려 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괴로워 살펴보니 마음 속에서 아버지와 갈등하고 있다. 

 

페루 출신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인간의 육체를 숙주로 삼고 기생하는 긴촌충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소명이란것도 작가의 삶을 먹고 산다고 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자기가 알고 이는,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한 남자가 한 말을 소개했다. "우리(나와 내 몸속의 촌충)는 아주 많은 것을 함께한다네. 극장과 전시회에 가고, 서점에 들르며, 여러 시간 동안 정치, 책, 영화, 친구에 대해 토론하지. 그러나 내가 이 일들을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나는 오로지 그를 위하여, 다시 말해 나의 촌충을 위하여 그 일들을 한다네. 그렇게 느껴져.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며 내 주인 행세를 하는 촌충을 위해 사는 셈이네." P가 언급한 메뚜기 배 속의 연가시는 때가 되면 몸 밖으로 나오지만 작가의 촌충은 몸 안에 붙어 몸의 일부가 된다. 몸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몸의 일부가 된 것에 대해서는 더불어 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 촌충은 몸의 일부다. 촌충이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다. 그는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촌충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이승우, <한 낮의 시선>, 88~89p 

 

왜 나는 아버지를 모른 척 하고 살 수 없을까. 아버지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든, 그가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 이상 그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길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눈雪은 왜 차갑고 돌은 왜 딱딱한지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해 '왜'라고 물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인가 싶다. 촌충과 같은 것이라면, 존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억압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이고 어찌할 도리 없이 끝내 이 아버지와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앞의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극복해야만 한다. 

 

상철이 다시 걸음을 옮겨 디디며, 너의 아버지 몸은 저 바위덩어리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라갔다, 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 내 몸은 평평한 바위위에 하늘을 바라보며 눕혀졌다. 아마도 아버지가 누운 채 자신의 육신을 말렸던 그 바위일 거라고,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나는 겨우 생각했다. 석양이 바다위에 피륙처럼 덮이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아버지...... 내 입에서 바람소리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승우, '풍장-정남진행2', <오래된 일기>, 242~243p 

나는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게걸스럽게 글을 썼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가 쓴 글 속의 주인공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내 몸은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새벽에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간다. (......)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반짝이는 것을 인식한다. 아버지도 내 손에 들려 있는 뾰족한 것을 인식한 것 같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움직인다. 내 손에 들린 것이 그의 가슴 속으로 들어간다. (......)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김 중사는 내 흰 티셔츠와 장판에 얼룩을 만든 붉은 피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 나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 나는 터널을 막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승우, <한 낮의 시선>, 151~157p 

 

'풍남-정남진행2'에서의 아들은 어머니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아버지를 40여년만에 결국 용서한다. 아버지가 죄를 뉘우치며 산채로 풍장되어졌던 바위 위에 몸을 눕히며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아버지와 화해한다. 이것이 옳게 잘 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내 아버지는 나에게 죄를 짓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화해함으로써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모른다.
<한 낮의 시선>에서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죄를 짓기는 했으나,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으로도 생활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그에게 그것은 그리 큰 죄가 아닌 듯 싶다.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도 용서나 화해- 긍정으로 아버지를 극복하는 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다. 외부에서 실재하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촌충처럼 느껴지는 아버지를 환상 속에서 칼로 찔러 죽인다.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그는 '터널을 막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상태로 도달해간다(156p). 아버지에게 긍정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안다 하더라도 긍정하고 싶지 않은 나는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까. 내 안의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또다시 글쓰기다. <한 낮의 시선>에서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환상을 체험한 것은 글을 쓰는 도중이였다. 노트 가득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써 내려가는 동안 문을 열고 나가 아버지를 죽였다. 하도 반복하니 이제는 후지고 구질구질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난 원래 구질구질한 것을 좋아하니 괜찮다. 쓰는 동안, 구원받을 수 있을까. 

 

  

by 비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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