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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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ㅣ 창비세계문학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0년 1월
평점 :
한국 문학을 좋아한다. 책장을 살펴 보더라도 문학 서적만으로 한정하자면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쓴 책들이 대부분이다.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쳐 얄팍해 보이는 독서취향인가 싶어, 가끔 부끄럽기도 하다. 최근 일 년 동안 읽었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더라도, 외국문학 중에선 랭보의 시집 한 권과 카프카의 소설 몇 권이 전부였던걸로 기억한다. 일 년을 이십여 년으로 확장해 보더라도 기억에 남는 작가와 작품들이 몇 되지 않는다. 미국 작가의 <미스 론리하트>나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밀란 쿤데라의 <농담>같은 책들은 아직도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지만 세계 문학의 고전이라기에 읽었던 작품들 중 대부분은 사실 마지못해 억지로 읽었다. 움베르트 에코같은 작가들도 사실 어디가서 있는 척 하기 위해 지루함을 참으며 힘들게 읽었고, 최근 읽은 카프카의 소설들은 꽤나 괜찮았지만 큰 감흥을 받을 정도는 아니였다. 차라리 카프카 소설을 연구해놓은 2차 텍스트들이 훨씬 흥미로웠다. 아직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한 책들이나 많이 읽히긴 해도 아직 고전 반열에까지 들진 못한 책들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고, 그 유명한 해리포터 시리즈도 제대로 안 읽어봤다. 시리즈의 첫번째와 두번째까지는 대충 읽었다만,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그 이상은 못 읽겠더라.
모국어를 지극히도 사랑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애국자나 무조건 우리 것이 최고라는 민족주의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외국 문학을 읽지 않는 것은 내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라도 거기에 한 번 집착하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꾸 신경쓰게 되는 피곤한 성격 탓이다.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져있다. 뿐만아니라 문학에게는 언어'밖에' 없다. 음악이나 이미지가 어디에서 생산되었고 누구에게 수용되든지 중간에 번역을 거치지 않고서도 전달될 수 있는 데에 반해서 언어는 꼭 번역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번역의 과정 없이도 외국 문학을 접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말로 되어있지 않은 것은 영어로 되어 있든 다른 말로 되어 있든 동화책이라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문학은 영화처럼 다른 수단이나 감각이 표현에 동원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언어뿐인데, 번역을 과정을 거치다 보면 아무래도 본래 언어가 가지고 있던 맛이 어느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또, 번역 사정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번역가의 문장보다는 소설가의 문장이 더 섬세하고 뛰어날 것이라 생각하다 보니 선입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거장으로 칭송받는 외국 작가의 대작보다는 그만큼 유명하진 않더라도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쓴 국문학에 훨씬 더 신용이 간다. 그렇다보니 외국 문학은 아무리 좋다 소문이 자자한 책이더라도 왠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거기에다 여러 작가가 쓴 단편들을 함께 엮은 책도 되도록 피하는 편이다. 작가마다 주제의식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른데, 특정한 주제의 기획으로 엮인 책이 아닌 바에야 여러 작가들을 직선적으로 늘어놓고 읽으려 하면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자꾸 호흡이 끊긴다. 성능이 떨어지는 머리 탓이다. 여러 개의 생각을 동시에 띄워놓지도 못하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도 느리다. 그래서 창비세계문학 중 독일 작가들의 단편들을 엮어놓은 <어느 사랑의 실험>은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한국 문학을 읽으면서도 여러 작가의 단편이 함께 엮인 책은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나 문예지를 읽을 때 뿐인데, 아무리 창비에서 고르고 골라 엄선하여 모은 작품집이라 하도라도 평소 피해 읽지 않던 걸 읽으려고 하니 잘 읽혀지지가 않았다. 끊기는 호흡을 다시 이어붙이길 반복하며 겨우겨우 다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푸념들을 늘어놓는 것은 내 독서 능력이 모자라서이지, 결코 책에 실린 작품들이 읽기 괴로울만큼 형편없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함께 읽으려니 괴로운 것이지, 떼어내어 따로 읽어보면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전부 훌륭하다. 잘 쓴 소설의 표본같다. 작품들의 뛰어난 완성도가 오히려 책 전체를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한 편을 읽는데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 호흡만큼이 필요한 작품들인데, 이것들을 함께 이어서 읽으려다보니 숨가쁘고 힘이 드는 것이다. 원서를 읽을 수 없으니 비교해 볼 수는 없지만, 번역도 흠잡을 곳 없이 좋다. 문장이 막히지 않고 매끄럽게 잘 읽힌다.
표제작 '어느 사랑의 실험'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행했던 생체실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불임시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평소 서로에게 호감이 있던 두 남녀를 작은 방 안에 들여보내 놓고 관찰하였으나, 어떻게 해도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어 실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세 장도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나치가 남긴 상처와 사랑에 대한 질문이 과감하고 신선한 방식으로 담겨있다.
'672일째 밤의 동화'는 '상인의 아들'으로만 서술되는 어느 데카당이 가진 욕망의 균열을 그리고 있다. 인물이 욕망을 투영하는 방식이 모호하여 읽어내기 어렵긴 하지만 감각적인 서술이 돋보인다. 작가는 파격적인 알레고리를 즐겨 구사했다고 하는데, 작품 해설에 인용된 구절이 꽤나 멋지다. '인생의 시골길'이라는 작품 중의 한 구절. "정원에는 바람 말고는 사랑만 살고 있었다. 사랑이 나무그늘 아래서 뇌우를 꿈꾸자 파란 하늘에서 따사롭고 향기로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저 아래 도로에서는 삶 전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아이들, 개를 데리고 가며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 어린 소녀들. 죽음은 말 한마리가 끄는 마차로 노신사와 직공청년, 기품있는 여행객, 거지, 행운을 몰래 실어가고 있었다." 원숭이가 인간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여 아예 거기에 편입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실연당한 여인의 심리를 환영을 통해 서술한 '달나라 이야기'같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짧은 단편인 '뜻밖의 재회'도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인데, 세 페이지 분량의 이 짧은 소설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의 원형이 농축되어 있는 빼어난 작품'이라 상찬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였던 여인이 결혼 직전 사고로 광부였던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이 지나 광산 속에 젊은 모습 그대로 파묻혀 있던 남편의 시신과 다시 만나게 되는 동안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쭉 나열해 놓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니, 수식이나 부연 설명 없이 간결한 문장으로 나열된 사건들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짧은 서술 속에 어떤 무엇의 전부, 한 삶의 전부이거나 한 사랑의 전부가 가감없이 담겨있는 것 같아 숙연해졌다.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시집의 날개에 적힌 랭보의 짧은 약력을 볼 때 이런 기분을 받았었다. 1854년 아르덴의 샤를르빌에서 출생. 1873년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완성. 1886년 '채색판화집' 발표. 1891년 사망. 마찬가지로 어떤 부연설명 없이, 간결한 네 줄만 달랑 기록되어 있으나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납득이 되는 듯한 기분이였다. 태어나 쓰고 죽으면 그게 전부고, 거기에 무엇을 더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 어쨌거나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인 것이 아니므로.
위의 작품들이 독특하고 신선해 인상깊었다면 '정직한 법관'이나 '주워온 자식', '루이스 헨', '바르바라' 같은 작품들에서는 탄탄한 기본을 바탕으로 완성도 높게 잘 쓰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에서 책에 실린 작품들이 '잘 쓴 소설의 표본같다'라고 했던 것은 이런 작품들을 두고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이다. 특히나 이념의 시대 속에서 사랑을 그린 '바르바라'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연상시키는데, 관계 사이와 가치 사이로 흐르는 미묘한 감정선과 기류를 섬세하게 잘 잡아내었다. 개인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나 가치와는 별개로 '뜻밖의 재회'와 더불어 책에 실린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주제로 쓰인 '인도로 가는 항로는 없었다'도 무거운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잘 표현해 놓았다. 인도를 찾아 출항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돌아온 배에 승선했었던 작가들에 대해 써 놓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들어 발췌한다.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서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역시나 나는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런 노골적이고 뻔한 문장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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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 중 일부는 배의 항로가 잘못되었을 뿐이지 바다 건너에는 여전히 풍요로운 땅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바다 건너의 땅을 인도 혹은 아메리카 혹은 유토피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면에 다른 작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항해를 하고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바다 건너에는 좌절한 희망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토론을 벌인 후에 작가들은 각자의 책상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관해 글을 썼고, 그때부터 아주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가들도 아주 다양해졌고 세상도 무척이나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바보들의 배를 타고 항해한 기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으면 작가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선상에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존재였고, 뭔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경험한 만큼은 더 풍요로워진 셈이지요. 삶과 글쓰기를 위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곧 사랑과 경험이니까요.
크리스토프 하인, '인도로 가는 항로는 없었다', <어느 사랑의 실험>, 374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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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시작한 김에 마저 다 언급해 버리자면, 카프카의 '짝짓기'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가볍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바흐만의 '개 짓는 소리'와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직 못 읽었다. 하인리히 뵐의 '광고물 폐기자'는 워낙 대충 날림으로 읽어 무슨 내용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시 읽기도 싫다. 어째 이 세 작품은 이상하게도 정이 안간다. 지금 읽을 작품들이 아닌가보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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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면하는 세계는 너무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갖 방식으로, 전방위로 누비고 다녔고, 우리가 타고 다닌 비행기와 선박의 항로들도 이 세계의 지도를 떡칠해놓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처녀지는 거의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그림엽사를 넘기듯이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끝에서 끝까지 모두 섭렵했지만, 정작 시작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장소를 구별할 줄 알고 장소마다 이름을 부여할 줄 아는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린 것이다.
일제 아이힝어, '작품 해설'에 인용되어 있던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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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소설적 완성도가 돋보이는 작품들보다는 주제나 표현이 기발해서 독특한 작품들이 대체로 더 재밌고 수월하게 읽혔다. 이런 것이 '좋은데 새로운' 작품이구나 싶은데, 멀게는 오십 년도 더 전에 또 가깝게 와 봐야 십 년도 더 전에 쓰인 작품들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내 읽기는 너무 얇다. 더 멀리까지 나아가 다양한 것을 읽어 올 수 있어야 한다. 괴로운 읽기를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한다. '창비세계문학'으로 함께 출간된 다른 나라의 단편들도 궁금하다. 그걸 다 읽으려면, 나는 또 죽었구나. 책 살 돈도 없는데.
아울러, '제니퍼의 꿈'의 작가 아이힝어가 1954년에 썼던 문장에서 그는 '이제 처녀지는 거의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세계에 너무 익숙해졌고, 우리가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좋은데 새로운'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생각해보면, 저 때의 아이힝어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지금의 고민들도 모를 일이다. 아직 앞으로도 아주 많은 것들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고, 아직도 새롭게 쓰이고 창조될 것들이 아득할만큼 크고 멀리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모두들, 힘 내시길.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올 때까지.
by 비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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