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동생 방의 도배를 새로 했다. 몇 년 전까지는 내가 썼던 방이라, 잃어버렸던 책들이 그 방 구석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해서 세간들을 몽땅 들어내는 김에 샅샅이 뒤져보았다.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박민규의 책 <카스테라>, <핑퐁>과 김연수의 책 <청춘의 문장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꼭 되찾고 싶었는데, 역시나 없다. 김연수의 책들은 잃어버린 후에 새로 샀음에도 못 찾은 것이 영 안타깝다. 대신에 언젠가 아프리카 수공예품을 파는 집에서 샀던 목걸이 두 개를 찾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먼지 낀 그것들을 하루종일 목에 걸고 있었지만 정작 찾고 싶었던 책들을 못 찾는 데서 오는 아쉬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동생 방에도 없다면 이제 그 책들은 내가 노력해서 찾아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 버린 것이 분명하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책들과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 그 책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 있을까. 사라진 책들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 중엔 곳곳에 펜으로 끄적거려 놓은 내 흔적이 남은 책도 있을텐데, 그 흔적들은 지금쯤 어디까지 흘러가 있을까. 책들이 다른 주인을 새로 찾아 아직 읽혀지거나 제대로 보관되어 있다면 분하긴 하지만 책으로서 본분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니 그래도 다행이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버려져 있거나 아예 이미 쓰레기로 처리되어 버렸다면, 내 부끄러운 흔적을 칠칠맞게 얼굴도 모를 누군가에게 내보이지 않아도 되니 그것도 나름대로 다행이다. 여기에는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없더라도 남에겐 양보하기 싫다는 괜한 심술도 담겨 있다.
이상한 일이다. 책을 애지중지 아껴 다루는 편이고 평소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가끔 책장 정리를 새로 할 때마다 보면 꼭 한두권씩은 사라지고 없다. 사서 읽는 책보다 빌려 읽는 책이 더 많으니,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 반납한 것을 사서 읽고 보관하다 잃어버린 것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있던, 혹은 있다고 생각했던 책의 부재를 확인하고 나면 그때마다 집안 구석구석을 한바탕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찾아도 없으면 낭패다. 책이 있을만한 곳을 생각하느라 길게는 며칠씩도 마음이 편치 않다. 다시 읽을 일이 없었을 게 분명한 책이었더라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않았더라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랐을 그런 책들 말이다. 어떤 것들은 그렇게 부재함으로써 제 존재감을 더 크게 드러낸다. '어떤 것'은 책 뿐만이 아니라, 손톱깎이나 비누 같은 사소한 일상용품들일 수도 있고 약으로 쓰려던 개똥일 수도 있다. 어떤 관계일 수도 있고 사건이나 감정일 수도 있으며, 한 시절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발견하는 일은 아주 쉽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쉴 새 없이 변해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 들 중에는 붙잡았더라면 아직 곁에 남아있을 수 있던 것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일 외에는 무심하고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붙잡으려는 노력 없이 그냥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던 아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찾아내려 하지 않더라도, 나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발견한다.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없음을 눈치챈다. 언젠가는 꽤나 친했던 누군가가 이제는 생김새마저 가물가물하다. 한때 사랑했던 그녀에 대한 감정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건조한 기억만 남았다.
요즘엔 특히 더 그렇다. 어릴 적에 가져보았던 장래희망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부라 믿었고 진실되다 믿었던 마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발견하는 일이 갈수록 잦아진다. 마음의 지향을 찾아가지 못하고 갈피없이 헤매고 있으니, 앞으로 얻게 될 것들- 얻어나가야 할 것들 보다는 지금 내게 없는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무엇인가가 없다는 것,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내 속 한구석이 빠져나가 비어있다는 것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비우고 사는 법도 모르면서 본의아니게 자꾸 비워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마음 속 빈 구석을 차지한 불안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 불안을 외로움과 구별하지 못한다. 사라진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 만큼의 불안이 빈 자리를 대신하고, 또 그 만큼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사는 법도 모른다. 이렇게 지향점 없이 정체되어 있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나는 갈수록 외로워진다. 살기 힘들어진다. 읽고 쓰는 것은 이 외로움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만 쓸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글쓰기 경험이 별로 많지는 않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날들은 살아온 전체의 날들에 비해 극히 드물다. 일정한 지면에 꾸준히 무엇인가를 써 보는 것은 지금 글을 쓰는 블로그를 제외하고는 딱 한 번 있었다. 먼저 열아홉, 수능을 앞둔 일 년 동안에는 일기를 쓰든 뻘글을 쓰든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썼었다. 자율학습이랍시고 매일 학교에서 늦게까지 잡아놓는데다 기숙사 생활까지 했으니 시간이 남아 돌기도 했고 별다른 재밋거리가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때는 글쓰기가 재밌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뚜렷하게 지향할 주관과 신념이 있었으며, 그것을 써 나가며 스스로 갱신해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때의 글들은 다 찢어 버려버렸고,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엉망일테니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자세만큼은 그때가 가장 괜찮았지 않았나 싶다. 글을 쓰는 매 순간이 새로웠다.
그때의 스스로 생각하며 내 속에 있는 것들을 풀어서 쓰는 글쓰기가 '얻고 쓰는'글쓰기였다면, 반면에 지금의 '읽고 쓰는' 글쓰기는 '잃고 쓰는' 글쓰기다. 열아홉 이후 오랫동안 쓰지 않고 있다가, 군에 있을 때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마음 맞는 사람 하나 없는 고립된 그곳에서 겪어왔던 어떤 시간들보다 외로운 시기를 보내며, 남아도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았다. 그러나 쓸 것이 없었다. 무작정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있어봐야 한 페이지를 쓸 문장도 생각나지 않았다. '있다'라고 생각했던 내 주관도, 다른 어딘가에서 끌어오지 않은 순수한 날것의 감수성도, 어딘가로 다 사라져 버리곤 텅 빈 껍데기만 남아서 밖으로 끄집어 내놓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때 내 마음 속을 채우고 있던 것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언제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무엇인가 쓰기 위해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은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것보다도 배는 외로운 일이다. 나 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므로. 빈 종이 앞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말없이, 미치도록 외로웠다. 빈말이 아니다. 정말 미치도록.
무엇인가를 읽고, 그것에 대해 쓰며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속에서 날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너무도 외로워 괴로운 일이었지만, 읽은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적어도 외로움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다. 외로움에 대해서라면, 도리어 위안을 받았다. 읽은 책에 대해 쓴 것이 나에 대해 쓴 것 같았고, 그것으로 빈 마음을 조금이나 채울 수 있었다. 여러권의 책을 읽고 함께 엮어 쓸 때는 마음의 조각 여러개를 한 번에 착착 들이맞추는 기분이었다. 읽기를 빌어 쓸 때야 비로소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숨어있던 '할 말'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 외롭지는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수록 읽고 쓰더라도 읽은 것에 대한 것 보다는 내 이야기를 더 많이 늘어놓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는 읽은 것을 빌지 않고 그냥 쓰는 것이 힘들다. 무엇에 대해 쓸 지를 떠올리고 첫 문장을 쓰기 전 까지의 그 막연함이 견딜 수 없을만큼 외롭다. 지금도, 잡스러운 말만 잔뜩 늘어놓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장현웅과 장희엽의 가벼운 에세이 <사소한 발견>과, 임영태의 장편소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읽고 쓰는 글이다. 그것도 사실은, 온라인 서점에 올릴 서평을 쓰기 위해 시작한 글이다. 공짜로 책을 받았으니 서평을 써서 내야 하지만, <사소한 발견>이 워낙 내 취향이 아닌 책인지라 대충 쓰윽 훑어보고 말았더니 '평'할 만한 건덕지도 찾지 못하겠다. 별 건덕지 없이 쓰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또 헛소리같은 잡담이나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쓰다 보니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까지 엮어 붙이게 되었다. 마음의 조각들이 들이맞춰지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다. 같은 주제로 읽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점에 있던 두 가지 이상의 텍스트들이 엉뚱한 곳에서 이어져 엮어지는 순간, 어려운 공식의 수학 문제의 풀었을 때의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대필 작가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하는 일에 자부심과 만족을 가지지 못하고 자격지심에 스스로 이리저리 치여다니다가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지만, 시골생활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 먹고 살 궁리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대필업이었다. "대필은 내가 만족스러운 글이 아니라 상대가 만족할 글을 써주는 일이다(11p)." 거기에 가격 계약 문제도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고객은 시장에서 옷을 살 때와 똑같이 가격을 밀고 당겼다(164p)." 스스로 만족할 수도 없고 먹고 사는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기에도 조금 벅차다. 그러나 별 수 없다. "나는 자주 막막한 심정이 되어 아내와 잠든 후에 혼자 술을 자주 마시고는 했다(165p)."
직장에 자리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도, 시골 생활을 결심하고 내려 가 살 때도, 처음 대필업을 시작할 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아내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았다. 사내는 홀로 대필업을 하며 변변찮은 생계를 꾸려나가며 집 근처 실내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죽을 위인 못 된(120p)"다며 태연하게 일상을 살고, 가끔 죽은 사람들을 본다. 언젠가부터 죽은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내가 죽은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던 그 때는, 커가는 외로움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어지기 시작한 때였을 것이다. "죽은 자에겐 욕망이 없"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장 큰 차이가 그것"이다. "산 자의 눈빛에는 자아가 깔린 욕망이 있"지만, "죽은 자는 다만 염원하고 소망한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지만 그건 욕망이 아니라 다만 그리움이다(125p)." 죽은 아내와 지나간 어떤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자아가 깔린 욕망보다 더 커져, 그 그리움만큼의 외로움이 쌓였을 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죽은 자들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상에 대해 무덤덤하게 말하고,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지나간 어떤 시기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모두 외로움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임영태 작가는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 걸음을 따라가는 동안 자주 먹먹했다.
대필이 아닌 자신만의 글을 쓰기로 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의뢰를 했던 '장자익'을 통해서였다. 장자익은 자신에 대해서 쓰되, 대필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내의 이름으로 소설을 써 책을 내 주기를 의뢰한다. 받아들이고 계약금까지 받았으나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장자익의 부음을 듣는다. 죽어버렸으니 미리 받은 계약금에 부채감을 가질 것도 없지만, 장자익에 대해서 알게 되고 죽은 장자익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장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게 될지도 모르겠(234p)"다며 어렴풋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아마 평생을 떠돌았던 장자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리라.
 |
|
|
| |
첫 문장을 생각했다. '나는 달력을 한 장 넘겼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도 좋다.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하게 사족 붙이지 않고, 부질없는 미문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아는 표정과 몸짓들에 대해서만, 내가 명백히 아는 이야기만 쓴다. 달력이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달력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벽시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벽시계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내가 정확히 받아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아는 세계'라는 한 의미가 된다. 그것이면 된다. 그리고, 하나를 제대로 말하면 사실은 모든 게 거기에 있다. 먼지와 햇빛과 행인은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를 쓸 수 있으면 다른 것도 말해진다. 먼지의 이야기는 햇빛의 이야기이다.
장 선생을 생각했다. 누구에 대해 쓰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를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235p
|
|
| |
|
 |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으므로, 장자익에 대해 쓰는 일은 사내 자신의 욕망과 상처에 대해 쓰는 일일 것이므로, 결국 사내는 장자익에 대해 씀으로써 자신에 대해 쓰게 될 것이다. 죽은 뒤에 다시 만난 장자익은 만나자 마자 "쓸쓸한가?"라고 묻는다. 장자익이 쓸쓸했던 만큼 사내도 쓸쓸했을 것이고, 사내가 쓸쓸했던 만큼 장자익도 쓸쓸했었을 것이다. 사내에게 대필을 맡겼던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를 제대로 말하면 사실은 모든 게 거기에 있"고, 단지 "정확히 받아쓰는"것이 중요할 뿐이다.
 |
|
|
| |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말해 줄까?"
나는 장 선생의 눈을 보았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 나는 그것을 몰랐어."
장 선생이 다시 코 밑에 담배를 굴렸다.
주택가 건너 큰길 쪽에서 여름밤의 부산스러운 활기가 날아왔다.
"지나기 전에는 왜 모를까요?"
장 선생에게 물었다.
"자아 때문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56p
"살아온 게 모두 후회된다는 말은 말이야, 더 이상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한 사람이 상대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는지는 누구도 몰라.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만 알면 돼."
269p
|
|
| |
|
 |
정확히 받아쓰자면 자신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을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받아 쓰면 나 뿐만 아니라 상대도, 나와 상대들이 전부 포함된 세계까지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을 모르는 자아를 포함한 모든 것을. 그렇게 된다면야,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지나간 것들도, 죽은 자들도, 무엇을 주고 받았는지 모를 수많은 타자들도, 어쨌거나 그 세계 속에서 '함께' 있으므로.
사내는 언젠가 오로지 자신의 육성으로만 이루어진 글을 쓸 것이다. 대필도 아니고, 장자익을 빌어 쓴 자신의 이야기도 아닌 온전히 스스로의 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욕망한다면 욕망에 대해서 쓸 것이고 외롭다면 외로움에 대해서 쓸 것이다. 정확하게 받아 쓴 그런 글들을. 나는 읽고 쓴다. 읽은 것을 빌어 내 이야기를 쓴다. 언젠가는 읽지 않고 쓸 것이다. 막연한 외로움에 대해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들과 나를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받아 적은 그 글을 쓰고 나서 큰 위안을 얻게 되고 나면, 더이상 외롭지 않게 되거나 그것을 이길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외로움과 싸우는 일 없이 마음 속 구석 어딘가에 숨어있는 '할 말'들에 대해서도 풀어낼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 번 이겨내고 나면 지나간 그리운 것들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단편 '뉴욕제과점'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린 시절의 공간 뉴욕제과점에 대해 이야기 한 뒤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김연수, '뉴욕제과점',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93p)." 지나간 시절은, 사라진 모든 것들은, 그리워 외로운 것들은 마음 속에 외로움이 아니라 불빛으로 남을 것이고 그 불빛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작가가 청춘의 시절들을 되돌아보며 쓴 에세이 <청춘의 문장들>을 쓴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책머리에 中)."
삶을 설명하는, 스스로 쓴, '정확한' 한 문장. 그 문장이 절실하다. 언제쯤 쓸 수 있을까, 아직은 막연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