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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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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방의 도배를 새로 했다. 몇 년 전까지는 내가 썼던 방이라, 잃어버렸던 책들이 그 방 구석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해서 세간들을 몽땅 들어내는 김에 샅샅이 뒤져보았다.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 박민규의 책 <카스테라>, <핑퐁>과 김연수의 책 <청춘의 문장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꼭 되찾고 싶었는데, 역시나 없다. 김연수의 책들은 잃어버린 후에 새로 샀음에도 못 찾은 것이 영 안타깝다. 대신에 언젠가 아프리카 수공예품을 파는 집에서 샀던 목걸이 두 개를 찾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먼지 낀 그것들을 하루종일 목에 걸고 있었지만 정작 찾고 싶었던 책들을 못 찾는 데서 오는 아쉬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동생 방에도 없다면 이제 그 책들은 내가 노력해서 찾아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 버린 것이 분명하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책들과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 그 책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 있을까. 사라진 책들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 중엔 곳곳에 펜으로 끄적거려 놓은 내 흔적이 남은 책도 있을텐데, 그 흔적들은 지금쯤 어디까지 흘러가 있을까. 책들이 다른 주인을 새로 찾아 아직 읽혀지거나 제대로 보관되어 있다면 분하긴 하지만 책으로서 본분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니 그래도 다행이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버려져 있거나 아예 이미 쓰레기로 처리되어 버렸다면, 내 부끄러운 흔적을 칠칠맞게 얼굴도 모를 누군가에게 내보이지 않아도 되니 그것도 나름대로 다행이다. 여기에는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없더라도 남에겐 양보하기 싫다는 괜한 심술도 담겨 있다. 

이상한 일이다. 책을 애지중지 아껴 다루는 편이고 평소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가끔 책장 정리를 새로 할 때마다 보면 꼭 한두권씩은 사라지고 없다. 사서 읽는 책보다 빌려 읽는 책이 더 많으니,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 반납한 것을 사서 읽고 보관하다 잃어버린 것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있던, 혹은 있다고 생각했던 책의 부재를 확인하고 나면 그때마다 집안 구석구석을 한바탕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렇게 찾아도 없으면 낭패다. 책이 있을만한 곳을 생각하느라 길게는 며칠씩도 마음이 편치 않다. 다시 읽을 일이 없었을 게 분명한 책이었더라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않았더라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랐을 그런 책들 말이다. 어떤 것들은 그렇게 부재함으로써 제 존재감을 더 크게 드러낸다. '어떤 것'은 책 뿐만이 아니라, 손톱깎이나 비누 같은 사소한 일상용품들일 수도 있고 약으로 쓰려던 개똥일 수도 있다. 어떤 관계일 수도 있고 사건이나 감정일 수도 있으며, 한 시절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발견하는 일은 아주 쉽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쉴 새 없이 변해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것이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 들 중에는 붙잡았더라면 아직 곁에 남아있을 수 있던 것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일 외에는 무심하고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붙잡으려는 노력 없이 그냥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었던 아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찾아내려 하지 않더라도, 나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발견한다.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없음을 눈치챈다. 언젠가는 꽤나 친했던 누군가가 이제는 생김새마저 가물가물하다. 한때 사랑했던 그녀에 대한 감정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건조한 기억만 남았다.
요즘엔 특히 더 그렇다. 어릴 적에 가져보았던 장래희망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부라 믿었고 진실되다 믿었던 마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발견하는 일이 갈수록 잦아진다. 마음의 지향을 찾아가지 못하고 갈피없이 헤매고 있으니, 앞으로 얻게 될 것들- 얻어나가야 할 것들 보다는 지금 내게 없는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무엇인가가 없다는 것,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내 속 한구석이 빠져나가 비어있다는 것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비우고 사는 법도 모르면서 본의아니게 자꾸 비워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마음 속 빈 구석을 차지한 불안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그 불안을 외로움과 구별하지 못한다. 사라진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 만큼의 불안이 빈 자리를 대신하고, 또 그 만큼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사는 법도 모른다. 이렇게 지향점 없이 정체되어 있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나는 갈수록 외로워진다. 살기 힘들어진다. 읽고 쓰는 것은 이 외로움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만 쓸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글쓰기 경험이 별로 많지는 않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날들은 살아온 전체의 날들에 비해 극히 드물다. 일정한 지면에 꾸준히 무엇인가를 써 보는 것은 지금 글을 쓰는 블로그를 제외하고는 딱 한 번 있었다. 먼저 열아홉, 수능을 앞둔 일 년 동안에는 일기를 쓰든 뻘글을 쓰든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썼었다. 자율학습이랍시고 매일 학교에서 늦게까지 잡아놓는데다 기숙사 생활까지 했으니 시간이 남아 돌기도 했고 별다른 재밋거리가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때는 글쓰기가 재밌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뚜렷하게 지향할 주관과 신념이 있었으며, 그것을 써 나가며 스스로 갱신해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때의 글들은 다 찢어 버려버렸고,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엉망일테니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자세만큼은 그때가 가장 괜찮았지 않았나 싶다. 글을 쓰는 매 순간이 새로웠다.
그때의 스스로 생각하며 내 속에 있는 것들을 풀어서 쓰는 글쓰기가 '얻고 쓰는'글쓰기였다면, 반면에 지금의 '읽고 쓰는' 글쓰기는 '잃고 쓰는' 글쓰기다. 열아홉 이후 오랫동안 쓰지 않고 있다가, 군에 있을 때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마음 맞는 사람 하나 없는 고립된 그곳에서 겪어왔던 어떤 시간들보다 외로운 시기를 보내며, 남아도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았다. 그러나 쓸 것이 없었다. 무작정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있어봐야 한 페이지를 쓸 문장도 생각나지 않았다. '있다'라고 생각했던 내 주관도, 다른 어딘가에서 끌어오지 않은 순수한 날것의 감수성도, 어딘가로 다 사라져 버리곤 텅 빈 껍데기만 남아서 밖으로 끄집어 내놓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때 내 마음 속을 채우고 있던 것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언제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무엇인가 쓰기 위해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은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것보다도 배는 외로운 일이다. 나 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므로. 빈 종이 앞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며 말없이, 미치도록 외로웠다. 빈말이 아니다. 정말 미치도록.
무엇인가를 읽고, 그것에 대해 쓰며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내 속에서 날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너무도 외로워 괴로운 일이었지만, 읽은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적어도 외로움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다. 외로움에 대해서라면, 도리어 위안을 받았다. 읽은 책에 대해 쓴 것이 나에 대해 쓴 것 같았고, 그것으로 빈 마음을 조금이나 채울 수 있었다. 여러권의 책을 읽고 함께 엮어 쓸 때는 마음의 조각 여러개를 한 번에 착착 들이맞추는 기분이었다. 읽기를 빌어 쓸 때야 비로소 내 마음 속 한구석에 숨어있던 '할 말'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 외롭지는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수록 읽고 쓰더라도 읽은 것에 대한 것 보다는 내 이야기를 더 많이 늘어놓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는 읽은 것을 빌지 않고 그냥 쓰는 것이 힘들다. 무엇에 대해 쓸 지를 떠올리고 첫 문장을 쓰기 전 까지의 그 막연함이 견딜 수 없을만큼 외롭다. 지금도, 잡스러운 말만 잔뜩 늘어놓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장현웅과 장희엽의 가벼운 에세이 <사소한 발견>과, 임영태의 장편소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읽고 쓰는 글이다. 그것도 사실은, 온라인 서점에 올릴 서평을 쓰기 위해 시작한 글이다. 공짜로 책을 받았으니 서평을 써서 내야 하지만, <사소한 발견>이 워낙 내 취향이 아닌 책인지라 대충 쓰윽 훑어보고 말았더니 '평'할 만한 건덕지도 찾지 못하겠다. 별 건덕지 없이 쓰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또 헛소리같은 잡담이나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쓰다 보니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까지 엮어 붙이게 되었다. 마음의 조각들이 들이맞춰지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순간이다. 같은 주제로 읽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점에 있던 두 가지 이상의 텍스트들이 엉뚱한 곳에서 이어져 엮어지는 순간, 어려운 공식의 수학 문제의 풀었을 때의 짜릿한 기분마저 든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대필 작가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하는 일에 자부심과 만족을 가지지 못하고 자격지심에 스스로 이리저리 치여다니다가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지만, 시골생활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 먹고 살 궁리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대필업이었다. "대필은 내가 만족스러운 글이 아니라 상대가 만족할 글을 써주는 일이다(11p)." 거기에 가격 계약 문제도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고객은 시장에서 옷을 살 때와 똑같이 가격을 밀고 당겼다(164p)." 스스로 만족할 수도 없고 먹고 사는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기에도 조금 벅차다. 그러나 별 수 없다. "나는 자주 막막한 심정이 되어 아내와 잠든 후에 혼자 술을 자주 마시고는 했다(165p)."
직장에 자리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도, 시골 생활을 결심하고 내려 가 살 때도, 처음 대필업을 시작할 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던 아내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았다. 사내는 홀로 대필업을 하며 변변찮은 생계를 꾸려나가며 집 근처 실내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죽을 위인 못 된(120p)"다며 태연하게 일상을 살고, 가끔 죽은 사람들을 본다. 언젠가부터 죽은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내가 죽은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던 그 때는, 커가는 외로움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어지기 시작한 때였을 것이다. "죽은 자에겐 욕망이 없"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장 큰 차이가 그것"이다. "산 자의 눈빛에는 자아가 깔린 욕망이 있"지만, "죽은 자는 다만 염원하고 소망한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지만 그건 욕망이 아니라 다만 그리움이다(125p)." 죽은 아내와 지나간 어떤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 자아가 깔린 욕망보다 더 커져, 그 그리움만큼의 외로움이 쌓였을 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죽은 자들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상에 대해 무덤덤하게 말하고,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지나간 어떤 시기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모두 외로움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임영태 작가는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 걸음을 따라가는 동안 자주 먹먹했다. 

대필이 아닌 자신만의 글을 쓰기로 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의뢰를 했던 '장자익'을 통해서였다. 장자익은 자신에 대해서 쓰되, 대필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내의 이름으로 소설을 써 책을 내 주기를 의뢰한다. 받아들이고 계약금까지 받았으나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장자익의 부음을 듣는다. 죽어버렸으니 미리 받은 계약금에 부채감을 가질 것도 없지만, 장자익에 대해서 알게 되고 죽은 장자익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장 선생과의 약속을 지키게 될지도 모르겠(234p)"다며 어렴풋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아마 평생을 떠돌았던 장자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리라. 

   
 

 첫 문장을 생각했다. '나는 달력을 한 장 넘겼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도 좋다.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하게 사족 붙이지 않고, 부질없는 미문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아는 표정과 몸짓들에 대해서만, 내가 명백히 아는 이야기만 쓴다. 달력이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달력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벽시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벽시계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내가 정확히 받아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아는 세계'라는 한 의미가 된다. 그것이면 된다. 그리고, 하나를 제대로 말하면 사실은 모든 게 거기에 있다. 먼지와 햇빛과 행인은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를 쓸 수 있으면 다른 것도 말해진다. 먼지의 이야기는 햇빛의 이야기이다.
장 선생을 생각했다. 누구에 대해 쓰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를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235p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으므로, 장자익에 대해 쓰는 일은 사내 자신의 욕망과 상처에 대해 쓰는 일일 것이므로, 결국 사내는 장자익에 대해 씀으로써 자신에 대해 쓰게 될 것이다. 죽은 뒤에 다시 만난 장자익은 만나자 마자 "쓸쓸한가?"라고 묻는다. 장자익이 쓸쓸했던 만큼 사내도 쓸쓸했을 것이고, 사내가 쓸쓸했던 만큼 장자익도 쓸쓸했었을 것이다. 사내에게 대필을 맡겼던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를 제대로 말하면 사실은 모든 게 거기에 있"고, 단지 "정확히 받아쓰는"것이 중요할 뿐이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말해 줄까?"
나는 장 선생의 눈을 보았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 나는 그것을 몰랐어."
장 선생이 다시 코 밑에 담배를 굴렸다.
주택가 건너 큰길 쪽에서 여름밤의 부산스러운 활기가 날아왔다.
"지나기 전에는 왜 모를까요?"
장 선생에게 물었다.
"자아 때문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56p

"살아온 게 모두 후회된다는 말은 말이야, 더 이상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한 사람이 상대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는지는 누구도 몰라.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만 알면 돼."
269p

 
   

 정확히 받아쓰자면 자신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을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받아 쓰면 나 뿐만 아니라 상대도, 나와 상대들이 전부 포함된 세계까지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을 모르는 자아를 포함한 모든 것을. 그렇게 된다면야,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지나간 것들도, 죽은 자들도, 무엇을 주고 받았는지 모를 수많은 타자들도, 어쨌거나 그 세계 속에서 '함께' 있으므로.
사내는 언젠가 오로지 자신의 육성으로만 이루어진 글을 쓸 것이다. 대필도 아니고, 장자익을 빌어 쓴 자신의 이야기도 아닌 온전히 스스로의 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욕망한다면 욕망에 대해서 쓸 것이고 외롭다면 외로움에 대해서 쓸 것이다. 정확하게 받아 쓴 그런 글들을. 나는 읽고 쓴다. 읽은 것을 빌어 내 이야기를 쓴다. 언젠가는 읽지 않고 쓸 것이다. 막연한 외로움에 대해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들과 나를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받아 적은 그 글을 쓰고 나서 큰 위안을 얻게 되고 나면, 더이상 외롭지 않게 되거나 그것을 이길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외로움과 싸우는 일 없이 마음 속 구석 어딘가에 숨어있는 '할 말'들에 대해서도 풀어낼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 번 이겨내고 나면 지나간 그리운 것들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연수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단편 '뉴욕제과점'에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린 시절의 공간 뉴욕제과점에 대해 이야기 한 뒤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김연수, '뉴욕제과점',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93p)." 지나간 시절은, 사라진 모든 것들은, 그리워 외로운 것들은 마음 속에 외로움이 아니라 불빛으로 남을 것이고 그 불빛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작가가 청춘의 시절들을 되돌아보며 쓴 에세이 <청춘의 문장들>을 쓴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책머리에 中)." 

삶을 설명하는, 스스로 쓴, '정확한' 한 문장. 그 문장이 절실하다. 언제쯤 쓸 수 있을까, 아직은 막연하기만 하다.
 

 

 

 



 
 
 
<4월의 물고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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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문장이란 어떤 것인지 아직 잘 모른다. 그것을 안다면 글쓰기가 이렇게까지 괴롭지도 않을 것이다. 좋은 문장은 커녕 좋은 단어 하나 선택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 쩔쩔 매느라, 손바닥만한 문단 한 단락을 쓰는데 몇 시간, 어떤 때는 며칠씩이나 걸리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해 겨우 써 놓으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잘 쓴 좋은 문장이 되어있는 것 같지도 않다. 순식간에 날려 쓴 한 문장이든, 몇 시간 고민해서 쓴 문장이든 여전히 거지같다. 나도 아마 타고난 '언치'인가 보다. 말문이 트이고 한글을 사용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십 년이면 그동안 뭐가 되었든 꾸준히만 했으면 달인 소리를 듣게 되었을 만도 한데, 아직도 언치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음치라고 해서 듣기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을 구분해 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요리를 못 한다고 해서 제 입맛까지 없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십여 년 째 언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좋은 문장의 조건이나 작법까지는 잘 몰라도 그것을 느낄 수는 있다. 읽고 말하고 쓰기 시작한지가 몇 년 인데 그것마저도 못하면 그건 언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애 수준이지 싶다. 다행히도 장애 수준으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까닭까지 자세히 들춰 낼 수는 없더라도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을 어느 정도 구분해 낼 수는 있다. 그렇다 보니 이제는 책을 읽더라도 조금만 읽어 보면 감이 온다. 아무래도 가장 많이 읽는 문학- 소설류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끝까지 읽어도 괜찮을 좋은 소설인지, 읽어봐야 시간만 아까울 나쁜 소설인지, 앞 부분 몇 장만 읽어보면 금새 판가름이 난다. 물론, 이것은 온전히 취향의 문제다. 남들 다 맛있다는 음식이 내 입맛엔 별로일 수도 있지 않나. 좋고 나쁨의 구분은 내 입맛에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만한 것은 아니다. 동의받아야 할 것도 아니다. 굳이 좋고 나쁨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은 단지 내 말 할 권리를 적절히 누리고 싶어 그리하는 것일 뿐이며, 강요할 생각도 동의할 생각도 없지만 공감을 받거나 적어도 대화를 하고 싶은 욕구 정도는 있다. 모든 취향은 도의적으로 어긋나지만 않든다면 마땅히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이므로, 언치 주제에 감히 누가 누굴 판단하냐며 욕을 하더라도 그건 당신의 취향이니 과하지만 않다면 괜찮다. 

권지예가 문단이나 대중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잘 쓰는 작가라는 소문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꽤 많은 작품을 출간했고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에서의 수상 경력도 있다. 이제 보니 그녀는 이번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었다. 제법 인지도있는 작가인가 보다. 나도 예전부터 그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작품도 하나 읽어 봤던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이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는 것, 단편집이였으며,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중간에 반납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난다. 왜 그랬었나 모르겠는데, <4월의 물고기>를 읽다 보니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된다. 읽을 시간이 없었다든가 하는 이유는 분명 아니였을 것이고, '안'읽은 것도 아니였을 것이며, 아마 '못' 읽었을 것이다. 권지예의 글은 도저히 나와는 맞지 않는다. <4월의 물고기>만 해도 끝까지 다 읽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읽고 있으면 뭐 이런 글이 있나 싶어 화가 나기도 했고, 다 읽고 나서는 소설을 읽는데 들어간 시간이 아까워 화가 나기도 했다. '뭐 이런 글'이라지만 어디가 어떻게 나쁜지 요목조목 짚어 낼 능력이 없으니 그것이 답답해 다시 화가 난다. 말했듯, 맛이나 볼 수 있는게 전부지 그 맛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가 어떻게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 짚어내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확실하게 나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문장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 

1) 영화관 안은 럭셔리했다. 10p
2) 서인의 경우에 쿨한 척하는 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이다. 11p
3) "오늘은 낚싯대 접어부러야 되겠네. 입질이 영 신통치 않어." 67p
4) '세렌디피티'라는 어감이 왠지 좋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아까 이곳까지 무작정 차를 몰고 오면서 계속 마음속에 떠오르던 문장이었다. 67p 

1)은 소설이 시작한 지 세 페이지만에 나오는 문장이다. 보는 순간 식겁했다. 깜짝 놀랐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영화관 안의 분위기를 '럭셔리' 한 단어로 일축해 놓은 것은 언어 선택에 대한 작가의 대담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라 해 두자. '고급스러웠다'도 아닌 '럭셔리'인 것은 이대나온 여자라서 그렇다 하자. 하지만 나는 감각이 작가보다 너무 뒤떨어져 있어서인지, 소설가가 저런 식의 문장을 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해 보질 못했다. 군더더기 없이 주어와 서술어로만 이루어진 이 짧은 문장이 너무도 뜻밖이라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디가 어떻게 나쁜지를 고민할 것도 없이, 2 + 2는 5가 아닌 것처럼 이것은 어쨌거나 아닌, 그냥 원래 나쁜 문장이지 싶다. 도대체 왜 저렇게 썼을까. 이 문장을 보고 무작정 나쁘다 하는 것은 단지 내 취향이 별나서일까.
별난 취향 탓에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 마자 저 문장에서 걸려 한 번 손발이 오그라들고 나니,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거부감만 든다. 3)같은 경우에는 '부러야' 다음이 '되겄네'가 아닌 '되겠네'라는 것 만으로도 이건 거의 참사 수준이 아닌가 싶었고, 따로 어느 한 부분을 발췌할 것도 없이 인물들간의 대화가 나올 때마다 밑도 끝도 없는 어색함에 마치 개화기의 신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갓 튀어나온듯한 2)같은 문장들을 읽을 때 드는 민망함도 소설에 대한 거부감을 한층 배가시켜주었다. '싸이월드스러운' 문장들만 그렇게 민망한 것도 아니다. 4)같은 문장은 저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문맥 속에서는 특정 작가나 작품의 감수성을 그대로 가져와 써 놓은 것처럼 읽혀 민망스럽다. 4)의 부분뿐만 아니라 저런 식으로 감수성을 도용해 놓은 듯한 부분이 자주 등장해서, 여기는 윤대녕같고, 여기는 또 누구같다 싶은 기분이 여러번 들었는데 이것도 단지 내가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만 과민해 있어서였을까. 

100% 언어로만 소통해야 하는 문학에서 이미 문장으로 승부를 내지 못했는데,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한들 제대로 된 소설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4월의 물고기는> 내용적인 층면에서도 과한 무리수를 두었다. "근본은 애절한 러브스토리지만,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작가의 말' 중에서)."라는데, '스릴러'라고 하니 혹시라도 아직 소설을 읽지 않았으나 앞으로 읽을 독자들을 위해 어떤 이야기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별 것 없이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를 뻔한 방식으로 풀어내지 않았나 싶다. '스릴러'에 기대를 걸며 끝까지 힘겹게 다 읽었으나, 마치, 여배우의 노출이 논란이 되었으며 호화 캐스팅과 개봉 전 요란한 마케팅으로 화제가 되었으나 막상 개봉하고 보니 별 것 없는, 관람 전의 기대와 티켓값이 아까운 영화를 본 듯한 심정이었다. 

이 거부감이 유독 나에게만 드는 느낌일 수도 있다. 작가의 인지도나 수상경력따위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내 입맛에 권지예는 최악이며, 앞으로 다시 권지예 작가의 책을 읽을 일은 아마 없을 듯 하다. 차라리 킬링타임용 블록버스터를 보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다. 그건 재밌기라도 하지. 

 



 
 
 
<삼한지> 가제본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삼한지 세트 - 전10권 
김정산 지음 / 서돌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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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정사삼국지를 읽으며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 읽는 것도 아닌 바에야 여간해선 재미를 붙여 읽기조차 힘들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역사를 다룬 책임에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면 사정이 다르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왔으며, 그만큼의 감동과 재미를 두루 갖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나관중에 의해 처음 씌어진 지 몇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번역본, 해설본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으며, 책 뿐만 아니라 영화나 게임, 드라마 등의 다른 컨텐츠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아마 정독하진 않았더라도 곁가지로나마 삼국지에 대해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연의를 통해 드러나는 중국 역사를 실제의 역사로 볼 수는 없다. 연의는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며, 실제 사실보다는 나관중에 의해 새로 지어지고 꾸며진 허구에 더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연의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역사의 일부 흐름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를 계기로 역사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연의를 읽었던, 혹은 다른 경로로 연의를 접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중국사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관심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할 수 있다. 하나의 문학 작품 덕분에 자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기 중국의 역사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거나, 더러는 아주 열광하게 되기까지 했으니 이것도 문학이 가진 힘, 문화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읽었던 삼국지는 초등학교때 읽었던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60권짜리 만화책, <만화전략삼국지>였다. 워낙 재밌게 읽었던 탓에 그 이후로 삼국지와 관련된 것이라면 일단은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되었고, 이문열이 번역한 삼국지와 비교적 최근에 번역된 황석영의 삼국지까지 여러 번 삼국지를 다시 읽었지만 그래도 질리는 감 없이 읽을 때 마다 재미있게 읽었다. 삼국지를 읽으며 인생을 배운다느니,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자와는 어쩌고 저쩐다느니 하는 것은 사실 잘 모르겠다. 굳이 지략이라든가 무엇인가를 배워보려 하는 전투적인 자세로 읽다 보면 그런 가르침들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해 본 적 없다. 그것은 단지 그냥, 재밌다. 뻔히 아는 내용을 다시 읽어도 괜찮을 만큼 재밌다. 예전에는 이 재밌는 역사와 소설을 가진 중국이 꽤나 부러웠었다. 그리고 의아했다. 우리나라에도 중국의 후 한말과 같은 삼국시대가 있었는데, 왜 그 역사를 다룬 소설은 없는가 하고. 

   
 

앞사람이 살아간 별 같은 흔적을 더듬고, 민족사에서 훌륭한 족적을 남긴 선조를 찾아내어 영웅으로 받들고 섬기는 일은 뒷사람의 당연한 몫이자 민족 전체의 저력을 키우는 초석이며 지름길이다. 그 영웅의 그늘 아래에서 후대는 단결하고 또 성장한다. 당대 영웅은 아무도 없다. 어느 나라든 영웅은 모두 후대가 만든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선조들은 불행하고 우리도 불행하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우리에겐 영웅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유례가 드문 우리만의 수천 년 역사가 있다 한들 후대에 널리 회자되지 않는 역사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영웅으로 승화하는 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제와 뒤늦게 그런 소설을 만났다. 삼국지가 부럽고 우리에게도 그런 소설이 있었으면 했던 예전 같으면 반가워하며 읽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읽으려니 덜컥 겁부터 났다. 이제는 삼국지에 대한 애정도 거의 식었고, 평소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며, 역사소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은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 본문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으니 더욱 겁이 난다.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들은 일단 피하고 보는 편이고 애국심이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데, 무려 ‘민족’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니, 앞선 걱정은 괜한 기우였구나 싶다. 걱정과는 다르게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글 읽는 속도도 느리고 집중력도 부족해 한 권짜리 장편이라도 마음먹고 읽지 않는 한 이삼일쯤은 투자해야 하는데, 삼한지는 10권을 다 읽는데 이 주도 걸리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재밌다. 삼국지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소설적 재미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했던 시기를 다루었으니 애초에 훌륭한 소재인데다가 구성도 탄탄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능력도 훌륭하다. 거기에, 역사적 사실들을 새로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허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전기적 요소들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며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쳐 이 작품을 썼다. 등장인물과 이야기의 대부분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에서 취했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허구를 사용했다(‘작가의 말’, 중에서).” 라고 하니, 이야기적 요소가 아닌 역사적 맥락들은 대부분 실제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혀 몰랐던 것을 새로 알게 된 것들도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다 생각했던 것들도 사실과 다른 것이 많이 있어 놀랐다. 특히나 얼마 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선덕여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그랬는데, 드라마로 재현된 역사를 전부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삼한지를 통해 보니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사소한 사실들 하나하나까지 실제와 너무 달라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나관중의 삼국지가 촉을 중심으로 쓰였던 것에 반해, 삼한지에서는 삼국의 비중을 대등하게 고루고루 다루었던 것도 좋았다.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신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어느 한 쪽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없을 만큼 삼국의 이야기가 모두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보다는, 멸망해 사라진 백제와 고구려에 더 마음이 갔다.
언제나 그렇다. 남아있는 것 보다는 뒤로 흘러 사라져간 것들에 더 마음이 간다. 흥하고 번성하는 것 보다는 이제 오래가지 못해 없어질 것들이나, 이미 흔적만 남은 것들에게 더 애정이 간다. 이것은 모두,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이 문장 때문이다.  

   
 

G. K. 체스터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열여덟 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봐 안달이 난 것이었다. 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190p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졌듯,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 역시 오래 전에 이미 사라졌다. 소설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역사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또 새로운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사라져갔다. 역사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사라져 간 것들의 기록, 그래서 아쉽고 애잔한 기록이다. 그나마 어떤 것들은 역사로라도 남겨졌지만, 역사에조차 남겨지지 않은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알려지지 못한 채 조용히 묻혀있는 것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내가 삼한지를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묵은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 또한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 사랑해 보려 노력한다. 뒤로 흘러가 사라진 역사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또한 언젠간 사라지고 잊혀질 시간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간들이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서 사랑이라도 해 보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나는 사춘기, 앞쪽 게르를 향해 가만-히 살핀다(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191p)." 

 



 
 
 
<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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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을 좋아한다. 책장을 살펴 보더라도 문학 서적만으로 한정하자면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쓴 책들이 대부분이다.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쳐 얄팍해 보이는 독서취향인가 싶어, 가끔 부끄럽기도 하다. 최근 일 년 동안 읽었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더라도, 외국문학 중에선 랭보의 시집 한 권과 카프카의 소설 몇 권이 전부였던걸로 기억한다. 일 년을 이십여 년으로 확장해 보더라도 기억에 남는 작가와 작품들이 몇 되지 않는다. 미국 작가의 <미스 론리하트>나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밀란 쿤데라의 <농담>같은 책들은 아직도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지만 세계 문학의 고전이라기에 읽었던 작품들 중 대부분은 사실 마지못해 억지로 읽었다. 움베르트 에코같은 작가들도 사실 어디가서 있는 척 하기 위해 지루함을 참으며 힘들게 읽었고, 최근 읽은 카프카의 소설들은 꽤나 괜찮았지만 큰 감흥을 받을 정도는 아니였다. 차라리 카프카 소설을 연구해놓은 2차 텍스트들이 훨씬 흥미로웠다. 아직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한 책들이나 많이 읽히긴 해도 아직 고전 반열에까지 들진 못한 책들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고, 그 유명한 해리포터 시리즈도 제대로 안 읽어봤다. 시리즈의 첫번째와 두번째까지는 대충 읽었다만,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그 이상은 못 읽겠더라. 

모국어를 지극히도 사랑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애국자나 무조건 우리 것이 최고라는 민족주의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외국 문학을 읽지 않는 것은 내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라도 거기에 한 번 집착하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꾸 신경쓰게 되는 피곤한 성격 탓이다.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져있다. 뿐만아니라 문학에게는 언어'밖에' 없다. 음악이나 이미지가 어디에서 생산되었고 누구에게 수용되든지 중간에 번역을 거치지 않고서도 전달될 수 있는 데에 반해서 언어는 꼭 번역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번역의 과정 없이도 외국 문학을 접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말로 되어있지 않은 것은 영어로 되어 있든 다른 말로 되어 있든 동화책이라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문학은 영화처럼 다른 수단이나 감각이 표현에 동원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언어뿐인데, 번역을 과정을 거치다 보면 아무래도 본래 언어가 가지고 있던 맛이 어느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또, 번역 사정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아무래도 번역가의 문장보다는 소설가의 문장이 더 섬세하고 뛰어날 것이라 생각하다 보니 선입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거장으로 칭송받는 외국 작가의 대작보다는 그만큼 유명하진 않더라도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쓴 국문학에 훨씬 더 신용이 간다. 그렇다보니 외국 문학은 아무리 좋다 소문이 자자한 책이더라도 왠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거기에다 여러 작가가 쓴 단편들을 함께 엮은 책도 되도록 피하는 편이다. 작가마다 주제의식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른데, 특정한 주제의 기획으로 엮인 책이 아닌 바에야 여러 작가들을 직선적으로 늘어놓고 읽으려 하면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자꾸 호흡이 끊긴다. 성능이 떨어지는 머리 탓이다. 여러 개의 생각을 동시에 띄워놓지도 못하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도 느리다. 그래서 창비세계문학 중 독일 작가들의 단편들을 엮어놓은 <어느 사랑의 실험>은 읽는 내내 힘들었다. 한국 문학을 읽으면서도 여러 작가의 단편이 함께 엮인 책은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나 문예지를 읽을 때 뿐인데, 아무리 창비에서 고르고 골라 엄선하여 모은 작품집이라 하도라도 평소 피해 읽지 않던 걸 읽으려고 하니 잘 읽혀지지가 않았다. 끊기는 호흡을 다시 이어붙이길 반복하며 겨우겨우 다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푸념들을 늘어놓는 것은 내 독서 능력이 모자라서이지, 결코 책에 실린 작품들이 읽기 괴로울만큼 형편없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함께 읽으려니 괴로운 것이지, 떼어내어 따로 읽어보면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전부 훌륭하다. 잘 쓴 소설의 표본같다. 작품들의 뛰어난 완성도가 오히려 책 전체를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한 편을 읽는데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 호흡만큼이 필요한 작품들인데, 이것들을 함께 이어서 읽으려다보니 숨가쁘고 힘이 드는 것이다. 원서를 읽을 수 없으니 비교해 볼 수는 없지만, 번역도 흠잡을 곳 없이 좋다. 문장이 막히지 않고 매끄럽게 잘 읽힌다. 

표제작 '어느 사랑의 실험'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행했던 생체실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불임시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평소 서로에게 호감이 있던 두 남녀를 작은 방 안에 들여보내 놓고 관찰하였으나, 어떻게 해도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어 실험은 실패로 돌아간다. 세 장도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나치가 남긴 상처와 사랑에 대한 질문이 과감하고 신선한 방식으로 담겨있다.
'672일째 밤의 동화'는 '상인의 아들'으로만 서술되는 어느 데카당이 가진 욕망의 균열을 그리고 있다. 인물이 욕망을 투영하는 방식이 모호하여 읽어내기 어렵긴 하지만 감각적인 서술이 돋보인다. 작가는 파격적인 알레고리를 즐겨 구사했다고 하는데, 작품 해설에 인용된 구절이 꽤나 멋지다. '인생의 시골길'이라는 작품 중의 한 구절. "정원에는 바람 말고는 사랑만 살고 있었다. 사랑이 나무그늘 아래서 뇌우를 꿈꾸자 파란 하늘에서 따사롭고 향기로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저 아래 도로에서는 삶 전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아이들, 개를 데리고 가며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 어린 소녀들. 죽음은 말 한마리가 끄는 마차로 노신사와 직공청년, 기품있는 여행객, 거지, 행운을 몰래 실어가고 있었다." 원숭이가 인간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여 아예 거기에 편입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실연당한 여인의 심리를 환영을 통해 서술한 '달나라 이야기'같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짧은 단편인 '뜻밖의 재회'도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인데, 세 페이지 분량의 이 짧은 소설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의 원형이 농축되어 있는 빼어난 작품'이라 상찬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였던 여인이 결혼 직전 사고로 광부였던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이 지나 광산 속에 젊은 모습 그대로 파묻혀 있던 남편의 시신과 다시 만나게 되는 동안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쭉 나열해 놓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니, 수식이나 부연 설명 없이 간결한 문장으로 나열된 사건들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짧은 서술 속에 어떤 무엇의 전부, 한 삶의 전부이거나 한 사랑의 전부가 가감없이 담겨있는 것 같아 숙연해졌다.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시집의 날개에 적힌 랭보의 짧은 약력을 볼 때 이런 기분을 받았었다. 1854년 아르덴의 샤를르빌에서 출생. 1873년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완성. 1886년 '채색판화집' 발표. 1891년 사망. 마찬가지로 어떤 부연설명 없이, 간결한 네 줄만 달랑 기록되어 있으나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납득이 되는 듯한 기분이였다. 태어나 쓰고 죽으면 그게 전부고, 거기에 무엇을 더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 어쨌거나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인 것이 아니므로. 

위의 작품들이 독특하고 신선해 인상깊었다면 '정직한 법관'이나 '주워온 자식', '루이스 헨', '바르바라' 같은 작품들에서는 탄탄한 기본을 바탕으로 완성도 높게 잘 쓰여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에서 책에 실린 작품들이 '잘 쓴 소설의 표본같다'라고 했던 것은 이런 작품들을 두고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이다. 특히나 이념의 시대 속에서 사랑을 그린 '바르바라'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연상시키는데, 관계 사이와 가치 사이로 흐르는 미묘한 감정선과 기류를 섬세하게 잘 잡아내었다. 개인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나 가치와는 별개로 '뜻밖의 재회'와 더불어 책에 실린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주제로 쓰인 '인도로 가는 항로는 없었다'도 무거운 주제를 짧은 분량 안에 잘 표현해 놓았다. 인도를 찾아 출항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돌아온 배에 승선했었던 작가들에 대해 써 놓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들어 발췌한다.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서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역시나 나는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런 노골적이고 뻔한 문장에 끌린다.  

   
  작가들 중 일부는 배의 항로가 잘못되었을 뿐이지 바다 건너에는 여전히 풍요로운 땅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바다 건너의 땅을 인도 혹은 아메리카 혹은 유토피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면에 다른 작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항해를 하고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바다 건너에는 좌절한 희망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토론을 벌인 후에 작가들은 각자의 책상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관해 글을 썼고, 그때부터 아주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가들도 아주 다양해졌고 세상도 무척이나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바보들의 배를 타고 항해한 기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으면 작가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선상에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존재였고, 뭔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경험한 만큼은 더 풍요로워진 셈이지요. 삶과 글쓰기를 위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곧 사랑과 경험이니까요.
크리스토프 하인, '인도로 가는 항로는 없었다', <어느 사랑의 실험>, 374p
 
   

기왕 시작한 김에 마저 다 언급해 버리자면, 카프카의 '짝짓기'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가볍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바흐만의 '개 짓는 소리'와 지크프리트 렌츠의 '발라톤 호수의 물결'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직 못 읽었다. 하인리히 뵐의 '광고물 폐기자'는 워낙 대충 날림으로 읽어 무슨 내용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다시 읽기도 싫다. 어째 이 세 작품은 이상하게도 정이 안간다. 지금 읽을 작품들이 아닌가보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우리가 대면하는 세계는 너무 익숙해졌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갖 방식으로, 전방위로 누비고 다녔고, 우리가 타고 다닌 비행기와 선박의 항로들도 이 세계의 지도를 떡칠해놓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처녀지는 거의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그림엽사를 넘기듯이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끝에서 끝까지 모두 섭렵했지만, 정작 시작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장소를 구별할 줄 알고 장소마다 이름을 부여할 줄 아는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린 것이다.
일제 아이힝어, '작품 해설'에 인용되어 있던 것.
 
   

탄탄한 소설적 완성도가 돋보이는 작품들보다는 주제나 표현이 기발해서 독특한 작품들이 대체로 더 재밌고 수월하게 읽혔다. 이런 것이 '좋은데 새로운' 작품이구나 싶은데, 멀게는 오십 년도 더 전에 또 가깝게 와 봐야 십 년도 더 전에 쓰인 작품들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내 읽기는 너무 얇다. 더 멀리까지 나아가 다양한 것을 읽어 올 수 있어야 한다. 괴로운 읽기를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한다. '창비세계문학'으로 함께 출간된 다른 나라의 단편들도 궁금하다. 그걸 다 읽으려면, 나는 또 죽었구나. 책 살 돈도 없는데.
아울러, '제니퍼의 꿈'의 작가 아이힝어가 1954년에 썼던 문장에서 그는 '이제 처녀지는 거의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세계에 너무 익숙해졌고, 우리가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좋은데 새로운'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생각해보면, 저 때의 아이힝어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지금의 고민들도 모를 일이다. 아직 앞으로도 아주 많은 것들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고, 아직도 새롭게 쓰이고 창조될 것들이 아득할만큼 크고 멀리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모두들, 힘 내시길.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올 때까지.
 

 

by 비선형 

http://whereartthou.tistory.com 

 


 



 
 
 
<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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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부정할 수는 있다. 그는 성령으로 수태된 처녀에게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였으며, 단지 마호메트나 자라투스트라와 같은 예언자 중의 한 명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예수의 역사적인 실존 자체까지 부정할 수도 있다. 그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들이 없으니, 그는 성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화적 인물일 수도 있다. 나는 물론 믿는다. 신을 잊고 신앙적으로 불온하게 생활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압도적으로!) 더 많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이십 몇 년간 믿어왔던 것을 이제와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신성이나 실존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의 신성을 부정하고 실존을 부정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삶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신화적 인물로서든 문학적 인물로서든 그의 삶은 분명히 있다. 그렇게 '쓰여져'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 오디세우스가 있듯, 괴테의 소설 속에 베르테르가 있듯, 성서 속에는 예수가 있다. 현실로서는 실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텍스트로서는 명백히 실재한다. 이 텍스트 속에서 그가 이룬 삶과 서사는 오디세우스보다는 양적으로 빈약하고 베르테르만큼 섬세하게 아름답진 않을지라도, 텍스트를 넘어 현실 삶의 한 부분에 넓게 자리잡고 뿌리내릴 수 있었을만큼 강한 파급력을 지녔다. 그만큼 강렬하다. "인간 구원의 이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신형철, '끝없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 <문학동네 2009 여름>,)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많은 이적들을 내보였고 누구보다 과격한 방법- 행동으로 시대의 정신과 체제를 꿰뚫고 지나갔지만, 그가 이룬 서사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클라이막스이자 완결점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 그는 말이나 기적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간 구원의 이념을 제시한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구원의 이념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과업을 위해 피해갈 수 없는 불가결한 요소였다. 최후의 만찬 중 유다가 예수에게 '인자를 팔 자가(예수를 그 적들에게 넘길 자가) 나입니까' 하고 묻는데, 예수는 이에 대해 '네가 말하였도다' 라고 대답한다(마태복음 26:25). 지젝은 예수의 모호한 대답을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로 읽는다(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는 죽어야 했고 유다는 배신해야만 했다. 이러한 독법은 '다 이루었다'는, 예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과도 이어질 수 있다(요한복음 19:30). 이루기 위해선 그래야 했다.
복음서 곳곳에 나와 있듯, 예수가 이루려 했던 것은 그의 뜻이기 보다는 아버지의 뜻이였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을 이루고 죽기 직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한다(누가복음 23:46). 그가 남긴 서사는 모두 아버지를 위한 것이였고, 그의 삶은 죽어 아버지에게 돌아가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였다. 이것은 그가 이 땅에 내려오기 전부터 예언된 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신의 아들' 아닌 '사람의 아들'로 이땅에 내려와서였을까. 예언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그가 확신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의 아들로서 감당하기에는 그 길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것인지 그는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고 싶다 고뇌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는 이렇게 외친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8:46)."
예수라 하더라도 이럴진대. 하물며 성령이 아닌 호르몬으로 잉태된 사람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에게로 이르는 길은 얼마나 아득한 길일 것인가. 

 

불러일으키다니! 나는 무의식중에 불러낸 하나의 단어에 움찔했다. '불러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불러내진 것들은 불러내질 때까지 누군가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부름에도 즉각 반응하는 것이다. 심지어 불안은 누군가를 불러 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승우, <한 낮의 시선>, 8p

아버지들은 아들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건 그들의 권리고 또 의무지요. 그런데 아들의 권리나 의무는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아버지를 사랑하든 안 하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든 안 했든, 그런 맥락과 상관없이 아들은 아버지를 찾고 받아들여야 하는 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추구하고 화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 그건 순전히 아들의 몫이에요. 아버지는 이미 이 땅에 없잖아요. 그래서 일방적이고요. 아버지는 화해할 의무도 없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는데, 아들은 아버지와의 화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발견해내고, 불러내고, 자기 안에서 화해의 논리를 개발하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좌담 '구심력과 원심력, 그리고 가족의 와해(이승우, 한창훈, 이문재)', <문학동네 2009 여름>, 94p, 이승우의 말. 

 

태어난 모든 것들의 안에는 '아버지'가 웅크리고 있다. 아버지가 '없을'수는 없다. 어쨌거나 있는 것이므로, 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 역시 태어난 사람의 아들로서,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작가의 소설은 아버지를 불러일으킨다. 나를 사랑하거나 그렇지 않는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추구하거나 화해하고 용서해야할 아버지를 불러일으킨다. 이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승우의 소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시작한다.
작품 <한 낮의 시선> 속의 화자 '나'는 아버지 없이도 큰 불편 없이 살아왔다. 스물 아홉이 될 때 까지도 '적극적인 예나 적극적인 아니오'에 능숙한 어머니(15p)의 의사에 따라 사는 동안 아버지의 필요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름조차도 모르는 아버지는 아예 없다고 생각했다(24p). 그러나 그의 안에 웅크리고 있던 아버지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버지는 원인 모를 불안의 형태로, 또 꿈으로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는 아버지를 찾아 낯선 도시로 향한다.
휴전선에 가까운 인구 3만의 도시, 이곳에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의 도시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어머니의 집은 아늑했으나, 아버지의 세계는 광야의 영역에 속한다(55p). 광야에서의 그는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측량기사처럼, 아버지가 있는 곳에 찾아가 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맴돈다. 아무도 그와 아버지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근처까지 갔다 되돌아오길 반복하다가, 서로 원하지 않았던 순간에 아버지와 조우하게 된다. 마침내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지도 어떤 충격을 받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111p). 오히려 그에게 아버지를 부정하길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그럴것이, 아버지는 애초부터 그를 부르지조차 않았다. 부르지 않은 아버지에게 그가 부름받아 간 것이다. 이 호출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각의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서 오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호출이다. 터키 작가의 책에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키스를 하려고 달려드는 남자에게 "아버지가 같은 지붕 아래 있는데 키스를 할 순 없어."라고 대답하는 것 처럼,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억압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심지어 그의 억압의 수단'이고, 그는 그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찾아간 것이다(66~67p). 

작품 속 그의 아버지가 그를 부른 적이 없듯, 나의 아버지 또한 나를 부르지 않았다. 위치의 이동을 요구하는 부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억압이나 강요를 부르는 행위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부름 때문에,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괴로웠던 적은 이제까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의 속내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나 가족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예나 적극적인 아니오'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족들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더욱 많은 열정을 들이는 사람이고, 그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받지는 못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간혹 섭섭하고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아예 내팽겨친 것은 아니니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하는 편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버지에겐 당신의 삶이 있고, 내 삶을 가꾸는데 아버지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에 강한 거부감이 들 때도 있지만, 그와 나의 가는 길이 아예 다르니 신념으로 마주쳐 맞서려 들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맞서거나 받아들이려 해 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어느새 괴롭다. 아버지를 받아들여야겠다 일부러 결심하고 노력한 적은 없다. 굳이 받아들일 필요 없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따로 살아가면 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어느새 괴로워졌다. 어찌 된 일일까. 맞서거나 받아들이려 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괴로워 살펴보니 마음 속에서 아버지와 갈등하고 있다. 

 

페루 출신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인간의 육체를 숙주로 삼고 기생하는 긴촌충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소명이란것도 작가의 삶을 먹고 산다고 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자기가 알고 이는,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한 남자가 한 말을 소개했다. "우리(나와 내 몸속의 촌충)는 아주 많은 것을 함께한다네. 극장과 전시회에 가고, 서점에 들르며, 여러 시간 동안 정치, 책, 영화, 친구에 대해 토론하지. 그러나 내가 이 일들을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나는 오로지 그를 위하여, 다시 말해 나의 촌충을 위하여 그 일들을 한다네. 그렇게 느껴져.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며 내 주인 행세를 하는 촌충을 위해 사는 셈이네." P가 언급한 메뚜기 배 속의 연가시는 때가 되면 몸 밖으로 나오지만 작가의 촌충은 몸 안에 붙어 몸의 일부가 된다. 몸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몸의 일부가 된 것에 대해서는 더불어 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 촌충은 몸의 일부다. 촌충이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다. 그는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 촌충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이승우, <한 낮의 시선>, 88~89p 

 

왜 나는 아버지를 모른 척 하고 살 수 없을까. 아버지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든, 그가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 이상 그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길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눈雪은 왜 차갑고 돌은 왜 딱딱한지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해 '왜'라고 물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인가 싶다. 촌충과 같은 것이라면, 존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억압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이고 어찌할 도리 없이 끝내 이 아버지와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앞의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극복해야만 한다. 

 

상철이 다시 걸음을 옮겨 디디며, 너의 아버지 몸은 저 바위덩어리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라갔다, 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 내 몸은 평평한 바위위에 하늘을 바라보며 눕혀졌다. 아마도 아버지가 누운 채 자신의 육신을 말렸던 그 바위일 거라고,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나는 겨우 생각했다. 석양이 바다위에 피륙처럼 덮이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아버지...... 내 입에서 바람소리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승우, '풍장-정남진행2', <오래된 일기>, 242~243p 

나는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게걸스럽게 글을 썼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가 쓴 글 속의 주인공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내 몸은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새벽에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간다. (......)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반짝이는 것을 인식한다. 아버지도 내 손에 들려 있는 뾰족한 것을 인식한 것 같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움직인다. 내 손에 들린 것이 그의 가슴 속으로 들어간다. (......)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김 중사는 내 흰 티셔츠와 장판에 얼룩을 만든 붉은 피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 나는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 나는 터널을 막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승우, <한 낮의 시선>, 151~157p 

 

'풍남-정남진행2'에서의 아들은 어머니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아버지를 40여년만에 결국 용서한다. 아버지가 죄를 뉘우치며 산채로 풍장되어졌던 바위 위에 몸을 눕히며 아버지를 부름으로써 아버지와 화해한다. 이것이 옳게 잘 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내 아버지는 나에게 죄를 짓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화해함으로써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모른다.
<한 낮의 시선>에서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죄를 짓기는 했으나,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으로도 생활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그에게 그것은 그리 큰 죄가 아닌 듯 싶다.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도 용서나 화해- 긍정으로 아버지를 극복하는 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다. 외부에서 실재하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촌충처럼 느껴지는 아버지를 환상 속에서 칼로 찔러 죽인다.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그는 '터널을 막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상태로 도달해간다(156p). 아버지에게 긍정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안다 하더라도 긍정하고 싶지 않은 나는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까. 내 안의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또다시 글쓰기다. <한 낮의 시선>에서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환상을 체험한 것은 글을 쓰는 도중이였다. 노트 가득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써 내려가는 동안 문을 열고 나가 아버지를 죽였다. 하도 반복하니 이제는 후지고 구질구질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난 원래 구질구질한 것을 좋아하니 괜찮다. 쓰는 동안, 구원받을 수 있을까. 

 

  

by 비선형 

http://whereartthou.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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