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는 겨우 중학교 3학년과 1학년인 두 아들이 중간, 기말고사를 볼 때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시험을 보러 학교에 가 있는 오전에도 나랑 놀아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시험 보는 동안 자기만 신나게 놀면 미안하고 혹시나 부정 탈지도 모른다는 거다. ...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혹시 보상받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43쪽)  

그래서, 아들이 시험보는 시간에 놀지 않고 인고의 시간을 보낸 끝에, 아들이 시험을 잘 보고,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야 좋겠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아이가 내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원망과 분노는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쏟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착각은 자신은 웬만하면 착각하지 않는다는 착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자신이 착각하는 것보다 덜 착각한다고 믿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착각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믿음은 가장 치명적인 착각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순진한 사실주의 native realism'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자신은 객관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신중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착각하거나 편향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착각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바로 타인을 비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66쪽)

자신이 실제 착각하는 것보다 덜 착각한다는 착각, 자기가 더 객관적이라는 착각, 자기는 신중하게 판단했기 때문에 착각할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적다라는 착각이 착각 중의 착각이요, 착각의 대표자다.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 아내와 둘째아들 순영이의 대화를 듣다 보면 내 귀를 의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아내는 성적표를 보자마자 물어본다.

“너희 반 1등은 누구니? 몇 점이니?”

“(순영이보다 평소 공부 잘하는) 아무개는 몇 점이니?”

이러한 질문에 대한 순영의 대답은 한결같다.

“우리 반 꼴등이 요번에 아무개야”, “누구는 수학에서 40점 받았대”, “이번 시험이 모두들 이상하대. 문제가 거지같아”.

아내와 순영이가 주고 받는 질물과 대답은 ‘사오정 놀이’처럼 엉뚱하지만 인간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무언가를 더 잘 하고 싶은 ‘향상의 동기 need for improvement'가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과 비교한다. 보통 비슷한 분야에서 자신보다 좀 더 잘하는 사람과 상향적 비교 upward comparison를 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는 고민하는 것이다. 순영이가 조금이라도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아내는 항상 더 잘하는, 더 나은 친구들과 비교하려 든다.

그래서 순영이는 자기보다 더 못한 친구들 이야기를 계속한다. 인간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아주 기본적이고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다. 이를 ‘자기고양동기 need for self-enhancement'라 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과 하향 비교 downward comparison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엄마에게 자신의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음을, 그리고 자신이 그리 못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바로 자기보다 못한 친구들과의 하향비교다. (89쪽)

정말, 진짜로, 엄격하게 판단해서....

우리 딸이 단원평가 시험지를 집에 들고 왔을 때, 나와 우리 딸의 대화 내용과 똑같다. 완전 똑같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나는 “100점 맞은 친구도 있어?”하고 물어본다는 정도. 신랑은 기겁을 했다. 예상 밖의 시험지를 들고와서, 15점 맞은 친구 얘기를 하는 딸애가 아니라, “100점 맞은 친구도 있어?” 하는 나를 보면서 말이다. 우리 신랑은 어쩜 그리 초연하신지, 그 예상 밖의 시험지를 보고도, “아, 우리 딸 참~~~ 잘했네.” 하신다. 그 표정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진심과 사랑이라고나 할까.

착각, 난 지금도 착각에 빠져있다.

내 글은 재미있다라는 착각, 누군가 내 페이퍼를 재밌게 읽으리라는 착각, 누군가는 추천을 꾸욱! 누르리라는 착각. 착각. 지금 나는 제 정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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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스토예프스키다. 민음사에서 <죄와 벌>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다음은 민음사 홈피에서 옮겨왔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전 2권)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84, 285)으로 출간되었다.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선고에 이은 8년간의 유형 생활 후 두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전작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싹튼 새로운 ‘인물 유형’과 소설 기법이 바로 이 소설에서 만개하여,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심리가 낱낱이 파헤쳐진다. 작가 스스로 『죄와 벌』은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밝혔듯, 죄와 속죄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이 팽팽하게 갈등하고 교차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작가로서의 성숙기에 정점을 찍을 수 있게 했고, 또한 조이스, 헤밍웨이, 고리키,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헨리 밀러, D. H. 로렌스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이 책의 번역자인 김연경은 서울대학교와 모스크바 국립사범대학교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젊은 학자이다. 또한 21세에 등단해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내 아내의 모든 것』, 장편소설 『고양이의 이중생활』 등의 작품을 발표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젊은 학자이자 소설가로서 김연경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이어 『죄와 벌』을 감각적으로 번역해 냈다.

 

<시크릿가든> 김주원의 서재 중 백미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다. 특별하게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서재의 모습 그 자체다. 아, 딸롱이가 어서 크기를, 세계 문학에 빠지기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사 달라고 하기를...

 

 

 

 아, 아니지. 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를 할려고 그랬지.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 때니까, 2002년 정도였던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교수님이 소개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어서 읽어라."

 

그 제안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너무나도 신선해서,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완전 결심한다.

 

그래서 신랑에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사야겠다고. 지금 아니면 후회한다고. 그의 작품 전체를 사야한다고.

신랑이 말했다. 하나만 읽고, 하나만 읽은 다음에 사. 그래? 아니야, 세트로 사야 더 싸지 않을까?

하나만 읽어보고 사. 그래? 그러면 다 사 줘. 응. 그래, 그럼 뭐로 할까? 젤 유명한 걸로 하자.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그래서 샀다.

 

  하지만, 어쩔.

   난 아직도 이 책을 못 읽었다. 상 50 페이지에서부터 진도가 안 나가더니만, 그렇게, 그렇게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은 그렇게 물 건너가고 말았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다섯 수레가 아니라, 열 수레 이상씩 읽은 책을 갖다 버린다는 내 친구도, 이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고 한다. 위안 맞나?

 

 

 

 

 

 

시간은 흘러, 전집 중 일부는 절판이 되고, 인기있는 작품 일부가 개정판이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죄와 벌>을 샀다.

 

 

  

 

맨 먼저 든 생각은, 아, <죄와 벌> 먼저 읽을 걸... 하는 후회였고, 두 번째 든 생각은 그래도 그 때 좀 더 우겨서 전집을 살걸 하는 후회다.

 

러시아 소설은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인데, 봄은 살랑살랑 다가오는 거 같고, 꽃샘추위 가기 전에

다시, 도스토예프스키나 읽어 볼까 한다. 따뜻한, 아니 뜨뜻한 매트에 배 깔고 누워... 키햐, 조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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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4-04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로 알아 들었어요.^^
민음사 책은 저도 몇 권 갖고 있는데, 세트 다 채우고 싶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려 꾹꾹 눌러둡니다~ ^^

단발머리 2012-04-04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ㅎ 순오기님~ 아직 안 주무셨군요. 혹 지금 활동시간이신가요? 저는 오늘 실수로 이렇게 깨 있답니다. 순오기님이 책 욕망을 꾹꾹 눌러참으시다니, 이거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긴대요?ㅋㅋ
 

 

1. 장정일의 독서일기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라서 많이 쑥스럽지만, 글을 쓰고 책을 내서 돈을 버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수입을 책 사는 데 할애함으로써 출판계를 튼튼히 하고 다른 저자들과 동료애를 나누는 게 맞습니다. 출판의 어려움을 늘 이야기하지만,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들이 먼저 품앗이 삼아 책을 구입해 준다면, 좋은 책들을 통해 자신도 보답을 받게 됩니다. (16p)

우리집은 책을 잘 사지 않는다. 필요한 책은 거의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고, 읽어본 후에 괜찮다, 아니 정~~말 괜찮다 싫으면 구매한다. 아이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좋아하는 큰 아이도 세 번 정도 대출을 한 후에야, “아빠, 이 책 사고 싶어요!”하고 운을 뗀다. 덕분이지, 덕택인지, 2011년도에도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책읽는 가족”으로 선정되었다. 큰애 왈. “엄마, 우리 2009년에도 선정되었는데, 또 됐네. 사람이 없나봐.” 끄응~.

내가 좋아하는 알라딘 서재의 “로자”님의 글을 읽다가, 이런 대목이 나왔다. “주문한 00책이 오늘 도착했다. 사실, 매일 책이 배달된다.” 허걱, 매일? 매일 책이 오는 거야? 매일? 그저께 주문한 책이 그저께 도착하고, 어제 주문한 책이 어제 도착, 오늘 주문한 책이 오늘 도착, 내일 주문할 책은 내일 밤 도착. 아.... 뭐, 가히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정겹고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매일 책이 배달된다. 그냥, 꿈 속의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장정일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게 맞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는 것도 좋지만, '책을 사서 보는 것도 필요하겠구나', 수긍이 된다. 이 자리를 빌어 감히 약속드린다. 제가 글을 쓰고 책을 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된다면, 저의 수입을 책 사는데 할애함으로써 출판계를 튼튼히 하고 다른 저자들과 동료애를 나누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잊어주시고, 제발 저를 믿어주십시오.

2. 20대의 독립을 위하여 - <88만원세대> (우석훈, 박권일)

저자들은 말한다. 지금 88만원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상징적 ‘짱돌’은 당장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징 매장에 출입하는 것을 끊는 일이라고. “만약 20대 1만 정도가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20대 사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시겠다는 선언‘을 한다면 ”100명의 20대가 자신의 카페를 가지고 경제적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의미있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이다. ... 젊은 세대의 반프렌차이징 운동은 ”스위스와 스웨덴 같이 프렌차이징을 권장하지 않는 나라가 4만 달러 경제로 넘어갔던 사실과, 프렌차이징을 늘리면서 사회 양극화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전체 사회에 알리는 효과가 있다. (20-21p)

40대가 30대를 볼모로 잡고, 20대를 협박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등골이 휘도록 아르바이트를 해도 1년에 1000만원하는 등록금을 댈 수 없는 상황에서, 인턴으로 취업해도 대출금 갚기가 빠듯한 상황, 한참전에 20대를 통과하고, 빛의 속도로 30대를 지나고 있는 이 시점, 낭만의 20대를 빠듯하게 살아내고 있는 현재의 20대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취업할 때만 해도, 계약직이란 단어가 없었다. 평생 직장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이직이 점점 쉬워진다 해도, “취업했어요.“ 하면, 그건 정규직으로 채용된 걸 의미했다. 정규직이예요, 하고 부연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규직만큼, 아니, 정규직 보다 계약직직원이 더 많다. 법적으로 2년 계약직 근무 후 정규직 전환을 강제했더니, 기업에서는 법을 악용해 2년 되기 하루 전날 직원들을 해고한다. 암담한 현실이다.

저자들의 작은 제안은, 프렌차이징을 거절하고, 20대들이 20대 사장이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장의 열렬한 소비자가 되어, 20대의 단합되고 공고한 힘을 시장에서 보여주라는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씩 가는 문화센터 근처 작은 슈퍼 옆에 대기업 편의점이 두 개나 생겼다. 깨끗하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오픈이라 선물도 주고 해서 아들 녀석이랑 자주 갔는데, 동네 슈퍼도 잊지 말고 이용해야겠다. 반프렌차이징의 실천이라할까.

3. 문명세계를 향한 도전 -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다니엘 에버렛)

작가 장정일의 ‘충격반전’이라는 소개가 전혀 과장이 아닌, 말 그대로 ‘충격결말’의 소개글을 보고 이 책을 찾아 읽었다. 다 읽지는 못 했다. 너무 두꺼웠다.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사는 피다한 사람들과의 30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함께 생활하게 된 지은이는 피다한 종족이 기존의 언어학이나 인류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민족임을 깨닫는다. 피다한 말에는 '전쟁', '걱정', '미래'와 같은 단어가 없고, '소유'나 '믿음'과 같은 개념도 없다. 그들을 오로지 '지금' 속에서 존재하며, 언제나 만족을 느끼며 유쾌하고 명랑하게 살아간다.

전도 활동에 한계를 느낀 지은이는 대학 시절의 은사를 찾아가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조언을 구한다. “그들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면을 찾아봐라.” “부족하다고 느낀다?”어쩌면 좋으냐. 그들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현재에 만족한다. 그들은 내일 먹을 양식을 ‘보관’하지 않으며, 가을에 먹을 양식을 키우기 위해 ‘밭을 갈지 않는다’. 오늘, 지금, 현재, 필요한 물건, 바구니, 작은 바구니 하나면 된다.

자신의 신앙을 전하기 위해 피다한 사람들에게 찾아간 지은이는 오히려 그들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모습에 매료된다.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신에 대한 회의’를 본인 스스로 인정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

사실, 나는 저자가 ‘회의’를 품고, 떠난 믿음과 신념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다른 세상, 다른 세계를 만나 떠나버린 저자에 대해 긴 말을 하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이 책의 인류학적, 언어학적 가치는 대해서는 100% 긍정한다.

4. 역사는 발전한다는 믿음으로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 북한의 핵심 목표를 폭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씨의 사설은 자신의 무식함과 용기를, 그 환상적인 합자를 무리없이 보여준다. 정신차리고, 6·25를 직접 체험하기도 했던 역사학자 강만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6·25는]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참극이었지만, 그 전쟁이 전체 민족사회에 큰 교훈을 준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 교훈이란, 6·25 전쟁은 우리땅의 경우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그 지정학적 위치 문제가 주된 원인이 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복하는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2) 앞으로 남북간의 평화주의가 정착할수록 유리하게 될 수도 있을 그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전쟁통일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7,000만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철저히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313p)

6·25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많이 들어봤다. 그 교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작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우리의 손이 아니라, 열강에 도움에 의한 것이었기에, 남북이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고,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고 싶은 누군가의 욕망에, 북한 정권이 무모한 공격을 감행, 민족 전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아픔을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처음이다.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한 쪽이 한 쪽을 점령하는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이 교훈 하나를 얻기 위해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갔나 생각하면 많이 아쉽기도 하지만, 아직도 역사로부터 배운 이 귀한 교훈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게도 많은 듯 싶다. “전쟁의 방법으로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귀담아들어야 하실 분들, 귀담아 들으시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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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3-2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고 책을 내서 돈버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저하고는 거리가 먼 일 같아서, 다른데 쓸 돈 아껴서 책 사는데 쓰겠습니다~ 라고 약속할게요.^^

단발머리 2012-03-23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맞는 말씀이예요.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꾸벅~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

- 애플의 1997년 광고 '다른 것을 생각하라 (Think Different)'

1. 드디어 끝났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다했다고 누가 칭찬해주지도 않을 일을, 스스로의 숙제라 여기고, 열심히 달리고 달려, 드디어, 끝냈다. 스티브 잡스.

“아니, 무슨, 자서전을 그렇게 정독해? 슬슬 보는거지!” 잔소리하는 신랑을 뒤로 하고, 나는 잡스와 즐거운 열흘을 보냈다. 큰 기지개를 한 번 펴고는, 신랑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 이 책 읽고 얻은 결론은 이거야. 아이폰 아니면 안 해!”

“하지 마라!”

2.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잡스 스스로는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이 거의 없다고 말했지만,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리고 특별함은 잡스 정체성의 일부였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25p)

“저는 항상 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부모님이 그렇게 느끼도록 해 주셨어요.” 누군가가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를 그의 '양부모‘라고 부르거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면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들은 1000퍼센트 제 부모님입니다.” (26p)

버려졌다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아니야, 우리가 너를 특별히 선택한 거란다.”라고 힘주어 말해주는 부모는 그 아이의 진짜 부모다. 부모 자격이란게 존재하다면, 폴과 클라라는 진짜 ‘부모의 자격’이 있다.

1972년 가을 잡스의 입학식이 다가오자 부모는 그를 포틀랜드까지 차로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반항심이 발동한 잡스는 부모가 캠퍼스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 “인생에서 가장 부끄럽게 기억하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너무 무심한 태도로 부모님께 상처를 준 것이지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저를 그 곳에 보내기 위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신 분들인데, 따라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으니...” (69p)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그 희생을 당연하다 여기는 수천, 수만의 기러기 아빠, 펭귄아빠, 그리고 수천, 수만의 매니저맘, 헬리콥터맘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자식의 대학등록금을 대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슬프지만, 당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것도 입양한 아이의 대학 진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부모는 찾아 보기 힘들다.

3. 애플 Ⅱ

사진 125p

기술적인 면에서 이 제품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외관에서 풍기는 독특하고도 특별한 느낌은 강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제품이 1977년에 만들어졌다는 걸 믿기 어렵다.

4. 현실 왜곡장

‘현실 왜곡장’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잡스가 거짓말을 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수사적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말보다 훨씬 더 복잡한 유형의 조작 행위를 가리켰다. 세계 역사와 관련된 특정 사실이든,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이든, 그는 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언하듯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한 행위는 의도적인 현실 거부에서 비롯했으며, 결국 타인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기만하는 것이었다. (200p)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이디어 회의에서 잡스의 부하직원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잡스는 '쓰레기 같은 이야기는 다 집어치우라'며 특유의 독설로 부하 직원을 질책한다. 일주일 뒤, 잡스는 그 직원을 찾아와 자기에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한다. 들어보니, 저번주에 자신이 했던 이야기다.

"그 얘기, 지난 주에 제가 했던 이야기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

상황에 근거해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는데, 1) 잡스는 현실과 상관없이 자신이 그렇다고 믿으면, 그것만을 믿는다는 것과 2) 그러하기에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잡스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성격이었다면 어떨까? 만약 이런 사람이 시어머니라면? (답은 하지 않는게 좋겠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제맛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게 이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게 그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정당하다고 느낄 경우 종종 사람들을 오도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것이 잡스 성격의 일부였다. 반면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장하거나 감춰 두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잔인할 정도로 솔직해지는 때도 있었다. 의도적인 거짓말과 지나친 솔직함 모두 일반적인 규칙들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의 니체 철학적 태도의 여러 측면일 뿐이었다. (496p)

이게 바로 잡스 거짓말의 이유다. 잡스가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가정했을 경우, 참, 세상 살기 편하다.

5. 잡스를 다루는 법

가세(프랑스 지사장)는 잡스의 출장 중 그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스티브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가세가 나중에 말했다. “그를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보다 더 심하게 진상을 부리는 겁니다.” (308p)

'현실 왜곡장'에 살고 있는 잡스와 소통하고 싶으면 어떡해야 할까? 잡스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닐테지만, 잡스는 항상 소리지르며 자신만이 옳다고 우길텐데, 그럴 땐 어떡해야 하나? 잡스 진상 전문가 가세에 의하면 "그보다 더 심하게 진상을 부리는 것"이란다. 같이 진상을 부리다 보면, 잡스가 조용해진다고 하니, 그런면에서 보면 잡스는 '어린 아이' 같기도 하다.

6. 워즈, 애플을 떠나다

당시 워즈는 애플 Ⅱ 부문에서 중간급 엔지니어로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경영이나 사내 정치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그저 회사의 뿌리를 상징하는 겸손한 마스코트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잡스가 애플 Ⅱ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렇게 느낄 만한 정당한 근거도 있었다. ... 화가 났을 때조차도 곰 인형처럼 온순했던 워즈는 다른 디자인 회사를 찾고 나서도 계속 애플의 대변인 역할을 맡기로 했다. (321p)

헌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만든 사람, 문자적인 뜻 그대로 애플 컴퓨터를 창조한 사람이 애플을 떠났다. 창업주가 회사를 떠나, 다른 회사에 입사한다고? 우리나라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가 더 명확해졌다. 즉,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을 만들어 이 세상에 '내놓았지만', 워즈에게 애플을 판매해 보자고 제안해, 이 세상에 애플을 '소개'한 것은 잡스라는 사실말이다.

7. 인생에서 현명한 닻, 파월 로렌

그는 결국 옳은 선택을 했다. 레지(잡스가 사랑했던 또 한 여인)가 친구들에게 말했듯이, 그녀가 잡스에게 돌아갔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의 결혼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레지와의 영적인 유대감을 그리워하긴 했지만, 그는 파월과 훨씬 더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파월을 좋아했고, 사랑했으며, 존경했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편안해했다. 신비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의 인생에 현명한 동반자가 되었다. (434p)

어린시절의 좌절이나 방황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린시절의 좌절이나 방황 때문에 불안정한 성격을 가질 수는 있다. 불안정한 성격은 평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잡스는 뜨거운 열정의 사람으로, 온 몸을 던져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또한 갑자기 냉랭하게 돌아서는 사람이기도 했다. 로렌 파월은 똑똑했고, 강했으며,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훌륭하게 가정을 지켜냈다.

8. 밥 딜런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뿐이었다. ... 딜런은 남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노나 데이비드 보위와는 달랐다. 그는 잡스의 친구가 된 적이 없었으며,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콘서트를 앞두고 잡스를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초대했다. (659p)

<One Too Many Mornings>, <Mr. Tambourine Man>, <Someday Baby>. 잡스가 좋아한 밥 딜런의 노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One Too Many Mornings>가 제일 내 정서에 가깝다.  인문학과 과학의 교차를 중시한 잡스는 밥 딜런의 노래가 아이팟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9. 암 그리고 재발

잡스는 마스크를 벗겨 내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쓰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마스크를 다섯 가지쯤 가져오라고, 그러면 자신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겠다고 지시했다. (763p)

이런 환자 본적 있나. 마스크 디자인 마음에 안 든다고 마스크 안 하겠다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스티브 잡스. DNA 분석을 통해, 염색체 지도를 완성하고 당시 최신 연구 결과를 토대로 암수술 및 치료가 이루어졌지만, 암은 잡스의 ‘현실왜곡장’ 밖에 있었나 보다. 저자는 잡스 질병의 이유 중의 하나로 젊었을 때부터 고수해온 ‘극단적인 채식’을 들고 있다.

10. 위대한 유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노고와 우리가 올라설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 준 사람들의 성과에 의존한다.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사람들 역시 인류에게 무언가 기여하기를, 그러한 흐름에 무언가 추가하기를 바란다. ...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을 사용해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전 시대에 이뤄진 모든 기여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 흐름에 무언가를 추가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 준 원동력이다. (886p)

앞선 사람들이 어깨를 빌려준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어깨를 밟고 일어서 또 하나의 지지대가 되어준다. 잡스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했다. 보기에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했다. 잡스는 오랫동안 기억될 기업을 만들고 싶어했다. 애플은 시장점유율은 그리 높지 않지만, 제품만족도와 시장을 이끄는 위치면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혁신적인 제품, 혁신적인 기업이 탄생했다. 이전 시대에 이뤄진 모든 기여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 흐름에 무언가를 추가하기 위해, 잡스는 최선을 다했다. 그의 몫을 다했다.

11. 그리고, 나꼼수

애플의 아이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 것이다. “~할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지난달 저녁 자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시던 아빠가 말씀하셨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이천만이 넘는다면서? 네, 그렇대요. 우리 나라 인구가 얼마냐? 사람들 거의 다 스마트폰이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스마트폰이야. 그 다음주에 아빠는 핸드폰을 바꾸셨다. 내 전화기는 스마트폰이 아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특히 아이폰이, 이 세상에 크게 공헌한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나꼼수”의 탄생을 가능케 한 것이다.

시내의 작은 녹음실에서 남자 넷이 앉아, 시시덕거리며, 욕을 남발하며, 그리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며 나눈 이야기를 팟캐스트에 올렸다. 한주, 두주, 세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나꼼수“는 정치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더니만, 마침내 전체 1위에 등극, 팟캐스트의 본산 미국에서도 어리둥절, 도대체 저 방송내용이 뭐냐 하도 궁금해해서, 후에는 인트로에 영어로 간단한 안내까지 나가게 되었다. ”이 방송은 꼼꼼하신 우리의 대통령 각하 헌정 방송입니다. 대통령의 이름은, 이명박, 이명박, 이명박~~~~“

12. 내 몫

안철수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100년 후의 사람들도 잡스를 기억할 것이다. 혁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 그의 열정을 말이다. 100년 후까지는 아니어도, 아니,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작더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난 내 몫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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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3-1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라보~~~ 멋진 리뷰에요!
아니 여성이니까 부라미라고 해야 되는 건가....^^

단발머리 2012-03-16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순오기님 오셨네요. 제 방에서 뵈니 더 반갑습니다. ㅋㅋ 책 두께에 비례하면, 리뷰가 좀 짧은 감이 있지요. 잡스님 땜에 딴 책들이 다 구석으로 밀려서는 깊은 밤 울부짖고 있습니다. 빨랑빨랑 리뷰쓰는 방법 있을까요?

순오기 2012-03-22 15: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익숙한 아이디를 내방에서 만나는 건 기쁨이 배가 되죠.^^
 

 

1. 사유의 의무

어떤 관료

-김남주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64p)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아이히만)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 였다. (74p)

김남주가 말한 면서기가 바로 아이히만이다. 그는 근면하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성실하고 공정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한 아이히만을 보며, 저자는 묻는다. ‘근면이 최선인가’.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히틀러에게 받은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아이히만은 그 명령을 수행했을 때 자신의 서명이 그 서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사유’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서명한 수용소 수감 명령서를 받았을 때 유대인들이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사유’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78p)

이런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는 유대인들을 철저한 절망으로 이끈다. 사유하지 않음이 가져온 충격적인 결과다. 사유가 의무인 이유이기도 하다.

2. 소비사회의 유혹

이렇게 해서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 그래서 자본주의적 욕망을 훈련하는 최초의 원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중략) 다시 말해 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히 복종해야겠다는 의지를 훈육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이란 것을 벤야민이 누구보다도 빠르고 예민하게 포착해 낸 것이지요. (134p)

난 백화점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백화점에 자주 갔다. 특히, 딸애와 같이 간 적이 많은데, 위의 글을 읽어보니, 나는 인생의 중요한 가치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순간에 내 아이를 “자본주의 욕망을 훈련하는 최초의 원형적 공간”에 최초로 이끈 사람이었다. 벤야민은 ‘필요’가 아니라 ‘과시’를 위한 소비의 장소 ‘백화점’의 모습을 정확히 예언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 중,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구절이 하나 있다. 말해야 할지, 말하지 말아야 할지. 그의 주장에 의하면, 백화점에 가는 여성은 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화점에 가는 중산층 여성은 ‘자신이 이런 물건을 살 만한 여력’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격에 연연해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백화점에서도 가격을 흥정하지는 않지만, 깎아달라고 말한다. 처음 백화점에 갈 때만 해도, 백화점에서 창피하게 깎아달라고 해? 백화점은 정찰제야, 이렇게 말했지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백화점도 사람 봐 가며 적당히 가격을 깎아준다는 것이다. 원래 할인제품은 할인된 가격으로 나오기 때문에, 더 싸게 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언니가 있는가 하면, 자연스레 5% 할인 추가로 해 드려요, 하고 말하는 언니도 있다.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가격이 어마어마한 명품 매장도 고객 봐 가며 5~10%씩 할인해 준다고 하니, 없어서 가격을 깎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 이제 끝을 어떻게 내야 하나. 대략 난감.

1) 강신주를 알게 된 건 행운이다.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도 우리가 공부하고 책 읽고 감동받아 놓은 걸 하나하나 저장해 놓는 건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이 우리를 보여 줍니다. (@좌절+열공, 174p) 흐뭇하다.

제자 백가의 귀환 시리즈 12권도 나오는대로 차근차근 읽어볼 예정이다. 도서관에서 도와주기를.

2) 백화점에 가고 싶다.

3. 사랑이란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 과연 어느 경우에 발생하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공동체,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닫혀진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 게임이 마주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타자, 즉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이란 감정은 삶의 규칙이 다르기에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타자에 대해 위험한 도약 또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208-9p)

사랑은 타자, 즉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매력이라 한다. 그렇다면, 외부세계에 속한 타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열정적인 감정만이 사랑이라 명명되는가. 가족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룬 부부간의 사랑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 같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닮아가는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이 10년이 넘어간다. 아직도 그이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닌가. 나는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표현 그대로 ‘잘 생긴 사람’과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도 남편을 보고 봄처녀마냥 맘이 설렌다면 그게 괜찮은건가, 아니, 그게 가능한가.

백보 양보해 사랑이 아니라면,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면, 남편과 나의 사랑은 뭐라 말해야 하나. 우리의 감정은 동료애, 양육 파트너로서의 연대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인가.

아들 친구 엄마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서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는구나.”

여자도 사람이니 여자도 바람 피우고 싶을 수 있겠다.

사랑의 완성에도 불행히 사랑의 비극이 조금씩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의 규칙을 공유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두 사람이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연애가 ‘사회적인 것’이라면 결혼은 항상 ‘공동체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결혼과는 달리 연애는 나의 맹목적인 비약이 언제든지 상대방에 의해 거부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결혼에 골인하면 상대에 대한 위험한 비약은 점차 사그라듭니다. 더는 상대를 조심스럽게 알고자 하는 긴장감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211p)

일단 구구절절 옳은 말씀인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가 없다는 게 아쉽다. 저자는 아직 결혼을 안 했거나, 적어도, 위의 글을 쓸 때까지는 결혼을 하기 전이라는 추측만을 남길 뿐이다.

죽을만큼 사랑하는, 이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과 결혼해 버린, 공동체를 이루어 버린, 가족이 되어버린, 우리 기혼자들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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