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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평점 :
비- 체 : 어떤 규정된 대상이 아니다
비체로서의 여성은 대상과도 다르다. 만약
남성들이 부여한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즉 착한 대상에 머무른다면 여성은 멸시받기는
하지만 혐오되진 않는다. 그 대상은 적어도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며, 주체로서의 경계를 뒤흔든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이
재생산을 위한 성녀임을 입증하는 한, 어느 정도의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가 되는 순간 여성은 멸시를 넘어 혐오된다. 여성혐오는 여성 대상이 아니라 여성 비체를 향한다는 것이다. (36쪽)
여성 혐오의 시작점이자 놀이터, 여혐의 절대 온상 일베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희진님은 2016년 7월 31일, 한겨레신문
특별기고문에서 “나는 일베가 남성 하위문화, 실업으로 인한
좌절, 여성 지위 ‘향상’에
대한 반발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일베 헤비 유저 출신의 <한국방송> (KBS) 수습기자 사건이 보여주었듯이, 그들은 한국의 평균
혹은 그 이상 수준의 남성들이다. 일베 사용자 중에는 ‘찌질남’도 있지만 지구화 시대 대한민국의 위상을 고민하는 새로운 건국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은 우익 시민사회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데올로그들, ‘엘리트’들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의 저자 이현재님은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듯 하다.
가상공간에는 새로운 여성 비체의 존재방식을 불편하게 느끼는 남성들, 비체들의 경계허물기에 반발하면서 자신의 경계 지키기에 집중하는 남성들이 그들끼리의 공간을 만들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화의 과정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여성, 명품을 소비하는 여성,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 등 젠더적 위계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여성 비체에 대한 반발심으로 결집한다. (68쪽)
일베 유저들이 페미니스트들을 남성의 권리를 약탈하는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로
비하하면서 혐오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과열된 성취인정의 논리에 집착하고 나아가 인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개별적 성취 인정에서
경험한 “자존심의 붕괴”를 회복하려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적 인정 논리를 통해 남성의 집단적 우월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왜곡된 인정욕망의 반영일 뿐이다. (103쪽)
서울대, 연대, 고대에
이어, 이번에 불거진 홍익대 단톡방 사건은 멀쩡하게 생긴, 소위
명문대 대학생들이 얼마나 ‘일베’스러운 문화와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지 확실히 보여준다. 보통의 남자들에게 ‘일베’가 ‘혐오’의 단어인지
‘공감’ 코드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베 그리고 메갈. 가장 격렬한 항의는 중 2의 여학생으로부터 온다. 일반 남성 뿐 아니라, 기혼여성, 남자 어린이, 남자
노인에게까지 무차별 언어 폭력을 퍼붓는 메갈도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제일 가슴 아픈 말은 ‘메갈도 일베랑 똑같아.’이다. 메갈이
어떠한지, 일베가 어떠한지 나는 사실 잘 모른다. 특별히
찾아가 메갈의 글을, 일베의 글을 읽지 않는다. 읽어본 적이
없다. 메갈도, 일베도 잘 모르지만, 어쩌면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 때마다 똑같은 말을 한다.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야.” (정희진, 한겨레신문)
아무도 일베에 저항하지 못 해. 여성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도, 내가 좋아하는 그 정당도.
만 원짜리 티셔츠 하나에 모두 벌떼처럼 달려들어 결국에는 항복 선언을 받아내잖아. 아무도
일베에 저항하지 못 해. 메갈을 빼고는.
메갈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패러디로서의
미러링 전략은 패러디를 수행하는 비체가 기존의 지배적 남성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그녀들은
패러디의 과정에서 자신이 패러디하고자 하는 남성성에 “잠정적 동일시” 하고 있는데, 이러한 동일시 때문에 그녀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와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면하게 된다. 따라서 패러디의 성패는 그녀들의 패러디적인
동일시가 “잠정적”이라는 점과, 패러디의 과정에서 그녀들이 “두 개의 입장”을 전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달려 있다. (41쪽)
모방의 모방은 효과를 거두었다. 일베는 ‘메갈’이라는 단어에 반응한다. 반응하고
있다. 이제 그녀들의 패러디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그녀들이
두 개의 입장을 전유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어쩌면, 저자의
이런 훈수(?)를 메갈은 한가한 꼰대의 잔소리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메갈이 어느 길로 가는지, 어느 길로 가게 될 건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비합리적 모욕과 차별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할 수 있다. 저항해야
한다. 1955-6년 미국의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과 백인을 차별을 당연시했던 몽고메리시 조례’에 저항했다. 버스 보이콧에 대해 앨라버마주는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고
참가자들을 탄압하며, 주동자들을 직장에서 해고시켰지만, 그럼에도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결국 ‘버스에서의 흑백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 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저항도 있다. 여성참정권 운동을 주도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시위와 가두 연설, 의회 방문, 수상 면접과 국왕 알현 요구
방식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투쟁했지만, 효과가 가장 빠른 것은 ‘재산
파괴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폭력의 언어만을 이해하는 남성들에게
‘폭력’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는 것이고, 그녀의 이런 전략은 성공했다. 센 여자, 몸으로 대항했던 여자,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우체국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갇혔던 그녀, 그녀들 덕분에, 나는 올해 조기대선에서 투표 ‘할’ 수 있게 되었다.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서의 동정심을 넘어, 자아와 타자의 동일성에
기반한 동감을 지나, 자아와 타자의 결합과
상호의존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공감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상호감응”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비체, 비체들은 즐겁게 소란스럽게 연대할
수 있을까. 남성은 여성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남자 또는 여자가 아니라 사람, 둘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인식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페미니즘 책을 읽고 난 후의 글은 항상 물음표로 끝난다.
그럴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목소리를 모방함으로써 크레온의 목소리가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듯이, 메갈리안인들은 남성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들이 어떤 폭력적 배제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메갈리안들의 거울은 단순히 남성의 주체성을 확인시키는 착한 대상의 거울이 아니다. 그녀들의 미러링은 남성들만큼 여성들이 남성들을 모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이자 남성인,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의 거울이다. (40쪽)
비체 되기의 전략들은 바로 그 비체성 때문에 혐오의 타깃이 된다. 기존의 인식틀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행위자의 등장은 기존의 젠더 경계를 교란한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러한 전략들은 모두 손에 잡히는 착한 타자로서의 여성성을 벗어나기 위한 것들이다. 비체는 주체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상대적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인식틀을 벗어나는 ‘급진적 타자’이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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