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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닺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204쪽)
5장에서 소개한 아사히야마 동물원을 방문한 관람객은 2008년 약 33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 아이들 손잡고 동물을 보러 온 사람은 30만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300만 명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일본 본토에서 아사히야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정말 그런지', '정말 그렇게 재미있고 놀라운 곳인지'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원래 동물원이란 아이들과 놀러가는 곳인데, 본래 취지에 전혀 맞지 않게 '확인'하러 간 사람이 10배나 더 많았던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롤프 옌센이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말한 핵심 메시지다. (205쪽)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한 가지 만들어내면 그 이야기가 개인이나 조직의 운명을 바꾸게 해준다는 말처럼, 죽이는(?)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냈더니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끌려 이 외딴 시골마을까지 몰려든 것이다.(206쪽)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 함께 이야기 나라로 여행을 가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란 무엇이고,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 열광하는지 알아보자. 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면 이야기의 원형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즈니스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법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먼저 이야기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한다.
로댕은 왜 10년 동아 <칼레의 시민>에 몰두했는가
근대 최고의 조각가로 유명한 로댕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창조했다. 그런 그의 대표적인 조각 작품 중에 <칼레의 시민>이 있다. 이 작품은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칼레 시를 대표해 죽음을 자청한 이들을 기리를 작품이다. 칼레 시에서 이 작품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댕은 망설임 없이 참여해 이 작품에 10년을 쏟았다. 과연 어떤 작품일까? (206쪽)
1347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프랑스 칼레 시부터 공격했다. 조그만 성이라 애초에 한 달이면 가능할 것이라고 쉽게 보고 시작했는데, 이 작은 성은 완강히 저항하여 1년 가까이를 버티어냈다. 영국 왕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이런 괘씸한... 함락만 하게 되면 전 주민을 몰살시키고 말리라!'
칼레는 버티고 버텼지만, 결국 식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어 영국군에 항복의사를 전했다. 이에 에드워드3세는 예고했던 대로 칼레 시민들을 몰살하려 했다. 그때, 한 신하가 나서서 말했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우리가 이제 프랑스 본토에 발을 디뎠고, 앞으로 함락해야 할 성들이 수없이 많은데, 항복을 청해온 칼레의 주민들을 몰살했다는 소문이 나면, 나머지 성들의 저항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듣고 보니 신하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럼 좋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그동안 우리 영국군을 괴롭힌 대가로 주민 6명만 죽일테니, 그 6명을 데려오도록 하라."
칼레 시는 대량학살을 면했다는 소식에 안도했으나, 어떻게 6명의 희생자를 고른다는 말인가. 이에 관해 회의가 벌어졌고, 대체적인 중론은 제비뽑기로 정하는 분위기로 모아지고 있었다. (207쪽)
그런데 어떤 지도자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우리가 나라를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제비뽑기로 정한다면, 결과적으로 '재수가 없어서' 제비를 잘못 뽑아 죽은 것이 됩니다. 이러면 후손들 보기 부끄럽지 않겠소?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원 방식으로 희생자를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나는 이곳에서 가장 부자고 살 만큼 살았으니, 내가 먼저 자원하겠소!"
이 영웅적이 연설에 고무된 시민들이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들어 순식간에 6명의 지원자가 다 찼다. 그 6명을 형상화한 것이 <칼레의 시민>이다. 이 동상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 인물, 외스타슈. 칼레 시 최고의 부자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장서 실천한 주인공이다. 이 사람의 표정은 의연하다. 하지만 손을 보면 반쯤 풀려 있다. 비록 자원의 방식을 주장하고 가장 먼저 손을 들었지만, 이 사람 또한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로댕은 절묘하게 표현한다.
두 번째 사람, 장 데르는 칼레의 법률가다. 손에는 적군에게 넘겨줄 성문 열쇠를 들고 있지만, 얼구을 더없이 강직하고 단호하다. '비록 성은 빼앗기지만, 정신마저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형제 피에르 드 위상과 자크 드 위상이 나온다. 그런데 동생은 얼떨결에 자원했나 보다.(209쪽)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는지 울상인 채로 뒤를 돌아본다. 입은 반쯤 열려 있고, 손바닥은 힘없이 펼쳐져 있다. 그러자 걱정이 된 형이 귀엣말을 한다. "돌아보지 마, 마음 약해져."
그 다음 사람은 학자 장 드 핀네다. 이 사람의 얼굴에는 '살고 죽는 일은 어차피 부질없는 것'이라는 실존적 허무가 떠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 아드리외 당드레. 이 사람에게는 특별히 '우는 시민'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자기가 희생을 자청해놓고도 죽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죽음이 너무나 두렵고 그 공포가 극에 달해, 한마디로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이 작품 속의 '우는 시민'을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로뎅이 10년을 투자해 완성한 이 작품을 납품하려고 하자, 칼레 시에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상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탁한 건 호기로운 영웅들의 모습인데, 이렇게 나약하게 떨고 있고, 울고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놓으면 어떡하느냐, 이거 우리 못 받겠는데? 반품해야겠는데?' 이런 기조다.
그러자 로댕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르는 소리, 이 사람들이 위대한 것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처럼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원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210쪽)
예전에 CEO들과 영화공부를 한 적이 있다. 이름하야 '무비앤컬처' 총 5회 수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한 끝에 다음과 같이 커리큘럼을 정했다.
1부: 영혼에 놓는 주사, 스토리(이야기 만드는 법)
2부: 누구나 보지만 아무도 못 보는 영화 속 속살 이야기(영화학 개론)
3부: 감동에 감동을 더하는 영화음악 이야기(영화 속 클래식음악, OST)
4부: 세상을 바꾼 위대한 미치광이들(위대한 영화감독들 이야기)
5부: 영화에서 배우는 유혹의 기술(위대한 '선수'들의 필살기 요악)
그 중에서 1부인 스토리 만드는 법은 심리학박사이자 영화평론가인 심영섭 선생이 담당했다. 심영섭이라는 이름에는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하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녀의 재미있고 날카로운 입담을 따라가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이야기로 먹고사는 작가들은 수백 년 동안의 노하우를 모두 모아 이야기 만드는 공식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미국 몬타나 주립대학의 토비아스 교수는 친절하게도 세상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4개의 나라, 20가지 플롯으로 정리해놓았다. (212쪽)
먼저, 모든 이야기는 다음 4개의 나라에 속한다.
모험의 나라, 사라의 나라, 성공의 나라, 가족의 나라.
또 각 나라는 작은 나라(小國)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험의 나라에는 7개 소국이 있다. 영웅담, 추적, 구출, 탈출, 대재앙, 게임, 수수께끼.
사랑의 나라에는 4개 소국이 있다. 순수한 사랑, 희생적 사랑, 구원적 사랑, 금지된 사랑.
성공의 나라에는 6개 소국이 있다. 성공, 라이벌, 음모와 복수, 실패, 희생자, 역전.
가족의 나라에는 3개 소국이 있따. 성장, 갈등과 화해, 변모와 변신(213쪽)
4개 나라에서 가장 점유율이 높은 국가는 '사랑의 나라'고 점유율은 약 80%라고 한다. 그리고 또 '사랑의 나라' 안에서의 점유율을 보면, '금지된 사랑'이 80%라고 한다. 계산해 보면 모든 이야기의 64%는 금지된 사랑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이야기 나라의 20개 원형을 이리저리 뒤섞으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해리 포터》는 모험의 나라 영웅담과 사랑의 나라의 순수한 사랑, 성공의 나라 중 음모와 복수, 가족의 나라 중 성장 이야기가 섞여 만들어진 이야기다. (214쪽)
비즈니스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법: '드림 소사이어티'
자, 다음 단계는 우리 이야기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먹히도록' 선사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차례다.
1999년 어느 날, 코펜하겐에 있는 미래학연구소에 난해한 질문 하나가 날아왔다.
"정보화 사회 다음에는 어떤 사회가 도래할까요?"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롤프 옌센 소장은 연구소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정보화 사회 이후 어떤 사회가 올 것인가를 진단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그들의 결론은 '드림 소사이어티'였다.
드림 소사이어티란?
한마디로, 꿈과 감성 그리고 이야기가 주도하는 사회다.(215쪽)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라는 것이다. 롤프 옌센은 드림 소사이어티는 미래가 아니라이미 도래해 있다고 결론지었다. 오늘날 우리가 내리는 모든 구매결정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상품'을 사지 않고, 상품 속에 들어 있는 '꿈과 감성과 이야기'를 구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들은 새롭게 정의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 방버은 한마디로 우리가 생각하는 업종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이름 아래서는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프 옌센은 업종에 대한 개념을 확 바꿔서 모든 상품은 다음의 6가지 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모험판매의 시장
2. 연대감, 친밀감, 우정, 사랑을 위한 시장
3. 관심의 시장
4. '나는 누구인가'의 시장
5. 마음의 평안을 위한 시장
6. 신념을 위한 시장 (216쪽)
1. 모험판매의 시장 : 이종격투기 K-1
2. 연대감, 친밀감, 우정, 사랑을 위한 시장 : 아이러브스쿨
3. 관심의 시장 : 동서커피문학상
4. '나는 누구인가'의 시장 : 막걸리, 김연아
5. 마음의 평안을 위한 시장 : 도보 체험관광
6. 신념을 위한 시장 :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동서식품은 커피를 파는 기업이다. 그런데 이커피 장수가 2년에 한 번씩 '동서커피문학상'을 주최한다. 엉뚱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20년의 관록이 붙은,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문학상이다. 왜 커피 장수가 문학상을 주최할까?
물론 엄청나게 착하고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비즈니스에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서식품은 유치하게 "커피 사세요!" 하고 외치지 않는다. 그드르이 방식은 당구로 치면 '쓰리쿠션'이다.
"주부 여러분, 문학에 대한 우리의 꿈과 열정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 다시 펜을 잡고 문학의 꿈을 살리십시오! 저희가 돕겠습니다."(218쪽)
소녀시절에 감성 충만한 글 한 편 써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부들이 동서식품의 메시지에 자극받아 십수 년 만에 펜을 잡고 앉았다. 하지만 삶에 매몰돼 어언 10~20년을 보내고 나니, 펜을 잡아도 글이 안 써지는 게 문제다. 그럴 때 주부들이 자연스레 찾는 것은, 맞다, 한 잔의 커피다. (생략)
동서식품이 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집안일에 쫓기면서 점점 억척스럽게 변해가는 주부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들의 겉모습 몇 겹 아래에는 '문학'으로 상징되는 여린 감성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생략) 주부들은 자신을 '문학소녀'라고 불러주는 커피회사의 손짓에 기꺼이 문학소녀가 되어 '커피 한 잔'으로 보답했다. '아줌마'로만 인식되던 대상 속에 꽁꽁 감춰진 '감성'을 건드린 결과다.
동서식품은 그들의 고객들에게 이야기를 쓸 기회를 주었다.(219쪽)
서울에 있는 어느 고깃집에 가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이 집 이야기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적이 있다. (생략)
고기를 시키면 은박지에 싸인 삼겹살이 나온다. (220쪽)
은박지를 벗기면 고기 위에 나뭇잎이 하나 붙어 있다.
"이게 뭐예요?"
"월계수 잎이에요."
"이걸 왜 붙여놨어요?"
직원은 손님에게 책받침 같은 걸 한 장 주고 자리를 뜬다. 책받침에는 월계수 삼겹살의 사연이 적혀 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저희는 육질이 가장 좋은 고기를 고객들께 제공하기 위해 각 지방을 돌며 최고의 돼지들을 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돼지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네 별로 '돼지 달리기 대회'를 개최합니다. 1등 한 애가 아무래도 육질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 집에는 돼지 달리기 대회에서 1등 한 애들만 옵니다. 1등 한 애들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을 수여합니다. 여러분이 드시는 고기는 1등을 했던 돼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등의 증거로 그 돼지가 받았던 월계관에서 입사귀를 한 잎 떼어 붙여놓았습니다."
이걸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재미있어서 여기저기 떠들게 된다. 이 이파리 한 장 덕분에, 그 동네 고깃집이 다 파리를 날려도 이 집은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집을 응원해주기 때문이다. 이 고깃집은 선생님처럼 사실을 말하는 대신 뱀장수처럼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뉴스처럼 무미건조하게 얘기하지 않고 드라마처럼 얘기했다. 그럼으로써 손님들을 일일이 끌어들이는 대신, 손님들이 알아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응원하도록 게임의 법칙을 바꾸었다.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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