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한 부분을 훔쳐 보자. 다음 문단은 단지 하나의 방에 대한 묘사가 어떻게 인물에 대한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전형적인 예다. 여기서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는 방금 자살한, 자신의 좋은 친구이자 체스 파트너였던 사진작가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방을 조사한다.

방 안에는 공원에서 쓰인 듯한 바퀴 달린 커다란 카메라와, 집에서 만든 페인트로 칠한 바닷가의 석양이 그려진 배경이 놓여 있고, 벽에는 중요한 순간들이 담긴 아이들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첫 성찬식 때 사진, 토끼 옷을 입고 찍은 사진, 생일 파티 사진. 체스를 두다 생각에 잠겨 멈춰 있던 오후마다, 우르비노 박사는 해가 지날수록 벽을 덮은 사진이 늘어가는 것을 바라보았었다. 일상적인 그 사진들은 미래의 도시의 씨앗이었다. 이 모르는 아이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또 부패할, 그의 영광이라곤 재조차 남아 있지 않을 그곳. 종종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그는 슬픔으로 몸서리쳤다.

이 짧은 단락은 이야기의 배경과 우르비노 박사의 세계관을 드러내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씨름하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멋지게 요약해준다. 마치 우리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언젠가 세계도 우리 없이 계속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커다란 돌 위에 “왔다 감”이라고 스프레이로 써놓는 것보단 훨씬 낫다.(199쪽)



이야기를 쓰는 이유?
‘이야기는 삶의 도구‘라는 말을 곱씹어 생각한다. 학생이었을 때도 분식점 벽에 ˝왔다 감˝ 낙서 한 번 해본 적 없으면서 새삼 이야기를 쓰겠다니 대체 무슨 이야기. 할 말이 없어서 답답했는데 이야기를 써서(도구 삼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면 와이낫?
진짜 말 그대로 와.이.낫

내가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 하나
와이낫

주인공은 나
나 아니면 안되는 이야기 하나
와이낫

주인공은 주인공으로서 해야할 일이 있다.
와이낫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 바깥에서
이야기 속으로

왔다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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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대목, 창작의 신비성이 아니라 현실성에 관한 것이라는 말에 설득됨.



이 책은 창작의 신비성이 아니라 현실성에 관한 것이다. - P13

중심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도록 장면 하나하나를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점점 산 넘어 산이 되어가는데, 알다시피 스크린에는 숨을 곳이란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이다. - P13

카메라는 모든 잘못된 것들에게는 치명적인 X레이 기계이다. 카메라는 인생을 몇 배로 확대해서 보여주며 우리가 혼란과 당혹감 속에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질 때까지 이야기의 전개 과정 중 모든 취약하고 유치한 구석을 샅샅이 발가벗겨 낸다. 그러나 단단히 결심하고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당혹감들은 사라지게 된다. 시나리오 창작 과정은 이상한 일들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미스터리는 아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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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조지의 《적색 부주의Careless in Red》 중 한 부분을 보자.

앨런이 말했다. “케라.”

그녀는 못 들은 척했다. 쌀과 녹색 콩으로 된 잠발라야와 브레드 푸딩을 만들기로 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괜찮았다. 치킨, 소시지, 새우, 피망, 바지락 국물…… 목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녀는 일주일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연습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 때나 자기들이 원할 때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을 수 있겠지. 정말 훌륭한 기계가 아닌가? 전자레인지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줬다. 이건 음식뿐 아니라 사람들도 이런 기계에 넣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녀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 아닐까? 그들을 데우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꿀 수 있도록. 소녀는 누굴 가장 먼저 집어넣을까. 그녀는 궁금했다. 엄마? 아빠? 산토? 아니면, 앨런?
(93/411)_《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리사 크론 지음 문지혁 옮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를 읽는다. 글쓰기 책에는 인용구가 많아서 읽고 싶은 책도 많다. 《적색 부주의(Careless in RED)》라는 책이 끌리는데 번역본은 안보인다. 아쉽다. 아쉽지만 패스. ‘내일 죽는다면‘까지는 아니어도,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1년뿐이라면‘ 정도의 생각을 하다보니 많은 일들을 패스할 수 있게 되었다. 잘된 일이다.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eBook으로 읽다가 종이책 주문
2024. 2. 19. 월 아침에 비 오다가 12시에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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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쪽 사진: 필로덴드론 글로리오숨

서점에서 본 책이다. 표지를 문지르면 좋은 냄새가 난다. 향기에 홀려서 그대로 계산대로 들고 가다가 ‘차라리 식물 화분을 하나 사는 게 좋겠다‘ 싶어서 책은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왔다. 하지만 식물 화분 파는 곳을 찾지 못해 그냥 집에 왔다. 결국 다음 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올 정도로 식물 사진이 많은데 그 중에 이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든다. 진한 초록색과 연두색이 어울린 색감이 좋다. 굵은 흰색 잎맥이 힘차게 느껴진다. 식물 이름은 ‘필로덴드론 글로리오숨‘이다. 외우기는 어려울 듯. 그래도 지은이가 이 식물을 제일 좋아한다고 해서 뭔가 통한 느낌이 반가웠다.



(269쪽) 수백 종의 식물이 자라는 내 정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식물을 꼽으라면, 나는 자랑스럽게 필로덴드론 글로리오숨을 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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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
프로개 지음 / 드루이드아일랜드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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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향기를 좋아한다. 단골 식당 주차장 화단에 로즈마리가 무성했다.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로즈마리가 그렇게 좋으면 조금 꺽어 가요. 가져가서 생수통에 꽂아두면 뿌리가 나와요. 뿌리가 나오면 화분에 옮겨 심으면 되요.˝

"감사합니다!" 사양 한 번 하지 않고 세 가지나 꺾어다가 500미리 생수통에 수돗물을 채우고 꽂았다. 3일째 하얀 뿌리가 나왔다. 일주일 후에 화분에 옮겨심었다. 일주일 만에 가지 두 개가 말라버렸다. 창가에 제일 가까웠던 가지 하나가 살아남았다.

작년 봄에, 자주 가는 하나로 마트 화훼 이벤트 시장에서 로즈마리 화분 2개를 샀다. (15,000원 × 2 = 30,000원) 같은 날 같은 집에서 산 거라 죽으면 다 죽고 살면 다 살리라 생각했는데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하나가 시들기 시작하더니 가을이 깊어갈 때 기어이 모든 잎이 다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둘의 차이라면 창가로부터 거리 뿐이었다(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튼 하나는 가고 하나는 남았다.

《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많이 울었다. 식물 입장에서, 인간 곁에 살아가는 식물들의 애로사항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신해주는 느낌에 동화되었다고 할까. 말로 표현하지 못해 아프게 남아있던 내 몸 속 감정들이
일렁 일렁 일렁여 눈물로 흘러나오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봄을 기다린다.
봄에, 여름에 가을에 겨울에
다시 봄에 답장을
드루이드가 드루이드에게
답장을
쓸 수 있기를


(12쪽) 이렇게,
(13쪽)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6쪽) 계속 편지를 쓰겠습니다.
(392쪽) 드루이드로부터 드루이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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