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거친 반론을 이해하길 바란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정서 역, 새움, 2014, 165쪽)
문학작품에서 부분은 전체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작품의 미적 구조를 형성한다. 문제의 이 부분에서 로쟈 님(이하 경칭 생략)은 limite를 영문판의 사례를 들어 '새벽'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며 초점을 흐린 다음(초점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히겠다), 사이렌(sirene) 또한 '뱃고동 소리'로 번역한 김화영 교수의 편을 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다른 번역도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젝처럼 난해한 책을 알기 쉽게 소개하기로 나름대로 꽤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의 논리치고는 너무나 허술하고 수상하며 객쩍다. 도대체 저게 논리적으로 어떤 정합성을 갖는단 말인가? A일 수도 있고 B일 수도 있는 번역이 있는데, 이미 누군가 B라고 했기 때문에 자신은 B쪽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다니! 더구나 본인 스스로, 번역은 쉽게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덧붙이기까지 하면서.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정서의 번역이 원문에 가장 가깝다. 거기에다 부분과 전체의 맥락을 두루 살피고, 문학 고유의 메타포나 상징적 장치까지 고려하면 이정서의 번역이 거의 전적으로 옳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는 불어 사전을 조금만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불어에서 limite의 사전적 의미는 1. 경계 2. (시간의) 한계, 기한 3. [비유] 한계, 한도, 제한이다.
그리고, sirene은 1. [그리스신화] 세이렌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요정으로 뱃사람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홀려 난파시켰다고 함) 2. [비유] 마녀,요부(妖婦) 3. (하반신이 물고기 꼬리를 연상시키는) 기형 동물, 인어체(體) 4. 사이렌이다.
limite는 뒤에 나오는 nuit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다. limite의 의미 자질 자체가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 전체의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인 까닭이다.
나는 누워서, 하늘이 황금빛으로 변해 가면서 여름 저녁이 오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이정서 역, 새움, 2014, 156쪽)
뫼르소는 감옥에 누워 저녁이 온 것을 알았고, 오랜만에 마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제가 들어왔다. 그와 논쟁을 벌이면서 긴 대화를 나누고, 급기야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 다음의 상황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나는 잠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얼굴 위의 별과 함께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전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떠올라 왔다. 밤과 땅, 그리고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식혀 주었다.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게로 흘러들었다.(이정서 역, 새움, 2014, 165쪽)
그리고는 문제의 구절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nuit는 언제쯤을 의미할까? 바로 '밤중'인 것이다. 로쟈가 인용한 영문판의 '새벽'은 결코 아니며(새벽이라면 별은 스러지고 없어야 한다), 문학동네판의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는 더더욱 아니다. 별이 초롱초롱하게 뜨고 주위의 소리들이 고요히 잦아든 '한밤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limite는 한밤중의 '2.한계'나 '3.제한'의 뜻보다 '1.경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다시 뒤에 나오는 사이렌과 결합되면서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당시는 2차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전시 상황이었으므로 우리가 유신시대에 통금을 알리는 싸이렌이 울렸던 것처럼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을 것이다. 사전에 보다시피 사이렌이 '뱃고동 소리'라는 해석은 없다. 물론 폭넓은 은유는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오딧세우스)의 맥락을 견강부회식으로 전혀 엉뚱하게 갖다붙인, 일종의 '과잉해석'이다.
참고로 여기서 '울부짖었다'의 hurler는 1.(개·이리 따위가) 짖다 2.(주어는 사람) 절규하다, 울부짖다, 고함[아우성]을 치다이다. 자정의 고요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렸기 때문에 역자(이정서)는 '울렸다'라는 자연스런 어휘를 버리고 일부러 '울부짖었다'라는 동사를,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작 지금부터이다. 앞서 언급했던 '초점'에 해당된다. 이정서의 번역이 전적으로 옳다고 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한밤의 경계선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다음날이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바로 그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는 '죽음의 세계'가 된다. 반면에 김화영 번역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뫼르소와 아무 관계가 없어진 세계, 즉 '바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이렌이 '뱃고동 소리'로 번역되면 메타포의 깊이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또한 '죽음의 세계'가 되어야만 바로 다음 문장("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이 더 깊고 강하게 공명할 수 있다. 사형수가 자기 생의 마지막 몇 시간을 남겨놓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장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의 이 구절이 감옥에 갇힌 사형수가 갖게 되는 분명한 심리적 메타포로 절대 기능할 수 없다. 무슨 수로 그게 가능하겠는가? 불과 몇 줄 안 되지만 까뮈의 언어 연금술이 아주 멋지게 빛나는 대목 아닌가. 좋은 번역자는 그런 걸 찾아내 독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물론 텍스트의 의미는 완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 맥락에서 부분이 조정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며, 그 전체의 범주가 달라지면 문제의 이 구절 또한 새로운 의미를 입고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 정도의 해석에 따른 이정서의 번역이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이쯤이면 로쟈의 지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지적이 새로운 번역을 더 도드라지게 만든 것은 아닌지 생경스럽다. 비판은 신중해야 한다. 로쟈가 좋아하는 지젝의 문장을 보라. 얼마나 기막힌 역설과 시적 진술로 가득차 있는가. 비판을 위한 비판처럼, 전체의 맥락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극히 지엽적인 부분만 가지고, 그것마저도 아무런 근거 없이 달랑 케이스 하나만 가지고, 누군가의 고된 작업을 깎아내리는 짓은 삼가야 한다. 그게 진정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인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곡학아세! 지식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짓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