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를 위한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2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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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옮겨쓰기.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이건 말이 아니고 글이라서.

글씨 크기를 크게 하거나 진하게 하거나 빨간색, 형광색, 그 무슨 강조 표시를 해도 여기다가 내 마음을 표현할 재간이 없다. 나는 개구리라서.

 

그러니 방법은 하나, 길게 옮겨 쓰는 것 뿐이다.

만약 이게 대자연 풍경을 보고 느낀 감정이라면 그나마 이런 방법조차 쓸 수 없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건 내가 여기 옮겨 쓸 수 있는 '글'을 보고 느낀 것이기에,

이 책을 쓴 글쓴이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 작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음 하나 모음 하나, 받침 하나 틀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길게 옮겨쓰기. 

 

이걸 읽고 누군가 나와 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리라 기대하면서,

그때 나는 그 누군가의 글쓰기 동무 되리라 상상하면서,

길게 옮겨쓰기, 시작.

 

 

9. 일반언어와 창작언어

 

모든 습관은 무의식적 자동화 속으로 퇴보한다. (........ 반면)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의 감각을 되찾게 한다. 사람들이 사물을 느낄 수 있게 하며 돌을 '돌답게' 만들어 준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알려져 있는 대로가 아니라 지각된 대로 부여하는 것이다.
ㅡ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기술로서의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는 일상의 자동화된 인식을 배제하고,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알려진 대로가 아닌 지각된 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즉, 습관적ㆍ관용적ㆍ상투적 표현을 배제하고 지각된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낯섥 하기' 이다. 그런 점에서 "낯설게 하기' 라는 용어는,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작가 자신에게 지각된 그대로 표현하기'다.

 

일반언어는 누구나 사용하는 관습적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관습적ㆍ관용적 태도를 유지시켜 준다. 반면 문학언어 혹은 창작언어는 화자가 실질적으로 느낀 그대로, 혹은 화자만이 느끼는 그대로 서술한다. 그런 점에서 화자만의 감각과 개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테면 다음의 예를 보자.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 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대드롱 직(織)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골 사람들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잔을 빼면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상태 속에서 듣고 있었다. 버스 안의 좌석들은 많이 비어 있었다. 그 시찰원들의 말에 의하면 농번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할 틈이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면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시작 부분이다. 개구리들은, 세상을 소모적으로 상투적으로 통속적으로 관용적으로 관습적으로 바라본다. 위 글의 시찰원들은 시찰원들답게 개발론적 시점에서 무진을 이야기한다. 이익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지방 여행을 가서는 맛집이나 찾는 통속적인 개구리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관점으로는 아무리 먼 곳을 여행해도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익과 개발에 따라 등급이 매겨질 뿐이고, 음식 또한 서울에 있는 전주비빔밥집이나 뉴욕에 있는 이탈리아 고급 레스토랑 음식이 제일 맛있게만 여겨질 것이다.

반면 곧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주인공은 전혀 다른 관점과 언어를 구사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속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은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버스의 덜커덩거림이 좀 덜해졌다. 버스의 덜커덩거림이 더하고 덜하는 것을 나는 턱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몸에서 힘을 빼고 이었으므로 버스가 자갈이 깔린 시골길을 달려오고 있는 동안 내 턱은 버스가 껑충거리는 데 따라서 함께 덜그럭거리고 있었다. 턱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몸에서 힘을 빼고 버스를 타고 있으면, 긴장해서 버스를 타고 있을 때보다 피로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열려진 차창으로 들어와서 나의 밖으로 드러난 살갗을 사정없이 간지럽히고 불어가는 6월의 바람이 나를 반수면상태로 끌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살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같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低溫),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찰원들은 무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진의 인구, 발전 조건, 명산물 등과 같은 일차적 표면 자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반면 주인공 '나'는, '나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발휘한다.

 

'나'는 바람기를 느끼고, 소금기를 느끼고, 뿐만 아니라 "햇빛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를 정확하게 느끼고 서술한다. 게다가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하고 혼자만의 개인적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다"라는 문장은, 통속적인 관념적인 관습적인 개구리 언어로는 결코 잡아내지 못할 참으로 독특하고 신선하고 상쾌한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에 주목하여 평론가들은 김승옥의 문체를 일컬어 "감수성의 혁명" 혹은 "개인의 발견"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언어는 '문자언어, 출판언어, 창작언어' 등에 의해 보다 세련되게 정련되는 역사를 걸어 왔다 개구리가 '입말언어, 일상언어, 일반언어'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공주 왕자의 언어는 '출판언어, 창작언어'를 통해 자신의 언어 솜씨를 업그레이드 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공주다운, 왕자다운 언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독서를 통해 '출판언어, 창작언어'를 자기 것으로 육화하는 동시에, 실질적 정직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적 언어를 구사해야하는 이중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아마도 우선은 수다를 떨거나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보는 시간부터 줄여야 한다. 뉴스나 신문의 대부분이 관습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접촉이 제로 상태일수록 좋다. 반면 좋은 책을 찾아 읽는 독서 시간과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 헤매는 습작 시간을 극대화해야 한다. 글쓰기 솜씨는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선택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수행하느냐, 얼마나 기꺼이 즐겁게 이어 가느냐 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온다.(48~53p.)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무뎌지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글.쓰.기!



 
 
승주나무 2012-11-22 13:32   댓글달기 | URL
낯설게 하기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듣고 갑니다. 근데 저는 일반언어와 문학언어와의 구분을 만든 사람들의 자충수라고 생각해요. 언어는 하나인데 일반태도와 문학태도가 있을 뿐이지 않나 합니다. 굳이 구분해서 대중과 멀어지다 보니 문학과 일반이 따로 노는 지금의 비극이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고... 여튼!! 오랜만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 몸과 마음, 언어와 신체, 건강과 치유에 대한 한 회의주의자의 추적기
팀 파크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백년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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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팀 파크스(1954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팀 파크스는 1980년 이탈리아로 영구 이주했다. ....)

옮긴이: 정영목(...《로드》,《눈먼 자들의 도시》,《눈뜬 자들의 도시》,《에브리맨》,《킬리만자로의 눈》,《서재 결혼시키기》,《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여행의 기술》,《불안》등)

출판사: 백년후(내가 읽은 백년후 출판사 책:『사계절 갈라 메뉴 303』,『천연 발효 빵』,『인디 커피 교과서』 그외:『음식과 요리』,『마유미의 캐크로비오틱 키친』,『유기농 선언』,『몸을 살리는 자연식 밥상 365』,『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청춘은 안녕하다』,)

 

 

책을 읽을 때 아니 읽을 책을 고를 때 제일 먼저 보는 건 제목과 표지다.

그 다음으로 저자와 번역서라면 번역자, 그리고 출판사를 본다.

그리고 거기서 결정이 안나면 목차를 보고

거기서도 결정이 안나면 머리말까지 자세히 읽어본다.

 

특이한 제목과 표지로 단번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다.

제목은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한 손엔 보라색 구슬(본문에 인용된 〈세비야의 물장수〉라는 그림과 연관짓자면 이 보라색 구슬은 다름 아닌 무화과 열매일 것이다.)이 든 유리컵, 다른 한 손엔 책을 들고 코를 박은채 읽기에 열중한듯 보이는 한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채로 공중부양하고 있는, '이건 대체 무슨 시츄이에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만화같은 표지를 본 나는 이미 책을 읽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표지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이 사람이 공중부양한 채 읽기에 열중한 곳은 강물 위다. 강물 한쪽에 난데없이 수도꼭지ㅡ그것도 물이 콸콸 나오는ㅡ가 나온다. 맑은 날 파란 하늘, 하늘엔 흰구름이 떠 가고 강물엔 유람선이 흐르고,는 아니지만 아무튼, 강물도 삐죽 삐죽 보이는 바위에 부딪히며 역동적으로 흘려가고, 그림엔 보이지 않지만 이런 정도 야외라면 온갖 새 소리 벌레 울음 소리 바람 소리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올것만 같다. 이런 환경에서 책읽기에 열중한 남자라... 으으 정말 궁금해 미치겠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말이다.

 

이 남자가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인지 알면 답도 쉽게 나오겠지.

본문에 나온다. 이것이다.

 

 

 

 

 

 

 

『A Headache in the Pelvis(골반의 두통)』, 의사가(의사들이) 쓴 책.

아하, 이런 책을 저토록 열중해서 읽고 있는 것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를 쓴 사람이 어디가 아픈가 보다. 골반에 문제가 있나? 아니면 머리에? 가만.. 그건 그렇고 골반의 두통? 두통은 머리가 아픈거잖아. 근데 골반의 두통이라니. 어이쿠야. '가만히 앉아 있는 법'도 모자라서 이젠 '골반의 두통'까지 알아봐야 되는건가? 나 참..

 

실은 고맙다.

이런 식으로 호기심을 자극해 주는 책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

.

.

.

다 읽었다.

저녁부터 읽기 시작해서 잠들기 전까지,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잠깐 더.

이틀 걸린 셈이다. 만약에 휴일 아침에 읽기 시작했다면 아마 하루만에 다 읽었을 것이다.

그렇게 재미있다.

 

다 읽었는데, 다 읽은 책에 대해서 말하자니 이상하게 내 이야기를 하게될것 같다.

내 이야기를 하자니 너무 길어질것 같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따로 묶어 다른 데다 쓰기로 한다.

자 그럼 무슨 이야기를...? 음..

 

책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 유명 작가의 전립선비대증 투병기?

- 통증 극복기?

- 명상 입문기?

 

모르겠다. 정말.

출판전문가들도 이 책을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 몰라서 애를 먹었다.

그런 책을 내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저자 팀 파크스. 그가 한 말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작가가 괜히 작가겠냐고. 괜히 유명한 작가겠냔 말이지. ㅎㅎ)

 

"다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어느 범주에 넣으면 좋겠습니까?" 출판사에서 묻는다. "건강, 심리, 뉴에이지, 전기, 비평ㅡ어디죠?"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분노다. 바로 그 문제에 관해 내가 지금까지 써온 것 아닌가! 환원주의, 낙인을 찍는 것에 관해서.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사물을 범주로 나누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찾는 것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확실하다.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다 적어도 책을 읽을 때 최고의 경험은 자신이 찾던 것을 찾을 때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 나를 찾아내고, 나의 허를 찔러, 나의 취향을 새로운 영토로 옮겨갈 때라는 생각이 든다. "실화 쪽에 넣으시지요." 나는 출판사에 그렇게 말한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세상을 아우르는 것은 이야기뿐이니까.(14p.)

 

그렇다. 이 책은 '실화'다.

여기까지 허접한 나의 리뷰를 읽어오신 분이라면 이 책에 관심이 있는 분일테고 그렇다면 분명히 팀 파크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곧장 원작자의 이야기를 원작자로부터 직접 들으시면 될것을 여기까지 돌아오신 셈이라 안타까움마저 일어난다. 다른 분의 리뷰는 읽지 마시고 이제 그만 직접 책을 읽어보시기를!!!

 

참고로, 나는 여자라 전립선 문제가 생길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립선 문제로 고통받은 저자가 그것이 어떻게 왔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느꼈고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을 아주 흥미롭게 재미있게 끝까지 읽었고, 심지어 '이렇게까지 쓸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해마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순오기 2012-07-21 05:31   댓글달기 | URL
오호!
전립선 비대증 통증, 투병 극복기라면 중년 남성들이 꼭 봐야 할 책이군요.^^
여튼 포핀스님 책 리뷰는 재밌어요.^^

메리포핀스 2012-07-24 00:07   URL
히히힛.. 책이 재미있어요.^^

pek0501 2012-07-23 00:13   댓글달기 | URL
윌리엄 스타이런 저, <보이는 어둠>도 실제로 작가가 우울증을 앓고 이겨내기까지의 과정을
쓴 책이에요. 그런데 표현이 문학적인 데가 많아 지루한지 몰랐어요.
게다가 책도 두껍지 않아 금방 읽었어요.
하루만에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면 행복해요.
반대로 더디게 읽히는 책은 구입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요.
그래도 책값이 아까워서 또 뭔가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로 끝까지 읽자고 결론을 내지만요. ㅋㅋ
이 책도 관심이 가는 걸요. 유익한 경험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메리포핀스 2012-07-24 00:09   URL
오오~ 이런 추천 완전 좋아요^^ <보이는 어둠> 제목도 특이한걸요!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조금 걸리지만, 두껍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오~케이!^^ 챙겨서 읽어볼께요. 페크님 고맙습니다!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
저우쭝웨이 글, 주잉춘 그림, 장영권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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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빠름~ 빠름~ 빠름~' 하는 광고를 자주 봅니다. 엘티이 워프~ 하는 광고 말입니다.

어릴땐 골목길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습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러 빨르면 비행기~'

말하자면 제가 어릴땐 기차하고 비행기가 빨랐고, 요즘은 엘티이 스마트폰 정도는 되어야 빠른 축에 낀다고 하겠습니다.

교통 수단으로만 쳐도요, 요즘은 기차가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나요?

빨리 가려면 비행기를 타던지 KTX를 타니까요.

 

그런데 달팽이는요, 예나 지금이나 느림의 대명사입니다. 물론 거북이도 있고 나무 늘보도 있긴 하지만 말이지요.

빠른 쪽으로는 계속 변화가 일어나는데 느린 쪽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빠른 것의 가치는 계속 부각되어가는데 느린 것의 가치는 점차 사그라들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는 느림의 대명사인 달팽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는 그림책이라서 그림을 빼면 얘기가 안됩니다.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에 나오는 그림은 아름답습니다. 세밀화 같기도 하고 수채화 같기도 하고 동양화 같기도 하다가, 그게 뭐가 중요해. 아름다우면 됐지. 이런 생각이 들만큼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은 참 여러가지입니다.

한 눈에 쓱- 볼 수도 있고 코를 박고 자세히 들여다 볼 수도 있고 하나 하나 뜯어 볼 수도 있지요.

저는 무엇보다 '느리게' 보려고 신경썼습니다.

 

가능하다면 지은이가 이 그림을 그린 속도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정도로 느리게 볼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그런 인내심이? 그런 섬세함이? 하고 갸웃거리면서

최대한 느리게 보려고 노력하며 보았습니다.

 

처음엔 그림만 봤습니다. 글도 꽤 있는 편이지만 글씨가 아주 작아서 대부분 손바닥 하나로 가릴 수 있는 정도라 그림만 보는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림만 보면서 어떤 내용일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두번째도 그림만 봤습니다. 나라면 이런 그림에 어떤 글을 써 넣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다음 세번째에는 글만 읽었습니다. 그림만 보는 것과 달리 글만 따로 읽기는 어려웠습니다.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중간에 멈추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아무튼 이제 네번째 읽기 시작입니다. 네번째 읽기에 드디어 그림과 글을 함께 봅니다.

 

놀라운 것은, 제가 생각한 것과 지은이가 써 놓은 글이 아주 달르다는 사실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데 딱 한 장, 맨 마지막 장은 신기할만큼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지은이와 내 생각이 달라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마지막엔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것 같아서

또 기분이 좋습니다.

 

처음엔 '멸종 위기에 처한 느림의 가치'를 되살려보자는 어줍잖은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해서 읽었지만

지금은, 내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세상이, 사람들이, 우리가, 내가, 당신이,

제 속도를 찾아낼 것이라고 믿고 빠르든 느리든 길을 가자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썼습니다.

 

시간이 너무 빨라서 멀미 나는 분이나 반대로

너무 느려서 답답해 죽겠는 분,

속도 조정이 필요한 모든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2012-07-03 00:3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7-03 08:43   댓글달기 | URL
네, 빠르든 느리든 자신만의 속도로 가보자구요.
좋은아침이에요, 메리포핀스님^^

메리포핀스 2012-07-03 10:11   URL
프레이야님^^ 하늘이 맑아요. 아직 바람도 선선하구요. 오늘은 딱 요 속도, 살랑 살랑, 요 속도로 가고 싶어요. ^_______^

2012-07-03 18:31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등현대명시 120 - 개정 16종 국어 교과서 전 작품을 실은 리베르 개정 16종 국어교과서 문학작품
이대욱 해설 / 리베르스쿨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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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16종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120 편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책이다.

 

학창시절에 처음 읽었던 시를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

요즘 고등학생들은 어떤 시를 읽나 궁금하기도 해서 읽는다.

과연 처음 읽는 시가 많고 처음 보는 시인 이름도 있다.

 

기억나는 시부터 얘기해보자.

학창시절에 읽은 시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박목월의 나그네, 이육사의 광야, 이육사의 청포도, 김춘수의 꽃 정도다. 사실 그땐 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시험에 대비해 반강제로 외웠던 것이지만, 그때도 윤동주의 서시는 낮이건 밤이건 하늘을 볼 때마다 그 순간, 그 하늘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보물같은 것이어서 그런 시를 외운다는 자체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학생때는 시를 시로, 문학을 문학으로 감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겠다. 이 책을 통해 다시 보는 윤동주의 서시나 그가 쓴 다른 시들ㅡ김영랑, 박목월, 이육사의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다.ㅡ을 읽으니 내 마음에 바람이 분다. 태풍같이 센 바람, 겨울처럼 찬 바람, 가을 저녁처럼 서늘한 바람, 여름 과수원 오두막처럼 시원한 바람, 봄 밤 바닷가처럼 설레이는 바람... 학창시절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이 모든 바람을 오늘 나는 기꺼이 반가이 즐거이 맞고 있다.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고향, 서시, 쉽게 씌어진 시, 자화상, 길, 십자가, 참회록, 간」이렇게 여덟 편, 가장 많은 시가 수록된 시인은 윤동주다. '서시'나 '자화상'은 지금까지도 외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읽었지만, '쉽게 씌어진 시'와 '간'은 여기서 처음 본다. '또 다른 고향'은 제목이 생소해서 모르는 시인줄 알았는데 내용을 읽으니 어렴풋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백골'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치면서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 . .

아... 외로운 사람 윤동주여!

아... 그리운 시인 윤동주여!

 

그의 시를 읽는 내 심정이 왜 이리 사무치는 것일까.

그는 너무 적은 시를 남기고 너무 빨리 갔다.

 

너무 적은 시

너무 빨리 간 시인

사무치는 마음

아,

이런게 시구나.

이런게 시로구나.

이런게..

 

그런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最初)의 악수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를 따라 읽는다.

'삶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따라 쓰면서..

 

쉽다. 너무 쉽다. 너무 쉬운 세상이다.

 

배신도 쉽고

거짓말도 쉽고

변명도 쉽다.

 

사랑도 쉽고

이별도 쉽고..

 

결혼도 쉽고

이혼은 더 쉽고..

 

성공도 쉽고

실패는 더 쉽고..

 

이 모든 '쉽고' 앞에는 '남에게는'이 빠졌다.

나에게는 어렵다.

 

사랑도 어렵고

이별도 어렵고

결혼은 더 어렵고

이혼은 말도 못하게 어렵고

사는 게 어렵고

시도 어렵다.

 

쉬운게 부끄러운 거라면

어려운건 쓸쓸하다.

 

마음 먹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사는 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나는 꽤 많은 시집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윤동주 시집은 없다.

오늘, 마음 먹었으니 당장 한 권 사야겠다, 하면서

책을 너무 쉽게 사는 것도 부끄러운 것일까 생각하게된다. 

별..

 

시인이 너무 쉽게 쓴 시를

내가 너무 어렵게 읽는구나.  

 

 

딱 한 편.

 

아래는 이 책에 딱 한 편씩 시가 실린 시인의 이름과 시 제목이다. 

 

김기림(바다와 나비), 김상용(남으로 창을 내겠소), 유치환(바위), 김남조(겨울 바다), 김종길(성탄제), 김춘수(꽃), 박두진(해), 심훈(그날이 오면), 이성부(벼), 이용악(그리움), 정한모(가을에), 강은교(우리가 물이 되어, 고정희(우리 동네 구자명 씨), 곽재구(새벽 편지), 기형도(엄마 걱정),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김혜순(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도종환(담쟁이), 문정희(찔레), 복효근(춘향의 노래), 유안진(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이성선(사랑하는 별 하나), 이해인(살아 있는 날은), 정현종(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황동규(조그만 사랑 노래)

 

이 중에 김남조의 에세이집과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 이해인의 『꽃삽』, 도종환의 책들을 선물 받거나 사서 읽었다. 다른 시인들은 두 편 이상씩 실렸는데 이 시인들은 딱 한 편이 실렸으니 그 한 편이 더 의미있겠다 싶어서 시인과 제목을 적어보았다. 적다보니 기형도의 '엄마 걱정'과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를 따로 적어서 외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처럼

'아무리 수백번 남의 시 베껴 써도/ 내 시 안 써지네'가 되면 곤란하겠지만서두...

 

시를 쓰시겠다?

시를 읽으니 시를 쓰고 싶다?

아하~

 

왜?

뭐가 문제지?

나는 시를 쓰면 안되나?

시 쓰는 데 뭐,

자격 필요해?

허락 필요해?

그럼 뭐?

 

아니 뭐.. 쓰는 건 자유지.

생각은 자유니까.

상상도 그렇고.

근데.. 무슨 시 쓰게?

 

이런 시.

 

눈과 비가 오는 세상.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에,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책을 읽고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서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랄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좋다고

 

인사하는..

 

 

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감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륵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그리고 또 이런 시,

 

 

 

 

 

 

남들은 다 '나물'이라고 해도

남들은 다 '잡초'라고 해도

나는 틀림없이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꽃이라고

"꽃이야!" 한마디 했더니

남들도 꽃이라고

"꽃이구나." 한마디 하는

이런 시.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떄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내 개인 '공책엔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까지만 

옮겨 쓴다.)



 
 
2012-06-22 03:09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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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2 2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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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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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 이상의 소설책!

 

희안하다. 기억, 추억, 회상, 첫사랑, 편지, 학창시절, 친구, 연인, 가족... 새로울 것 하나 없는 흔한 소재를 가지고 이토록 인상적인 책을 쓸 수 있다니! 놀랍다. 단숨에 읽었다. 역시 나도, 끝까지 읽은 다음에 곧장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이야? 다시 말해 봐. 그게 정말 사실이야?" 되묻는 심정이 되듯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정말 틀림없는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다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소설, 이상의 소설책이라 할만하다.

읽기 전에는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읽고 나서는 책 뒷표지에 적힌 김연수(소설가) 작가의 소감에 완전히 공감한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그 감상은 완전히 다를 수가 있는데(어느 정도는 다른게 정상이다. 감상이 완전히 같다면 더 이상 언급할 꺼리도 없을 뿐더러ㅡ그러면 재미없으니까ㅡ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질린다.), 이건 완전히 나와 같다.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는 한 소설가가 평생 좇아온 주제가 담겼다. 무거운 주제에 비해서 소설이 잘 읽히는 까닭은 최종적인 종말의 의미가 소설을 다 읽어야만 밝혀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종말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모든 인생은 교훈적이다. 종말의 관점에서 다시 인생을 되짚어보면, 모든 건 원인과 결과로 강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 테니까. 마치 마지막 장면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씌어진 소설을 읽을 때처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그런 소설이다. 죽을 때에야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는 우리 인생을 닮았다. 원서 150페이지짜리인 이 소설을 두고 줄리언 반스는 "나는 이 작품이 3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건 꼭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들린다. 마지막 순간, 이 인생의 의미가 드러날 때 우리는 한번 더 인생을 살아갈 테니까. 김연수(소설가)

 

 

그래서 작가와 나의 차이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작가와 나는 얼마든지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다만? 흐흐) 그것을 말(글)로 표현해 낼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작가와 나의 차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것은 희망이기도 하다. 나에게, 작가와 나의 차이(거리)를 줄여(좁혀) 보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것,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내가 설 수 있는 분명한 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점에서 그렇다. '독자'의 자리, 그것도 아주 '좋은'..

 

 

뚜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물론 그 연필 자국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원본이라는 의미에서, '뚜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 이 말은 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라는 말로 이어진다. 이 두 문장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를 읽고 리뷰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생각난 말이다. 주인공(잠깐 주인공이 '나' 토니 웹스터(앤서니)인지 에이드리언 핀인지 헤깔렸다.(그만큼이나 이야기 한가운데에 에이드리언 핀이 항상 존재한다. 그는 22살에 죽었고, '나'는 60살이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아니, 그렇기 때문에 헤깔린 건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은 당연히 '나' 토니 웹스터다.

'나'는 '희미한 연필 자국' 대신 '뚜렷한 기억'을 가졌기에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나타난다. '나'의 '뚜렷한 기억' 속에 구슬이 서 말이다. 그러나 '나'에겐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들 재간이 없다. 그래서 계속 헛다리만 짚는다. 대신 '나'에겐 시간이 있다. 드디어 '나'에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보배'..

 

그것이 보배일지 재난일지 그것조차 '나'에게 달린 문제이긴 하다.

'나'에겐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나는 다만 지켜보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시간은 내 편이다, 그렇고말고. 가끔 노래에서 진실을 얻을 때도 있는 법.(231p.)

 

시간은 내 편인가?

정말?

 

'시가아아아안은 내 편이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기숙사 방에서 혼자 빙글빙글 돌며 믹 재거와 듀엣으로 요들처럼 목청을 떨며 부르던 노래였다. 그런 고로, 다른 친구들이 의사와 변호사 과정을 밟고 공무원 시험을 볼 때, 나는 아랑고 않고 미국으로 갔고, 반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83p.)

 

시간은 누구도 편들지 않고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시간은 나를 어디에 내려놓을까.

 

나는 왜 시간에 떠내려가고 있는걸까.

나는 왜,

나는 어디로,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