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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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말하자면,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에 더 끌리는 편이었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뇌의 규칙을 가장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은 신경과학이지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문학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52p.)

인생의 무의미와 고독, 그리고 인간의 상호 유대감에 대한 절박한 추구를 이야기하는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엘리엇의 은유가 내 말투에도 스며들게 되었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때 다른 사람의 명백한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해지는가에 주목했다. 조지프 콘래드는 잘못된 의사소통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특유의 명쾌한 감각을 통해 보여주었다. (52p.)

대학 시절 내내,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는 금욕적이고 학구적인 내 연구는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를 쌓고 강화해나가려는 충동과 갈등을 일으키곤 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뒤돌아볼 가치가 있을까?(53p.)

병원에서 배우는 실무가 의과 대학원생으로서 강의실에서 받는 교육과 상당히 다르리라는 것이 점점 더 실감났다. 책을 읽고 객관식 문제에 답하는 건 행동을 취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이의 어깨가 쉽게 나올 수 있게 머리를 신중하게 당겨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직접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 너무 세게 당기면 어떻게 될까?(‘돌이킬 수 없는 신경 손상‘, 내 뇌가 소리쳤다.) 임산부가 힘을 줄 때마다 머리가 밖으로 나오고, 쉴 때마다 머리가 다시 들어갔다. 3보 전진, 2보 후퇴의 느낌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인간의 뇌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출산을 위험한 일로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뇌 덕분에 산부인과, 심장진통계, 경막외 마취제, 응급 제왕절개술 같은 것들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해졌다. (87p.)

"저, 어젯밤에 그 쌍둥이는 어떻게 됐나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 아이는 어제 오후에 죽었고, 다른 아이는 24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내가 새로운 아이를 받을 무렵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죽음이라는 한계에 다다른 쌍둥이의 상황에 너무도 잘 들어맞는 사뮈엘 베케트의 은유만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느 날 태어났고, 어느 날 죽을 거요. 같은 날, 같은 순간에.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앉아 아기를 낳고, 빛은 잠깐 반짝이고, 그러고 나면 다시 밤이 오지." 나는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 옆에 서 있었던 셈이다. 쌍둥이의 삶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88p.)

"그게 나쁘다고 생각해요? 사산아를 낳아도 임산부는 진통과 분만 과정을 겪어야 해요. 상상이 돼요? 최소한 그 쌍둥이들은 빛이라도 봤잖아요."
성냥불이 깜박이다가 꺼지고 말았다.(89p.)

"제왕절개가 올바른 선택이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럼요.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다면요?"
"죽었겠죠. 비정상적인 태아 심장 박동 기록으로 산혈증이 일어나고 있는지, 탯줄이 문제인지, 아니면 아주 심각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가 나쁜 상태라고 할 수 있죠? 너무 빨리 태어나는 것과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안 좋은가요?"
"그건 의사의 판단에 달렸죠."
이 얼마나 중대한 판단인가. 내가 여태껏 살면서 프렌치 딥 샌드위치와 루벤 샌드위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판단을 해본 적이 있었나? 어떻게 하면 의사다운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앞으로 실제적인 의학을 더 많이 배워야겠지만,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지식만으로 충분할까? 물론 지능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도덕적 명확성 또한 필요했다. 앞으로 내가 지식뿐 아니라 지혜도 함께 얻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89-90p.)

베케트의 포조가 한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삶은 너무나 짧은 ‘잠깐‘이기에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맡겨진 역할, 즉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시간과 방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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