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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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쪽)
영일의 칠순잔치가 열릴 장소는 긴 토론 끝에 결국 자금성이 선택되었다. 비록 버스 한 번이면 갈 수 있는 서울 시내의 자금성이었지만 삼대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과정은 길어서 베이징을 가는 것만큼이나 멀고 험난했다. 칠순이 있기 보름 전 토요일, 예년보다 일찍 나온 매미 울음소리가 거실에 둘러앉은 식구들 귀를 어지럽힌 날이었다.

일식집에 가자고 하니 회는 물컹물컹거리는 게 비린내까지 난다고 애들이 싫어해서, 그럼 담백한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양식은 김치도 없이 손바닥만 한 고기 한 뎅이를 비싼 값에 내온다고 춘단이 싫어하고, 그렇다면 김치도 많이 주고 반찬도 많이 주는 한정식집에 가면 되겠다고 하니 집에서 맨날 해먹는 지겨운 밥을 시아버지 칠순 때까지 먹어야 하느냐며 이번에는 유정이 질색했다. 뷔페는요? 뷔페는 먹을 때만 좋지 먹고 나면 뭘 먹었는지 알 수 없어서 싫다 하고, 소갈비는? 갈빗집은 철판 바꾸는 게 품위가 없어서 싫다 하고, 그럼 중국..... 쯧! 중국집은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하고, 이도 저도 다 싫다 하는 꼴에 옆에서 가만히 신문을 보던 종찬이 끼어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145쪽)
"그럼 칼국수나 먹으러 가든지요, 수제비도 좋고."

그때까지 난 이파리나 닦으면서 남의 일인 척 앉아 있던 영일의 입꼬리가 단박에 굳었다. 시골집에 있었으면 못해도 마을회관에서 지역 가수까지 부르는 큰 잔치를 벌였을 것이다. 어림잡아도 부를 사람이 백 명이 넘었다. 고향 떠난 죄로 인생에서 제일 크게 치르는 잔치에 부를 사람이라곤 아들 내외, 손자 손녀, 꺼림칙한 옆방 하숙생밖에 없는 처지가 가뜩이나 서러운데,

......칼국수? 수제비?

이제껏 살면서 칠순잔치 때 칼국수를 먹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역사가 없었다. 마을에서 제일 없이 사는 양주댁도 아버지 칠순이라고 멀리 떨어져 살던 오남매가 합심해 뷔페를 차려주고 중국 여행을 보내줬다. 영일은 서운함을 넘어 노여움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녹록지 않은 칠십 년 인생이 칼국수 한 그릇 값으로 매겨진 기분이었다. 둔감한 아들은 자기 말이 영일의 가슴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고 밀가루 가격이 많이 올랐다느니, 이젠 분식도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느니 하며 칼국수 타령만 하고 있었다. 영일이 난 화분을 멀찌감치 밀어놓고 시뻘게진 눈으로 창밖만 보는 것을 눈치챈 유정이

그제야 남편에게 실없는 농담은 그만하라고 눈치를 준 뒤, 아주 품격 있는 중화요릿집 자금성을 추천하고 나섰다. 아까 중국집은 안 된다고 했잖아? 준희가 딴지를 걸자 유정은 흘깃거리며 자금성은 일개 중국집이 아니라 중·화·요·리·집이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국인 치고 중화요리 안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유정은 영일의 눈치를 살피며 본격적으로 설득에 들어갔다. 짜장 짬뽕 파는 중국집이 아니라요, 최고급 요리를 아주 정통으로 하는 비싼 중화요릿집이에요. 영일은 도통 반응이 없었다. 코스 요리는 그나마 가장 싼 게 일인당 십만 원이니까 중간 정도 가는 것만 먹으려 해도 얼마나 비싼 거예요. 사실, 애들이 먹기에는 너무 귀한 감이 있죠.

영일은 여전히 시뻘건 눈으로 하늘만 노려보고 있었다. 시뻘건 눈에 하늘이라고 푸르게 보일 리가 없었다. 생각나는 미사여구를 다 갖다붙여도 영일의 얼굴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유정은 지하에 잠들어 있는 중국 황제를 모셔왔다. 아버님, 만한전석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중국 황제도 회갑 때나 먹었다는 귀한 음식인데 종류가 백 가지가 훨씬 넘는다네요. 서울에서도 만한전석 하는 요릿집은

정말 드물어요. 예전에 신문 기사에서 보고 아버님 모시고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님 어떠세요?

"........"

"별로세요?"

"........"

"아, 귀가 먹었소? 대답을 하쇼. 어떠냐고 묻지 않소."

중국 황제까지 행차하고 춘단이 재촉을 한 뒤에야, 영일은 흰자에 선 핏줄을 서서히 풀며 짧게 대답했다.

"에미가 좋으면 그라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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