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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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리에 처음 발을 들인 어린 처녀 춘단은 마을의 이름이 풍경과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 ‘송(松)’ 자를 붙이고, 한국 사람치고 정 없는 사람 없다고 ‘정(情)’ 자를 붙였다는 송정리는 그러나 막상 와보니 마을을 둘러싼 산이 모두 돌투성이였다. 그런데 그것이 예사 돌이 아니었다. 맷돌로 만들어 콩을 갈면 5대 후손까지 배불리 먹여줄 돌, 비단결처럼 몸을 다듬으면 어느 절의 마당에 그림자도 없이 서있을 돌, 단단한 외피 속에 귀하고 귀하신 부처님부터 땅바닥에 붙어사는 두꺼비까지 온갖 삼라만상을 다 품고 있는 돌. 금값으로 치자면 금광을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춘단은 그 돌들을 바로 옆에 두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태연히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송정리 사람들의 셈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고, 어쩌자고 우리 아베는 백치들만 사는 마을에 딸을 시집보냈단 말인가. (23쪽)

그러나 갓 들어온 새색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가는 시집 식구들에게 미움 받을 게 뻔해서 춘단은 번쩍번쩍 빛나는 돌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밭일하러 가는 어른들 뒤를 얌전하게 따라 다니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모기 때문에 잠을 뒤척이는 영일을 보고 춘단은 참다 참다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이 마을엔 소나무보다 바위가 훨씬 많은데 왜 석정리가 아닌 송정리로 이름을 지었나요?"

영일은 시집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춘단을 귀여워하며 오히려 반문했다.

"여그 어디에 바위가 많다고 그래? 맨 밭에, 논에, 황토색 흙뿐인디."

"뭔 소리여요? 여그도 저그도 맨 돌뿐인디. 눈이 삐었나벼."

영일은 크게 웃으면 춘단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안았다. (24쪽)

"그건 당신이 석공의 딸이라서 그려. 돌로 벌어먹고 사는 집 눈엔 요 세상 자체가 맨 돌로 보이겄지. 하지만 이 농사꾼 눈에는 돌산도, 소나무밭도 맨 경작할 땅으로밖에 안 보이는디. 이젠 당신도 농부의 마누라가 됐응께 쓰잘데기 없는 돌멩이 대신에 벼, 고구마, 깨를 보도록 노력해봐. 그게 우리를 먹여 살려줄 텡께."

닭 우는 새벽에 첫 하늘을 본 춘단과 영일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해마다 농사를 늘려갔다. 시집온 지 이 년 만에 춘단은 아들을 낳았고 그다음 해에는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보름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춘단은 마을에서 가장 어린 안주인이 되었다.(24-25쪽)

몇 년 뒤 겨울, 북쪽 벌판에서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면서 눈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아이들마저 기겁할 폭설이 내리쳤다. 발이 묶여 이웃집 방문도 어렵게 되었지만 그 덕에 송정리 사람들은 하루 종일 온돌방에 머물면서 아궁이에 감자와 고구마를 번갈아 쪄먹는 휴가를 누릴 수 있었다. 세 계절 내리 인간의 먹을 것을 위해 몸을 바친 땅들은 긁힌 속을 다스리기 위해 짐승들을 따라 긴 잠에 빠졌다. 길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마을은 깊은 침묵에 들어갔다. 그런 날 중에 한 날이었다.

따ㅡ앙 따ㅡ앙 따ㅡ앙.

조용히 낙하하는 눈송이의 장례를 방해하며 어디에선가 불가사의한 소리가 들렸다. 송정리 사람들은 처음 들어본 낯선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뜨끈한 아랫목에서 한파가 몰아치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심심한 동네에 뭔 일이 나기야 하겄어, 또 뭔 일이 나면 이장이 연락을 해주겄지, 이 바람만 지나가면 나가봐야제, 사람들은 몇 날 며칠 아침, 점심을 먹고 난 뒤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의 진원지를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땅땅땅 하고 울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디단 낮잠에 빠져들었다. (25쪽0

따ㅡ앙 따ㅡ앙 따ㅡ앙. 자꾸 들으니 먼 절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같기도 했다.

밥상을 차려준 뒤, 영일에게 아들을 맡기고 어김없이 산으로 올라간 춘단이 보름째 되던 날 양어깨에 긴 밧줄을 매달고 산에서 내려왔다. 밧줄에는 송정리에서 가장 키가 큰 박철보다도 한참이나 큰 바위가 묶여 있었다. 영일은 서방 어깨에도 못 미치는 자그만 여자가 자기 몸이 감당하지도 못하는 큰 돌덩이를 끌고 오는 괴이한 못습을 보고 아들과 함께 뒤로 자빠질 뻔했다. 춘단은 매고 있던 밧줄을 풀고,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영일 앞에 입석을 끌어다 놓았다.

춘단이 말했다.

"봄 여름 가을이면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곡식들만 보려고 노력해요. 헌디 겨울에는.... 겨울에는 사람이고 땅이고 맨 잠만 자고 이 돌들만 사방에 시퍼렇게 살아서 나를 보는디 워떡해요. 난 농부의 마누라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석공의 딸이잖아요. 내 피의 반쪽을 그 쓰잘데기 없는 돌에서 왔구만요."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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