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장-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경전과도 같다. 그런데 이 책은 대전 이후 유럽과 북미를 휩쓸었던 실존주의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내용이 불분명하다. 당대 실존주의자 가운데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다. 특히 서론은 이해하기가 지독히 어렵다. 거기다 대륙 철학에 대한 배경적 지식이 없다면 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런 초기의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존재와 무』는 ‘인간이 처한 딱한 처지’에 관련된 근본 물음을 붙들고 진정으로 씨름한 금세기의 몇 안 되는 철학책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이 책의 다소 명료한 구절들은 교훈적이며 즐거움을 준다. 소설가요 연극작가로서의 사르트르의 경력은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특정 상황에 대한 뛰어난 묘사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존재와 무』의 중심 주제는 ‘의식의 본성은 그것이 아닌 것일 수 있음이며 동시에 그것으로 있을 수 없음이다’라고 하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마치 심오한 체하는 사이비 사상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사르트르의 설명의 요약이다. 이 문장의 충분한 의미는 이 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existentialism?

실존주의란 일종의 철학 운동으로서 철학과 심리학뿐만 아니라 예술의 여러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의 사상에 있어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5년에 행한 한 강좌)이라는 책에서 사르트르는, 그들 모두가 인간 존재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은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신념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인간성에 대한 이미 존재하는 청사진이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 존재란 그들이 되어가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본질은 그의 마음속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를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만든다. 주머니칼은 그 기능에 의해서 규정된다. 다시 말해서 그 주머니칼이 잘 들지 않는다면 그리고 칼이 접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머니칼이 아니다. 주머니칼의 본질, 즉 그것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주머니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의 마음에 존재했다. 인간은 이런 주머니칼과는 다르다. 인간에게는 사전에 정해진 그 어떤 기능도 주어진 어떤 것도, 그의 마음속에 이미 우리의 본질이 정해져 있는 그런 제작자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나타난 견해이다. 그런데 『존재와 무』를 저술할 당시 사르트르는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조건에 빛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의 접근은 현상학이라고 알려진 철학의 한 학파에 의해 크게 영향 받았다.

현상학적 접근 phenomenological approach

『존재와 무』에 나타난 사르트르 사상의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상당히 장황하게 묘사되는 실재의 또는 상상적 상황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단지 표현상의 기교가 아니라 오히려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접근이 가지는 하나의 특징이다. 사르트르는 후설이라는 철학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후설은 ─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옆으로 치워두고 ─ 의식의 내용을 기술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후설에게 철학에서 중요한 일은 기술이다. 즉 우리의 경험을 기술해야 한다. 추상적인 단계에서 사유하기보다는 말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후설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의식 내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의식되는 대상의 본질적 성질을 드러내 준다고 하는 가정은 거부한다. 사르트르에게 현상학적 방법이 현실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학이나 경험적 심리학이 기술하는 그런 인간 존재에 집중하기보다는 말이다. 그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 고도로 추상적인 논의와 생생하고 뛰어난 소설가적 시나리오 및 서술의 절묘한 결합이다.

존재 being

『존재와 무』 전체는 여러 다른 존재 형태들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에 의존한다. 사르트르는 의식 존재와 의식 없는 존재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앞의 것은 ‘대자 존재(그것을 향한 존재: 옮긴이)’라고, 뒤의 것은 ‘즉자 존재(스스로 있는 존재: 옮긴이)’라고 불린다. 대자 존재란 그 특징에 있어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그런 종류의 존재이며, 『존재와 무』의 대부분은 이것의 주된 성격을 밝히는 데 주어진다. 불행하게도 사르트르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이 합당하게 대자 존재로 분류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주고 있지 못하다. 한편으로 즉자 존재는 의식이 없는 사물들, 가령 바닷가의 돌멩이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nothingness

무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사르트르의 저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을 우리 존재의 한가운데에 있는 빈터, 즉 무로 특징짓는다.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결코 그 자신일 수 없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미래에로 투사project할 수 있게 그리고 우리의 과거를 재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무의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가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경험된다. 당신은 4시에 카페에서 당신의 친구 피에르를 만나기로 했다. 당신은 15분 늦게 그곳에 도착한다. 그는 거기에 없다. 당신은 그를 보리라 기대했고 그렇기에 그를 존재결핍, 즉 부재로서 인식한다. 이것은 가령 카페에서의 무하메드 알리의 부재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기서 알리를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카페에 있지 않은 사람들 모두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종의 지적 게임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오직 피에르의 부재만이 진정한 존재결핍으로 느껴질 것이다. 피에르만이 기대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 즉 어떤 것을 부재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의식의 능력은 사르트르가 의식의 초월성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를 이룬다. 이것은 그의 자유의 관념과 연계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서, 또는 실현될 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가능성으로 넘치는 세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는 어떤 경우에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즉 자기기만이라는 독특한 종류의 세계, 사르트르가 ‘그릇된 믿음bad faith’이라고 이름 붙인 그런 것이 지배하는 세계, 그리하여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자유의 진정한 크기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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