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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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의 모래처럼 소화되지 못한 시구절이 마구 새어나간다

시에서 산문으로 이어지는

단어의 나열에서 짐작해보는 심상은

찰나의 파착의 순간으로

계절의 낙하처럼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시인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운

밀려드는 감정의 홍수

겹겹의 소음

다 듣지도 못했는데 끝나버린



나에게 시라하면

열심히 활자를 두드리고

또 갸웃거리는

골똘히 흐르다

마음에 안착하는 단 한 구절



그것은 비냄새 머금은 심상

높은 습도 탓에 사방에 퍼진 서글픔

당신의 아름다움이 멈출 수 없는 글이 될까봐
물기 속에 묻어둔 그 마음



비가 왔다 낮잠을 자고 꿈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짐승의 털이라도 가진다면 웅덩이에 몸이라도 던지겠지만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만 편지를 세탁기 넣고는 며칠을 묵혔다




죽은 공처럼 누가 날 발로 차주었으면

들어가지 마시요 끝말이 틀린 경고문 안에서 우리는 튀어오르고

골대가 없는 농구장에서 던지는 연습을 했다 공을 주면 살아서

받아내려고 멈추지 않았다 누구의 공인지도 모른 채

죽으면 안 되니까, 산 것을 가만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죽음이었다


오병량 - 편지의 공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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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스토리콜렉터 72
스티브 캐버나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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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 했던가. 여기 자신의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긴시간 공을 들이는 치밀한 사이코패스가 있다. 연쇄살인범 '케인'의 진짜 범행현장은 법정이다. 주인공 '에디 플린'은 그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던 분야에서 손을 털고 변호사가 된 독특한 이력의 인물이다. 천재 연쇄살인범과 사기꾼 출신 변호사의 두뇌싸움을 다룬 법정 스릴러인 스티브 캐버나의 <열세 번째 배심원>는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첫번째 소설이다. 헐리우드 인기 배우 '로버트 솔로몬'이 아내와 경호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고 모든 혐의를 부인하지만 증거는 그가 유죄임을 가르킨다. 게다가 희생자의 입속에서 발견된 나비모양의 1달러 지페엔 12년 전 사망한 범죄자의 DNA가 발견된다. 여러모로 꺼침칙한 이 사건을 에디는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나는 훈련된 심리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범죄학자도, 범죄 분석가도, FBI도, 경찰도 아니었다. 이 분야에서 내가 가진 기술들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를 알고 있었다. p.364



법정에서 유죄와 무죄를 가르기 위해 에디가 벌이는 언쟁은 '아트 프라이어'와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실은 배심원석에 앉은 범인과의 대결이다. 케인이 꾸린 배심원단은 로버트 솔로몬에게 유죄를 선고할 것이다. 하지만 에디는 승패를 이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알고 있다. 속이는 법과 죽이는 것. 게다가 막강 운빨로 "죽지 않는" 에디이기에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천재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앞에서도 독자는 그가 믿음직스럽다.



살짝 느슨한 전반부와 다르게 후반부는 휘몰아친다. 엎치락뒤치락 뒤바뀌는 상황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미드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중간중간 배심원단의 성향을 조사한 자료가 끼어있는데 이는 하나의 트릭으로, 범인의 정체가 밝혀진 뒤 무심코 지나친 부분을 다시 돌아가 읽었을 때 그가 케인의 레이더에 걸린 이유를 알 수 있는,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하나의 재미요소다. 스릴러 거장들의 찬사를 받은 스티브 캐버나의 '에디 플린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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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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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결합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유년 시절은 위험하다. 보편적으로 미화된 유년기는 순수했던 그 시절로 자주 회상되곤 하는데 기억의 더께를 거쳐 제일 밑바닥을 들여다본다면 온통 불순물로 가득할 것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순수는 그 시절이 아닌 뭘 모르는 나였으며 평생의 삶을 좌우할 조타를 잡은 이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자전적 경험을 담은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는 한 여성의 생애를 다룬 단편집으로 예리하게 짚어내는 감정선이 인상적인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인 온타리오주에 위치한 핸래티는 마치 경계선이라도 그은 듯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을의 계급이 나누어진 곳이다. 엄밀히 따지면 '로즈'의 가족은 하층민들이 많은 웨스트핸래티에 속하지만 강가에 위치한 집탓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 동떨어진 집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삶을 살게 될 로즈의 정체성과도 같다. 그리고 가족들. 잦은 마찰을 빚는 새어머니 플로와 매질을 일삼는 아버지, 이복동생인 브라이언. 웨스트핸래티의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녀는 아이를 배고 어딘가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와 또 아이를 배고, 또 어딘가로 옮겨지고, 또 돌아와 아이를 배고, 또 옮겨졌다. 라이온스클럽이 비용을 대서 프래니에게 불임수술을 시키자, 돌아다니지 못하게 가두자 등의 얘기가 나왔지만 그녀가 돌연 페렴에 걸려 죽으면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p.57




그러니까 이건 완전히 다른 범주의 이야기다. 친족에게 겁탈 당하는 '프래니 맥길'의 뭉개진 얼굴에서 새어 나오는 간헐적 호흡과 울부짖음을 하나의 놀이처럼 낄낄거리며 목도하는 아이들, 거듭된 임신과 '어딘가로 옮겨진다'는 공포스러운 표현, 문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해결' 되었다는 문장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장애를 가진 여성 프래니에게 가해지는 '보편적인 의미'가 없는 폭력은 목격자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배제시키고 철저한 관찰자로 둔갑시킨다. 학교에도 가정에도 울타리는 없다. 선생도, 학생도, 부모도 아무도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웃으며 행해지는 죄악 속에서 희생양의 자리는 언제나 공석이고 그곳에 앉는 것은 언제나 약자다. 청중들에게 뒤따르는 것은 내가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는 안도감뿐. 나의 어린 시절에도 더러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과 소문들을 떠올려보면 가끔씩 궁금해진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른이 된 내가 무법지대와 같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다 커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프래니와 같은 이들이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학교에 코텍스가 전시되었을 때 희생양으로 지목된 이를 두고 "나 같으면 자살, 하고 만다." 조급함이 서린 말을 내뱉던 이름 없는 학생처럼, 단 한마디 혹은 무관심한 시선이면 충분하다.




목이 비틀린 소녀 '베키'의 아버지를 때려 죽인 '해트 네틀턴'은 아주 잘 먹고 잘 살았다. 백두 해를 넘기고 장수를 기념해 라디오에 나온 그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버기 경주의 위험성에 대해 떠들어댄다. 하지만 정말 위험했던 건 버기 경주 따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아니던가. 상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역할을 맡듯 '장엄한 매질'을 일삼던 아버지와 야생 백조의 아름다움을 논하던 목사의 추행이 그것이다. 폭력에 노출된 유년기는 로즈에게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야기시키고 그릇된 남성관을 갖게 한다. 투철한 기사도 정신의 '패트릭'에게서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간 뒤 그가 휘두른 폭력에 안도하고, 어린 나이에 부유한 농가로 보내져 온갖 핍박과 폭행을 당한 플로가 그곳을 탈출하고도 계속해서 그들의 초대에 응한 이유 역시 결핍된 감정에서 온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다른 곳에서 느꼈던 질서와 조절의 감각이 되살아나, 결코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난처하고 서글픈 빈곤을 보았다. 헨쇼 박사의 집이 해낸 일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고향집의 자연스러움, 당연시하며 받아들였던 배경을 파괴한 것이었다. (중략) 그것은 흉한 막대기 모양 전등을 사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도 때도 없이 돈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새로 산 물건을 놓고 악담을 하며 그것을 공짜로 얻은 건지 아닌지 입씨름하는 것을 의미했다." p.131




'자몽 반 개'에서 싹튼 가난혐오는 '헨쇼 박사'의 생활방식과 쓰는 언어(가령 로즈를 노동 계층이라 칭한 부분)의 차이가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는 계기로, 또 사랑하지 않는 이와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진취적인 인물로 보였던 헨쇼 박사 조차 패트릭과의 관계를 두고 대단한 성과라 일컬었으니 어린 로즈의 허영은 그 뒤로도 10년을 '행복에 대한 환상'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세계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낭만을 부르짖듯 왕좌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 코페투아왕에 자신을 대입하던 남자와 거지 소녀라 지칭된 여자. 그렇다면 부유함에서 오는 오만과 가난한 자의 오만엔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클리퍼드'가 '정태적인 모순'이라며 결혼생활의 권태를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아는 소년들은 아무리 무능해 보여도 결국은 남자가 될 것이며, 자신들이 갖춘 것보다 훨씬 큰 재능과 권위가 필요할 것 같은 일들을 하도록 허가받을 거라는 사실"처럼. p.359 로즈가 그토록 원했던 특권은 어떤 이들에겐 날 때부터 그냥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여자는 활달하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무엇을 만들거나 비축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빠릿빠릿해야 하고 흥정과 관리에 능해야 하며 사람들의 가식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지적인 면에서는 어수룩하고 아이 같아야 하며, 지도가 긴 단어나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을 우습게 보고, 아기자기하면서 알쏭달쏭 한 생각, 미신, 전통에 대한 믿음 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게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성향이란 말인가. 작중에서 아버지가 본 플로를 가르킨 설명인데 그에게 다중인격적 요소가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처럼 어처구니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즈의 아버지와 같은 이들은 많다. 이성과 타인,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 다를 거라는 터무니없는 믿음, 나와 같은 세계의 사람들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는 오만. 오판은 여기서 온다. 소설 전반에 걸쳐 로즈는 꽤 자주 확언한다. 헛간에서 남몰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읊조리던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 확신한 것처럼 계속해서 타인을, 자신을 속단하는 실수를 범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쉽게 유대감을 느끼고 쉽게 사랑에 빠지며 또 상처받고 도망친다. 외국문학임에도 이야기가 피부로 와닿았던 건 올곧지 않은 로즈의 캐릭터에 있다. 누군가 지난날의 좌절이 나를 성장시켰느냐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노라 대답하겠다. 보통의 소설이나 영화처럼 주인공의 인생을 바꾸는 단 하나의 사건은 없다. 모순을 저지르고 거듭 실수하며 부딪치는 것은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과정, 말 그대로 인생이다. 그 더딘 흐름을. 딸 '애나'를 통해 처음으로 가정적인 삶과 안식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서 자립할 힘을 얻고 '빵을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그리고 '사이먼'의 죽음이 가져온 어긋난 충격은 로즈에게 또 한 걸음 내딛는 계기가 된다.




"그녀가 늘 떨쳐내지 못했던 이상한 수치심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연기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허튼 것에만 주목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만 전달했던 걸 아니었을까, 항상 그 이상의 어떤 것, 섬세한 결이나 깊이나 빛 등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포작하지 못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중략) 그때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때로는 실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p.367




세월은 흘러 핸래티와 웨스트핸래티를 가르던 차이는 사라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중년의 로즈는 이제 완벽하게 로즈를 연기하고 어릴 적 친구 '랠프 길레스피'는 완벽한 '밀턴 호머'가 되어버렸다. 살면서 자주 느끼곤 했던 출처 불분명의 수치심은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옛친구와의 조우에서 유년의 자신을 마주하며 희석된다. 이는 동생 브라이언이 혐오하는 대상들로 남매가 펼치는 언쟁 속에서 우애를 느끼고 그들의 뿌리가 여전히 웨스트핸래티에 있음을 확인하는 장면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결합으로 세상에 나온 불완전한 존재들. 어쩌면 우리가 저지르게 되는 바보같은 짓들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실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더디더라도 우리는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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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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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는 것에 대해서뿐 아니라 읽을 수 있다는 그 기적에 놀라 숨이 막히길 바란다." p.357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도입부에 실린 제임스 보즈웰의 새뮤얼 존슨전 인용문이 인상깊다. 한 남자가 어떤 신사의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얘기하던 중 깊히 몰입한 나머지 급격한 감정변화를 보인다. 시차에 인지적 오류가 발생하여 신사의 총구가 당장 눈앞에서 소중한 것을 위협하기라도 한듯 상념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앞으로 읽게 될 소설 전체를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은 머리말부터 시, 주석과 색인 모두 소설로 취합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게임처럼 미로에 들어가는 길(읽는 순서)를 독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단번의 독서로는 온전한 재미를 얻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머리말에서 이 시의 주석자이자 편집자인 '찰스 킨보트' 박사는 독자들에게 관례를 무시하고 본문인 시보다 주석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는데 짐짓 자연스러워보이는 이 과도한 친절은 사실 그의 계략인 셈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지만 도달점은 같아도 여정의 조망에 차이가 있으니 텍스트가 꼭 퍼즐과 같다. 앞서 나보코프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 명확하고 분명한 비평 연구 자료를 비비 꼬고 뭉그러뜨려 기괴한 소설 비슷한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p.111 라며 참으로 발칙한 발언을 했더랬다. 주석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독자를 매료시키고 때때로 리드미컬한 희곡을 읽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 이 기괴한 걸작은 당신을 눈멀게 하기에 충분하다.




소설은 크게 세 줄기로 나뉜다.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에 결여된 '인간적 사실성'에 대한 보충(주석)과 젬블라의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의 일대기, 그리고 망명왕을 처단하려는 '그라두스'의 여정. 방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왕의 훌륭한 통치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젬블라 왕국에 반란이 일어나고 폐위를 거부한 친애왕 카를 크사베리는 호화로운 투옥생활을 하던 중 비밀 통로를 통해 탈출에 성공한다. 여차저차 미국으로 건너간 왕은 새로운 신분으로 천재 시인 '존 셰이드'의 이웃 사촌이 되고 젬블라 왕국사가 아름다운 언어로 탄생되길 바라는 그의 마음은 시인을 향한 엄청난 집착을 불러오는데, 그가 바로 우리의 주석자 킨보트 되시겠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머리말에서 낌새를 챘겠지만 캐릭터가 범상치 않다. 초장부터 시인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주석자의 자질에 대한 세간의 의구심을 질투로 치부해버리며 신랄한 언사(암살자 그라두스를 가리켜 박쥐와 게의 잡종같이 생긴 그로테스크한 외모라 일컫는 등)는 물론, 시를 제멋대로 해체하는 등 흡사 걸작에 편승해 본인의 전기를 펼치는 모양새이니 신뢰감은 바닥을 뚫는다. 또한 동성애자왕국에서 온 통치자답게 정원사를 스카웃하는 기준도 남다른 남색의 왕 되시겠다. 거기다 그의 여성혐오주의적인 면모는 시인의 아내 '시빌'과 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절정에 달하는데 일례로 그녀의 색인 항목에 주석 번호를 기입하는 수고조차 아끼는 한결같은 태도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세계를 누빈 학자와 화롯가에 앉은 시인. 이들간에 존재하는 여러 공통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7월 5일로 출생 일자가 같다. 존의 아버지 새뮤얼 셰이드는 생전에 '깃털 달린 종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셰이드종의 여새(봄비칠라 샤데이)가 존재한다. 카를의 아버지 알핀왕은 비행기 사고로("이 비행기는 그의 운명의 새가 되었다." p.132) 목숨을 잃었으며 킨보트와 셰이드 모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리고 시빌 셰이드의 젊을 적 초상(肖像)이 킨보트의 아내 디사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과 어릴 적부터 시작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그것이다. 이들의 평행성은 무엇을 뜻할까. 정말 킨보트는 허구의 인물일까, 아님 우상시한 인물에 대한 동경으로 날조한 주석에 불과한가. 워낙 다각적 측면이 있는 소설이기에 해석의 향연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전자에 대한 것은 나보코프만이 알 것이고 후자로 논하기에는 셰이드를 대하는 킨보트의 태도에 분명한 양면성이 존재한다.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로 추앙하면서도 "'창백한 불꽃'같이 [템페스트]등등에서 인용한 표제를 맹렬히 비난, 671" 하고, 숙부 '콘말'과 시인을 한데 묶어 비웃으며 자신의 우월감을 표출하기도 한다("작가란 세상을 알아야 하고, 중략… 노란 상아탑 안에서 노상 명상만 하고 있어도 안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존 셰이드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p.352).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백한 불꽃 제 1편에 두 차례 등장하는 이 구절은 존 셰이드의 유전적 요인으로 인한 육체적 불편과 자신을 닮은 딸 '헤이즐'로 인해 겪었을 고통의 심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나의 신은 요절했다." 99행과 스스로를 괴짜라 칭하는 대목 역시 그 의미를 나란히 한다. 그런데 이 시행은 꼭 홀로그램 같다. 처음과 끝을 이어 창작자 대신 완결을 낸 이의 처지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니 말이다. 그러니까 주석 부분을 끝마치고 시로 넘어갈 때만 해도 '죽은 여새'는 셰이드를, '그림자'는 킨보트를 뜻하며 고인이 된 시인의 유작을 읽고 나서야 그가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었음을 깨닫고 느낀 허탈한 심정을 대변한 구절이라 느꼈다. 그런데 마지막 1000행, 즉 미완의 999행이 끝난 뒤 다시 1행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 대목은 똑같은 문장임에도 그 감상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미주에 따르면 여새란 전쟁, 죽음, 전염병의 창궐을 알리는 전령으로 일컬어진다. 변장한 왕이 미국에 도착하던 무렵 시인에게 심장 발작이 일어나고 카를파의 도움으로 마련된 새 보금자리를 아르카디아로 지칭하는 등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시인의 말로와 몇몇 장면들이 대비된다. 또한 킨보트란 이름은 '왕을 파괴하는 자'로 "망명이라는 거울 속에 자신의 정체를 감춘 왕"을 뜻하는데 이는 이전의 신분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그가 '죽은 여새'인 망명왕 카를 크사베리를, "예술은 태양에 맞서서 움직인다." 해설 p428 는 나보코프의 희곡 「사건 The Event 속 문장은 시인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가 예술 그 자체(그림자)임을 뜻한다. 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킨보트가 주석자로 나선 것이 어떤 불순한 의도가 아닌 필연적 운명의 불가항력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 테니까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p.264 모든 것을 버리고 쫓기듯 도망친 왕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기념비적 상징이 필요한 법이다. 허나 당초 계획과 달리 킨보트의 이야기가 불러온 반향은 그림자단(the shadows)의 일원 그라두스란 실체였고 레드 애드머러블(바네사)의 날갯짓이 존 셰이드(shade)를 스치며 죽은 여새의 '그림자'로 잠들게 된 것이다. (킨보트는 그라두스를 "전진시키는 힘은 셰이드의 시 자체의 마술적인 작용"p.171이라 했지만 결과물로 미루어 보아 이는 그의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추후에 사용하려고 적어둔다. p.83" 우리네 삶이 그렇듯 추후를 기약했던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삶을 예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시와 현실이 접점("밀려오는 어스름과 저물어가는 빛 속에서 한 남자가 ―아마도 어느 이웃의 정원사인 듯― 나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빈 수레를 굴리며 비탈길을 오른다." 996~9행)을 맺으며 그렇게 미완의 삶은 어떤 운명적 힘에 의해 킨보트의 주석이 더해져 예술로써 완성된다. 그리하여 출처가 의심되는 초고는 차치하고서 주석 전체가 1000행으로 가는 여정이라 볼 수 있겠다.




달이 태양에게서 훔친 창백한 불꽃




셰익스피어의 『아테네 타이몬』을 콘말의 번역인 젬블라판으로 접한 킨보트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표제의 의미. 여기서 태양은 남성을, 달은 여성을 뜻한다. 롤리타의 짧은 주석을 보면 "소방수에게는 모든 불('창백한' 불조차도!)이 그녀다." p.299 라는 대목이 있다. 세 명의 주요 인물들에게 달은 어떤 의미일까. 킨보트에게는 애정 없는 어머니와 왕위계승을 위해 혼인한 아내가 그렇다. 특히 디사에 대한 미묘한 감정은 킨보트에게 지우고 싶은 과오와 순수한 삶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이 꿈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셰이드에겐 모드 고모와 딸 헤이즐이 그들이다. 모드 셰이드는 괴짜라 불릴 만큼 독특했던 인물로 시인이자 화가였던 그에게 존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병든 몸으로 정신과 육체을 지배 당한 고모의 말로(末路)를 지켜보며 내세에 대한 심상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셰이드, 호수가 집어삼킨 헤이즐. "호수에서 우리집 현관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왜 시야를 가리는 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지붕조차 안 보이는가, 알 수 없다." 42~4행 딸에 대한 아픔이 묻어나는 시구절이다. 추한 외모로 태어나 짧은 생을 고독 속에서 살다간 그의 삶은 셰이드가 왜 무신론자인지를, 왜 삶보다 죽음이 더 위대한 경이라 말했는지를 납득할 수 있다.




우리의 늙고 지친 젬블라인 암살자 그라두스를 논하기 전에 표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창백한 인간의 눈을 가린 손의 형상이 마치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은 듯하다. 소설 속에서 바네사는 죽음을 알리는 운명의 나비로 잦은 등장을 한다. 저마다의 길이로 지펴진 인생의 불씨는 신의 섭리 혹은 자연의 법칙이란 결코 알 수 없을 타의로 우리들 눈앞에 드리워지고 모두가 겪게 될 일이지만 결코 경험할 수는 없는 것. 그렇기에 삶은 역설적이며 동시에 경이롭다. 살아있기에 죽음도 논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죽음, 검은 나비와도 같았던 그라두스의 기구한 삶은 어떠한가. 불의와 기만을 혐오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그는 "일반성은 신성하고, 특수성은 악마적이다."라는 독특한 사상을 가진 인물이다. 아내는 집시와 바람나 집을 나가고 장모와 불륜을 저지르다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거세를 시도한 그에게 경악과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있어 달이란 바다가 훔친 것이요, 녹아서 사라진 탓에 아주 캄캄해진 밤이 아닐까. 태양은 창백한 불꽃을 잃어버렸다.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ㅡ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집필이 끝난 원고를 보고 신이난 킨보트는 셰이드에게 비밀을 말해줄 것을 약속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진실을 알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오식에서 비롯된 깨달음으로 화창한 내일을 확신하던 이는 죽음을 맞았고, 환청에 시달리며 보이지 않는 암살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이는 또다른 내일을 얻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신분을 바꾸고 다른 이를 연기한들 결코 죽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로써 주석자의 최후 발언은 모두 끝이 났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당신은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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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의 말들 - 사소한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
엄지혜 지음 / 유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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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솔직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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