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은 고생해서 배우고,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가?
습득한 것의 극히 일부밖에 기억해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단 잊어버린 것을 필요에 의해 다시 한 번꺼내려고 할 때, 전혀 배워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경험도 없는 사람과는 달리,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별 고생 없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에는 그런 측면이있다. 나는 그것을 ‘지혜의 넓이‘ 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지혜에는 대상을 깊이 살펴보는 ‘깊이‘ 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결단력을 유도하는 ‘힘‘ 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왜 배워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러한
‘지혜‘ 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이 책에서 학문하는 즐거움과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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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지음 / 바다출판사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읽은 때는 20대 한창 나이였다.
무릎을 치며 공감을 하였다. 모든 것이 유교 사상 때문이라 했다. 권위주의, 남녀차별, 서열 등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 '남성'을 위한 도덕, '어른'을 위한 도덕,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라는 것이다. '힘 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곡된 권위와 도덕적 가치, 허풍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이 유교적 허세문화와 정치적 허세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그 때의 나는 이 책을 상당히 매우 좋은 책으로 평점 만점을 주었었다.

나는 자라면서 딸부자에 아들 하나있는 우리 집에서 차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동생이 누나들 등살에 괴롭다고 했다.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남녀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착각 이었다. 예의범절로 포장된 횡포를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지였다. 초등학교 때 반장은 당연히 남자, 부반장은 여자였다. 출석부 이름도 남자가 늘 앞 번호였다.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복장 자유화였는데도 당연히 치마를 입어야 했다. 직장생활을 했을때 여자는 늘 먼저 출근해 책상을 닦았고, 커피를 탔다. 아무리 몸이 불덩어리여도 어른이 앞에 서계시면 얼른 자리를 양보해 드려야 했다. 선생님과, 선배, 상사의 말에 절대로 토를 달어서는 안 되었다. 이의 제기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딸 끝에 아들을 낳은 것도 유교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장손 타령에 굴복하신 것이다. 세월이 훌쩍 지나,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몇 번 탐독하고, 김진명의 고구려를 읽으면서 문득 이 책이 생각이 났다. 구부(소수림왕)가 그토록 뛰어넘고 싶어 했던,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 했던 공자. 그런데 다시 읽으니 그 때의 그 느낌과 똑같지는 않았다. 머리말을 제외하고 첫 장 부터 어?... 이런 내용이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의 기억의 오류.. 좋았던 부분만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건가? 그 당시 내가 어떤 부분에 끌리고 매료 되었었는지 궁금해 끝까지 붙잡고 찬찬히 읽었다. 내가 꼰대가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 한국인으로 사는 열 가지 괴로움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인생의 최고의 책이라 생각했던 내게 뒤통수를 쳤다.

" 정치인, 기자, 학자들처럼 민족과 민주주의를 열심히 외치는 집단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찾아낸 우리들의 대안이 찬호와 세리, 그리고 릭 윤이지만 이것이 해답이 될까? 찬호의 스트라이크와 세리의 버디 퍼팅, 릭 윤의 미소에 일희일비하면서 손에 땀을 쥐어야 비로소 한국인인가? 그것이 나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들의 개인적 선택에 대해 왜 우리가 '애국적'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사실은 돈 때문에 나간 것이 아니고 국위선양을 위해서라고 자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등한 대리만족 때문일까?"

살짝 반감이 생긴다. 의도하지 않은 국위선양 맞다. 개인의 이익에서 온 어부지리 국위선양 맞다. 그러나 선한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 또한 사실이다. 과대한 찬양만 아니라면, 조금의 애국적 박수 정도야 쳐 줄 수 있는 일 아닌가. 대한민국이라는 인지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금 박세리 키즈들이 LPGA를 휩쓸고 있으며, k-pop열풍으로 문화 수출에 의한 이익 또한 어마어마하다. 작가는 지금 이런 열풍을 보면서 아직도 박세리와, 박찬호에게 '애국적' 박수 보내기를 떨떠름하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백두산 천지를 보며 수많은 미사여구로 민족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이들에게도 고깝게 말한는 것이다.

"산을 가다 보면 산이 있고, 산이 있다보니 폭포도 있고, 호수도 있음이 무에 그리 넋을 놓고 노래하며 민족 장래 모두를 부탁할 만큼 대단한 것이던가? 그것은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의 시작 언저리에서 더덕 몇 뿌리를 천년 묵은 약초라고 팔고 있는 허술한 장사꾼의 보따리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몸짓들이다.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흐름 속에 어느 한 지역 문화의 성스러움 이나 순수 가 그들만의 원시적 가치로 남아 있도록 놔두지 않는 그 흐름 앞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게 될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감정과 생각이 왔다 갔다, 이랬다저랬다 혼란스러웠다. 1부를 읽을 때와 2, 3부를 읽을 때,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의 마음과 생각이 달랐다. 왜 그런 것일까? 답은 맨 뒷장을 덮은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2부는 유교의 해악, 출발과 기원, 왜곡의 역사, 조상 숭배 의식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며, 3부는 한중일 삼국의 식칼과, 음식을 통해 문화 비교를하며 일본 찬양을 해댄다. 그래서 1부와 같이 3부도 반감이 생겼다. 중국은 좋게 말해서 다국적이고 나쁘게 말해서 다소 오만하다고 평한다. 그들의 주된 음식인 돼지볶음 '차오'를 빗대어 둔탁하고 불투명하며, 실체를 잡을 수 없다고 중국 문화의 정서를 비꼰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극찬을 한다. 뒤가 없는 일본인들의 진솔한 면을 '쓰시'에 빗대어 투명하고 정갈한 국민성이라 칭찬하며,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해 주고 발휘할 수 있는 문화성이라 극찬 한다. 그에 비해 한국의 '찌개'는 이름부터 몰개성, 억지가 가득한 음식이라고 한다. (잡탕찌개, 부대찌개, 섞어찌개) 김치와 된장 고추장에 대한 평도 영~.
마음에 안 든다. 맛에 변화를 전혀 줄 수 없는, 유연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음식, 외부 변화에 대해 유달리 둔감하고 고집이 센 한국인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평한다. 같은 것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것 아닌가? 한국의 찌개를 두고 좋게 평한 글도 많이 읽었다. 작가는 그것도 민족주의를 앞세운 문화적 해석 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장 반감이 가는 것은 "일본을 용서 한다"는 단락이다. 뺨을 때린 놈은 때린 적이 없다고 우기는데 맞은 사람이 나서서 난 널 용서해 사랑해~~ 네가 가진것이 많기 때문이야 너에게 배우고 싶어 어떻게 하면 미개하지 않게 살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일본이 6가야에 자신들이 지역 통치를 위해 '임나일본부'를 두었다는 주장을 완전 부정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 지역에 정말 '임나일본부'가 전혀 없었다는 기록도 없고, 완전히 백제나 신라의 통제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이란다. 없다는 기록이 없기에 인정을 할 수 없다니, 기록이란 있는 것을 기록하는 게 아닌가? 작가는 애국적 역사풀이를 그만 두자고 한다. 그러면서 식민사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주고받으며 때로 싸우고 화해하는것, 이것이 바로 문화다. 만일 우리가 일본에 건네준 문화의 일단면만을 가지고 일본을 문화적 속국으로 치부하려고 하는 한, 그건 우리가 일본의 강제 통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부려보는 억지고, 또 다른 컴플렉스일지 모른다는 혐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다."

4부는 대한민국의 커다란 숙제 교육, 입시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학벌주의, 일류 지상주의를 유교의 뿌리에서 찾는다. 이 부분은 상당히 공감되는 부분이다.
5부는 결론 부분으로 유교의 오만을 벗어버리고 국가를 넘어 하나의 인류, 문화를 만들자고 말한다.
"한국인을 넘어서. 한국인의 문화가 아닌 사람들의 문화를 만들어보자, '유토피아를 꿈군다.' " 작가의 외침 이다.

외면적으론 유교를 비판하지만 내면은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난 민족주의자 이다. "우리 민족은 하나"(혈통적으로 하나를 말 하는 것 아님)라는 민족주의와 전체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국수적 민족주의, 한국적 쇼비니즘은 아니다. 내 민족이 자랑스럽고, 민족을 강조하는 우리의 근성이 좋다. 이 민족의 근성이 없었다면, 그 수많은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를, 6.25를, IMF를 금융위기를, 코로나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민족만의 특유 근성이 나는 좋다.

"민족주의, 우리 사회 저층에 깔려 있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오늘 이 사회에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척화비의 주인공 대원군이 승리했는가? 사대부들이 일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았는가? 해방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는가? 남북을 이어노았는가? 전쟁을 막았는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투명하고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들어놓았는가? 무엇 하나 바꾸어본 일도 없고 올바른 예측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 민족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가? 귀 막고, 입 막고, 눈을 가린 채 '우리끼리 만세'를 부르면서 미래 사회를 운운해도 되는 일까? 정말 우리들은 도도하게 변하며 흐르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통속이 되어, 민족주의 속에 마련된 기득권과 권위의 달콤한 꿀을 나누어먹고 있다." -p57-

저자는 본문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유교라는 하나의 잣대로 매도하는 우를 저지르는 멍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말 한다. 멍청이는 아닐지라도 한쪽으로 너무 쏠린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우리 사회의 저변에 유교 문화의 특성이 두텁게 깔려 있음은 부인하지 않지만, 유교를 타파하기 위해 민족주의까지 부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간 듯하다. 작가의 주장처럼 "우리 사회에 더러운 부유물처럼 떠있는 목소리와 주장과 구호와 이념들 밑에 도사리고 있는 유교적 권위, 그리고 그것 앞에 엎드리는 타협, 그래서 만들어지는 불평과 불투명함들. 그 본질들을 해체하고 찢어내고 씻어내야 마땅하다.

"유교 문화의 내부에는 스스로를 붕괴시키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유교 문화가 내거는 가치 척도는 '도덕 사회'를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상적 도덕 사회. '인'의 세계로 표현되는 이 사회는 절대적 인격체 '성인'에 기반하고 있다. 억지와 희망이 만든 착각의 세계였다."

"주로 정치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도 살펴보고 또 다른 삶의 지평으로 넓혀갈 수 있다는 면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다. 이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정신적, 문화적 독재를 획책하고 있는 지배자들(정치,경제,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의 교묘한 통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교 문화 속에서의 '힘'은 단순한 이분법적인 관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하늘과 땅, 남과 여, 왕과 백성, 부모와 자식들은 이 '힘'을 주고받는 이분법 체계 속의 대표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존재들 속에서 '힘'은 상하 수직의 루트를 따라 일방적으로 전달된다."

"문제는 '힘'의 사용이 상식과 법, 그리고 수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시스템 속에서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프로그램, 즉 유교 문화가 만든 권력 구조 속에서 발생했음에도, 다시 한 번 도덕으로 돌아가는 다시 유교 문화 속으로 스스로 기어드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데 있다"

20대 때와 지금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다른 이유는, 아직 유교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1990년대 보다는 훨씬 많이 유교를 지워냈다는 것이다. 책에서 작가가 주장해왔던 것들이 많이 이루어졌고,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면 그 때 이 책이 쓰여진 덕분인가? (정말이지 끝까지 생각이 왔다 갔다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 예로 언어의 변화와 효의 근본적인 의미가 바뀌었으며, 노인복지가 시스템화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번 굳어진 어휘에 대해서는 검증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언어란 변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따라서 시대에 맞는 언어를 늘 새로운 마음으로 골라 사용해야 하는 법. 언어란 사회 공동의 가치를 담는 그릇, 따라서 언어를 새롭게 해석하고 선택한다는 뜻은 바로 사회 고동의 가치를 담을 그릇을 다시 씻고 다시 만들어간다는 유연한 태도를 의미한다."

지금 21세기 아이들과 미디어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언어가 새롭게 정의되고 만들어 졌는지 작가도 아실 것이다. 유교의 악습 또한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했지만 계속적으로 지워 나가고 있다. 아니 지워져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세대는 유학을, 유교를 모른다. 그리고 일반 시민의 의견이나 여론을 대변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90년대 시점에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다소 진부하고, 올드하다는 얘기다.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고 바라는 책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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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라는 별에는 몇십억 개의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타인의삶이 아닌 여러분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게 반드시 있어야하는 겁니다. 부모가 원하는 게 아니고요.
나라는 유기체를 존중하는 것은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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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5 - 제2부 유형시대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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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을 가진 자 권력을 탐하고, 권력을 가진 자 여자를 탐하게 된다. 한강 5권에서 박부길은 군부와 결탁해 회사를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그다음 그의 야심은 바로 권력이었다. 아들 박준서를 국회로 진출 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여자를 탐한다. 허진 동생, 박부길의 비서 허미경을 범하고 처참하게 내친다. 지금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시대인데 70년대는 오죽하였을까. 박부길에 당하는 허미경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속상함에 이 바보야, 칼부림을 해서라도 도망쳐야지라는 속울음을 쳤다. 그러다 문득 두 권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묻는다. “왜 바로 그만두지 못했느냐?” 000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는 초기 피해 이후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가 외면당한 뒤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시간을 도려내고 또 도려냈다. 사건과 일을 철저히 분리했고, 가해자 000과 직장 상사 지사님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렇게 가해자에게서 도망치지도 소리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들려 살았다. 이것이 ‘해리 증상’이라는 것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책 <김지은입니다>)
또 한 권은 권김현영이 쓴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이다. “미투를 문제 삼는 이들의 또 다른 단골 소재는 폭로의 시점이다. ‘이제 와서’라며 질책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내가 이들에게 가장 놀란 건 어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미국 폭스뉴스 회장을 성희롱으로 고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에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 피해자 중 하나인 케일라(마고 로비)는 “직장 내 성희롱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질문의 늪에 몰아넣어요. 그럼 끊임없이 자문하죠. 내가 뭘 했지?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뭘 입었지?” 다른 여성들이 이어받는다. “내가 돈을 노렸다고 소문이 날까?” “내가 ‘관종’이라고 하진 않을까?”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까?” 너무나 낯익은 질문들이다. 다시 케일라가 묻는다. “여기 남는다면 참고 견뎌야 할까? 다음 직장은 다를까? 아니면… 내가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다르게 만드는 것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람이 입을 여는 건 시작일 수 있지만,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근래 서울시의 시끌시끌함이 허미경의 이야기에 오버랩되어 가슴이 시리고 아리다.

http://aladin.kr/p/mWqqC

http://aladin.kr/p/ONMfc

http://naver.me/FeTxl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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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 - 구부의 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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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퍼트렸으면서도 유학을 미워하고, 법을 만들었으면서도 법을미워하고, 하다못해 불법을 받아들였으면서도 불법을 비웃은 왕. 백성을 법에 의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며, 유교로 백성의 무지를 깨우치고 악습을 타파하며, 불교로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고자 했던 왕.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웠지만 그가 꿈꾸는 나라는 아니었다.(작가의 주장) 그가 추구하는 나라는 공자가 죽은 나라였다.

작가는 구부의 입을 통하여 공자라는 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90년대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이 떠올랐다. 한국인의 내면을 지배해온 유교 문화와 그 권위와 위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유교는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했다. 유교의 씨앗은 쿠데타로 왕권을 쟁탈한 조갑이라는 한 중국인 사내의 정치적 탐욕을 감추려는 목적 아래 뿌려진 것이었다. 정치적 사건은 교묘하게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전해오다가 공자라는 한 사나이에 의해 후대에 전해졌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 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공자의 도덕은 '힘 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 잡아먹는 유교이다."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내용 중 -

고구려 6부 첫 장도 유교에 대한 비판으로 사람을 죽이는 '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가난에 굶주린 딸을 먹이고자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못한 사내는 야만과 퍠륜이라는 죄목으로 몽둥이찜질을 받다 죽는다. 인자하기로 정평이 난 태수는 울부짖는 딸에게 사내를 때려죽이도록 한 자는 "예'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예가 그를 벌한 것. 당장은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힐지라도 장래엔 태평성대를 이룩할 미풍과 양속을 규정하기 위함이라 한다. 그는 살해당한 것이 아라. 예의 엄정함을 알리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 거라 인자하게 말해준다.

"위대한 스승 공자께서 아무것도 없는 짐승의 야만 속에서 사람의 걸을 길을 만드셨고 영명한 태왕께서 받아들이셨다. 백성을 구제하고자, 너희를 더욱 안정된 내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무지, 야만, 악습의 비례가 바로 너희의 원수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효와 예를 따르면 벌하는 이도, 벌받는 이도 사라질 터."

태학을 설립하여 유학을 장려한 구부가 지우고자 하는 것이 한의 유학이다. 구부는 유학을 말의 눈가리개에 비유한다.
그에게 유학은 생쥐를 키우는 자를 벌하고, 잘 씻지 않는 자를 벌하고, 게으른 자를 벌하고, 과식하는 자를 벌하고, 백성 스스로의 판단을 일절 금하고 아주 작은 물꼬만을 터주어 원하는 대로 끌어가는 것. 그것이 그들의 방법이고 그들의 세상이다.

"말의 눈가리개란 제가 어떻게 부림 당하는지,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에는 어떤 다른 것이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만드오, 이끄는 대로 달리는 일, 제 본분으로 지워진 일에 가장 충실하게 될 뿐이오. 나는 그 눈가리개를 벗기고 백성이 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들 것이오. 유학 따위 저들이 얼마든지 간직하도록 두겠소. 그러나 눈가리개를 벗어낸 백성이 제 눈으로 똑똑히 세상을 보며 제 손으로 자유롭게 빚어낼 앞으로의 산물, 새로이 태어날 문물은 우리의 것이 되겠지."

학문을 닦으면서도 자유롭고 방종한 구부이기에 당연한 전통과 선입견에 오히려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꿈은 전쟁이 아니다. 고구려라는 나라와 맞지 않아 동생이련에 게 양위를 하고 공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려 떠난다. 한의 문물. 공자가 차지해버린 거대한 바다. 구부는 그 바다를 퍼내어 말려버리겠다는 그야말로 걸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법을 추리고, 예를 줄이고, 백성의 몸을 묶는 수만 관습과 규제. 백성의 눈을 가린 신분의 구분을 없앤 세상. 당당히 걷고 자유로이 공부하며 할 말을 하는 세상.

예법을 따르지 않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단청의 아버지. 구부는 그 단청을 의지하여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고구려의 제일의 무사, 풍수사, 학자, 화가, 도둘 꾼이 함께 공자를 무너뜨릴 구부의 군사들이다.

"헌데 폐하께서 유학을 받아들이고 태학을 지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이 못되고 병들었다고 타지 않을 수는 없다. 다른 말이 또 있다면 모를까?
'다른 말이 없을 리가 없지 않사옵니까?'
'정제된 처세이니 일단 야만을 물리치는 데는 요긴하다.'
'하여 폐하께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유학이 백성에게는 삶을 좌우하는 법도가 된 것이군요."
"삶을 좌우한다. 그래, 태학이 세워진 이후 유자들이 지나치게 설친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다. 새로이 불법이 퍼지니 과민히 경계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유학이나 불법이나 백생의 삶을 밝히고 나라를 이끄는 해가 되지는 못한다. 어두운 밤 횃불 같은 것이 될 수는 있어도.'
'가는 길에 불과해, 내 결국 다다르는 곳은 따로 있을 것이다."

http://aladin.kr/p/5FTT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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