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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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30대를 꼭 1년 앞둔 20대 여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첫째' '딸'로써의 기대와 역할에 충실히 부응해 왔고 25살에 취직하여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지 4년차다. 19살엔 대학만 가면, 24살엔 시험에만 붙으면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를 매일 배수진으로 내몰며 '의지와 노력' 이라는 단어로 점철된 생활 끝에 맞이한 스물 다섯. 턱 끝까지 숨 차게 하던 레이스를 마치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 내 앞에 내밀어진 것은 '예의바르고 친절한 1등 신붓감으로써의 역할' 이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다음 경기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었을 뿐, 어느새 내 앞엔 새 출발선이 있었다. 

  어렸을 땐 당연히 달려야 하고 그래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어딜봐도 모두 나와 비슷했고, 열심인 나를 모두가 제대로 하고 있다며 칭찬했다. 거의 다 왔다며 조금만 더 힘내라고 격려해 주기까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돌아보니 옘병, 구라였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주변 모든 것이 뒤틀려 보였다. 눈 앞에 그려지는 것 이면에 내가 진짜 알아야하고, 봐야할 것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탈주하기로 했다. 뛰쳐나가는 나를 두고 어른들은 피와 살이 될 충고인양 제각기 한 마디 했다. 처음엔 내가 정말 큰 잘못을 하는 건 아닐까 마음 졸였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일년에 한 두번 볼까 말까한 사람들 말에 마음 쏟느니 스스로의 말에 신경 쓰는게 훨씬 더 의미있다에 도달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문구를 봤다. '2832를 조심하라.' 결혼에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저 나이 대가 되면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듯 결혼을 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막 그 시기에 진입했다. 아직까지는 주변에 결혼 소식이 자주 들리지 않아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면서도 대화 주제로 심심찮게 오르는 '결혼'을 보며 경계해야 겠다는 다짐도 종종 한다. 

  그렇게 '결혼'이 내 앞에 빈번하게 등장할 수록 '사랑' 이라는 가치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이 결혼을 선택했지만 최우선에 사랑이 있진 않았다. 훌라후프를 자유롭게 돌릴 공간 여유가 있는 집에 살고 싶어서, 신혼 부부를 위한 법의 테두리 속에서 보호 받고 싶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삶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줄 것 같아서 등이 먼저 등장했다. 하지만 결혼에 작은 기대라도 하면 안 되는 것 마냥, 내가 1만큼의 기대를 하면 10에 상응하는 짐을 지우는 것이 여성에게 결혼이 뜻하는 것이었다. 가정을 위해 나의 커리어를 내어주어야 하고, 나의 주장도 슬그머니 접어야 하며 그러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어느 샌가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그런. 정세랑 작가님 신간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들이 내가 달렸을 그 트랙 위에 있었다. 이미 나를 무수히 앞질러 갔거나, 내가 탈주 하지 않았다면 같은 곳을 달리고 있을 그들, 또는 나처럼 자신을 위해 트랙에서 벗어난 여성들까지.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마중나갈 인물들이 이번 가득했다.

 소설은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꼭 그 트랙 위에 서 있지 않아도 된다고, 다양한 선택지를 여성 또한 갖고 있다고 말한다. 나를 불러주는 사람을 따라갔지만 좋아하는 것을 위해 선택을 번복해도 되고, 결혼에 기대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되고. 힘들면 도망쳐도 되고, 이혼해도 된다고 한다.  모든 것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나'에게 달려있다고 한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자고, 찬 바람 맞으며 머리도 식힐 겸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그렇게 소설은 우리를 부른다.

 사회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큰 일 날 듯 으르렁댄다. 예전엔 그런 모습에 움찔했을 수도 있다. 이젠 겁내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색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다.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에 나도 이 곳에서 빛낼 수 있다. 서로의 빛을 확인하며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된다. 


 
 p. 20  결혼은 겉의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법의 문제, 제도의 문제, 보호의 문제이니 말이다.

 p. 24  더 좌절할 때는 젊은 세대의, 충분히 개인주의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세대의 사람이 비슷한 말들을 할 때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가 기성세대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여 여자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말들을 할 때, 여자는 마음속 리스트에서 그 이의 이름을 지웠다. 너는 이제 그만 만나야 하겠구나, 

p. 128 되게 바보 같은데, 사랑받는 기분이다? 클라이언트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거나 무서운 윗사람한테 칭찬을 들으면, 프로답지 않게 갑자기 눈물이 글썽 고여. 나는 사랑도 꽤 받고 컸는데 왜 하필 그런 순간들에서 충족감을 느낄까? 미쳤나봐. 고장났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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