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과는 달리 이야기는 낮설다. <뱀과 물>의 첫 이야기를 한장, 그리고 또다시 한장씩 넘겨 덮을때마다 기묘한 물음표가 머리 속에 가득차는 느낌이었다. 잘 모르는 인상파 화가의 미술전에 들어온 것처럼 아득한 머리통으로 애써 이해하려고 문장을 헤집어 한글자 한글자 기워읽었다. 트럭과 노송나무, '눈 아이'와 빨치산 소녀의 사진, 유원지에 버려진 아이, 분실물센터 같은 미아센터, 여자 심리학자와 기묘한 대화, 결국 또다시 트럭으로 귀결한다. 읽어갈수록 낮모를 장면들만 머리에 박혔다. 골치가 아파왔지만 무언가가 잡힐듯 말듯한 이야기의 매력에 손은 자연스레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에 도달한 내가 그를  덮었을때 굳이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첫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서커스 눈표범 조련사인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족의 무덤에 도달한 소녀와 친구였던 얼이, 그리고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 이후 얼이의 어머니처럼 미친년이 된 소녀와  키큰 소녀와 그의 친구 라우진, 그리고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떠나 노인 울라에서 눈먼 소녀와 만난 소녀, 그리고 집을 떠나 병에 걸린 엄마를 둔 소녀와 자매가 되는 소녀, 기억을 잃고 전학생으로 학교로 찾아가는 소녀 김길라와 꿈에서 깨어난 여선생 김길라,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장례식을 찾아가는 손녀인 소녀.

 

 참 어렵다. 어느 한 이야기도 쉬운 이야기가 없었다. 그저 뒤집어지고 또다시 뒤집어진다. 현실과 꿈, 그리고 환상이 서로가 서로를 타고 기어올라 무언가의형태를 만들어내고 나는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계속 들여다보고 또는 더듬어보지만 그의 한자락도 명확히 알지못한 채로 또다시 다음장으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다달랐을때 무언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제목으로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없다. '나', 그리고 소녀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마술사가 알려준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간다는 악령 이야기로 소녀들은 남장을 하고 일곱살까지는 남자애지만 이후에는 여자애가 된다. 그리고, 현실과 유리된 망상의 꿈을 꾼다. 그런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와 <노인 울라에서>, 그리고 <1979>와 <뱀과 물>이 가장 묵직하게 마음에 가라앉는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와 <노인 울라에서>는 서로 연결된다. 화형당한 소녀 '눈 아이'를 읽던 나, '눈 아이'는 유원지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으러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향한다. 이후 어머니를 찾아다니는 눈먼소녀 '눈 아이'와 아버지를 찾기위에 스키타이족의 무덤에서 노인 울라까지 도달한 '눈 아이'는 노인 울라에서 만난다. 그들이 사령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눈먼소녀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사령관이 돌아온 날 밤에는 거의 '나'의 어머니처럼도 보일정도로 완연한 성숙의 모습이다. 그리고 마지막 눈먼소녀가 처형대에서 눈먼소녀의 죽음을 보면서 두 사람, 세 사람의 '눈 아이'는 서로 완연히 겹쳐진다.  나쁜 여왕이 어린 여자아이의 눈에 아네모네즙을 짜넣어 눈멀게 한다음 젖 짜는 소녀로 키우기 때문에 일곱살 생일까지 사내아이처럼 살아가는 소녀. 일곱살이 지나면 여자아이로 돌아가는 소녀. 살아있는 '눈 아이'는 아버지가 읽어주었던 책의 '눈 아이'처럼 처형당해 죽은 '눈 아이'의 떨어진 붉은 리본을 주워 머리에 묶은 뒤 그곳에서 떠난다. 동시에 머릿속에 배경처럼 울리는 아버지의 말처럼, 그리고 눈먼 소녀가 보여준 것과 같은,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의 '눈 아이'는 더이상 향유할 수 없는 미래의, 그리고 미지의 여자아이로서의 삶으로 향한다. '눈 아이'는 나머지 두 '눈 아이' 가 맺은 결말과 달리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다른 결말로 나아갈 것이다.


 <뱀과 물>은 위의 경우와 또 다르다. <뱀과 물>의 여교사와 전학생이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한명으로 겹쳐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여교사는 그들과 달리 이미 성장한 어른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그 성장은 불완전하다. 기억을 잃은 전학생 '김길라'는 언덕길과 오두막집을 지나쳐 그림자같이 걸어 학교의 여선생 '김길라'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한채 그저 남은 자취를 더듬는다. 때문에 세 명의 '눈 아이'들과 달리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소녀가 떠날 때까지 여교사는 깨어나지 못한채 '뱀과 물'의 꿈 속에서 괴로움의 근원, '황소 마스크' 아래의 맨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녀는 끝없이 회피하며 그를 외면하기위해 끔찍한 일도 서슴없이 하려 한다. 악몽에서 깨어난 후에도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전학생 '김길라', 그리고 늙은 '길길라'와 마주하는 여선생 '김길라'의 자아는 분열되고 엉망으로 뒤엉켜 결국 끊어진 수화기 앞에서 방황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덮어둔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깨어지고 분열된 자아의 끝에는 나아갈 길이 없다. <1979>도 마찬가지다. <1979>에서 교사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인물로 가끔 남동생과 전화를 하며 최근에 별장을 사서 반 학생들과 나들이를 간다. 교사는 12살이지만 큰 키와 성숙한 몸으로 성인여성으로 오인받는 키큰소녀가 눈에 걸려 함께 가려하면서 또다른 반 학생이자 자신이 남자아이라고 생각했더 '라우진'을 알게된다. 그리고 두 사람을 쫒다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도달하게 된다. 입안을 파고드는 사탕의 단맛, 그리고 모든 것이 깨어진후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혼선된 목소리는 교사가 키큰소녀이며 라우진이고, 가족들이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과거형으로 부르는 남동생마저도 교사 그 자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도 결국 자신의 자아를 결속시키진 못한 채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그들은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오직 그뿐인 극이다. 고도의 의미는 그 누구도 모르기에 고도는 매번 새롭게 느껴지고 또 다르게 느껴진다. 각각 고도를 빵이라거나 희망이라거나 신이라고 해석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는 고도다. <뱀과 물>도 마찬가지다. 소녀들의 이야기는 꿈처럼도 느껴지고 망상이나 환상 같기도 하다. 혹은 그저 익숙한 우리의 현실일뿐일 수도 있다. <뱀과 물>은 보호받지 못한 소녀들의 이야기로서 표지의 그림처럼 어둡고 흐린 경계 사이로 소녀들은 불분명한 형태로서 부조리한 현실과 망상을 드나든다.

 

'어린시절은 망상이예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어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p

 

  '아이들은 보호받으며 자란다.'라는 일반의 믿음이 망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보호자가 없는 현실에서 어린아이들의 삶이란 존재할 수 없이 고된 시련과 수행을 거쳐가는 방패없는 삶이란 것을. 소설 속 소녀들은  보호자의 부재 속에서 무수한 위협을 당한다. 처형당하기도 하며, 희롱과 추행을 당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결국 미친년이 되기도 하고 교사나 여선생처럼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채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젠가 불완전한 소녀들은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훌륭한 우체국 직원이 될 수 있을수도 있다. 혹은 승려가. 그 앞에는 알 수 없는  많은 직업과 생애가, 아이의 발 밑에 여러 갈래의 삶의 작대기로서 그여져 있을테니까. 부디 '눈 아이'의 끝이 갈 곳을, 나아갈 곳을 잃은 '김길라'와 같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김길라'의 삶도 그녀를 헤집는 뱀과 물의 악몽과 끊어진 수화기가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다. 어쩌면 내 감상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과는 동떨어진 '오독'에 불과할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 소설의 음습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글귀가. '꿈은 직관의 일종', 그 형태없는 직관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