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적는데 가슴이 저려온다. "이제 곧" 이라는 뜻의 <any day now>...이제 곧 (갈께) 내진 좀 있다(너를 데리러 갈거야.)라는 말이 뒤에 생략되어 있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포스터 뒷모습만으로도 꽤나 심상치않아 보이는 세 사람. 그들은 게이 커플에 다운증후군 아이란 흔히 보기 힘든 조합이다. 혈연이 아닌 그들이 어떻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는지 사연을 들어보면 이렇다. 게이 클럽에서 여장 가수로 살아가고 있는 루디는 옆집에 사는 아이 마르코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다운 증후군인 그가 마약 중독자인 엄마에게 방치되다시피 양육되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싸가지 없는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모성은 있어주길 바라건만, 어떻게 이 여잔 그것도 없어! 마음씨 고은 루디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남의 아이를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냥 모른척 하고 넘어가던 어느날, 마르코의 엄마가 마약 소지죄로 감옥으로 잡혀 들어가게 된다.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마르코를 거둬 들이게 된 루디는 연민으로 마음이 짠해진다. 마르코를 자신이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던 중 마르코는 보육 시설로 끌려 가고, 루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시설에서 잘 지내길 바라는 것 뿐이다. 속이 상한 루디는 묵묵히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마르코를 길에서 보게 된다. 집에 가겠다고 무작정 시설을 나와 걷고 있다는 마르코를 집으로 데리고 온 루디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자신이 돌보려 하지만 열 네살이나 먹은 다운 증후군 아이를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루디가 키운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 그들 앞엔 처음 가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연인이자 변호사 폴의 도움으로 임시 양육권을 얻게 된 루디는 기쁘고 기꺼이 마르코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지만, 때는 1979년 캘리포니아, 루디와 폴이 게이 커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행복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맡게 되는데...

폴이 묻는다. 쉽지 않을텐데 이 아이를 맡을 생각이냐고. 이에 루디는 대답한다. 다운 증후군인 것도 엄마가 마약 중독자인것도 이 아이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고. 해피엔딩과 도넛을 좋아하는 이 아이에게 그가 요구하지 않는 더이상의 짐을 올려주긴 싫다고 말이다. 그렇게 사려깊은 선량한 어른들이 나와서 흐믓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영화. 다만 그들의 선한 마음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서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하지만 과연 지금이라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뉘앙스상, 만약 게이에 대한 편견만 없었더라면 ...이라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나던데, 법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그런 편견이 없었다고 해도 결론이 바뀌긴 힘들었을 거란 것이다. 그러니까, 친부모에게서 양육권을 빼앗는다는건 결코 쉽지 않다. 과연 누가 잘 알 수 있겠는가.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법이라는 애매한 테두리내에선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섬세한 조율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길 바라고, 왜 그러지 못하냐고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게 상황에 따라 갖가지 조합과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 제대로 파악한다는게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해서 어떻게든 결론이 바뀔 수 없었겠구나 싶으면서, 그렇다면 결국 마르코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 뿐일까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해피 엔딩을 좋아하는 그 소년에게 다른 결말을 안겨줄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어서 도래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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