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반 혼란스러운 전개를 무시한 채 쭉 읽게 되면 마지막에 가서 보상을 받게 되는 작품. 분명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단점들이 널려 있음에도--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건 아니고, 초반 전개가 눈에 거슬리는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하게 되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추리 소설에선 보기 힘든 감동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읽을때마다 모두 합해 결론은 완벽하다고 점수를 매기게 되는건 루이즈 페니만의 장기인 듯 싶다. 요즘 나오는 추리 소설들 가운데서 군계일학이라 할만한 작품으로 , 묵직한 감동마저 선사하던 흔치 않은 책이다. 올해가 다 가진 않았지만 올해의 책으로 탑 텐 안에는 넉근히 들어가지 않겠는가 미리 가정하고 있다. 이변이 없는한 탑 파이브 안에 들어갈지도...


내용은 마을에서 천사라고 불리는 아줌마가 강령회 도중 사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원래 심장이 안 좋았던 사람이라 무서워서 심장 마비로 사망한거라 짐작하던 마을 사람들은 사망 원인이 독살로 밝혀지자 발칵 뒤집어 진다.  가마슈 경감이 부하와 함께 조용히 사건을 밝히고 다니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 역시 누가 과연 범인인가를 두고 촉각을 곧두 세우게 되는데 과연 범인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스러운, 살인과는 가장 거리가 먼 마을 같은 산골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과연 천사라고 불리는 그녀가 살해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살해한 범인은?


이젠 거의 믿고 보는 루이즈 페니가 되겠다. 위에도 썼지만 요즘 왠만한 추리 소설은 다 손에 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던 작품. 추리 소설에서는 흔하게 보기 힘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어 좋다. 살인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도 재미도 있지만 그보단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작가의 통찰력이 만만찮으니 말이다. 루이즈 페니...처음엔 그냥 그저 그런 추리 소설 작가인줄 알았는데 그녀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작가의 재능이 심상찮다 이거지. 걸출한 작가 한 명의 탄생을 보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재능과 통찰력에 찬사를...


★★★☆☆


아~~ 아쉽다. 별 네 개는 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지 싶어서 말이다. 북극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 더군다나 작가가 북극을 이리저리 탐험하고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서, 마치 북극에 내가 간듯 그렇게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북극으로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북극을 그렇게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서, 북극을 굉장히 재밌는 곳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합격점이다. 안타까운점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전개가 지루하게 늘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책은 그저 좀 지루하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서도...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중반을 넘어서서 지루해지면 곤란하단 것이지. 그런 면에서 위에 언급한 <가장 잔인한 달>은 그야말로 특이한 책이다. 초반의 횡설수설을 뒤로 가면서 멋지게 역전했으니 말이다. 영화나 책이나 음악이나 하여간...완벽함이란 무엇일까? 결국 진심이 무엇인지, 그게 중요한게 아닐까 싶다. 진심이 훌륭하다면 약간의 묘사 부족이나 표현력의 미숙함 정도는 얼마든지 커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를 사로잡은 가장 궁극의 것은 < 진심>이나 <생각> 이라는 것이 아닐런지...다른 말로 좋은 작가는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두고 두고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

  

역시나 빌 브라이슨이구만 하고 감탄을 하고 만 작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1927년만 쳤더니 이 책이 나온다. 왜냐면 그것이 이 책의 주요 중심점이기 때문이다. 내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데, 빌 브라이슨은 저택에 가두고 글만 쓰게 하고 싶다고. 아마도 어떤 주제를 던져 줘도 그는 잘 써 낼 것이라고 말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책이다. 도대체 미국의 1927년에 뭐가 있다고 책 한 권에 써 낸단 말이냐? 싶겠지만서도, 빌 브라이슨에게 갖다 주면 훌륭한 책이 되어 나온다니까? 그러게 내가 아무 작가에게나 미저리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다 그만하니까 나서는 것이지. 하여간 빌 브라이슨이라면 나는 미저리의 주인공이 기꺼이 하러 나설 용의가 충분하다 . 물론 종종 터무니 없는 주제를 가지고 너무도 성실하게 글을 쓰는 바람에 읽는 독자도, 번역하는 역자도 학을 떼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서도, 그래도 이 정도의 퀄리티를 결국 만들어내는 작가가 어디 흔하던가. 이 정도면 무조건 존경해 마지않아 하는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내용은 미국의 전성기를 막 구현해내고 있던 특별한 한 해 1927년을 글로 재현내 낸 것이다. 그 해에는 베이비 루스와 루 게릭의 홈런 경쟁과 최초 대서향 횡단으로 나라의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의 해였다. 야구와 항공사를 중심으로, 그리고 소소한 뒷 담화들과 함께 빌 브라이슨은 1927년을 우리 앞에 생생하게 그려낸다. 오래전 미국의 이야기임에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 특히나 야구를 어찌나 맛깔나게 묘사하던지, 마치 내가 그 해의 야구를 직접 관람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는데, 빌 브라이슨의 특별한 재능이 과연 어디서 내려온 것인가 라는 점. 이렇게 특별한 재능이 홀로 발현될 리는 없고, 그렇다고 그의 이력을 보면 그다지 특별한 구석은 없고 말이다. 그래서 난 늘 그의 재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생각이 났던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 못지 않은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던 스포츠 기자였다는 사실이. 부전자전이라고, 이 책을 읽게 되면 누구보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자랑스러워 할 듯...역시나 내 아들이야 하면서 말이다.


★★☆☆☆


만약 이 책을 < 나 소시오패스>를 읽기 전에 읽었더라면 분명 좋은 점수를 주었을 터인데...안타깝게도 이미 그 책을 읽은 뒤에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책을 먼저 읽었다는 이유로 점수가 확 깍인 책. 필 맥그로의 <라이프 코드>다.


내가 위에 쓴 말을 한 이유는 바로 이 책이 소시오패스를 조심하라는 취지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 소시오패스>라는 책에서도 말한 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은 소시오패스를 짐작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당사자가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그들의 성향이나 충동을 짐작만 할뿐, 알아차릴 수는 없다고 말이다. 심리학의 대가는 아니라도, 심리 상담의 내놓으라 하는 전문가인 필 맥그로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소시오패스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그간 자신이 만나왔던 가해자 목록을 적어 보면서 그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곤 유레카를 외친 것이지...아, 이 사람들에겐 이런 습성들이 있구나, 하니 우리 선량한 보통 사람들은 조심해야 되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그가 60년의 세월동안 경험을 통해 어렴풋이 알아챈 소시오패스에 대한 데이타가 실은 소시오패스 자신의 고백으로 이미 들통이 난 정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알겠는가? 소시오패스가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짐작해서 때려 맞추기 힘든 문제라는 것을. 심리 상담에 모든 것을 걸고 60평생을 살아온 필이 유레카를 외칠 정도로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소시오패스 한 사람의 30년에 걸친 고백으로 그새 한물간 것이 되고 마니 말이다. 결론은 그래서 우리는 소시오패스를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고, 그저 잘 피해 가기만을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 소시오패스>는 그런 면에서 내게 참 유용한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 난 더이상 아니, 어떻게 인간이? 라는 말을 하면서 머리를 썩히지 않는다. 그저 아, 그 사람은 소시오패스겠군! 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되니 말이다. 설명의 명확성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 명확함을 선호하시는 분은 이 책보단 <나 소시오패스>를 읽어 보시길.



 
 
 




엄마가 죽은 뒤 20년, 사라는 가족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 소문의 진위를 알아보기로 한다. 그건 바로 사라가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농담에 대한 것. 도대체 어떤 가족이길래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함부로 하나 싶겠지만서도, 사라의 엄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설마! 와 역시~~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신빙성 높은 이야기였다. 다만 정작 당사자인 사라는 어린 시절 엄마를 잃었기에 어느것이 진실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일 뿐. 해서 어른이 되고 커리어면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사라는 드디어 용기를 내서 자신이 늘 궁금해하던 문제에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과연 그녀는 아버지의 친딸이 맞을까. 그런 소문을 무성하게 뿌리고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린 그녀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사라는 엄마가 죽기전 엄마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자신이 궁금했던 점을 물어 보기로 한다. 그녀가 그녀의 후손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가.

끔찍한 농담이 사실로 밝혀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의문에 최대한 정직하고 비교적 우아하게 답을 내놓고 있던 감독의 자전적 다큐다. 처음엔 놀랍도록 용기있는 한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보단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보답을 나름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던 작품이 아니었는가 싶더라. 아니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라고 보는 내내 꺼림칙하더니만, 마지막에 가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과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키운 정이냐 핏줄이냐를 저울질 하면서 정답은 단 하나라고 못박아 대답하길 좋아하지만서도, 어쩌면 거기에 대한 답은 모든 경우에 따라 다 다른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작품속엔 그 답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내어놓은 딸이 있고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 무자비할 정도로 솔직하게 대답할 것 같은 작가가, 자신의 부모에 대한 남부끄러운 사생활을 끄집어 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서, 최대한 보기 좋게,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그려내준 점이 참 대단하다 싶다. 부모기에 이해는 하려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감독으로써의 객관적인 시선 역시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감추고 싶은 내 가족의 치부와 모든걸 테이블에 올려내어 보여줘야 하는 감독으로써의 시각을 비교적 충돌없이 잘 엮어냈지 싶다. 가장 재밌고 흥미로웠던 장면은, 엄마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인터뷰 하면서 교묘하게 자신은 어떻게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지 드러내지 않던 감독이 맨 마지막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어찌나 깜찍하던지...박장대소 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고인이라는 이유로, 점잖은 성품이라서, 남은 것이 그녀뿐이라서, 엄마기 때문에, 같은 여자 입장에서,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등 기타 감상적인 이유를 달아 엄마에게 하고픈 말을 못하는 것 같던데, 그 말을 조용히 들으면서 모두에게 동조하는 것 같던 감독이 실은 그녀만의 통찰력으로 엄마를 파악하고 있었더라니...그 엄마에 그 딸, 음흉한 엄마에 못지 않은 발칙한 딸이지 싶었다. 생전에 거칠것 없이 기세등등하게 사셨을 듯한 엄마도 어쩌면 딸에게만큼은 어쩌지 못하셨을지도... 하여간 감독의 작가로써의 역량을 짐작하게 하던 탁월한 피날레던데, 그 장면 때문에라도 난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듯 싶다. 그녀가 이젠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들려줄 자신만의 훌륭한 전설을 만들어내길...




 
 
 




제목을 적는데 가슴이 저려온다. "이제 곧" 이라는 뜻의 <any day now>...이제 곧 (갈께) 내진 좀 있다(너를 데리러 갈거야.)라는 말이 뒤에 생략되어 있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포스터 뒷모습만으로도 꽤나 심상치않아 보이는 세 사람. 그들은 게이 커플에 다운증후군 아이란 흔히 보기 힘든 조합이다. 혈연이 아닌 그들이 어떻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는지 사연을 들어보면 이렇다. 게이 클럽에서 여장 가수로 살아가고 있는 루디는 옆집에 사는 아이 마르코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다운 증후군인 그가 마약 중독자인 엄마에게 방치되다시피 양육되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싸가지 없는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모성은 있어주길 바라건만, 어떻게 이 여잔 그것도 없어! 마음씨 고은 루디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남의 아이를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냥 모른척 하고 넘어가던 어느날, 마르코의 엄마가 마약 소지죄로 감옥으로 잡혀 들어가게 된다.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마르코를 거둬 들이게 된 루디는 연민으로 마음이 짠해진다. 마르코를 자신이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던 중 마르코는 보육 시설로 끌려 가고, 루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시설에서 잘 지내길 바라는 것 뿐이다. 속이 상한 루디는 묵묵히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마르코를 길에서 보게 된다. 집에 가겠다고 무작정 시설을 나와 걷고 있다는 마르코를 집으로 데리고 온 루디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자신이 돌보려 하지만 열 네살이나 먹은 다운 증후군 아이를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루디가 키운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 그들 앞엔 처음 가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연인이자 변호사 폴의 도움으로 임시 양육권을 얻게 된 루디는 기쁘고 기꺼이 마르코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지만, 때는 1979년 캘리포니아, 루디와 폴이 게이 커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들의 행복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맡게 되는데...

폴이 묻는다. 쉽지 않을텐데 이 아이를 맡을 생각이냐고. 이에 루디는 대답한다. 다운 증후군인 것도 엄마가 마약 중독자인것도 이 아이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고. 해피엔딩과 도넛을 좋아하는 이 아이에게 그가 요구하지 않는 더이상의 짐을 올려주긴 싫다고 말이다. 그렇게 사려깊은 선량한 어른들이 나와서 흐믓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영화. 다만 그들의 선한 마음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서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하지만 과연 지금이라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뉘앙스상, 만약 게이에 대한 편견만 없었더라면 ...이라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 나던데, 법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그런 편견이 없었다고 해도 결론이 바뀌긴 힘들었을 거란 것이다. 그러니까, 친부모에게서 양육권을 빼앗는다는건 결코 쉽지 않다. 과연 누가 잘 알 수 있겠는가.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법이라는 애매한 테두리내에선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섬세한 조율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길 바라고, 왜 그러지 못하냐고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게 상황에 따라 갖가지 조합과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 제대로 파악한다는게 인간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해서 어떻게든 결론이 바뀔 수 없었겠구나 싶으면서, 그렇다면 결국 마르코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 뿐일까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해피 엔딩을 좋아하는 그 소년에게 다른 결말을 안겨줄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어서 도래하기를 바라본다.




 
 
 




                                            ★★★☆☆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 만화 영화의 원작이 100여년간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꿀벌 마야의 모험" 이라고 하던데, 나는 도통 그런 책을 읽은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그간 살아오면서 왠만한 책들은 다 읽었다고, 읽진 않았다고 해도 제목 정도는 들어봤다고 자신하던 내게 나도 모르는 인기 아동 도서가 있었다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 기간이 100년이란다.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100년...나온지가 그 정도 됐다면 오다가다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데도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깜깜하다. 혹시나 어렸을 적 봤는데도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제목이랑 마야의 모습이 어딘선가 한번은 본 것 같애! 라면서 유도 심문에 기억 날조도 해봤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당최 기억에 없다. 마야건 꿀벌이건 간에 말이다. 더군다나 충격적인건 그간 이 동화가 EBS에서 만화로도 방영을 해주었다고 하더라는 것~! 도대체 어떻게 한번도 내 레이다에 걸리지 않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늘 ebs를 눈여겨 본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아마도 빠진 기간이 있었는가 보다. 그렇다보니 맨처음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했을때 몇 명의 엄마들이, 아니 그 마야 말이여요? 제 아이가 그거 엄청 좋아했는데...라면서 반색하셨을때 난 정말로 당황했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나 혼자 모를때의 그 황당함과 소외감을 아시는지. 딱 그랬다니까. 이건 아는 척을 할 수도 없고. 난 분명 난생 처음 본 동화책인데, 그게 100년이나 됐고, 유명하다니... 그래서 애니로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건 감이 잡히지 않는거다. 이거 믿고 봐도 되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기대 된다고 흥분하시는데, 정말로 기대해도 좋은 것인가요? 그런 의문이 머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왔다. 

그래서 결론은 ? 일단 합격점이다. 독일 애니라고 해서 약간의 우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아이를 위해서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우려가 무색하게시리 괜찮았다. 색상도 선명하고, 마야를 비롯한 곤충들은 귀엽기 짝이 없고, 갖가지 곤충들의 이야기를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아니, 충실하게 그려준 것도 마음에 든다. 꿀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본다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서 특히나 그랬다. 적어도 꿀벌이나 개미등 곤충이 어떤 사회 구조를 가지고 지탱해 가는가 라는걸 단박에 짐작하게 해줘서 말이다. 각자의 할 일이 태어나기전부터 정해져 있어 개개인의 개성이라는 것이 몰가치하고 불필요한 꿀벌 사회에서 마야는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가. 어린 탓에 늘 사고만 치고 다니는 아이들 입장에선 마야야말로 자신들과 동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존재였지 않는가 한다. 개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탓에 결국 꿀벌 사회에서 쫓겨나고 그것도 모자라 꿀벌 왕국을 지키려 했다가 2인자의 간계로 감옥에 갇히게 된 마야, 어린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원성과 응원을 뒤로한채 과연 마야는 꿀벌 왕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이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인데, 흥미진진하게 볼만한 내용이었지 않는가 한다. 그외에 다양한 곤충들이 등장해 아이들의 호기심과 웃음을 유발해주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볼만한 애니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거기에 곤충 사회를 재밌고 이해하기 쉽게 그려내준 점도 좋았고 말이다.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보기엔 괜찮은 영화였지 않는가 하면서...


<이 영화의 최고 유머 담당인 덤앤 더머 개미들...함께 본 조카 역시 이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아이들에겐 역시나 이런 단순한 바보 캐릭터가 최고인가보다. 시사회 전에 꿀벌 박사님이 오셔서 꿀벌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아이들에겐 귀한 시간이었을 듯 싶다. 물론 " 왜 영화는 안 틀어주는 거여요? 언제 틀어줄 거여요?" 라며 주리를 틀고 있던 귀여운 유아들은 빼고...>




 
 
 







임신한 아내 낙을 두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떠난 피막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집으로 돌아온다. 살아온 것만해도 감지덕지인데, 거기에 친구 네명까지 얻어 돌아온 그는 친구들에게 머물곳이 생길때까지 자신의 집에 있으라고 한다. 피막의 청에 쉬어가자는 생각으로 머물게 된 친구 넷은 피막이 부러워 어쩔 줄은 모른다. 아름다운 아내에 귀여운 아들까지...그들이 원하는 것 모두를 가진 친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부러움도 잠시, 친구들은 피막의 아내 낙에게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다. 이상한 것은 낙만이 아니라서, 동네 사람들 역시 피막을 슬슬 피하고, 그 들의 호듭갑에 당황한 친구들은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피막 자신은 이상한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피막의 말대로 낙의 오두막엔 아무 이상 없는 것일까? 친구들이 과민반응하는 것일 뿐일까? 상황이 점차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피막, 과연 친구들은 어느것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태국에서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라고 해서 호기심에 보게 된 영화. 보고나니 미국 사람들이 명량을 보게 되면 이런 감정을 갖게 될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관객수과 작품성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준 작품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태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뻥 뻥 뚫린 듯한 허접한 시나리오와 눈뜨고 봐주기 힘든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 속에서도,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진심이 담겨져 있다면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는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뇌리에 더 오래 남는 것이 그 어떤 진심이기 때문이겠지. 하여간 작품성의 질을 따진다면 천만 관객이라는 것이 허세처럼 느껴지지만서도, 그럼에도 삼류라고 폄하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는건 사실이다. 태국은 영화를 어떻게 찍나 궁금하신 분은 보시길. 그나저나 태국 사람들은 왜 멀쩡한 이를 까맣게 염색하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미관상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던데... 우리나라 상투나 쪽 같은 개념일까? 보면서 영 거슬리던데, 적어도 요즘 사람들이 일부러 그러고 다니진 않겠지? 만약 그렇다면 영 적응하기 힘들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