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목소리 - 어느 나무의 회상록
카롤 잘베르그 지음, 하정희 옮김 / 파란시간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집엔 나무가 많다. 어느샌가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하나 둘 사 모으다보니 베란다가 가득찰 지경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나무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저 물만 주면 쑥쑥 크는 나무들이 예뻐서이기도 하지만, 시든 잎은 없는지 통풍은 잘 되는지 등을 보살피며 나누는 교감 때문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조금 나쁜지...등을 저절로 알게 된다. 조금 우울한 날에 베란다에 나가 나무들을 들여다보면 차분해지고, 편안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집 나무들도 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까? <<초록 목소리>>를 읽고나니 자신들의 감정과 불평들을 내게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감정들과 내 고민들을 모두 들어서 잘 기억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해 우리집 나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초록 목소리>>는 2천 년을 넘게 살아온 어느 한 나무의 회상록이다. 나무는 오랜동안 인간들 옆에서 그들을 목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무 자신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무와 함께 한 기억을 가진 인간들은 위안을 얻고 추억을 함께 한다.

나무가 <무릎 꿇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던 그때에는>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던 한 가족이 어느 순간 "탐욕"과 "욕심"에 물든 가장에 의해 점점 불행해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보람 없이 첫 열매를 맺었던 시절>에는 한 세대를 앞서가는 한 천재를 지켜보고 그 열매로 천재가 첫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함께 하기도 한다.(마치 뉴튼의 이야기같다) 나무는 마녀 사냥처럼 광분하는 한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사랑하는 한 커플이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고, 한 시인의 문학적 고뇌와 그의 젊은 천재 연인의 사랑과 헤어짐을 지켜보기도 한다(이 이야기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가 아닌가). 전쟁으로 영혼이 죽어버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어느 군인의 최후를 함께 하기도 하고,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을 하는 한 아버지의 절망을, 홀로코스트로 인해 삶을 저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희망을 지켜본다. 인간들은 급기야 너무나 삭막한 이상한 문명을 만들고 그때에도 나무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나무는 알고 있다. 어리석은 짓만 일삼는 인간들이긴 해도 그 속에서 희망의 불씨가 살아있음을.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음악이 있고 열정이 있기에 인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처음에 저는 제 운명이 두 분 운명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요, 전 석방된 그날부터 시작해서 삶이 가면 갈수록 더 감미롭게 느껴져요."... 130p
"비록 당장의 배부름과 잠자리, 그리고 다가올 새벽을 무사히 넘기는 것에 급급해야 할 정도로 무력해졌을지언정, 인간들은 영원히 일어서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넘어지는 그런 피조물로 남으리라."...148p

나무의 사고를 따라 읽다보면 한 문장 한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치 "시의 언어" 같다. 그래서인지 <<초록 목소리>>가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표현하는 나무와 인간들이 함께한 세월의 무게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내 나무들"도 나를 기억해줄까. 내가 나무들을 보살피며 나도 모르게 뿜어냈던 고민과 후회의 오로라를... 내 나무들이 굳이 듣지 않고도 모두 들어주고 기억해줄까. <<초록 목소리>>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