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비주얼 쇼크였다. 우리의 뇌에 각인된 단 한 장의 이미지, 버섯구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떨어진 지름3m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전 세계인에게 인류멸망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안겨줬다. 그건, 두발짐승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최초의 인류멸망에 대한 시각적 경고이자 체험이었다. 핵폭탄의 발명은 신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인간 스스로 세계의 종말을 컨트롤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한 기계가 상공 580m 높이에서 폭발하는 순간, 어쩌면 인간은 신을 저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류멸망 프로젝트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 동시에 이 비주얼 쇼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유전자변이를 일으켰다. 정확히는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대재앙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죽기 전에 먼저 지옥을 거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한 장의 이미지를 근거로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한 지옥도를 펼쳐놓았다. 죽음 이전, 멸망 이후의 세계 디스토피아는 그렇게 구체성을 얻어갔다.
미래가 우리의 예감대로 지옥이라면, 현재는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삶이란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데도 유토피아인가? 이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신의 손을 자처한, 살인마 Jack the Ripper를 음성학적으로 은유한 Jack D Ripper(배째는 사람인 잭) 장군이 수소폭탄 버튼을 누르기 전에 즐기는 마지막 파티로 표현했다. 큐브릭의 영화대로 지금의 삶이 멸망을 향한 우스꽝스러운 마지막 파티라면 어딘가에 잭 디 리퍼 장군 같은 인간도 있다는 소리다. 아니, 우리는 안다. 그런 이가 실재함을. 때문에 우리는 삶이란 샴페인을 터트리고 파티를 아직까지는 즐길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Vera Lynn의 ‘We'll Meet Again’이 흘러나오고 폭탄은 터졌다. 그렇다. 파티는 곧 끝날 것이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말이다. 파티의 끝, 세계의 종말, 마치 큐브릭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줄리애나 배곳의 소설『퓨어』(전2권)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멸망 이후의 세계, 그것은 또 다른 비주얼 쇼크를 예고한다.
파티의 끝, 세계의 종말…, 그 이후
대폭발 이후 지구는 지옥으로 변했다. 선택받은 자는 대폭발 직전 ‘돔’ 안으로 피신했지만, 선택받지 못한 자는 죽거나 괴물이 됐다. 줄리애나 배곳의 소설이 여타의 디스토피아 문학과 다른 점은 지옥도의 풍경을 폐허가 된 지구에서 찾기보다 괴물로 변해버린 인간의 신체변이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질문명 숭배의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키듯, 인간의 신체는 대폭발 당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무언가와 뒤엉키고 녹아내렸다.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 조각, 콘크리트, 플라스틱, 유리 같은 물질문명과 신체가 융합됐다. 나머지는 인간, 동물과 융합됐고 극소수는 땅과 합쳐지기도 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까지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식물이 자라났고 전과는 다른 종의 동물이 등장했다. 소설의 여주인공인 16살의 소녀 프레시아에겐 인형머리가 그녀의 한쪽 팔을 대신한다. 대폭발 당시 껴안고 있던 플라스틱 인형이 신체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인간의 신체변형 혹은 신체왜곡은 문학은 물론 예술분야와 영화에서 꾸준히 이용된 소재였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젠더적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포스트 유기체의 형태인 트랜스휴먼(transhuman)을 제시한 이래, 인간과 기계(물질)의 공생은 사이버펑크 문화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현실화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줄리애나 배곳은 이것을 한 차원 더 발전시켜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궁극적으로 실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무언가와 융합한 새로운 종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소설은 ‘돔’의 소년 패트리지와 ‘바깥’의 소녀 프레시아, 그리고 등이 새와 합체된 소년 브래드웰, 어린 동생과 몸이 합체된 소년 엘 캐피턴이 대폭발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 것이다. 돔 안의 소년 패트리지는 인간이지 않으냐고? 대폭발 직전 선택 받은 자들은 미리 준비한 돔 안으로 피신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신체왜곡을 겪지 않았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이런 돔 사람들을 ‘퓨어’(pure)라고 부른다. 그들의 변형되지 않은 육체는 새로운 종으로 다시 태어난 바깥인들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처럼 순수함 그 자체로 비쳤다. 더욱이 돔 사람들, 즉 퓨어들조차 바깥인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 ‘다르다’의 의미는 퓨어 스스로, 인간이되 인간 이상의 존재로 자신들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바깥인들의 경외심까지 더해져 퓨어는 신의 영역에 들어선다. 인간에 의해 최후의 심판 기계가 발명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신의 자리를 탐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대폭발은 패트리지의 아버지처럼 스스로 신이 되고자 욕망한 이들과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 신이 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자 관문이었다. 결국 노아의 방주의 미래적 재현이었던 돔은 신들이 모여 사는 올림포스의 산이 된 것이다. 때문에 엄마를 찾아 돔에서 탈출한 퓨어 소년 패트리지는 바깥인들에게 메시아 또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로 비쳐진다. 왜곡되지 않은 소년의 육체성은 무법천지가 된 바깥세상에 사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표시나 다름없다. 이렇듯 줄리애나 배곳은 신화적 이미지의 착용과 성서의 재현을 통해 인류멸망의 실질적 의미와 이미지를 소설 안에서 재현한다. 지구라는 별에서 인간은 사라졌다. 대신 거기에는 신이 된 퓨어와 괴물의 모습을 한 바깥인들만 있다. 버섯구름이 예견한 또 다른 비주얼 쇼크란 이런 것이다.
인간이 사라진 시대, 인간성의 회복
프레시아는 선풍기 날개와 융합된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다. 할아버지에게 듣는 대폭발 이전의 세상풍경은 현실의 절망을 상상 속에서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이것이 잿빛하늘, 재로 뒤덮인 무법천지 세상에서 바깥인들이 그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는 방법이다. 소설에서 추억놀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속되는 과거의 반추는, 역설적으로는 바깥인들에게 (희망적)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미래가 없는 삶, 디스토피아는 희망이 거세됐을 때 완성되는 세계다. 특이한 건, 그들의 추억 속에서 대폭발 이전의 세계가 마치 유토피아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기억의 소산이지만, 괴물의 육체를 갖게 된 그들의 기억은 너무나 선택적이다. 그들의 과거이자 책을 읽는 이의 현실인 지금은 앞서 말했듯, 신의 손을 자처한 누군가가 버튼을 누르기 전에 즐기는 파티의 끝물일 수도 있다. 염세주의적 발언일 수 있으나,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자연재해, 기아와 전쟁으로 얼룩진 현시대는 휴머니즘(인간애)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깥인들의 추억놀이 안에서 지금 시대가 풍요롭고 행복하게 묘사된다. 육체의 변형보다 선택된 기억이 문제이다. 바깥인들 스스로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택된 기억은 희망을 찾기보다 추억하는 것에 불과하다.
총3부작의 1부에 해당하는 이번 소설은 모험성장소설의 얼개를 갖고 있다. 패트리지, 프레시아, 브래드웰, 이들 세 명의 주인공은 자신들의 운명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로 진실을 쫓는다. 브래드뒐은 과거를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타인과의 소통에 서툴다는 면에서 불완전하다. 패트리지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엄마를 찾아 돔을 탈출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지 못한 상태다. 프레시아 역시, 인형과 융합된 팔을 흉측하다고 여기는, 즉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상태다. 이들 세 명이 각기 다른 목적으로 여정을 함께 하면서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변화가 1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성을 느끼고, 사랑과 우정을 깨닫고, 서로를 신뢰하게 됨으로써, 이들은 퓨어와 융합인이라는 외형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공통된 정서를 갖게 된다. 바로 인간성, 정확히는 휴머니즘의 회복이다. 이는 패트리지가 엄마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파급된 감정변화이다. 미래가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프레시아와 브래드웰, 앨 캐피턴에게, 퓨어 소년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워준다. 희망이 생겼다는 것은 다른 말로 구원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제우스의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처럼 패트리지는 1부에서 희망 없는 세상에 희망이란 등불을 밝힌 것이다. 대단히 클리셰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앞으로 출간될 2,3부에서 패트리지 일행이 대폭발의 진실을 밝히고 신들의 사회 ‘돔’과 대적하려면 꺼지지 않는 희망은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기능할 게 분명하다.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인간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성의 회복은 아이러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선택된 기억 속에서 희망을 추억하는 놀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부터 희망을 찾는 순간 그들에게는 미래가 생긴 것이다. 역사는 사라지고, 미래도 없는 세상에서 패트리지 일행은 희망을 발육제 삼아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만 이런 해석이 캐릭터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게, 이 책을 읽은 이로써는 아쉽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해, 1부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비주얼 쇼크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줄리애나 배곳이 묘사한 미래의 지옥도는, 성서와 신화의 이미지를 차용해 읽는 이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한다. 이에 반해 캐릭터의 성격은 모호하다. 프레시아와 패트리지, 패트리지와 브래드웰 등, 인물간의 갈등과 화해 구도에서 설득력 있는 상황묘사가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패트리지를 사랑하는 퓨어 소녀 라이다와 동생과 융합된 엘 캐피턴이 패트리지 일행에 합류하는 과정 또한 나사 하나가 빠진 느낌이다. 그들의 모험도 우연의 연속이다. 비밀에 접근하는 미스터리적 요소가 너무 허술하다. 예를 들면, 암호코드처럼 등장한 백조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수수께끼도 안 될 정도로 유치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줄리애나 배곳의 소설은 뛰어난 묘사력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독자로서 나는, 앞으로 나올 2부『퓨즈』(2013년 출간예정)와 3부『번』(2014년 출간예정)이 기대된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강화되고 스토리가 보강된다면, 이 같은 장점은 전형에서 머물지 않고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진일보할 가능성이 많아 보여서다.
책을 덮은 후,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금의 내가 삶이란 파티를 즐기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내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커다란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쯤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나는 이렇게 뒷방 늙은이 신세처럼 세상 속에서 밀려났는데, 나라는 이가 빠진 세상은 전보다 잘 돌아갔다. 나는 그런 세상을 보며 악의를 가졌다. 그리고 바랬다. 세상이 망하기를! 하지만 나의 악의는 인류멸망 같은 대재앙을 바라는 잔혹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인간이 세상 속에 없다는 것을 누군가 뼈저리게 아프게 기억주길 바라는 마음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부재가 곧 세상의 부재처럼 느끼길 원했던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마음속에 나만의 디스토피아를 만들고 현실의 분노와 외로움을 그 속에서 폭발시키는 소심한 인간일 뿐이다. 게다가 지구가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서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음모론자도 아니고 미래를 비관하는 비관론자는 더더욱 아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지금의 나다. 어찌됐든, 나는 지금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파티를 끌 낼 마음이 없다. 아니, 파티는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