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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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묵직함과 두려움이 있는 책이다. 그렇게 망설이다 읽어야 할 상황에 처해서야 주저하며 책장을 넘겼다. 왜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해야 할까? 그런 직업이 따로 있단 말인가?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할까? 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의문 속에 책읽기는 그렇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문학을 전공한 저자답게 글이 예리하고 느린 듯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풀어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학적 통찰력은 눈에 확 들어온다.

집을 치우며 지독한 고독을 보았다면 그것은 결국, 내 관념 속의 해묵은 고독을 다시금 바라본 것이다. 이 죽음에서 고통과 절망을 보았다면, 여태껏 손 놓지 못하고 품어온 내 인생의 고통과 절망을 꺼내 이 지하의 끔찍한 상황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한 불행한 남자를 보았다면, 마치 인생의 보물인 양 부질없이 간직해온 내 과거의 불행함을 그 남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고는, 나는 결백하답시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이 지하 방에 관해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이다.(101쪽)

이 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간단했다. 쉽게 말해 자신의 직업으로 다가가는 것이지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죽음에 대한 고귀한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추측한 것은 독자의 착각이거나 섣부른 예상에 불과했다. 이것은 어쩌면 남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부담을 지워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런 질문들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어쩌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런 질문들도. ˝귀신 본 적 있으세요?˝

책에는 왜 이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저자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건 사고의 현장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일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고 이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오는 현실은 아픈 것이었다. 그가 맡아 일하는 죽음의 현장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 고독한 자들, 고립된 자들이 주인공이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죽음의 현장에서 그는 뒷그늘에 가려진 사회의 단면을 본 것이다.

혼자 죽은 채 방치되는 사건이 늘어나 일찍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고독사 선진국 일본. 그 나라의 행정가들은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어휘인 ‘고독사孤獨死’ 대신 ‘고립사孤立死’라는 표현을 공식 용어로 쓴다. 죽은 이가 처한 ‘고립’이라는 사회적 상황에 더 주목한 것이다. 고독사를 고립사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죽은 이의 고독이 솜털만큼이라도 덜해지진 않는다. 냉정히 말해서, 죽은 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 편에서 마음의 무게와 부담감을 덜어보자는 시도이다.(190쪽)

무겁게 시작한 책읽기는 중반을 지나면 어느새 저자의 따뜻한 마음에 동화된다. 그는 죽음 이후를 다루는 직업을 가졌지만 결코 죽음에 동화되거나 그 속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글과 청소를 통해 죽은 자의 마음을 다독이며 그를 위로한다. 한걸음 나아가 이웃을 염려하고 자살하려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힘쓴다.

이곳을 치우며 우연히 알게 된 당신의 이름과 출신 학교, 직장, 생년월일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그것은 당신에 대한 어떤 진실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치우면서 한 가지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이곳에 남은 자들의 마음입니다(128쪽)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지인은 결국 이 책을 포기했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경도되어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그런 제목만 눈에 들어와 책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며 오히려 저자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길 원했다. 직업관도 사회에 대한 혜안도. 함께 읽고 마음을 나누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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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다면
애덤 해즐릿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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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려다 표지에서 어색한 점을 발견했다. 영어 제목에 철자가 하나씩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제목이 ‘내가 없다면‘이니 무언가 결핍이 있는 콘셉트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나쳤다. 책을 다 읽은 뒤 가진 독서모임에서 어느 지인이 무심히 말했다. 뒤표지에 N과 O가 있다고. 표지 디자이너는 왜 이런 시도를 했을까? 나쁘진 않지만 궁금증이 밀려오는 표지를.

마음의 감기를 ‘우울증‘이라고 했던가? 전염병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지는 않지만 우울증은 주위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와 사람을 힘들 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멀스멀 내면을 갉아먹는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괴물이 되어, 사람의 내면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원 주인의 공간을 잠식해 간다. 동시에 몸 주인의 가까운 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가족에게.

<내가 없다면>은 독자들에게 단순히 우울증의 심각성만을 전하지 않는다. 연인으로서, 가족으로서 또는 한 개인으로 우울증을 가진 사람과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이점이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이다. ‘나라면 어땠을까?‘를 반복적으로 되뇌며 일게 된다. 단순히 심리적 문제를 가진 인간을 살피는 소설이 아니라 복잡다단의 인간 사회의 한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힘을 가진 글이다.

젊은 날 소중한 사랑의 불꽃을 키운 마거릿과 존. 하지만 존이 가진 정신적 문제를 접한 마거릿은 고심 끝에 사랑을 택한다. 결혼 후 이들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며 단란한 가족을 꿈꾸지만, 서서히 우울 증세가 심화되던 아빠 존의 급작스러운 자살과 마이클의 우울 증세 발현은 가족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존의 자살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남은 마이클을 위해 가족 모두 자신을 양보하며 사랑을 나눈다. 그럼에도 결국 마이클은 가족의 곁을 떠나고 만다. 이 책은 바로 이 다섯 가족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것이다.

<내가 없다면>을 읽다 보면 미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가 보인다. 또한 외부인인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미국과 영국의 구석구석은 물론 숨은 명곡들도 일러 준다. 듣도 보도 못한 지명과 노래들이 자연스레 나온다. 반면 나는 이런 점이 답답했다. 주인공들의 심리와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요소들이기는 하겠지만 그 사회를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마치 수학 공식의 나열인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선택은 건너뛰기였다. 책의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울증이나 내면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간접 경험을 하고픈 이들이라면 권한다. 단 재미를 원하는 독자는 책을 펼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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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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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있는 아빠 독자인 내게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은 그 이름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딸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 책은 이렇게 이미 객관적 읽기가 어려웠다. 첫장부터 다분히 주관적 심정으로 읽고 분석했다. 물론 마지막 장까지.

소설 속 화자인 엄마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엄마의 품을 떠나 독립했던 딸은 사회적 난관에 부딪히자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동성 애인과 함께. 성장하면서 늘 엄마의 자랑이었던 딸은 대학의 시간강사 생활을 하지만 대학의 부조리에 맞서 시위에 앞장서는 투사이기도 했다. 안정적인 이미지의 엄마에 비해 딸은 불안정하다. 반면 딸의 동성 애인은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더더욱 딸의 애인이 못마땅하다. 현재 딸이 가지지 못한 것을 지닌데다 딸의 앞길까지 막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엄마는 딸과 애인 모두가 싫다.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일한다. 그곳에서 만난 노인을 통해 엄마는 어쩌면 자신의 미래를 보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환자 젠에게 친절하고 헌신적이었는지도. 결국 자신의 집에까지 젠을 데리고 온 것은 이런 심리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엄마는 딸이 어떤 사람이길 바랐던 걸까? 그것은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딸이 꿈꾸는 것은? 엄마의 바람과 딸의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까? 책을 읽으며 딸에 집착하는 엄마가 답답했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엄마에게 의지하는 딸에게 분노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아들이고 아빠일까? 고민이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부족하고 미완성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서 의존적 삶을 시작한다. 사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은 힘들다. 아울러 부모로서 자녀와 떨어져 개별적 삶을 사는 것 역시 어렵다. 우리는 왜 그럴까? 물론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생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에 대처하자면 가족, 그중에서도 부모, 자식의 존재를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갖혀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딸에 대하여》는 요소요소에서 깊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가장 잘 드러나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족 관계), 성소수자 문제, 노인 요양 시설 문제, 이웃 관계 등. 예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들이 드러나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 이때의 불편함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그리하여 사회적 메스를 들이대야 하는 성질의 것들이기도 하다. 결국 독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해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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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8쪽)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즐기고 사는 일에 서툰 내가 더 나이 들어 몇 안되는 즐거움마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미리하는 걱정이 우습기는 하지만 늦은 밤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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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뫼비우스 그림,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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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일까?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국내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친 이 책. 내가 좋아하는 류의 책은 아니었다. 특히 사막에서의 환상 체험은 이게 뭔가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아마도 제목에서 오는 착각 때문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알고 있던 연금술사와 책 속의 연금술사는 완연히 다른 존재였다.

<연금술사>가 내게 주었던 강한 메시지는 자신의 꿈을 찾아 그 길을 찾아나서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주인공 산티아고는 아버지의 격러 속에 여행을 나섰다. 양치기로 출발하여,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로 과감히 건너가고, 이어 사막 여행을 통해 피라미드로까지 고난길을 이어간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찾고 자신의 꿈(미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 개척해 나가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책 전체를 통해 나는 이런 점에 크게 공감했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꿈을 찾도록 지원하고 격려해주는 역할까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젊은 날의 내가 읽었다면 아마도 이 책을 이렇게까지 해석하지 않았을테지만 나이 들어 읽으니 이렇게 읽혀지기도 한다. 나이와 경험이 책을 읽는 데 이렇게 영향을 준다. ㅎㅎ

확실한 것은 코엘료는 나랑 잘 안맞는다는 점이다. 그의 책을 4권 정도 읽었는지만 모두 그랬다.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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