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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 정의론 -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원칙 리더스 클래식
황경식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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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후에 겪어야 할 지적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읽은 책이다. 2학기 학부 수업 중 존 롤스의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를 공부하기 때문에 준비운동이 필요했다. 「정의론」은 교수님이 인정했을 정도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정의론에 조금 쉽게 다가가고자 고른 책이 바로 황경식 교수님이 쓴 「존 롤스 정의론」이다. 황경식 교수님은 「정의론」 번역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롤스의 철학을 깊게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이 직접 정의론 해설서를 출판하셨으니 믿고 읽어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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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수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서점가를 장악했다. 미국에서는 고작 10만 부 남짓 팔리는 정도였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유독 크게 인기를 끌면서 100만 부 이상을 돌파했다. 많은 사람은 정의를 물었다. 기득권은 자신이 가진 이익을 놓지 않으려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원한다. 하지만 금수저들의 금빛은 점점 화려해지는 데 반해 흙수저들의 운명은 가혹하기만 하다. 운동장은 기울어지고 있으며, 기득권은 법의 허점을 이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화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가 과거에 저질렀던 행위, 불법은 아니었지만 정의롭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행위가 왜 비난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부정의함에 대해 특히 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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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스승이자 ‘정의’ 문제에만 파고든 ‘단일 주제의 철학자’인 존 롤스는 다소 급진적이라고도 느낄 수 있는 정의론을 펼친다. 우리 사회는 의무의 연속이다. 우린 타인에게 물리적 심리적 부채를 갖고 있다. 그 부채는 나 자신의 지속과 발전을 요구할 권리임과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에 대한 의무로 이어진다. 만약 부채를 무시하고 개인의 지속과 발전이 사회의 그것과 평행선을 긋는다면, 개인은 사회에 의무를 다하지 않는 유아독존(唯我獨尊)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그는 합의 사항에 따르지 않고, 사회 유지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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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둔 자유방임적 사회는 자연적 운(재능)과 사회적 운(부)을 방치하여 행운아와 불운아 사이에 심연을 만들었다. 대안으로 제시된 자유주의 사회는 사회적 이익과 불이익을 조정하여, 동등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유사한 기회를 얻도록 만들었다. 이 사회는 편향된 이득을 얻는 기득권을 배제했다. 복지 사회와 유사하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평등체제는 사회적 요인만 제한하는 데 성공했지, 자연적 자질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롤스는 반문한다. 자연적 자질에서 오는 차등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로버트 노직은 나에게 주어진 능력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그것을 공유할 권리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사회가 자연적 불평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사회일 뿐이며 결과적 불평등이 초기 조건으로 주어진 불평등의 함수에 불과하다면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점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p56


여성과 남성에겐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이 차이를 근거로 남성과 여성의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현대 사회의 직업은 성별에 따른 차이(가령 근력)를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남성이 하는 일도 충분히 여성이 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회적 공간이 자연적 능력을 근거로 하여 차별과 제약이 생긴다면 그 사회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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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가 제시한 정의로운 사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정한 기회균등과 관련된 광범위한 기회 체계를 인정하고, 사회적 출발점과 자연적 자질에 있어서 어느 정도 차이와 다양성을 용납한다. 두 번째는 이 노력 이후에 비 자유방임적 방법으로 그 최종 결과를 사회 성원 중 최소 수혜자의 관점에서 재조정하는 것이다. 이 ‘민주적 평등체제’는 자연적 운과 사회적 운을 완화하고 최소 수혜자를 최우선 배려하는 사회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사회 모든 구성원이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이의 ‘공동선’을 위해 자연적 사회적 여건을 활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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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는 사유실험을 실행한다. 인간이 출신 배경, 가족 관계, 사회적 지위, 재산 상태 등 자신의 위치나 입장을 전혀 모른다는 ‘무지의 베일’ 뒤편에서 인간은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무지의 베일 때문에 재능과 능력, 인종, 젠더 등을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원초적 입장’이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을 통해 합의한 결론이 정의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내린 원칙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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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원칙: 평등한 자유의 원칙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 2원칙: 차등의 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편성되어야 한다.
a)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고
b)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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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는 결과의 평등을 말하지 않았다. 인간에겐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긍정했다. 롤스는 다양한 삶의 양식과 가치관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그 가치관을 지키면서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를 만들고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롤스는 평등이 아닌 자유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강제에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주의였다. 최대한 개인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최소 수혜자로 세울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정치에서 소외되는 약자를 신경 썼으며, 정치적 도덕을 이야기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그러나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모델을 구축하는 데 있어 롤스의 정의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롤스의 철학에 한 걸음 다가가도록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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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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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은 아렌트가 가졌던 네 편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정치 이론가로서 그는 많은 저작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개진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스토리텔링(사유가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그리고 개념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설명하는 작업)과 메타포(은유)를 한껏 활용해 글을 전개했다. 여기에 그의 난해한 텍스트가 더해져, 그의 사상을 쉽게 이해하긴 힘들다. 아렌트는 이 책에 담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풀어내고, 여기에 더해진 갖가지 오해들을 설명한다. 가령 온 유대인 지식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악의 평범성에 담긴 오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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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에요. 단순히 희생자의 규모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런 짓을 자행한 방법, 시신 훼손 등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와 관련해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에요.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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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은 그의 세계를 뒤바꿔 놓는 대사건이었다.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폭력은 거대한 심연과도 같았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앞으로도 있어선 안 될 일이 나치에 의해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나치의 가담자들은 절대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아이히만이 아무런 범행 동기도 없었던 평범한 공무원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범행을 저지른 인간을 악마로 묘사하는 것은, 그자를 평범한 인간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점에서 악마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지극히 멍청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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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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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사람들이 악의 평범성을 흔한 것으로 착각한다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은 일상적인 아이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평범성은 멍청함과 어울린다. 우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이들이 정작 타인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지 못 하는 경우도 심상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자리에 악의 평범성이 뿌리를 내린다.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자기가 결정한 일이 초래할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며 멍청함이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인물과 말하는 것은 벽돌담을 상대로 말을 거는 것과 같다. 아이히만은 이런 의미에서 멍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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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만 있어요. 그것들은 허깨비들이 하는 거짓말이에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단히 역겨운 거짓말이요. 관료제는 대량 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관련 개인이 판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금 인간이 돼요, ... 그 사람이 저는 그저 관료일 뿐이었습니다하고 말하면 판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잘 들어요.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오. 당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당신이 인간이고 당신이 어떤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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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이란 정치적 획일화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의 직위를 안전하게 지키거나 일자리를 얻으려고 나치즘에 투항한 현상을 가리킨다. 글라이히샬퉁과 더불어 사람들은 내면적 이민’, ‘어쩔 수 없음으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한다. 공적으로 나치와 협력했을지라도, 내면적 영혼, 즉 양심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외면적 저항만이 있을 뿐이다. 전체주의는 개별 인간을 소멸시켰다. 는 전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수히 많은 대중의 일원이 된다. 나는 전체 앞에선 익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법원 앞에선 다시금 인간이 된다. 그들의 양심이 어땠는지는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외면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 동기가 아닌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나치 가담자들은 처벌을 면할 수 없다. 멍청함은 죄를 덜어내는 변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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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이 명제는 아렌트 사유 개념의 핵심을 꿰뚫는다. 사유는 나와 나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사유는 타인의 처지를 고려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방향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사유는 실천적이다. 자신이 어떤 고민을 하든 행위(action)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유를 통해 나 자신과 소리 없는 대화를 진행하고,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보는 것,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이야기한, 인간적인 삶이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더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인간의 조건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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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렌트 입문자에게 쉬운 책이 아니다. 대담집이기 때문에 글 자체가 어렵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아렌트의 사상 전반을 이해했다는 전제하에 인터뷰가 진행된다. 따라서 아렌트 초심자들은 아렌트가 말하는 메타포에 휩쓸려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시간이 된다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 인간의 조건등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런 사전 작업이 뒷받침된다면, 악의 평범성 외의 다른 개념, 학생운동의 실패, 3세계의 허구성, 정치에서 거짓말, 평의회, 공화주의적 자유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아렌트의 숨결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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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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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우리 곁에 머문다.

『총, 균, 쇠』의 저자로 유명한 제래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60년 문명 탐사의 결정판으로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를 출간했다. 『총, 균, 쇠』를 비롯하여 그 이전에 저술한 책들이 인간과 국가 그리고 문명의 과거를 추적한다면, 이번 『대변동』에서는 미래를 향한다. 애초 생리학을 전공했던 그는 그 외 다른 분야인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인류학,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압도적인 배경지식과 비교 연구 방식, 그리고 스토리텔링으로 각 국가가 겪었던 위기들을 총합하고, 이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위험들을 집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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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위기에 직면한다. 그 위기는 나와 다른 외적 대상에 의해 발생할 수 있고 내적인 갈등(정치적 갈등, 쿠데타 등)으로 발생할 수 있다. 위기가 지닌 빈도와 기간, 그리고 영향력에 따라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위기는 ‘중대한 위기’이다. 개인으로 비유하자면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재기불능 상태에 놓이거나 개인의 생명이 끊어질 뻔한 사건 같이 극단적이고, 위험한 위기이다. 저자는 개인이 경험하는 중대한 위기를 국가로 확장한다. 개인이 경험하는 위기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은 국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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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개인과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의 위기를 바라보는 렌즈를 사용해 국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심리치료사들이 찾은 개인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12가지 요인이 국가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위기를 바라보는 12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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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기 상태의 인정,
(2) 무인인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4) 다른 사람과 지원 단체의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사람의 사례
(6) 자아강도(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함)
(7) 정직한 자기평가
(8) 과거에 경험한 위기
(9) 인내
(10) 유연한 성격
(11) 개인적 핵심 가치
(12)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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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기준틀을 국가적 차원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한다. 첫 번째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이다. 이는 국민이 그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이다. 국가가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리더들의 적극성, 그리고 책임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울타리 세우기이다.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이며, 그 문제가 어떤 대외적인 환경 속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이다. 다섯 번째는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다른 국가의 사례를 찾는 일이다. 여섯 번째는 국가의 정체성의 정도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추상적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국가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정직하게 자기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덟 번째는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를 통해 교훈을 도출하여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국가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열 번째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이며, 열한 번째는 국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이다. 국가는 지리적 위치와 국부 및 군사력, 정치력의 차이로 선택의 자유에서 제약을 받는다. 지정학적 제약은 약소국, 그리고 중견국가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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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6) 국가 정체성 
(7) 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평가
(8)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
(9) 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10)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11) 국가의 핵심 가치
(12)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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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준거들을 통해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선별한 국가들이 어떻게 위기를 겪었고,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 국가는 외부적 요인으로 갑작스런 변화를 맞이한 핀란드와 일본, 내부적 갈등으로 위기에 처한 칠레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점진적으로 확대된 위기에 시달린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이다. 과거 국가의 영광, 몰락 그리고 극복 과정을 보여주고 난 뒤, 저자는 현재진행형인 위기에 대해 논평한다. 지금 일본은 국가부채가 너무 많고, 여성 혐오가 만연하며,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가 점차 붕괴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이 해외 자원 장악 욕심이 과하고, 과거 식민지배 시절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피해자로 생각하며, 엄격한 자기평가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국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저자의 조국은 어떤가? 다이아몬드는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정치적 타협은 갈수록 불가능한 일이 됐고, 복잡한 유권자 등록 시스템으로 인해 미국의 투표율은 전 세계 민주국가 중에서도 항상 최하위권을 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불평등이 심화하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신분 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폭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이 이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미국이 유럽, 아시아 등과는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로 인한 자부심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래에 닥칠 위기인 ‘핵무기,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부의 불평등문제’를 언급하며 12가지 기준에 따라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기는 먼 미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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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와중에 대한민국은 분명한 위기에 마주했다. 일본과의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일본은 자국의 안전 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첨단 기술과 전자 부품을 수출할 때 허가 신청을 면제하는 국가를 ‘백색국가’로 지정한다. 일본은 이렇게 지정된 국가를 안보 우방 국가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을 안보 위협 국가로 규정했다. 또한 우리나라에 일부 소재 물품 수출을 규제하여 한일간 무역 분쟁이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조치로 대한민국 내부에선 일본 불매운동을 통해 NO 재팬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文정부과 여당은 극일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에서 끝나지 않는다. 북미간 판문점 회동 이후 뚜렷한 북미 접촉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연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여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독도 영공을 침범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내부 문제인 이념 갈등, 성별갈등, 제노포비아, 청년실업 등도 마찬가지로 위협적이다. 하지만 난 대한민국이 처한 외부적 위협을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12가지 기준 틀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현재 처한 위기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가? 지금 채택한 방법은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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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은 현재 처해진 위기에 대해 대체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편이다.(요인1) 그 원인이나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불매운동을 펼치고, 북한과의 평화를 바라며 한반도의 안보 위협이 해소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이고 독자적인 언어인 한글을 갖고 있어서 국가 정체성이 상당히 강하다(요인6). 그리고 식민지배, 6.25 전쟁과 같이 대한민국은 거대하고, 완전하며, 그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있는 위기를 겪었다(요인8). 하지만 그 외엔 우리나라에게 적용될 만한 기준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이야기한 기준틀마저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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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제약(요인12)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반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이란 현실로 인해 육로를 통한 대륙 진출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주변의 강대국(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은 대한민국의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입지를 축소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남중국해를 넘어서 인도양으로 확장했다. 두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 패권경쟁에 의도치 않게 휘말릴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자율권은 강대국들에 의해 제약당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정직한 자기평가(요인 7)가 절실히 부족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대한민국은 울타리 세우기(요인 3),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요인 10), 국가의 핵심가치(요인 11),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요인 4) 국가적 책임의 수용(요인 3) 등 전반에 대해 오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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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과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더욱 중요한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 현재 미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항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모두 아베의 작품이다. 2006년 1차 아베 내각은 미국-일본-호주-필리핀-인도를 통해 중국을 포위한다는 ‘자유와 번영의 호’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전략은 훗날 제2차 아베내각이 2015년에 제시하게 된 ‘인도-태평양 전략’의 초석이었다. 아베는 2017년 미일 정상회담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트럼트 대통령에게 소개했고 그는 이 전략을 이후 미국의 전략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미국-일본-인도-호주가 협력하여 중국의 급격한 부상을 견제하는 전략이다. 미국은  2017년 발표한 『National Security Strategy』(국가안보전략)에서 미국의 주적을 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규정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은 미국에 위협이 되었으며,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자 한다. 최근 미 국방부가 발간한 『Indo-Pacific Strategy Report』를 보면 대만을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할 때 맺은 ‘하나의 중국(대만의 독립 부정)’ 원칙을 폐기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국을 보편적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현상타파국가로 지목했다. 즉 차후 미국이 주된 위협국가는 북한이 아니다. 중국이다. 『Indo-Pacific Strategy Report』는 일본을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번영의 초석(cornerstone)’으로 규정하고 일본이 미국의 입장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말한다. 반면 한국에 대해선 ‘평화와 번영의 핵심국(linchpin)’이라고 언급할 뿐 미국의 입장을 따른다는 말도, 인도-태평양 범주에 함께한다는 언급은 없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 최고의 동맹국인 기밀정보 동맹 ‘Five Eyes’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Five Eyes’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명권을 공유하는 국가들이다. 영어를 사용하지도, 같은 문화, 문명을 공유하지 않는 일본이 그들과 협력을 추진한다는 사실은 미일의 공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가 미일 동맹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수준으로 비유한 건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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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행보를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일본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환영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어 자국의 군사적 행보에 동참하는 것을 항상 요구해왔다. 세계적인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전문가이며 클린턴 정부 시절 국방부 국제안보를 담당했던, ‘소프트파워’로 유명한 조셉 나이는 “The Us-Japan Alliance Report”를 통해서 동맹 협력을 제약하는 일본 헌법 수정, 그리고 일본 군대의 해외 배치 허가 법안 등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일본은 지극히 최근까지도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을 1% 미만으로 유지해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3% 이상을 유지해왔다. 절대적 비용으로 비교해보면 분명 일본의 국방비 지출은 우리나라보다 많다. 하지만 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중이 보여주는 것은 그 국가가 ‘국가 안보에 얼마나 적극적이고 관심을 두고 있느냐?’이다. 미국의 GDP는 19조 3천억 달러에 달하고 국방비 또한 7천억 달러로 GDP에 3%를 차지한다. 미국은 세계금융위기 당시 GDP는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국방비는 유지하여 그 비중이 GDP에 4~5%를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에 반해 일본은 국가 안보 자체를 미국에게 의존하고 그 비용 전반을 경제 성장에 투자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군국주의 추구한다는 해석은 다소 현실과 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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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대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이 지금까지 부담했던 안보비용을 줄이고 온전히 중국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일본과 한국뿐 만이 아니라 EU에게도 방위비 분담금과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상황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1950년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짙어지자, 유럽대륙에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열전에 대한 우려가 번졌다. 미국은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할 최초의 방어선인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했고 이를 추진했다. 프랑스, 영국 등의 반발에도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췄다. 당시 독일의 총리였던 아데나워는 재무장에 대한 국내 반대여론이 과반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끝내 재무장을 실현한 목적은 주권을 회복하여 독일을 정상국가로 만들고자 함에 있었다. 미 부르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위원이며, 미국 외교정책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과 유럽의 역할 차이를 곰과 사냥꾼에 비유한다. 사냥꾼이 칼을 들고 곰을 마주치게 된다면, 사냥꾼은 곰에 대항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곰이 그냥 지나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냥꾼이 총을 들고 있다면 곰을 죽여 위협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다. 즉 힘을 가진 자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자 하며, 근거 없이 평화를 바라는 것은 단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평화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케이건은 충분한 군사력 없이 낙원을 만들고자 하는 유럽의 행태를 이상주의라고 비난하고 그 낙원은 오로지 미국의 힘 덕에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여 평화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미국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 국제적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베는 미국의 입장을 전격 수용하여 평화헌법을 수정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정세가 돌아가고 있는 방향이다. 만약 무작정 일본의 군사화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상치(相馳)한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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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는 마치 한미 동맹이 미일 동맹보다 중요한 것처럼 간주한다. 북미간 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들은 일본이 그 대화에서 끼어들지 못하는 이른바 ‘일본 패싱’을 인용한다. 하지만 미국의 주된 위협국이 중국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북미간에 대화는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북한이 친미화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의 영향력을 그만큼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일본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패싱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중국과의 대립구도는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상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에게 충분히 매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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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핵심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시장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를 따른다. 우리의 가치는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에 부합한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의 중요성은 크지 않은 듯하다. 이 전략의 중요한 축은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이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인도, 호주가 다이아몬드 형태의 협력 구도를 구축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네 국가를 선으로 잇는다면 다이아몬드 형태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라고 명명되었다. 이 동맹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가치동맹이다.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애초에 일본은 이 전략을 제시할 때 우리나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중국의 패권전략인 일대일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참여에는 소극적이다. 또한 일본의 무역보복에 우리나라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를 꺼냈다. 이 카드는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겠지만, GSOMIA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한미일간 주요 안보 채널이다. 이를 폐기하겠다는 것은 명백히 미국의 국가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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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경두 굮방부 장관과 미국의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에스퍼 장관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GSOMIA의 유지를 희망했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미국이 징용문제가 끝났다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의향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국이 꺼내든 카드는 미국의 협력을 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섣불리 친중 노선을 취했고(요인11), 해결해야 할 국가의 문제가 어떤 대외 환경에 속해있는지 오판하여 울타리를 잘못(요인 3) 세웠다. 미국의 지원도 불명확(요인 4)하며, 우리가 지정학적 조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확히 평가(요인 7)내리지 못했다. 또한, 현 정부는 불매운동과 반일 정책 외에 다른 뾰족한 수(요인 10)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때마침 나의 아버지가 반도체 관련 사업을 20년 넘게 유지하고 계신다. 덕분에 일본 반도체 기술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한국제 반도체의 가격은 일본의 대략 1/10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싼 가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버지의 기기에선 국산화 반도체를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국산 제품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도체는 엄밀한 검증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고장도 잘 나지 않고, 그 수명 또한 길다. 반면 국산 제품은 고장 나기 쉽고 수명도 짧아 사용할 수 없다. 반도체 부품이 한 개라도 망가진다면 전자 기기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따라서 부품 하나를 고를 때도 신중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국산화 생산을 강화한다고? 그 기술력의 격차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까? 가능했다면 왜 지금껏 하지 않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야 시작한단 말인가? 일제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국산 제품의 품질을 개량하면 다른 중소기업에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이다. 시간은 충분했고, 우린 그 시간 동안 나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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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역사적으로 무수한 국가 위기를 겪었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6·25전쟁으로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우린 이 위기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얻었는가(요인8)? 우리는 여전히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도덕적 정당성 문제에만 빠져있는 것 같다. 국제관계는 도덕의 영향력이 지극히 미비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린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을 수용(요인2)해야 한다. 우린 이 교훈을 『대변동』에서 핀란드의 예시(요인 5)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핀란드는 자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소련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의 사망자는 거의 10만에 달한다. 이는 당시 핀란드 총인구 370만 명의 2.5%였고, 남성의 5%였다. 거기에 핀란드는 전 영토 1/10을 소련에 양도했다. 거기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과 함께 소련을 공격했다. 이 일은 후에 연합군에 의해서 문제시되었고, 졸지에 핀란드는 전범국이 되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핀란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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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소련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소련의 걱정과 예민한 심기를 다독거리기 위해 다른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치를 취했다. 전시의 지도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고 징역형을 구형했다. 또한 긴급조치법을 통해서 대통령 선거를 연기했고, 언론을 통제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핀란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서방 국가들은 핀란드의 사정을 몰랐다. 그들은 핀란드의 정책이 자주적인 자유를 포기한 개탄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하며 ‘핀란드화’라는 경멸적인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이 오명은 핀란드에 대한 오해이다. 핀란드는 조국의 독립이란 핵심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했으며, 이웃한 소련의 위협에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민주주의란 명분보다 국가의 독립이란 실리를 추구해 독립을 유지했다.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서 이토록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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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침략으로 많은 국민이 죽었고 과부나 고아가 되었다. 그럼에도 핀란드의 재평가는 가혹할 정도로 냉혹했다. 자신이 약소국인 것을 깨달았고, 소련에 영원히 저항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았다. 그들은 경제적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해 모욕을 감수했다. 우리는 어떤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위안부 그리고 강제징용에 대해 부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감정적으로 나오기 쉬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현 정권은 일본보다 북한과의 평화협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세계 최하위 국가인 북한과 협력해봤자 세계 GDP 3위인 일본을 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리고 북한과의 협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분명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북한과 전례없는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을 뿐이지, 다시 갈등 관계로 회귀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변수는 충분하다. 우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러 가지 옵션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옵션은 한미일간의 공조에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그 옵션을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갈등에서 미국은 일본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외교적 고립에 놓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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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정답이 아니다. 중국은 러시아, 홍콩, 대만, 인도 등 국경과 인접해 있는 국가 및 준 국가들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과 팽창은 주변국들에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와중에 중국과 경제협력보다 더 포괄적인 협력을 취한다? 이를 미국이 반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여야 할 미국이? 미국이 없는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무법지대이다. 미국의 도움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중국은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린 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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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압도적이지 않다. 따라서 일본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전혀 대한민국에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과거사에 얽매여 일본을 동맹국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인다면 우린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다.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위안부 합의를 현 정부가 성급히 폐기한 것은 오판이었다. 분명히 졸속히 체결된 합의이고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 대 국가 맺은 합의였기 때문에, 그 합의를 체결한 우리에게도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 처분하여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은 그 책임을 모조리 일본에 전가하겠다는 명분에 사로잡힌 그릇된 판단이었다. 국제관계는 명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국가이익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반일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린 대체 반일을 통해서 어떤 국가이익을 얻겠다는 것인가? 일본이 항복하면 그것이 정녕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 부디 이 상황을 포퓰리즘으로 이용하여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현 국제지형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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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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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의 유럽은 그야말로 어둡고, 절망적이며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1914년부터 4년 동안 이어진 제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리고 1929년에 닥친 대공황은 인플레이션, 대량실업, 그리고 혁명적 불안을 야기했으며, 1939년 발발한 제 2차 세계대전은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럽 전역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시대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었고 어떤 행동도 의미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을 무의미한 축제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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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파괴된 세상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대적 어두움을 이해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답습하지 않도록 노력한 여러 인물들의 처절한 지적 헌신은 혁명적 운동, 철학적 성찰, 문학적 표현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이 활동했던 정치적 어둠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그리고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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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인물들은 잃어버린 세대라고 표현된다. 잃어버린 1세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와 전쟁터를 통해 처음으로 세계에 참여한 사람들이고, 제 2세대란 대공황으로 사회의 불안전함을 깨우친 사람들이다. 마지막 3세대는 나치 강제 수용소, 전범재판 등으로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 시기의 인물(일정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뛰어난 사람)들은 세상의 어둠을 명백하게 이해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든 정치 공간이 상실됐을 뿐 아니라 개인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추동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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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브레히트의 시어인 ‘어두운 시대’를 정치적 은유로 수용하여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밝음과 어둠의 공존과 대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아렌트가 어둠과 밝음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란 제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아렌트의 철학 전반을 오독할 수 있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내면을 어둠과 연계시킨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동기를 품고 있는지는 보호받아야 한다. 만약 자신의 내면이 공적인 빛에 의해 벗겨진다면, 우리는 고독한 사유의 자유를 침해당할 것이다. 두번째로 아렌트는 사적 삶을 어둠으로, 정치적 삶과 공공영역의 특성을 밝음으로 묘사한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인 집은 은폐된 것이다. 공공의 빛이 집안까지 비춰진다면 우리는 편안한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반면 공공영역 즉 정치영역은 서로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있기 때문에 공개적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말’로 표현하는 공간이 공적영역이기 때문에 은폐된 사적 영역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아렌트는 공공영역에 빛을 발휘하는 인간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건강한 정치가 유지될 수 있고 인간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공공의 빛이 조작된 형태로 모든 사적 공간을 비추고자 하는 경우, 정치의 어두움이 드리운다. 그것이 전체주의 사회를 지배한 어둠, 칠흑같은 어두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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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는 사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어두운 영역에 강제적인 빛을 비춤으로써 사적 영역과 공공영역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방법은 비밀 경찰과 테러, 거짓말 그리고 상호 고발을 동원한 총체적인 감시로 이뤄진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사생활마저 파괴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이 고립을 가장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경험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삶을 영위해왔기 때문에 어둠과 밝음은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파괴는 인간세계를 사막화 했으며, 절망만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나치즘이 보여준 어둠의 또다른 모습은 인간조건 전반을 파괴했다는 것에 있다. 어두운 시대는 공간을 파괴한 것을 넘어서 인간 조건인 삶, 다원성, 탄생과 죽을 권리 모두 부정했다. 집단 수용소는 어둠의 모델이었으며, 조건이 파괴된 인간은 껍데기, 혹은 잉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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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두운 시대는 개성을 상실했고, 사람들의 기본적 도덕관마저 부정당한 시대였다.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공간은 마치 지옥과도 같다. 이 시기는 모든 정치적 빛을 상실했고, 건강한 어둠은 왜곡됐다. 새로운 시작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둠이 바로 전체주의의 어둠이다. 하지만 어둠은 민주주의 시기에도 찾아온다. 아렌트는 1960년대 미국에서 거짓된 정보를 바탕으로 베트남 전에 참전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며, 케네디 전 대통령도 암살당하는 등, 미국의 시대적 배경은 마치 ‘공화국의 종말’과 같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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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어느 시대라도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고, 생각하는데 나태해질 때 찾아온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라도 빛을 밝히려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은 정치적 사유를 통해서 어둠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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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싱의 위대성은 …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즐겁게 받아들인 데 있습니다.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논쟁의 종식이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이 논쟁의 종식은 곧 인간성의 종언을 의미했습니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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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소개되는 레싱은 사유의 중요성을 피력한 인물이다. 그는 진리와 정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는 정해진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사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즉 그는 아렌트가 훗날 이야기할 정치에서 공적 영역의 회복을 외친 초기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인식의 효모’를 유포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이 효모라는 은유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요소를 의미한다. 즉 인간 개개이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절대 진리는 그 과정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 진리가 존재하게 되면 대화의 종언으로 이어진다. 나치즘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진짜 반지’ 인냥 사람들의 복종을 강제했고, 덕분에 정치 영역은 소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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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는 도덕적 문제 때문에 일차적으로 혁명에 관여했다. 이러한 관여는 로자가 공적인 삶과 공공업무, 그리고 세계의 운명에 정열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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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자 혁명가이다. 여성의 정치적 참여가 터부시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로자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 순응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그룹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는 등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의 운명에 정열적으로 참여한 공적인 인물이었으며 죽는 순간까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비극적으로 암살당했지만, 후대의 정치 참여자들에 의해 이름이 언급되면서 ‘불멸성’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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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의 파멸이라는 공포에 기초를 둔 소극적 연대는 명료하지 않지만 적잖이 중요한 이해에 그 대응 방안을 지니고 있다. 즉 인류의 연대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할 경우에만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관념에 따라 개인적 ‘죄책’과 관계없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공적인 문제에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하여 우리를 감당하기 어려운 전 지구적 책임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시민으로서 책임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연대는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부담에 대한 공통된 반발은 정치적 무감각과 고립주의적 민족주의, 즉 인간주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라기보다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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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유대는 주관적으로는 “무한한 소통을 향한 의지”이며 객관적으로 보편적 이해 가능성이라는 사실이다. 인류의 통합과 유대는 하나의 종교, 철학, 또는 한 정부형태에 대한 보편적 동의에 있는 게 아니라 복수성이 다양성이 의해 동시에 은폐되면서도 노출되는 유일성을 지향한다는 신념 속에 존재한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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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스승이자 친구인 야스퍼스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이 책에서 유일하게 두 챕터를 소비해가며 그를 소개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공공영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동정심, 형제애, 박애 등과 같은 인간애를 후마니타스라고 명명한다. 야스퍼스는 유대인 부인을 두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쫒겨났지만, 그 철학적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고 세계사랑과 후마니타스를 외쳤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진정한 연대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세계 시민들이 “무한한 소통을 향한 의지”로 나아갈 때, 후마니타스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정치적 악과 타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망명하면서도 공적 세계와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 그는 “위기의 시대와 순응의 시대”에서도 사유의 힘, 그리고 사람들을 믿었던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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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제외하곤 대부분 극작가, 시인, 평론가 등 문학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설명한다.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베냐민, 브레히트, 나탈리 사로트, 오든, 자렐 등은 문학영역에서 그들의 사유활동 전반을 보여주며,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와 연관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린 아렌트의 은유적 표현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 제목에서부터 ‘어두운 시대’라는 시어를 따왔듯이 아렌트는 정치 이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언어를 표현할 때만큼은 시적인 은유를 사용한다. 레싱의 말을 인용하며 사용한 ‘인식의 효모’, 진리를 묘사한 ‘진짜 반지’, 그리고 빛을 밝히는 ‘조명’과 극단적인 빈곤을 말하는 ‘어둠과 매서운 추위’는 모두 시적인 메타포이며, 아렌트는 메타포를 통해 사유와 행위를 연결하고자 했다. 형이상학 전통은 이데아라는 정신적 삶(빛)과 현상이라는 활동적 삶(어둠)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아렌트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이 오류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신활동에 참여할 때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아렌트는 두 영역 사이에 놓인 심연을 좁히는 방법을 찾았으며 그것이 바로 사유 언어 즉 은유(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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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은유를 통한 사유와 행위를 조응하고자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학가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대한민국의 어두운 시대, 식민지 지배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처절하게 항쟁한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펜으로 일제에 저항한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와 같은 저항시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기 성찰을 보여주었으며 노골적으로, 혹은 메타포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다. 그들은 정신과 행위를 연결하는 메타포를 통해서 정치적인 빛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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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예술가의 잘못된 행동은 고대 이래로 정치문제였으며, 때로는 도덕문제였다. 나는 이러한 사례에 대한 다음 논의에서 두 가지의 가정을 고수할 것이다. 첫째, 괴테는 일반적으로 옳았으며 평범한 사람들보다 시인들로부터 더 많이 인정을 받았다고 시인들도 중대한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 둘째,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좋은 시행을 쓰는 능력은 시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도움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어도 그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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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예술”의 마굴에서 벗어나 “모든 미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의 힘 속에 투입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특별한 사명이라는 것, 이러한 주장은 모두 브로흐가 창작활동을 시작하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원칙이었다. 그는 윤리의 절대적이며 신성한 탁월성과 행위의 탁월성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특이한 근대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 그는 이 근대성 때문에 갈등과 어려운 문제에 의해 결정된 삶 속에서만 근본적 태도와 자기 품성의 근본적 요구조건을 표현해야만 했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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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을 찬양했지만 동베를린에 정착해 공산주의의 현실을 깨달은 브레히트처럼, 예술은 공적 영역으로 발표된 직후, 사람들의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작품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벗어나 예술 속에는 미적인 것, 윤리적인 것들이 투입해야 한다는 브로흐의 말처럼, 예술 그 자체론 불충분하다. 예술은 인간을 정치적 삶으로 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짜를 퍼트려 인간을 순응화, 잉여화 할 수 있는 만능 도구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인간을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차원을 개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상향만을 책임없이 퍼뜨려 사람들을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으로 끌고 갈 것인가? 정신과 활동의 심연은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과 예술가는 그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는 연결되어 있다. 공적인 삶을 무시하고 책임 없는 발언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그것은 기만을 낳고 혼돈을 초래할 것이며,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위험을 끌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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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쉽지 않은 책이다. 은연한 메타포는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번역하신 홍원표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아렌트가 사용하는 메타포 때문에 번역에 상당히 애 먹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메타포는 아렌트의 사상체계를 꿰뚫는 중심적인 방법론이기 때문에 곱씹으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어렵더라도 시간을 들여가며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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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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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서 읽게 된 이유는 방학 기간 동안 공부할 한나 아렌트 철학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니체 전문가이자 한나 아렌트의 초기 저작인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을 번역한 이진우 교수님이 바라보는 아렌트를 들여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철학자 중에선 니체와 한나 아렌트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군 생활 시절 니체의 대표 저서들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안티 크리스트」 「도덕의 계보학」 등을 읽었다. 그리고 아렌트의 저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을 읽었다.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이 그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진우 교수님의 주된 분야와 내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에는 니체와 아렌트가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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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니체와 아렌트의 철학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일단 니체는 아렌트와 달리 정치 철학에 대해서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주의만큼은 비난했다. 민주주의란 자신들의 행위를 선함으로 포장하고, 나약하고 저급한 도덕 원칙인 ‘노예의 도덕’을 따르는 대중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천민적 가치가 국가 경영에서 지배적 가치가 되면서 정치는 빠르게 천민화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위버맨쉬’ 즉 현재의 자신을 계속해서 넘어가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를 보유한 ‘초인’이 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위버맨쉬’ 개념은 생물학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인지 정신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때문에 니체 사후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는 그의 유고를 조작해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의지」를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초인은 우월하고, 현재의 도덕가치를 넘어선 새로운 도덕서판을 만들어내는 리더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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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보면 니체와 아렌트는 접점을 찾아볼 수 없다. 니체의 사상은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기도 했지만(물론 니체는 나치즘을 철저히 반대했다. 그는 반민족주의자였다.) 아렌트는 철저히 전체주의를 해석하고, 전체주의를 재발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았던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 니체와 아렌트 사이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진리를 배척했다는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격언인 ‘신은 죽었다.’는 신이라고 의인화되는 절대적 진리가 19세기 허무주의와 함께 도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지만 새로운 가치는 도덕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현실에 적용가능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힘에의 의지’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도덕적 현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선악의 저편의 구절에서 보듯이 니체는 도덕이란 해석의 여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 사회적 가치관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라 점, 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란 점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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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의 폭력에서 탈출한 유대인이었다. 그 신분과 경험은 아렌트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아렌트의 관심은 오롯이 전체주의를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쓸모 없는 잉여물로 환원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도덕적 개별적 인격을 모조리 파괴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도 없고 정치적 활동이 벌어지는 ‘공적영역’이 이해관계에 잠식하게 될 때 전체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고 「인간의 조건」에서 밝힌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하여 그가 철저하고 완벽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령에 복종할 줄만 알지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그를 통해 아렌트는 이젠 너무나 대중화되어 진부해진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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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유의 과정 속에서 아렌트는 정치영역의 회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개개인의 의견들이 보장되는 ‘공론 영역’에서 정치를 만들어낸다.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이 자유로움 속에서 정치권력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적 힘이라고 명시한다. 즉 권력이란 개인들이 모여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만드는 공공의 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아렌트는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견의 영역이다”라고 말을 함으로써 정치에서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진리는 비정치적이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이야기할 뿐 바뀔 수 있는 현실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는 개인의 의지를 통해서 도덕적 진리를 파괴했다면, 아렌트는 정치적 공동체, 공화주의를 통해서 정치 내부에 잠식한 진리를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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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민주주의를 노예의 정치라고 말하며 혐오한다. 그가 꿈꾼 이상사회는 귀족의 도덕, 즉 발전을 위해 나아가고 힘의 의지를 갖춘 귀족적 인간이 중심이 되는 정치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시민을 믿고 있다. 아렌트는 지배자의 등장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행위를 상실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자유란 정치적 평등이 이뤄진 상태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비지배 자유가 실현된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복잡하고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지적 여정은 마침내 정치적 판단 문제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 「정신의 삶」은 1부 사유, 2부 의지만을 완성하고 3부 판단을 쓰지 못한 채로 아렌트는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말하고자 한 정치적 판단은 도대체 무엇인가? 판단은 어떻게 현대사회에 남아있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배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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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판단의 해답을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찾는다. 흔히 알고 있듯이 「판단력 비판」은 취미판단의 일종으로서 미학의 기반이 되었다. 아렌트는 정치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예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의 마음에 든다. 가령 특정한 장미가 마음에 들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판단할 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에는 객관적인 기준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민은 정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판단한다. 때문에 기초적인 정치 판단은 장미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취미 판단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우리는 쉽게 정치인의 언행과 이미지 만으로 호감이 가는지 혐오감이 이는지를 판단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렌트는 이런 일차적인 정치판단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개별적인 사건을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치적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치의 필수 조건은 다원성에 기초한 ‘공평성’이다. 공론 영역에서 다양한 행위자가 모이는 다원성이 보장된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자신의 생각을 공개하는 과정이 바로 ‘공평성’이다. 아렌트는 판단력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다양한 인간들이 어울리는 사교에 있음을 강조하며, 공개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정치가 판단력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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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진리가 작동하게 되며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 진리를 정해준 자는 폭력을 지닌 자이며 그들의 총구는 사람들의 머리를 향해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강조될 때 전체주의의 싹이 자라난다. 아렌트는 인간의 사유능력에 희망을 갖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와 아렌트는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이 전복하고자 한 것은 공통의 진리이다. 아렌트는 진리를 정치영역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전체주의의 싹을 자르고자 했다. 그 사상의 조류는 정치 영역의 회복으로 촛불 혁명이란 실천적 행위로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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