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페미니즘 My Little Library 8
박준우 지음 / 한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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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나 집에 왔어. 오늘 되게 힘들었어.
차가운 것 좀 줘 그리고
발 좀 문질러줘, 먹을 것 좀 가져와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 만들어줘
나 쉬면서 TV 봐야 해.
Shania Twain(샤니아 트웨인), 「Honey, I’m Hom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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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익숙한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어머님들이 가정을 위해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피로를 풀어주는 모습이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란 차이가 있겠다. 추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만한 미러링이다. 거울을 통해서 반전된 세계를 보는 미러링은 페미니즘이 사용하고 있는 주된 운동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미러링의 교본이 된 「이갈리아의 딸들」은 성 역할이 반전된 상황을 그려냄으로써 여성의 억압받는 세태를 성공적으로 보여줬다. 정교하고 철저히 연구된 페미니즘 이론보단 대중문화가 고발하는 현실이 사람에게 사회문제의 리얼리티를 보장한다. 이 리얼리티는 문화가 갖고 있는 ‘파워’다.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여러 가수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리드미컬하게 들려준다. 음악 안에 내제한 ‘파워’는 명랑한 메아리가 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공유된다. 이것이 음악만이 맡을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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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달리
소녀들에게 결혼이 목표라고 가르치죠
왜 소년들처럼 성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하죠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평등을 믿는 사람입니다.
Beyonce「***Flawless」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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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페미니즘이란 용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페미니즘 운동의 결론이 양성평등이라면 양성평등 운동이어야지 왜 여성주의 운동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 논리에 반대한다. 인종차별 폐지가 흑인 인권 운동이듯이, 현재 차별 받는 존재는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사회 운동은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보단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권 평등이라는 천부적 가치 아래에서 여성의 권리 신장이란 방법을 채택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여권확장론)이라는 이름이 가장 적합하다. 만약 페미니즘이란 명칭이 양성 혹은 성평등 운동으로 바뀌어버릴 경우, 여성들에게 모든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또한 목적과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운동은 소음이다. 수많은 외침은 그 목소리를 분명히 알 수 없게 만든다. 때문에 여성들의 권리 운동은 페미니즘이란 이름 하에 이뤄져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그들의 목소리를 깨끗하게 들을 수 있다. 사회운동은 선택과 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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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페미니즘도 이러한 갈래 안에 있다. “미국인 가운데 가장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이는 흑인 여성입니다.”라는 말처럼 백인 경찰에 의해 살해 당하는 흑인 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차별 받는 존재다. 자넷 잭슨을 시작으로 비욘세, 리한나 등으로 이어진 블랙 팝은 흑인 여성들의 삶을 고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주체성을 여실히 음악을 통해 드러낸다. “나는 내가 통제한다”라는 말처럼 자기결정권의 보장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미시시피주나 조지아 주 등에서 낙태금지법을 다시 제정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 지역의 세력이 백인 중심의 공화당인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추론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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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든, 이성애자든, 양성애자든, 레즈비언이든, 트랜스젠더든
난 제대로 가고 있어. 난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사람
흑인이든, 백인이든, 베이지색이든, 라티노든, 동양인이든
난 잘 가고 있어, 난 태어날 때부터 용감한 사람.
Lady Gaga, 「Born This Way」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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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종차별만이 차별이 아니다.
누구든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소외된다고 생각이 들면
차별받는 것이다.
계급차별은 새로운 인종차별이다.
The-Dream 「Black」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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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매력적인 점은 페미니즘과 더불어 인종,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밝힌다는 점이다. 음악은 사회비판정신을 담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도구이다. 따라서 레이디 가가의 가사처럼 의견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다. 루페 피아스코는 힙합 문화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꼬집고, 음악과 뮤직 비디오를 통해 위대한 남성성을 고발한다. 소말리아 난민 출신인 케이난은 평화를 바라는 마음,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처절히 가사에 담았다. 흑인사회는 동성애를 금기시한다. 하지만 흑인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프랭크 오션은 동성애를 터부시 하고 조롱하는 흑인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음악 속에서 흐르는 보편적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연대의 장을 마련해준다. 음악이란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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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요코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저자는 비틀스의 해체를 오노 요코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반 아시아적이고 반 페미니즘적인 증오라고 말한다. 애초에 요코가 없었다고 해도 비틀스는 해체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맴버들의 갈등은 깊었다. 비틀스는 해체됐지만 존 레넌은 오노 요코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음악에 페미니즘과 반전평화 등 보편적 가치를 반영하는 음악을 작사, 작곡할 수 있었다. 오노 요코는 과소 평가 되었지만 그 또한 전위 예술가로서 또 음악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선보였다. Cut Piece라는 퍼포먼스로 성차별과 타자의 개입, 실존하는 개인에 대한 고민을 풀어냈다. 그리고 「Yang Yang」, 「What A Mess」 등의 음악을 통해 남성 중심 권력을 비판하고 여성해방을 노래하며 페미니즘을 이야기 했다. 분명 그의 행보에 논란이 될 만한 것은 있었지만, 비틀스라는 혼란의 시기에 함께하여 예술적 역량마저 저평가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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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른 이야기도 해볼까 한다. 저자는 마돈나가 성적, 인종적, 종교적 편견을 깨부수고 성녀와 창녀 이분법을 거부하며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발한 도발적인 페미니즘 메시지를 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코르셋」의 저자 쉴라 제프리스는 마돈나가 성매매 되는 여자들의 복장을 하이 패션으로 정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마돈나는 단지 남자에게 지배력을 갖는 ‘여창’으로 분한 배우에 불과했으며, 실제 성매매 업소를 포함한 세상에서의 권력 행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돈나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이에 대한 통제권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돈나가 보여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계(여성성 자체의 파괴)는 성매매를 정상화하고 패션, 광고 분야 전반에서 성매매를 대중적으로 문제 없게 만들었다. 제프리스는 마돈나가 코르셋을 덧씌움으로써 여성들의 패션을 남자의 색슈얼리티에 복속시켰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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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역설적인 점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팝 음악가들이 여전히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봐도 예쁘고 섹시하다는 점이다. 물론 섹시함이나 섹스어필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체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여긴다면 이는 하나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디어로 이를 접하는 수용자들은 직접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의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 음악가들과 페미니즘을 소비하기 쉽다. 결국 팝 페미니즘이 성숙하려면 음악시상에 종사하는 다수, 또 이를 수용하는 다수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을 피할 수 없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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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도 이에 대한 문제를 피하지 않는다. 아무리 마돈나나 비욘세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가수의 의도완 무관하게 섹시한 여성, 예쁜 여성으로만 받아들이면 예술가들의 목적은 왜곡된다. 창작자의 의도는 관람자에 의해 재해석된다. 아이유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 대한 재해석으로 「ZeZe」를 발표했을 때 소아성애에 대한 논란에 빠졌다. 아이유는 이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수용자들은 달랐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아이유를 로리타와 엮어 내렸다. 즉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이해의 벽이 존재한다. 비욘세가 코르셋을 장착하고 섹시함을 어필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성이란 젠더의 벽을 더욱 고착화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의 범주는 넓기 때문에 이를 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포스트모던처럼),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여성성을 거부하려는 레디컬 페미니즘의 경우 비욘세의 페미니즘에 불만을 가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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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페미니즘을 음악에 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은 아이린의 사례를 보더라도 공인이 페미니즘을 꺼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희망을 찾자면 난 소설과 웹툰을 꼽겠다. 물론 웹툰에는 여성혐오를 조장하는 것도 있지만 「내 ID는 강남 미인」과 같은 성형에 대한 편견을 부수거나 최근에는 「화장 지워주는 남자」처럼 화장에 대한 인식 전환을 보여주는 웹툰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물론 해석은 다양하다.)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노래하는 페미니즘이 대중적이지 않지만, 적어도 그려보는 페미니즘, 낭독하는 페미니즘은 대중성을 얻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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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책할까요 - 내 인생에 들어온 네 마리 강아지
임정아 지음, 낭소(이은혜) 그림 / 한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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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와 평생을 함께한 네 마리 강아지 까미, 바람이, 샘이, 별이의 이야기다. 까미가 새끼 강아지였던 1990년부터 세상을 떠난 2002년까지 13년, 그리고 바람이와 샘이가 내 곁에서 평생을 살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2015년까지 16년, 그 후로 외롭게 홀로 남은 별이까지 30여 년에 걸친 네 마리 강아지 이야기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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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동반자 반려동물. 외로움을 덜어내 주고 기쁨을 채워주는 나의 진정한 친구.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고, 우리가 웃고 울 때 그들은 옆에 앉아 우리의 감정을 보듬어준다. 이 책의 작가도 인생의 절반을 넘게 이 동물 친구들과 함께했다. 오히려 그들이 없는 삶이 더욱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첫 동반자이자 인간 이상의 선함을 보여준 까미, 그리고 눈이 먼 바람이, 여왕님 같았던 샘이, 그리고 샘이와 바람이의 자식인 별이. 작가의 30년이란 긴 시간을 차지한 그 강아지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3마리를 떠나 보내며 느낀 상실감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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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들이 어렸을 때 저한테 기쁨과 위로를 주었어요. 이젠 제가 돌볼 차례죠. 키우던 강아지가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고 새로 사면, 새로 들인 애들은요? 그 아이들은 늙거나 병들지 않나요?” 늙고 병들었다고 개를 버리는 것은 늙은 우리 개들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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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기 때문에 한없이 선할 수 있고, 인간이기 때문에 한없이 악독할 수 있다. 사람은 강아지를 더 이상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쉽게 떠넘겨버리고, 혹은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강아지들이 자신에게 준 사랑만큼 그 아이들의 남은 여생을 사랑으로 보답해주려고 한다. 동물병원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는데도, 죽은 남동생 옆자리에 바람이의 시신을 묻는 작가님은 그 분이 얼마나 그 동물 가족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떠나 보내고 난 뒤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도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작가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보고자 했다. 상실은 또 한번 그들의 소중함을 깨우칠 수 있는 인생의 비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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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한 마리 푸들과 산다. 작가님이 키우던 토이 푸들과 같은 종인 ‘코코’다. 약 6년전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던 난, 외삼촌이 키우던 강아지가 새끼를 낳자 얼른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코코는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존재였다. 수험공부를 하고 집에 늦게 들어온 날 제일 처음 반기던 가족은 코코였다. 또한 혼자 계신 시간이 많았던 어머니에게 좋은 친구가 된 것도 코코였다. 코코는 우리 가족에게 기쁨을 준 한 명의 구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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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키웠던 탓일까? 우리 가족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재주가 부족했다. 덕분에 코코는 상당히 감정 기복이 심한 아이가 되었다. 좋게 반기다가 갑자기 이빨을 보일 때도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전투태세를 갖출 때도 있다. 덕분에 몇 번이나 피를 봤는지 모르겠다. 또 산책을 나갈 때 다른 강아지나, 어린 아이를 보면 싸울 듯이 달려들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었다. 누군가는 강아지의 사나운 모습 때문에 키우기를 포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육의 미숙함을 반려동물 탓으로 돌리며 포기하는 건 멍청함을 속이는 일일 뿐이다. 귀여움 때문에 너무나 쉽게 얻은 반려동물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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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수명이 10~15년 정도인가? 우리 코코는 대략 6살쯤 됐으니 한 절반쯤 지나온 것 같다. 혹은 더 일찍 갈지도 모른다. 죽음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니까. 물론 아무도 원치 않았을 방문객일 테지만. 작가는 반려견의 죽음을 다른 이들과 아픔을 공유하거나 새로운 만남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아마 코코의 죽음은 우리 가족이 극복할 문제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다가올 미래란 것은 분명할 테니까.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썬 그 일이 절망으로 다가올지 혹은 정신적 성숙함의 과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겪고 싶지 않은 건 분명한 것 같다. 지금처럼 코코는 편하게 살며 충분히 놀았으면 한다.

“저 애들이 어렸을 때 저한테 기쁨과 위로를 주었어요. 이젠 제가 돌볼 차례죠. 키우던 강아지가 늙고 병들었다고 버리고 새로 사면, 새로 들인 애들은요? 그 아이들은 늙거나 병들지 않나요?” 늙고 병들었다고 개를 버리는 것은 늙은 우리 개들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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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건축기행 - 유토피아를 디자인하다 My Little Library 7
강영환 지음 / 한길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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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축, 종교 그리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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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건축기행]은 저자가 40여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본 아시아 건축물에 대한 견문기이다. 저자는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여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황금탑 외에도, 각 종교가 갖추고 있는 특색 있는 건축물을 비교하며 볼 수 있다. 독자들은 다양한 사진을 통해 아시아가 품고 있는 다채로운 건축물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건축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한 명의 여행객으로서 건축을 보고 느낀 바를 말할 뿐이다. 건축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저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아시아의 모습이다.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역사 공부까지 할 수 있어서 여행의 재미를 더욱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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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이 책을 건축에 담긴 미학을 중심으로 독해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아시아 건축에 상당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 혹은 아시아의 종교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질서를 구축하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령 남인도 힌두 사원인 ‘벨루르’와 ‘할레비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 결합을 잘 보여준다.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를 영속화 하기 위해 종교적인 정당성을 필요로 했다. 이 사원들은 각각 계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종교적 경외심을 극대화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런 의미는 유럽의 종교적 건축물과 맞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종교건축물들은 사람들의 경외심을 자극하여 지배적 질서를 안정 시키는데 있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종교는 과연 민초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타이와 미얀마는 종교가 보여주는 두 극단적인 삶을 제시한다. 타이 국민의 대다수는 불교신자이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불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타이의 사원은 지역사회에게 정신과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한다. 해발 1,600m 고도에 달하는 산 정상부에는 ‘도이수텝’이라는 사원이 있다. 그 사원에서 승려들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제공하고 부처의 은덕을 베푼다. 그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인격을 수양하며 공존을 배운다. 반면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국민 소득은 1.300달러에 불과 하는 세계 150위권의 나라이다. 빈부격차의 극심함은 말할 것도 없다. ‘슈웨다곤’은 휘황찬란한 금빛과 보석으로 물들여 있어, 순간 미얀마를 보석의 나라로 착각할 정도다. 종교적 믿음에 의해, 미얀마 국민들은 자신들이 번 돈으로 금박을 구입한 후 사원에 덫 붙인다. 그들의 노력으로 ‘슈웨다곤’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민들의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미얀마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장과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파리떼들 그리고 가난에 찌들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 그들은 끼니 이을 돈으로 금박을 입혀 종교 건축물의 신성함을 보강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은 비참함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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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랜드마크란?
한 도시 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그러한 건축물들을 흔히 랜드마크라고 부른다. 가령 파리의 ‘에펠탑’이나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랜드마크로 불릴 만 하다. 저자는 라오스의 ‘비엔티안’을 방문하던 도중 “랜드마크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라오스에는 현대사의 랜드마크로 주목 받는 건축물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한 ‘빠뚜싸이’이다. 저자는 ‘빠뚜싸이’를 프랑스 건축과 라오스 건축 사의 기형적인 결과물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건설방법도 아류로 뒤덮인 건축계의 짬뽕이다. 그는 오늘날 목적 없는 랜드마크 조성사업이 한창이라고 비판한다. 탐욕적이고 사적 욕망의 상징물들이 기업, 정치인들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공격적으로 건축되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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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저자의 비판이 전통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목적을 알 수 없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건축물이 우후죽순 건설되는 상황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대부분 종교적인 건축물들이 건설된 배경에는 ‘미’라는 낭만적인 목적만 있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는 지배자의 권위를 보호하고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주요 수단이었다. 권위자에게 종교적인 정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압도적인 건축이었다. 노예들은 지배자의 권위를 위해 건축현장에 동원되었다. 현대의 랜드마크 조성 사업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종교적인 권위와 자본의 권위, 말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은 같다. 바로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의 명예의식이다.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건축물을 순순한 미로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 건축물들은 지어질 당시엔 평가를 박하게 받을 지도 모른다. 단적인 예가 에펠탑이다. 에펠탑은 건축될 당시에 파리의 흉물로 취급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를 떠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으며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지금의 흉물이 나중에는 나라의 상징으로 뒤바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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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의 장벽, 그리고 고립의 장벽
스리랑카에는 경이로운 유적이 있다. 바로 ‘시기리야’이다. 평원 위, 195m 바위산에 자리잡은 이 유적은 본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절벽으로 출입을 봉쇄하여 적의 침입을 막고 물과 물자를 공급받을 기술을 마련했다. 이곳을 만든 카사파 1세는 부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하고자 거대한 바위 요새에 몸을 숨겼다. 분명 이곳에 성채를 구축한 왕은 자신의 첨단 방어시스템을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완벽한 봉쇄는 고립을 자초한다는 것을. 왕은 이 어마어마한 도시를 만들어 놓고도 이복동생의 군대에 의해 패망했다. 천연의 요새가 무너지는데 고작 1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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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떤 장벽이 떠올랐다. 바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이다. 이 장벽의 목적은 중남미 출신 불법 이주자들을 물리적으로 봉쇄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법이 정말 이것뿐일까? 안보란 국가이익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장벽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장벽 건설에 소모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은 불법 이주민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에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장벽이 난민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수 많은 방법을 찾아냈고 실행해 왔다. 그들이 생존하자는 욕구는 보트에 몸을 실어 대양을 건너게 만들었고 군인들의 총성을 감수했다. 장벽을 만든다고 해도 그들은 ‘자유’라는 가치를 찾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통해 외적을 방어하고자 했고 시기리야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무너지데 각각 30년, 그리고 18년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국의 장벽은 온전히 미국을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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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유토피아를 말하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3만불(약 3천만원)을 달성했지만 국민들은 불행하다. 세계행복보고서에서 156개국 중 종합 54위에 머무른 것만 봐도 경제적 풍요와는 대비되는 불행한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행복보고서는 국민행복지수(GNH)를 통해서 사람들의 행복한 정도를 측정한다. 그렇다면 GNH는 어디에서 처음 만들어졌을까? 놀랍게도 인구 80만명의 작은 나라, 부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부탄 왕조 4대 왕인 왕추쿠는 왕권을 포기하고 국가를 민주주의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1970년대에 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헌법에 명시하고 국가 발전의 기준으로 삼았다.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4가지 기본전략은 이렇다. 첫 째는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경제발전이다. 두 번째는 생태계의 보전과 회복을 중시하는 것이며 셋째로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앞의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는 국정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행복을 원칙으로 삼은 나라는 달리 또 누가 있을까? 저자는 부탄이 근대화의 물결 안에서도 행복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행복이란 기조 아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마냥 부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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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은 국가 정책의 기조를 행복으로 삼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구한다. 부탄의 근대화는 분명 느리게 흘러갈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고려하고 최선의 선택을 결정하는데 대한민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동네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한국인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저자는 라오스의 도시 ‘루앙프라방’에 있는 작은 카페에 방문했다. 그 카페에 이름은 ‘유토피아 카페’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그 카페에는 별다른 것이라곤 없다. 단지 매트에 누워 강가를 바라보거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뿐이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카페가 왜 유토피아일까? 유토피아를 직역하면 ‘없는 장소’이다.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낭만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수 없는 모순된 장소가 바로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너무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사소한 것에 행복을 얻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유토피아적 공간은 없을지라도 삶의 사소한 순간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 ‘유토피아 카페’는 사람들에게 단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데 그친다. 거기서 무엇을 할지는 사람 나름의 역할에 달려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강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지고 또 누군가는 낮잠을 취할 것이다. 사소하기 그지없지만 그들은 현실의 짐을 덜어냄으로써 행복에 잠긴다. 고되고 힘든 순간 잠시 휴식을 취하고 행복을 만끽할 기회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이 풍요로워 질 것이다. 정말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누구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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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을 한가롭게 만드는 공간이다. 특별히 볼 것도 할 것도 없으니 시간은 천천히 흐르게 마련이다. 목적 없이 빈둥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잘 기획된 건축적 장치는 오히려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구속하기 마련이다. 나른한 강변 풍경과 시원한 바람, 서늘한 그늘, 편하게 드러누울 수 있는 곳이면 평화를 누리기에 족하다. 그 카페의 이름은 ‘유토피아’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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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바위 게임 - 불평등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가
마이클 슈왈비 지음, 노정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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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바위: 교묘한 수법으로 남을 속여 돈을 따먹는 노름.

 

Rigging the Game이라는 원제를 <야바위 게임>으로 번역 해 출판한 출판사의 창의력에 우선 감탄한다.< 야바위 게임>의 저자 마이클 슈월비는 현대사회를 불평등이 극심한 사회라고 평가하며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한다. 소득과 자산을 소유한 부자와 소유하지 못한 빈자 사이의 양극화가 극대화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부자를 중심으로 지배계층이 만들어놓은 게임규칙이 양극화를 심화시킨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토록 불평등이 만연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애초에 우리가 지배계급에 의해 조작된 게임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인 구조다. 역사적으로 강자들이 부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인 절도, 약탈 그리고 착취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교묘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절도, 약탈, 착취를 게임을 조작하는데 이용한다.

 

‘소유권이 인권에 우선한다.’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명령은 자본주의에서 기본원칙으로 수행된다. 먼저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은 행정수단을 차지함으로써 규칙을 만들고 해석하고자 한다. 그 과정은 경제집단이 국가 권력층에 로비를 하는 정경유착의 형태로 수행된다. 실제로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한 규칙들을 미국에서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복잡하게 만들어 사전에 차단하는 ‘테프트-하트리 법’, 흑인들의 거주 비율이 높은 지역을 경계 대상으로 삼아 융자나 보험 인수을 거부하는 노골적인 ‘레드라이닝’이 있다. 그리고 신분증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미국의 배경을 이용하여 신분증을 발급받을 여유가 없는 피억압자(흑인 빈곤층, 이민자 등)의 투표참여를 배제하고자 ‘투표자 신원확인법’을 제정해 신분증이 없는 미국 시민들의 투표를 차단하고자 했다. 선거는 시민들이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꽃조차도 어떤 집단에 의해 장악되고 조작되는 일이 교묘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상상력을 훼손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인간은 애초에 이기적인 동물이다.’라는 경제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인간본성론은 사람이 경쟁과 불평등을 당연시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덜 떨어진 인간, 노력하지 않는 인간, 착취할 만한 인간을 타자로 규정함으로써 차별을 고착화하고 폄하를 정당화한다. 미국에 자리잡은 ‘성취이데올로기’는 남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열등감과 자괴감을 겪게 만들고 스스로를 탓하게 하여 불평등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한다. 애초에 사람들은 동등한 자원을 갖고 출발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사람들을 수용할 자리도 없다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눈 앞에 보이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실패한 사람은 그 사람이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임은 개인에게 떠넘겨 진다. 특히 ‘대안은 없다’라는 비관적인 이데올로기는 현실이 그나마 낫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킨다. 이 작업은 대안을 추구하는 행위를 사전에 방지하고 불평등한 구조를 고착화한다.

 

조작자들이 일반 서민들의 상상력을 훼손 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함으로써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떠한 행동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차적인 이득이나 혜택을 의미하는 ‘개평’은 사람이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정체성’은 개인을 시민으로, 노동자로, 학생으로 규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든다. 정체성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일관성을 부여해준다. 하지만 정체성이 부정당하게 된다면 개인은 공동체로부터 타자가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타자의 위치는 불안과 차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위험을 담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역할이 집단의 역할 전반에 얽혀있다는 ‘책임의 그물’안에서 개인은 집단의 책임과 맥락을 같이한다. 집단이나 공동체 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냐에 따라 자신이 용납될 수 있는지 여부가 달라진다. 그 책임의 그물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고 싶다는 사람의 욕구는 현실을 더욱 고착화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젠더와 인종차별과 함께 더욱 악화된다. 저자는 불평등에는 근본적인 위계가 있다는 ‘억압의 위계’를 반대한다. 불평등을 양성하는 모든 원인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상호작용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남성의 우월함을 주요한 헤게모니로 간주하는 미국에서는 여성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한다. 인종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역시 환상에 기반한 인종적 구분을 통해 흑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착취를 정당화한다. 가난한 백인들은 여전히 백인이라는 정체성 덕분에 지배계층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며 흑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앞장선다. 인종주의는 백인 노동자 계층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피처를 마련했으며 인종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대통령을 선출하게 만들었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었으며, 일반 사람들 조차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반대자들은 신뢰할 가치가 없는 바보들이며 오직 자신의 이기적 목표만을 갈구한다. 현존하는 체제를 폐기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우리의 현재 지도자들은 현명하고, 경험이 많으며, 모든 사람들의 최선의 이익을 늘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야 한다. 제안된 변화는 무질서와 혼돈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는 말썽꾼들이 주장하는 무책임한 극단적 변화가 아니라 약간의 조정에 지나지 않는다. P329

 

불평등의 함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개인들의 의식변화를 요구한다. 타자를 인간으로 바라보고 모순을 향해 질문한다. 타자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들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우리가 누리는 안락한 생활에 다시 빠져드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항상 ‘만약에?’ 라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가 당연히 여기던 모순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은 ‘대안은 없다’라는 현실도피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조작된 게임을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연대의 문화를 통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정치권력을 제한해야 한다. 정치적 영역의 재생산은 지배계급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협동 조합을 만들어 내며 실질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 근간에는 마르크스주의가 담겨있다. 사회문제의 근간을 착취로 바라보았다는 점, 국가 질서는 지배계급이 부를 축적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저자의 주장에는 여러 한계를 담고 있다. 불평등의 문제를 너무 구조적인 측면에만 치중했다는 것, 연대의 사회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을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는데 만 치중하는 탐욕적인 돼지로만 바라본 것 같다. 이는 현실을 너무 단편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저자는 적절한 현실 사례와 직접 지어낸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책의 이해를 돕는다. 어떻게 우리사회에서 불평등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는 통계를 봐서는 잘 알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의 수업에서 학생 열명에게 사회에서 부가 배분되는 비율에 따라 종이접시를 나눠주었다. 결과는 최상위층으로 대표되는 첫 번째 학생이 대부분의 종이접시를 가져갔다. 이는 저자가 불평등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기 위해 시도한 자작극이 아니다. 현실임이 틀림없다. 저자는 불평등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지배계급의 놀음에서 희생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의 주장 곳곳에 담겨있는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책 어디에도 아렌트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가 폭력과 권력을 구분한 점에서 아렌트의 저서 폭력론 의 핵심 주장을 엿볼 수 있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비판하며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은 서로 다른 것이며 권력은 정치적 행위자들의 공동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슈웰비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펜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P237



“진정한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펜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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