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류본사 -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본 1만 2,000년 인류사
이희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평점 :
반가운 마음으로 읽은 『인류 본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소화할까 생각한다. 학교에서 서구중심 세계사를 배우고 가르쳤기에 첫째, 세계사를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보기, 둘째, 알고 있던 내용에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기, 셋째, 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을 언급하여 더 깊게 배울 방향 찾기에 중점을 둔다. 끝으로, 『인류 본사』가 가진 의미를 찾는다.
1부 : 아나톨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 1만 년의 역사
첫째, 세계사를 오리엔트-중동의 눈으로 보기는 서구중심 세계사와 비교한다.
그리스 문화로 배워온 지식이 아나톨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중동 일대에서 일어난 문명(오늘날 튀르키에)의 소산이다. 헤로도토스, 호메로스, 히포크라테스, 밀레투스 3대 철학자인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만드로스도 아나톨리아 문명이 길러낸 인물이다. 성서고고학 측면에서 아라라트산은 노아의 방주가 걸렸다고 추정되는 산이고, 에덴동산, 아브라함의 활동 무대였던 하란, 사도 바울의 생가, 초대 7대 교회와 산타클로스의 실제 무대인 성 니콜라스 주교 성당이 아나톨리아반도 문명에 속한다. 1만 2천 년 전 신전도시 ‘쾨베클리 테베’, 트로이, 히타이트, 황금 손을 가진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신화와 전설이 넘쳐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대항해시대, 종교개혁,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19세기 과학의 시대, 20세기,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우리가 배워왔던 세계사, 특히 서양사의 큰 줄기다. 저자는 그리스-로마 문명은 인류 문명이 뿌리이자 모태인 오리엔트에서 뻗어 나간 줄기 문명이라고 본다. 왜곡하거나 가볍게 취급한 아카드, 바빌로니아, 페니키아, 트로이, 프리기아, 아시리아, 우라르투, 메디아, 페르시아,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압바스 제국, 사파비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관점을 『인류본사』에서 시도한다.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아나톨리아는 ‘해 뜨는 곳(anatole)’이란 의미다. 쾨베클리 테베 발굴로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 혁명을 정착 생활의 시작으로 보았으나, 농경 이전의 수렵과 채집이 주된 구석기시대에서 대규모 도시 공동체와 문명이 존재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헬레니즘’이란 알렉산더의 동방 침략 이후 이 지역에 전해진 그리스 문화의 흔적이나 융합적 요소에 갖다 붙인 지극히 그리스적인, 나아가 서양 중심적인 표현이다.”(p. 211)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저자는 알렉산더가 1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광대한 페르시아를 발아래 두었다고 헬레니즘의 승리로 주장함은 지나치다고 본다. 알렉산더가 그리스 문화를 이식하여 오리엔트를 변화시켰다는 주장은 유럽 중심적인 오만함에서 비롯된 과장(p.212)이다. 저자는 오리엔트에 세운 그리스계 후계국가들이 오리엔트 지역의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소멸한 점에 유념하자고 말한다. 노엄 촘스키도 같은 맥락에서 유럽 중심적 시각은 미국 자본주의가 20세기에 만든 프로파간다라고 한다. 알렉산더는 동방 원정에 그리스 학자들을 대동하고 다녔고, 이를 토대로 헬레니즘 문화를 형성했다고 배우고 가르쳐왔다. 알렉산더의 유명세는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그리스-로마 작가들 덕분이다. 고대문자의 해독과 고대 문헌을 이해하게 되면서 동서양 역사 인식이 균형을 잡아가고 있지만, 중동에서, 저자는 알렉산더의 동방 침략을 “단 13년 동안에 벌어진 인류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침략전쟁이자 약탈 전이었다.”(P.224)라고 평가한다.
둘째,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던 내용에 새로운 지식을 보탠다.
1986년 사세휘가 쓴 『세계사를 서양인의 눈으로 보지 말고 동양인의 눈으로 보자』는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가 아닌 '일본인의 안목으로 본 세계사'에 관한 책으로 지적 호기심을 일으킨 첫 책이었다. 정수일의 『이슬람 문명』, 타임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은 오리엔트-중동에 관한 이해를 돕는 책으로 유익했다. 이를 통해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 소화하려고 한다.
함무라비 법전 조항 중 부부관계에 관한 내용은 놀랍다. “아내가 남편과 잠자리를 거부할 경우 그 배경과 전후 사정을 조사해 아내는 정절을 지키고 과오가 없는 반면 남편은 외출이 잦고 평소 아내를 크게 멸시했다면, 아내를 나무랄 수 없다. 그러면 아내는 자기 재산을 가지고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p.79) “빚 때문에 노예가 된 경우 채권자의 집에서 3년 동안 노예로 일하게 한 뒤에는 풀어줘야 한다.”는 조항으로 보아 노예는 중세 농노보다 처지가 나은 듯하다. 저자는 신이 함무라비 왕에게 통치권을 주고 주문한 두 가지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왜 5 공화국이 떠오르는지…….)할 것과 약자가 고통받지 않는 국가 운영이라고 본다. 서구인들이 “게르만인은 모두가 자유롭고, 라틴인은 일부가 자유로우며, 오리엔트에서는 한 사람만 자유롭다며 절대권력 체제가 오리엔트의 특징"이라고 강조한 편견을 바로잡아야 한다.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치드키야 왕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21세기에도 이란에서 존경받는다)는 “바빌론으로 끌려와 노역하던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함으로써 성경과 유럽 역사서에서 성인으로 추앙한다.
바빌로니아인들이 남긴 《길가메시 서사시>》는 B.C. 2,000년 경의 작품으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보다 1,500년 앞선 것이다. B.C.1274년 철기와 전차 3,500대를 사용한 히타이트와 청동 무기로 무장한 이집트 간 전쟁을 '카데시 전투'라 한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두 문명, 철기와 청동기 문명이 충돌한 대륙 간․문명 간 전쟁이었다. 두 나라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이집트-히타이트 평화조약(카데시 조약)을 맺는다. 양국 국경선 인정, 상호불가침, 호혜·평등의 원칙을 확인한 전문 12개 조로 인류 최초의 성문 국제조약이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B.C. 550~B.C. 330)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가 외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모반해 세웠다. 나라 이름을 메디나에서 페르시아로 바꿨으나 언어, 지배계층, 문화는 연장되었다. 키루스가 제국을 통치한 대원칙은 다문화 정책과 관용정책이다. 중앙정부에 정치적으로 복속하고 조세를 내고 군사적 통제를 받는 조건으로 개별 국가나 군소 공동체에 일정한 자치와 자율권을 부여했다. 이런 전통은 초기 이슬람 시대를 거쳐 오스만제국 시대까지 이어졌다. 키루스는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에서 고향으로 귀환을 허락하며 수만 명 유대인의 노임을 계산해 챙겨주고 신전을 지을 비용까지 대주었다. (에스라서 1:1~4) ‘키루스 원통’이라는 도기에 새긴 쐐기문자는 인권선언문이다. 이는 세계인권선언의 효시로 여겨진다. 키루스 무덤 주변은 관개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페르시아어로 ‘갇힌 정원’이란 의미의 ‘파라다이아’로 불렸고, 여기서 오늘날 ' 파라다이스(Paradise)’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p. 167)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팔레비 이란 국왕, 이스라엘 건국자 벤구리온, 아테네 출신 역사가 크세노폰(《그리스 역사》를 지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리스 전기 역사이고,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는 그리스 후기 역사다)은 키루스를 예찬했다.
페르시아의 ‘왕의 길’을 벤치마킹한 로마는 역전제와 아피아 가도를 고안했다. 페르시아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이고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조로아스터교의 고대 페르시아식 발음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이원론적 세계로 우주와 인간 세상이 대결구도 속에 진행된다. 인간은 내면에 선과 악 이란 상반된 속성을 품고 있으며, 미리 정해진 운명이란 없고 타고난 이성과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이 선순환하는 생활철학이 교리의 중심이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를 라틴어로 ‘마구스(Magus)’라고 하는데, 페르시아어에서 라틴어,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 magic과 magician가 됐다. 유향과 몰약을 들고 마구간에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다(p. 196) 초상화나 인물이 포함된 상상화, 상징물을 제작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배격했다.
영화 ‘300’에서 묘사된 그리스-페르시아 간 전쟁은 지나친 왜곡이다. 2세기 로마 제정 시대 문학가 루키아노스는 헤로도토스를 거짓말쟁이로 혹평한다. 그리스 작가들이 묘사한 페르시아 전쟁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반세기 동안 11차례 공략했으나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고, 마라톤 전투에서는 패했다. 이란에서 마라톤은 인기가 없단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유래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단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B.C. 330년 알렉산더에게 패하며 220년 역사를 끝냈다.
연꽃은 B.C. 3,000년 경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간다라와 중국을 거쳐 6세기에 한반도 불교문화로 전해졌다.
파르티아(안식국) (B.C. 247~224)
우리 교과서에서 나라 이름 정도만 언급되었으나 파르티아는 500년간 로마에 맞선 대제국이었다.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오늘날 동쪽의 튀르키예 일부, 이라크, 이란을 포함하는 오리엔트 핵심지역을 장악하고 로마와 경쟁 또는 협력하며 471년간 존속했다. 로마와 중국, 동아시아 간 중계무역으로 경제를 다졌다. 파르티아는 로마와 300여 년간 전쟁을 치렀다. 아르메니아 지역이 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충지로 로마와 파르티아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한 지역이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로마는 파르티아를 공격하지 않는다(서로 지친 탓에)는 불문율이 있었기에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하였다. (역사지도를 펼치면 이해가 쉽다) 파르티아가 중국이나 로마에 군사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중앙아시아의 말을 이용해 끊임없이 기병을 양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레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명한 결전이었던 로마와 파르티아 간 전투로 마지막 결전에서 로마의 크라수스가 전사한다. (P. 247) 로마와의 긴 전쟁은 파르티아의 중앙 권력을 약화하기에 충분했다. 파르티아의 주류 신앙은 이란 동부에 뿌리내린 ‘미트라교’였다. 미트라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로 보기도 했으나, 최근 연구자들은 조로아스터교 이전부터이란, 인도 지방에 존재한 독립된 신앙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미트라교가 로마로 건너가 미트라가 로마의 군신이 되고,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로마 상층부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로마인 스스로 미트라교를 ‘페르시아 밀교’라 칭했으니 페르시아 신앙과 관련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로마와 500년 가까이 전쟁과 교역을 통해 접촉과 교류를 했던 파르티아를 떼어 놓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기 어렵다.
《신국론》을 쓴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독교 교리와 불교의 내세관이 가미된 종교로 4세기 초 로마,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위구르, 티베트 불교에 영향을 끼침)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마니교의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정립한다. 천국과 지옥, 이생과 전생, 천사와 사탄, 최고신에 대항하는 악신 등 조로아스터교 신앙의 이원론적 변증법이 기독교 교리 완성에 작동했다고 본다. (P.274)
저자는 인류 최초의 대제국이었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후예로 선조들이 이룩한 제국의 거버넌스를 계승한 파르티아는 로마 못지않게 관심을 기울이고 역사와 문화적 실체를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사산조 페르시아(224~651)
사산조 페르시아는 B.C. 6세기부터 1,200년간 서아시아에 페르시아 문명을 꽃피운 거대한 제국 중 하나로 마지막을 장식한 나라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파르티아-사산조 페르시아) 3개 도시에 아카데미가 있었고, 5세기 설립된 ‘군데샤푸르’의 아카데미는 6~7세기 당대 최고의 학문의 전당이었다.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아테네의 아카데미를 폐쇄하자 아테네에서 쫓겨난 그리스 철학자와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정통에서 이단으로 봄) 학자들이 아카데미 교수진을 형성했다. 인도의 천문학과 점성술, 수학과 의학, 중국의 전통의학이 소개되고 각 지역의 의학 지식이 집대성되어 치유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번역하고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조너선 라이언스가 지은 『지혜의 집』은 더욱 상세하게 기술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화와 예술은 입수쌍조(가운데 나무가 있고 양옆으로 새가 쌍을 이루고 서 있는 양식) 디자인, 아라베스크 무늬, 건축양식 이완(책으로는 알 수 없어 더 공부해야 할 듯) 등은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한반도, 아나톨리아, 발칸반도, 이집트, 이베리아반도까지 퍼졌다. 타지마할과 알함브라 궁전 양식에 드러난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에 멸망하면서 몇몇 왕족과 귀족이 아랍군을 피해 동방으로 도망하다가 당나라에 정착하기도 했다. 《구당서》에 기록이 있고, 사산조 왕족의 후예가 후일 신라로 망명하여 살았다는 내용의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가 발견되었다. (p.309)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으로 오리엔트 세계는 이란 민족에서 아랍 민족으로 주인공이 바뀌게 된다. 1,200년간 축적된 페르시아 문화는 문화적 토대가 축적되지 않은 아라비아반도 중심의 아랍 정치 세력을 문명화한 세상으로 이끈 촉매제 역할을 했다. 페르시아 문명이 안내한 길을 따라간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고, 티무르 제국왕실의 후예는 인도에서 무굴제국을 세웠다.
셋째, 나름대로 아쉬운 부분은 더 깊게 배울 방향을 찾는 소재로 삼는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세 문명은 독립적이지 않고 이미 5천 년 전부터 광범위한 접촉과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현대 고고학이 밝혀냈다. 저자는 에게해에 있는 ‘산토리니섬이 대폭발’한 사건은 지중해를 둘러싼 미케네, 크레타, 트로이, 프리기아, 히타이트, 페니키아, 이집트의 고대 역사와 연결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토대로 가설을 제시한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진전을 기대한다.
로마와 500여 년간 경쟁과 협력했던 파르티아는 다언어, 다문화 사회였음에도 뚜렷하게 문자로 기록된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파르티아 왕실은 음유시인들의 창작을 장려해 수많은 서사시의 전통을 남겨 후대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 서사시의 놀라운 발전을 가능케 했다. 파르티아의 주류 신앙인 미트라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가 불교와 습합(習合, 절충한다는 의미)하여 미륵불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P. 273) 저자는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정한 것도 미트라 전통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P. 298)
P.S. 이완(iwan (페르시아어 : ایوان eyvān, 아랍어 : إيوان Iwan, 철자가있는 ivan, 터키어 : eyvan)은 일반적으로 한 쪽 끝이 완전히 열리는 3면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홀 또는 공간입니다.)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