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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x -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
마크 레빈슨 지음, 김동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THE BOX. 컨테이너의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
2022. 12. 7(수)
우리의 경제 규모 혹은 수준인가가 세계 10위 안쪽에 있다. 누구나 A 대통령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거나, B 대통령 때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거나, C 대통령 때 수직적 문화가 수평적으로 됐다느니 이야기 한다. 현재를 만든 과거 여건, 동력에 대한 논의는 학문의 영역일지 모른다. 경제지리학을 배우며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연결의 경제, 네트워크 경제, 상품사슬, 가치사슬,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GPN)들을 개념화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만난 이야기가 말콤 맥린이 주역이었던 컨테이너화라는 서사시다. 본문 503쪽에 부제가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이라서 평론가는 학문적이라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대서사시다.
1950년대 후반 화물 운송 작업은 수백만 명이 종사하는 도시산업이었다. 이야기는 트럭 운송 산업의 거물인 말콤 퍼셀 맥린이 사업을 키워가는 흥미진진한 논픽션이다. 그는 항구, 선박, 크레인, 창고시설, 트럭, 기차, 그리고 수송과정에 대한 모든 부분이 변화돼야 한다고 통찰한 사업가다. (구글어스를 띄우고 책을 읽어가며 지명을 확인하면 공간을 느낀다)
뉴욕의 브루클린이 1971년 무역항으로 누리던 과거의 영광을 뉴저지주의 뉴어크, 포트엘리자베스 항구로 빼앗기고 뉴욕시의 빈곤 자치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밝힌다. 뉴욕의 발전과 정체 과정에 고속도로의 영향이 있었으나 컨테이너가 이끈 변화는 뉴욕 제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뉴욕은 컨테이너 산업이 도입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범위에 걸쳐 경제적 타격을 받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해운 산업 거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하역 인부이자 철학자인 ‘에릭 호퍼’의 이야기가 나와 반갑다(p.178) 항구의 기계화 및 현대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하역 인부들과 노동조합은 선사와 힘겨루기를 다룬다. 1960년대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읽기 능력도 수학 능력도 없었다. 그저 생계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학력만 있었다. 당시 생산 라인에 있던 미국 노동자들의 반이 10학년의 학력이었다고 한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에서 어려운 과제 중 하나가 컨테이너의 표준화 과정이다. 컨테이너의 크기에 대한 철도회사, 트럭 운송회사, 해운회사의 표준이 달랐다. 1958년 미국 내에서 컨테이너의 1차 표준화의 기준은 너비 2.4m, 높이 2.55m 미만, 길이 문제는 보류였다. 1959년, 1961년, 1964년, 1965년, 1968년, 표준화를 위한 정부와 기업 간 협의를 거쳐 1961년에 길이 3m, 6m, 9m, 12m 규격에만 정부지원금을 주었다. 1968년에 길이 6m가 1 TEU로 정한다. 이 과정에서 말콤 맥린은 기차, 트럭, 선박은 모두 같은 사업체, 즉 화물 운송 산업임을 파악했고 회사 경영 방침으로 삼는 안목이 있었다. 철도가 늦게 복합 운송에 합류한 이유는 lock in 효과 때문이다. 당시 베트남 전쟁으로 철도의 피기백(바퀴달린 철도 화물 수송용 대형 컨테이너) 방식이 3년에 30% 성장하는 실적을 올렸으니. 결국 트럭에 내륙 운송 수단의 영광스런 자리를 내줘야 했다.
컨테이너 보급의 막강한 후원자는 베트남 전쟁을 치르던 미군이다. 1969년 기준, 54만 명이라는 미군을 먹이고 재우고 생필품을 보급해야 했다. 말콤 맥린의 기업가적 감각은 베트남에 화물을 내리고 가는 텅빈 컨테이너선을 일본에 들러 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1968년이면 일제 TV, 스테레오를 컨테이너에 가득 채워 태평양을 건넌다. 1950년대에 미국 해운업은 기차와 트럭의 맹공격으로 쓰러졌으나 컨테이너 상선이 정박하는 뉴어크, 잭슨빌, 휴스턴, 산후안과 푸에르트리크는 번창한다. 또한 컨테이너화는 지역적 한계를 탈피할 기회를 주어 서부의 시애틀,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가 신식 부두를 건설해 성장을 따라간다. 유럽에선 런던과 리버풀은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이 줄고, 로테르담이 빠르게 성장했다. 아시아에서 요코하마, 고베, 도쿄, 홍콩이 항구의 컨테이너화에 동참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전폭적인 투자로 동참했고, 2005년에 일반 화물 취급 규모 세계 1위가 되었다. 약 5,000군데 국제 회사가 싱가포르를 화물 무역 중심지로 사용했다.
1969년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아버지 격인 말콤 맥린은 시랜드사를 완전 매각한다. 60년대 말 70년 대초가 되면 전쟁 잉여 선박인 군함을 개조하거나, 일반 상선을 부분 개조한 것에서 벗어나 순수 컨테이너 화물선이 주류를 이룬다. 한편, 컨테이너선의 폭증은 해운사 간 운임요율 전쟁을 유발한다. 여기에 오일 쇼크까지 겹치자 수익이 줄어들게 된다.
말콤 맥린은 1977년 그의 주식을 모두 팔고 돼지농장을 만들었으나 돈이 되지 않았다. 1978년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해운사를 새로 인수한다. 규모가 더 크고, 속도는 좀 느렸던 컨테이너선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쳤으나 1986년 회사는 파산한다. 타이완의 에버그린 해운선사는 1982년에 2,700 TEU의 컨테이너를 싣고 세계 일주 화물 운송 서비스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후 해운업계는 더 큰 컨테이너 화물선이 건조되고, 1분에 1개 컨테이너를 옮길 수 있는 대형 크레인이 속출했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비를 좌우하는 요소는 하역비와 화물을 배송하고 빈 상자로 돌아오는 경우 맡아야 했던 재정 부담 등의 고정 경비였다. 1969년 제2세대 화물선의 디자인으로 비용은 낮아지고, 70년대 초반 화물 운송 능력이 브레이크 벌크 화물선의 실적보다 4배가 늘었고 속도로 빨라졌다. 70년대 오일 쇼크는 업계에 충격이었다. 화물운송비 파악은 쉽지 않으나 정기선인 컨테이너선과 비정기 벌크 화물선인지가 중요했고, 환율, 인플레이션, 연료비 등의 요인이 작용한다.
1980년대 ‘JUST IN TIME 시스템’(적기생산방식)은 경제적 효율과 품질 향상을 이루어낸다. 이는 컨테이너 화물 운송 없이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JIT가 수월해졌다. 컨테이너 화물선은 세계 경제를 연결한다. 경제의 세계화, 노사 관계와 고용, 통상과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이 무역 국가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단순한 12m 길이의 직육면체 BOX 컨테이너가 낳은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