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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음 / 샘터사 / 2020년 3월
평점 :
똑같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같은 일상의 에피소드를 겪어도 유난히 재미있고 흥미있게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 친구가 있을 때 때로는 직접 그것을 보기 보다 그 친구의 입을 빌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맛깔나고 찰지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혹은 막장 드라마를 보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저자의 글이 참 맛깔나고 재밌으며 찰지다는 느낌을 받았죠.
"이봐, 수도사 나리, 어리석음이란 이 지상에 너무나 필요한 것이야. 세상은 어리석음 위에 세워져 있고 그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몰라.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알고 있는 거라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어리석음이란 게 세상에 그렇게 필요한거야? 정말? 나는 아주 큰 위안을 얻었다. 애써 짚어 볼 필요도 없이 내 인생은 어리석음으로 점철돼 있으니 말이다. (p. 50)
고전 문학을 잘 알지 못하고 많이 읽어 보지 못한 저에게 저자의 글은 도스토옙스키와 저를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더군요. 이름도 어려운 그의 작품,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어려운 이름. 막연히 도스토옙스키는 굉장히 어려운 내용의 책들을 썼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요. 제가 살고 있는 지금과는 훨씬 옛시대를 살아온 그의 작품에 나타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스토리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 흥미를 갖게 만드는데에는 저자의 찰진 글이 한몫했던 것 같습니다.
도스토엡스키를 읽는 동안, 나는 고전이야말로 막장 드라마의 기원이었구나 싶었다. 어디 도스토엡스키뿐일까. 철학도 문학도 공부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삶의 많은 순간이 막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막장에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인생의 진짜 얼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품격 있고, 아름답고, 따뜻한 순간은 마구 달리는 막장 열차가 드물게 정차하는 기차역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천하의 도스토엡스키 소설이 이렇게까지 콩가루가 흩날릴 순 없지 않을까.
그래서, 위로가 되었다. 아, 예로부터 인간이란 이렇게 비루하고 남루해서 삶의 의미를 잃기도 했겠구나. 이렇게 가족 친구, 동료와 불화하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면서 자괴했구나. 누군가를 죽일 듯이 증오하고 욕망에 눈이 멀어 도의를 저버리기도 했구나. 인간이란 존재가 원체 이렇게 생겨 먹은 걸, 나인들 어쩌겠어. 최선을 다해도 누구나 형편없는 상황에 처할 떄가 있는 건 삶의 이치인지도 몰라(p. 281-282)
나 역시 열차 안의 로고진과 예빤친 장군처럼 <백치>를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백치미 '뿜뿜'하는 이 공작에게 빠져들었다. 도스토엡스키 소설 주인공들은 대체로 '지하 생활자' 같은 존재들이기에 단숨에 매력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공작은 대단히 새로운 존재였다.
아니, 이 남자 뭐야? 어쩌자고 이렇게 솔직하지? 이 정도 형편이라면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도 모자라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의 허약함과 궁색함을 감추기 위해 적당히 거짓말을 일삼거나 허세를 부려야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무언가 숨기거나 꾸밀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정신상태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럴 수 있다는 건 열등감을 느끼지도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는 뜻일 텐데,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 내적 힘을 어떻게 갖추게 되었을까? (p. 167-168)
저자는 오랫 동안 일하던 회사를 때려치고 재취업에 성공하여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는데 1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드럽고 치사한 그곳에서 상사와 맞짱을 뜨고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고 합니다. 호기롭게 나오는 과정에서 책상에 남겨진 자신의 물품들은 그대로였죠. 그런 상황들 속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저자는 과외 알바를 하며 읽었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을 펼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멋짐 반 허세 반 읽으며 다녔지만 내용이 제대로 와닿지 않았던 20대와 달리 최악의 상황 속에서 그의 소설안에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마주하게 되고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였다. 가정교사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 일의 책임은 바로 장군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어째서 장군님이 저를 대신해서 남작님께 책임지겠다고 나섰습니까? 제가 장군님 집안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도데체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단지 장군님 집에 있는 선생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자식도 아니고 당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장군님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저 또한 법률적으로 권한을 갖는 한 인간이고 나이도 스물다섯 살입니다. 대학의 박사 후보생이고 귀족입니다. 그리고 장군님과는 완전히 남남입니다." (미성년 중에서)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뭐야, 왜 이렇게 멋있는데. 왜냐하면 나라면 내 언행이 고용주의 체면과 인간관계에 흠을 냈다니, 용서를 구하느라 정신을 잃고 해고 통보라는 중요한 문제를 뒤늦게 인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p. 209-210)
애석하게도 가정교사에게는 먹히질 않는다. 왜였을까? 그들이, 그 귀족들이 결코 눙치고 넘어갈 수 없는 무엇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주도권 문제였다.
"남작은 나를 마치 장군의 하인 취급하면서 나에 대한 불만을 장군에게 호소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첫째, 내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둘째, 내가 마치 자기 한 몸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같이 얘기할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요지였다." (노름꾼 중에서)
설득에 실패할 듯하자 프랑스인은 사탕을 발라 가며 말한다. ... 그러자 가정교사가 빽 소리를 지른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쫓겨났다는 말입니다!" 가정 교사는 자신이 장군의 집안이나 권세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곳은 단순히 일자리였고, 자신은 약속했던 노동력을 제공할 뿐이었다. 자기 인생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걸 해결할 권리는 오직 자신에 있었다. 자기 인생은 자신이 대변할 뿐이었다. 브라보! 브라보! 나는 그에게 정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p. 211-212)
원래 몇 장만 읽고 다른 일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이 책을 펼치고 나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 속의 그들이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 혹은 어디선가 들었던 누군가, 혹은 나 자신과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들을 보고 저자가 느낀 것들을 따라가는 재미도 쏠쏠 했습니다.
"내 생각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지는 마십시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에서)
나는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맞아, 그렇지. 적어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타인의 생각보다 내 생각과 감정이 우선이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지. 너무 당연하잖아. 만약 사람이 정말 이럴 수 있다면 조시마 장로의 말대로 평심을 잃지 않을 수, 즉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 <미성년>의 돌고루끼만 해도 우역곡절 끝에 첫 월급을 받은 날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그 정도의 비용을 받을 만큼은 일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역시 내 말을 듣고 나서 내게 정당한 비용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미성년 중에서) (p. 86-87)
<백야>의 주인공처럼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고, 직장과 돈도 없이 있는 것이라곤 낮은 자존감뿐인 사람을 여전히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많은 시대 아닌가. 누군가에게는 혹은 어느 시대에는 당연시 되었던 연애와 결혼, 출산과 취업, 내 집 마련과 건강, 돈독한 인간관계가 시나브로 높디 높은 허들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이방인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는 저성장, 저출산을 염려하며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덕담을 이제는 조금 바꾸었으면 좋겠다. 우선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러자면 사회가 변해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변화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우선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p. 133-134)
마침 이 책을 읽기 전에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에 빠졌던 유명인 중 한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재정난에 시달렸고,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늘 마감에 쫓겼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도박하는 인물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런 밑바닥 속에서 그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인간의 날 것 그대로의 상태를 많이 마주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러한 날 것 그대로가 사람들의 겉모습 이면에 있는 진짜 모습을 통관하여 보게 하고 그러한 모습들을 작품에 녹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바샤를 구해야만 해. 그를 자기 자신과 화해시켜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망치고 말거야.' (약한 마음 중에서)
정확한 판단이었다. 행운 같은 연인의 애정도, 진실된 우정도 바샤의 약한 마음을 구원해 주지 못했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어느정도는 바샤와 같지 않을까. 내 뒤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신경 쓰일 때, 어렵게 던진 유머에 분위기가 썰렁해져 나 자신이 싫어질 때, 주문한 짜장면이 아닌 짬뽕이 나왔는데도 아무 말 못 하고 꾸역꾸역 먹을 때, 상대의 요구를 잘 거절하지 못하는 데다 어렵사리 거절해도 미안한 마음이 들 때 우리 안에 있는 바샤가 고개를 드는 것 아닐까? (p. 224)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곳은 비슷하구나,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들도 느꼈구나 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마 가장 힘든 시간에 저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고 이와 같은 책을 내기까지 저자도 같은 느낌을 받았겠지요.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과하거나 호들갑 떨지 않으면서도 재치있고 담백하게 풀어내어 세상에 낸 저자가 감사하게 여겨졌습니다. 저자의 글을 통해 저도 위로를 받았으니까요. 저자의 다음 책이 궁금해집니다. 다른 문학작품을 저자의 눈을 통해 어떻게 비춰지는지 기대가 됩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행복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요! 행복한 인간으로요. 누가 알겠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내가 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백야 중에서)
나는 이 난데없는 고백에서 '나 자신과 화해'라는 구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가 될 수도 있구나. (p. 128-129)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s://blog.naver.com/sak0815/221859609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