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돈이 없어도 사업을 한다 - 스펙도 나이도 필요 없는 주말 48시간의 기적
프레이저 도허티 지음, 박홍경 옮김, 명승은 감수 / 비즈니스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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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참 실질적인 것같다.

돈, 시간, 기술 없이도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노하우에 관한 책이다.최소한의 비용으로 창업이 가능한 노하우를 알려줘서 초기자본이 적은 사람들에게 좋은 방법을 소개한다.

한국인들의 사업스타일은 은행빚부터 끌어다 개인사무실부터 차린다.하지만 이들은 절대  그런 허세부리지않고 혼자서도 사업꾸릴만큼 알뜰하다.대신 반짝이는 신상품내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시작한다.창조가 아니라 재발견하라는 건 가장 간단한 리노베이션으로 하는 사업이다.광고도 홍보한답시고 돈 쏟아붓는 한국인들과 달리 sns나 컴쀼터마케팅만으로도 효과적으로 가능하다.

사람들이 이런  책을 보면서 '저 사람은 운이 억세게 좋았어'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이야기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 ...

독창적이 되려는 시도를 하기전에 무슨 아이디어라도 일단 행동에 옮기라. p73 직접 해보지 않으면 이러한 프로세스를 알지 못한다.

참신한 생각이  떠오르면 어떻게 발전을 시켜서 사업을 진행하고 실제 상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나만의 소개로 단골이 될만한 고객을 모으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해야하는지 이 방법이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한번 해 볼만하다.

작자는 많은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실패하더라도 절대 희망을 버리지말고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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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하다 생긴 일 - 만화 그리는 해부학 교수의 별나고 재미있는 해부학 이야기
정민석 지음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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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되기위한 눈물겨운 길이 유머스럽게 묘사되었네요.그렇게 힘들게 해부학을 배워 인술로 쓰는 거란 생각이 드네요.독자는 쉽게 읽지만 공부하는 이들은 힘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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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생각의 기술
박종하 지음 / 김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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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논리와 숫자로만 채워진 딱딱한 공학분야라고 생각하기쉬운데 의외로 인문학적인 면도 있네요.음악이나 미술도 수학적계산이 안 깔리는 분야가 없네요.사고의 자유가 수학적 아이디어의 시발점이네요.너무 겁먹을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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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과학 - 원자 무기에서 달 탐험까지, 미국은 왜 과학기술에 열광했는가?
오드라 J. 울프 지음, 김명진.이종민 옮김 / 궁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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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과학산업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놀랍군요.냉전이 그런 부수적인 과학발달 효과가 있었네요.아직까지 한국은 꿈꾸기힘든 분야지만 북핵때문이라도 대한민국도 첨단과학분야에 관심좀 가져야겠네요.군사기술이 머잖아 민간사업화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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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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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엄연히 유교이며 성리학에 찌든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백년 역사속에 다분히 그시대의 반항아들,혹은 백성을 제몸같이 생각하고 사회개혁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킹메이커였다. 고려시대의 불교에서 조선조의 유교로 사상적기반을 변화시킨 일이나 토지제도 개혁으로 신진 사대부와 백성에게 경작할 땅을 분배하고 다소 공산주의내지 사회주의성격이 짙은 주나라시대 정치를 회귀하려한 걸보면 그는 다분히 혁명가였다.조선의 개창은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그에게 운을 주지않았으니 방도전의 왕자의 난때 역신으로 몰려 제거되고 만다.천인의 핏줄이 섞여 권문세가의 멸시를 받은 그가 새왕조를 꿈꾼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군주란 권력의 양분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 있나보다.이성계를 이용하려 한 정도전은 결국 잘난 아들 방원을 이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구상한 조선의 기본건국이념은 변질되어 명나라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만일 그의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만일 그가 주장한 주나라시대 재상중심의 정치가 실현되었다면 조선이 군주독재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

 허균은 조선왕조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란 건 홍길동전이나 율도국건립을 통해 알 수 있다.임난이후 사회모순이 드러난 조선사회를 그는 한심하게 여긴 것같다.서인기득권은 정권을 유지하려고만 했고 백성의 고통은 외면했다.그러나 그의 급진혁명적인 생각이 그 시대에 허용될 리 없었다.결국 광해군시대의 정쟁에 말려 이상을 펴지도 못한채 처형되었다.

 윤휴가 북벌을 계휙하면서 호포법 주장을 이미 효종때했으나  좌절된 것은 순전히 권력기득층의 횡포때문이다. 결국 균역법은 영조때나 이루어졌다. 양난으로 민생이 피폐한 데도 권력층들이 자신들의 잇권만 따지는 건 지금도 같다.

 김육의 대동법은 조선역사에 세금의 부과를 획기적으로 통일시킨 제도였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안다는 건 김육 자신이 숙청되어 경기도광주에서 숯을 구우며 가족을 부양할 때 체험했을 것이다. 양반은 굶어도 노동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시대에 천인으로 여겼던 숯굽는 일을 하며 노동을 한 그는  재상이 되어서도 민생의 고단함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정치인이 지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본디 임난이후 경기도에서 유성룡의 주도아래 시행된 수미법은 그시대에도 찬사를 받았으나 권력층의 사대부들의 반발로 결국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오죽하면 재상이던 유성룡이 수미법과 면천의 시행으로 실각하기까지했을까? 이토록 오래걸린 내막을 보면 어이없기 짝이 없다.대지주와 양반 사대부들이 경작결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단느 것을 깨닫고 세금을 내지않으려 온갖 명분과 핑계를 대고 이미 시행된 대동법조차 폐기까지했다.그때도 양반층 기득권층 대지주의 조세저항이 극심했나보다.그 격렬한 지탄과 반대를 싸워가며 대동법을 추진한 김육도 대단한 사람이다.역대 제왕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김육처럼 민생을 돌봐주었더라면 전대통령들이 줄지어 감옥에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변덕스러운 숙종이 사대부지배층의 최고정점에서  대동법이 세금의 징수에 유리한 것을 알아채고 끝까지 법제화한 것이니만큼 온전히 백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앙정부의 착취가 덜해진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다.유서에서도 노망난 대신의 말은 대동법외에 쓸데가 없다고 할만큼 김육은 평생 대동법시행에 정치생명을 걸었다.경신대기근전에 시행된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대동법으로 공납이 없어지고  공인들의 활동으로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킨 건 한편의 역사의 장이다.그러나 이런 좋은 세법도 19세기 삼정이 문란해지며 빛을 보지 못했다.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잘 운영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서자들은  조선조에서 평민층의 부러움과 동시에 양반사대부들의 괄시의 대상이었다.

 정조시대나 되어야 서얼허통이 빛을 보았다. 실학자들의 생각이 유학에 찌든 양반 관료들보다 더 획기적이고 현실적이다.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다고 한 박제가나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유수원의 생각이, 노동하지 않는 양반은 먹을 수 없다고 깨우치는 실학자들의 주장이 노동을 천시한 양반들에게는 저주였을 것이다.박제가 ,박규슈..그들은 비록 서얼들이었지만 민생의 고단함을 알고 실리적인 사고를 했다.왜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 근대화에 뒤쳐졌나보면 유교가 국가를 말아먹은 것같다.일본만해도 사무라이들이 농사를 짓는데 양반은 기술직과 생산을 천시하며 글만 외기 좋아하니 한정된 관료의 자리에 잉여인구가 제구실을 못하고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라도 등과해서도 관직을 제대로 얻지못해 가난에 찌들어산다는 건 이미 그시대의 사회문제였다.지금도 많은 청춘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한다. 정조가 그들의 실용가치를 알아채고 규장각부터 등용한 것은 그 시대의 빛이었다.하지만 중인과 서얼들이 잡과로 관직에 나가 중국 청나라의 실용주의 노선을 걸으며 새시대의 분위기를 선도했지만 관습적인 사고는 크게 양반관료들과 변하지않은 것같다.  대다수 중인들은 몰락한 양반들과 통혼하며 신분상승을 꿈꾸었지만 사회개혁을 할 의지는 그만큼 없었나보다.그러한 실질적인 정책과 이론들이 불행히도 채택되지 못했지만 그러한 선각자들이 있었단 것만으로도 조선이 꽉 막힌 사회는 아니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천재들의 의견이 조선사회에 어느정도라도 수렴되고 실천되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사회를 살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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