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장르'라는 말이 태어난 영화 <기생충>을 개봉일(5월 30일)에 봤다. 이틀 뒤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라고. 감상평을 듣고 싶었으나 하루를 참았다.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역사를 쓴, 칸느영화제의 그랑프리_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내게는 개운치 않은 뭔가가 남은 작품이었던 것, 그렇게 열심히 관련 기사를 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내가 극장을 나선다는 지인에게 보낸 문자는 다음과 같다. '스포일러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

 

스포일러주의보 발령! '스포일러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

이 영화의 감독도 영화제 현장에서 세 개의 언어로 스포일러 주의를 당부했다 하고, 귀국 후 인터뷰에서 그런 당부를 잊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존 영화 문법의 모범답안을 뛰어넘는 플러스 알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칸느영화제를 의식하고 제작한 것은 아닐 테지만 결과적으로 칸느영화제 수상을 위한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칸느 영화제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나름대로의 흥행과는 반비례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재미 삼아, 또는 나의 대중성 인지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흥행 예측을 해보곤 하는데, 수상 효과가 적지 않게 작용하겠지만, 그런 사실을 배제한다면 ‘대박’까지 기대하기는 좀 힘든 영화가 아닐까! 한 편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그런 기준으로 볼 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앙금처럼 남았다. 해서 개봉중인 다른 영화 한 편(<악인전>)을 극장을 옮겨가면서까지 관람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글은 어제 조조(5000원이란 착한 가격 덕분에)로 한 차례 더 <기생충>을 보고서 쓰고 있다(그게 뭐지? 스포일러 때문에 훗날 쓰기로 한다).

 

이틀 만에 한 차례 더 본 영화,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앙금처럼 남아
내가 혹은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팝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그렇게 분류되는 영화들은 작품성이란 측면에서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너무 진지하고 고단한 삶에서 잠시 떠나 있고 싶은 소박한 바람, 영화 한 편을 보는 동안이라도 현실을 잠시 잊고 싶은 그런 어루만짐에 대한 기대, 이것을 거의 모든 영화들이 지향하는 '대중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봉준호 장르'는 문제소설이라고 하듯 문제(예술)영화와 대중영화라는 '사이' 어딘가에 있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승우는 문고판으로 펴낸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저 아래층에서 끌어올려라>) 얘기한다. "소설은 대체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어쩐지 허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지 않겠는가"(책 146면)라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듣는 소설은 지표수의 물론 만든 맥주와 같다는 것, 그는 '지하 150미터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로 만든' 맥주의 히트 사례를 예로 들면서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필요하다면 신화를 활용하고 상상력을 풀(full)가동할 것, 상징과 은유를 적극 활용한 소설로 다양성과 개성을 확보할 것을 주문한다.


"만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달라질 것이다. 층이 생기니까. 그 내부의 깊은 층에서 끌어올리려 한다면 메타포나 상징은 지표면의 그렇고 그런 사연들에 대한 및을 비춘다." (책 146면)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 과정을…….

 -작가는 소설 작법을 다룬 이 책에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제시하지만, 인용한 부분의 사례로 그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대표작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2015년(39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뿌리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로 인식의 지평을 넓힌 혹은 연장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인간이 나무로 변신하는 모티브 못지않게 지하(뿌리)의 세계가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새로움을 창조한다.

-오디비우스의 『변신이야기』는 그러한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상상력 사전이라고 할 수 있으면, 이런 관련성은 다른 글에서 이미 살폈다.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변신이야기』, 가장 오래된 상상력 사전

시간(서사)과 공간(묘사)은 소설에서나 영화, 모든 이야기의 기본 구성요소다. 우리 삶의 전제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좋은 소설(이야기)에 대한 이승우의 주문에도 A플러스 학점을 받을 만큼 모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반지하-지상이라는 현실 속 공간에 대한 설정, 그것은 또한 상상력의 영토를 확장이며, 동시에 인간들의 빈부 차이(계급갈등)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 점이 돋보인다.

영화의 주요 공간인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이라는 공간의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부엌 창고에서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는’ 혹은 ‘떨어지는’ 계단에 주목한다. 잘 다듬어진 잔디 정원은 '그렇고 그런' 풍경일 수 있지만 지상층과 2층(이상) 공간들은 실제 집의 구조보다도 넓고 쾌적한데, 지하의 세계와 극적 대비를 이루는 설정으로 읽힌다. 어쨌든 영화 <기생충>은 서사를 제외하고도 공간에 대한 묘사(세트 설정과 세팅)만으로도 상당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지상, 현실 공간에 대한 설정, 빈부 갈등에까지 연결

"아무리 튼튼한 담론이라고 해도, 아니, 튼튼할수록 더욱더 스스로 몸을 해체하여 다른 몸으로 변신하여야 한다."(이승우 같은 책, 141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지하(저승)를 통치하는 은둔의 신 하데스가 딱 한 번 직접 등장할 법한 사건이 벌어진다. 제우스의 재가로 올룀포스의 신들까지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아군)에 가세하여 총력전이 벌어지는 20권에서다. "좀 조용히 살게 해주면 안 되겠니?" 요란한 지상의 전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참전하는 것(여기까지),

 

*영화 <기생충>에서 펼쳐지는 지하의 세계에 대한 설정은 (특히, 3월에 개봉한 <어스US>를 비롯 지하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지만) '한국적인' 현실성이 겸비되면서 관객을 새로운 차원으로 안내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9-06-0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이승우) <시간이 만든 소설, 공간이 만든 소설> 마무리 부분에서 이 글의 제목을 차용했다. ˝안개나 비고 그냥 내리지 앟는다. 현실 속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 표현할 이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다 ˝(153면)
 

2017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독일, 감독 위르겐 플림)은 2018년 5월에 개봉되었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현재 무대에 올라 공연중(2019.03.02~2019.06.30, 서울 종로구, 명작극장)이다. 연극으로 영화로 책으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함께 잘 알려진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원형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퓌라무스와 티스베」다.
[자세한 이야기는 필자의 리뷰: '변신이야기'와 '이솝우화'에서 만나는 뽕나무와 오디, 참고].

필요시 클릭, https://blog.aladin.co.kr/791561146/8257185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원형은「퓌라무스와 티스베」
19세기 근대 역사학자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유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에서 다시 흘러나왔다고 말했다.(위의 책 옮긴이 서문) '흘러들어갔고' 앞에는 '그리스문화'가 자리할 것이다.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원형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는 믿음에는 숱한 균열이 생겼지만, 그래도 남녀 혹은 여남의 사랑이 완전하고 안전한 것이기 위해서는 결혼이란 제도가 필요하다. 다만 결혼이 사랑의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랄 뿐. 어쨌든 결혼은 당사자들만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관계 맺음이다. '때문에' 서로 눈이 맞은 연인들이 숱한 장애물을 넘고 넘어 결혼에 이르고, 그 사이에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다.

 

랑케, "고대의 모든 역사는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에서 다시 흘러나왔다."

이것은 실화다! 한국의 섬이란 섬을 두루 여행하며 글을 쓰는 강제윤 시인은 섬을 탐사하는 동안 수집한 신화와 전설들을 들려주는데, 다듬으면 보석이 될 원석의 발견과 유포라고 할까? '섬'이라는 고립성 '덕분에' 그러한 이야기가 탄생하고,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신에게, 섬』(꿈의지도, 2015)에는 신화와도 같은 현대의 실화가 등장한다. 제주 서귀포 가파도라는 섬 이야기(「가파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김동욱 전 이장님의 사랑 이야기다.
그에게는 두 살 아래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서울로 갔다. 방학 때마다 고향에 와서 놀이 삼아 물질을 했는데, 어느 날 물속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여동생의 해녀 친구는 해녀대장이던 자기 어머니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다들 외면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을 건져 주면 죽은 사람에게 남은 숨을 다 줘 버리기" 때문에 "다시는 해녀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오래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장님 집안은 여동생의 친구네 집안과 원수가 되었다. 여동생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진 친구를 위로하고 달래는 동안 이장님과 여동생의 친구는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결혼 허락은 떨어지지 않고, 이장님은 유랑의 길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간다. "귀신이 세 개 들어도 남녀 간의 사랑은 못 말린다는데 내가 졌어." 그렇게 10년 만에 이정님은 결혼 허락을 받는다.(책 172~174면 요약) 강제윤 시인은 '사랑은 힘이 세다'며 실화 소개를 마무리한다.
어쨌든 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해피엔딩이다. 그는 가파도를 떠나 몇 달씩 떠돌다 돌아와 살기를 반복했다. 제주도 한 읍의 사무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집을 떠나 유랑하는 시간이 늘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만 하는 선택, 문득 이 이야기를 읽으며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이것은 실화! 서귀포 가파도 이장님 부부의 '로미오와 줄리엣'
"형에 대한 내 감정은 날로 사나워졌다. 그녀에 대한 말 못할 사랑이 간절해질수록 형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허물이 될 수 없다는 명제에만 편집적으로 집착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은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나아가 바람직한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나는 사랑의 보편성에 매달렸다. 하나의 관념, 또는 추상화된 사랑을 붙잡고 늘어졌다."

_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문학동네, 2014, 발표는 2000년) 61면

 

어느날 문득 형의 애인을 사랑하게 된 동생이 겪는 번민인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도의적으로 힘든 사랑, 이 소설의 내레이터인 '나'의 사랑은 처절한 비극의 씨앗이 된다. '나'는 자신의 사랑을 다스릴 수 없어, 가출을 하고 수년 동안 객지를 떠돈다. 나와 형과 형의 연인 사이의 삼각 관계는 이 소설의 사랑 이야기 중 '메인'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가 사랑한 '그분'의 사랑도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 제목이 '식물들의 사생활'('들의')이다. '나'는 가출하면서 사진가를 꿈꾸던 형의 촬영장비 일체를 팔아넘기고, 그 안에 든 필름 때문에 형은 강제징집을 당하고, (당국자들의 고의적인 행위로) 지뢰에 두 발목이 잘려 장애인이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식물'의 세계로 진입한 것.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좌절된 사랑의 고통을 식물적 교감으로 승화해가는 과정을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풀어낸 작품'. (더 이상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듯) 어쨌든 이승우는 『식물들의 사생활』로(프랑스 등에서 번역 출판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지목할 만큼 찬사를 받았다.

 

'한국 작가 중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 가장 높은 작가'로 주목받아
"매끈한 나무줄기가 날씬한 여자의 나신을 연상시켜" 형은 취한 것처럼 말했다. "정말 황홀한 것은 흰 꽃이지. 5월이니까 조금 있으면 꽃이 필 거야.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때죽나무의 흰 꽃들은 은종 같아. 그 아래 서 있으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지." 그의 목소리가 깊은 바다에 떨어지는 닻처럼 어두운 숲속으로 유영해들어갔다.  _같은 책, 47면

이승우의 작품들에는 서양의 신화들이 배경에 깔리곤 하는데,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이 유력한 한국 작가'라는 기대를 모으는 것과 연관이 있다.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대체로 수상작이 결정되기에 하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이승우의 소설들에 그리스-로마의 신화들이 이야기의 원형으로 차용되고 변주된다는 점이 그들의 '공감을 이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펼치는 사랑론이 소개된다(75면). 하지만 소설 전반에 걸쳐 주요한 뿌리가 신화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천병희, 숲, 개정판 2017.10. 초판 2005. 3.)에 소개된 「월계수가 된 다프네」 이야기다.
'활의 신' 포이부스(아폴론)은 쿠피도(에로스)가 활을 구부리는 것을 보면서 비웃고, 쿠피도는 앙갚음으로 화살 두 개를 쏜다. 하나는 사랑을 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불지르는 것. 쿠피도는 사랑을 쫓는 화살을 페네오스의 딸인 요정 다프네를, 다른 화살로 아폴로를 쏘아 그의 뼈와 골수를 꿰뚫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시작! 쿠피도의 복수는 잔인하다. 쫓고 쫓기는 사랑의 공방전이 펼쳐지고, 막다른 골목에 이른 다프네는 아버지 신(페네오스의 강물)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한 그루 나무로 변신한다.

 

『식물들의 사생활』의 밑그림, 『변신이야기』중「월계수가 된 다프네」

그녀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짓누르는 마비감 같은 것이
사지를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가슴 위로 엷은 나무껍질이 덮였고,
머리카락은 나뭇잎으로, 그녀의 두 팔은 가지로 자랐다.
방금 전까지도 그토록 빠르던 발이 질긴 뿌리들에 붙잡혔고,
얼굴은 우듬지가 차지했다. 빛나는 아름다움만이 남아 있었다.  _『변신이야기』, 550~552행

             VS

그래도 포이부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나무줄기에 오른손을 얹어 그녀의 심장이
새 나무껍질 밑에서 아직도 헐떡이는 것을 느꼈고,
나뭇가지들을 인간의 사지인 양 끌어안고 나무에 입맞추었다.
나무가 되어서도 그녀는 그의 입맞춤에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반드시 내 나무가 되리라. 월계수여, 내 머리털과 내 키타라와
내 화살통에는 언제나 네가 감겨 있으리라"  _위 같은 책, 553~559행


신화에서 소설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사랑, "사랑은 하는 것"
쿠피도의 복수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변신 이야기에서 '사랑은 하는 것'임을 추출할 수 있다.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나의 형의 연인인 순미를 향한 사랑, 아버지의 '그분'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폴로의 사랑을 닮았다. "그가 수집한 변신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식물의 숫자보다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좌절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소설, 146면)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으니 이 정도)임을 입증하였다고 할까. 신화는 동서양이 닮아있다. 그럼에도 세계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신화나 그들의 정신세계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들을 꼼꼼히 읽고 변용하여 사용할 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희소식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종려나무 꽃이랍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트로피의 상징은 종려나무 잎이다. 다른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의 경우처럼  '황금'은 '최고'를 뜻하겠지만 사자는 황금색과 연관이 있다. 종려나무는 지중해 일원에 많기도 하고, 최근에는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주겠다면서 가로수로 종려나무를 심기도 한다.

최근에 종려나무 꽃을 보고 아 황금색이구나, 하고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인데, 마침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맛있는 음식을 보면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를까요?'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광고, <사기열전>의 '미자하 이야기'를 상기한다. 그 다음인가, 효(孝) 시리즈의 다음 버전인가, "꼭꼭 씹으면 다 맛집" 이라는 카피가 와 닿는 잇몸 약 광고가 있다.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는 최불암 선생의 내레이션이다. 한 끼 식사만 그럴까? 모든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행본 한 권으로 세상에 나올만한 요건을 갖춘 것이라면, 잘근잘근 씹듯 읽는다면 얻을 것이 있다. 너도 그래, 나도 그렇던데, 감칠맛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책은 고전이 된다. 읽기는 곧 쓰기, 독서와 창작 관련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방송인 최불암, "꼭꼭 씹으면 다 맛집", 책 읽기도 그런 것 같아

"느리게 읽기가 빨리 읽기보다 더 어렵다는 건 느리게 읽기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은 마치 오래 밥을 씹는 것과 같고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의 페달을 아주 천천히 밟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음식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려 하고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 자전거 페달을 느리게 밟다보면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음산책, 2019-02-25) 24면

앞서 거론한 광고 카피가 여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다. 작가 이승우는 우리나라의 중견작가이면서 한 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소설 쓰기와 관련하여 자신의 노하우를 후학들과 나누는 것.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는 소설 창작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소설을 읽어라, 그러면 소설 창작 방법이 보인다. 소설 창작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그런데 작가는, '가급적 느리게 깊이 읽는 것이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독서법의 하나인 정독과 같은 듯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소설을 천천히 읽을 때 문장들은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추동한다는 것, 문장들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나는 1)대들거나 2)반문하거나 3)수용한다. "나의 대듦이나 반문이나 수용에 대한 소설 문장들의 대듦이나 수용이 이어지고,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거기에 하나의 유연하고 둥글고 탄력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바로 이 공간에서 소설이 태어난다는 것.

 

작가 이승우, '가급적 느리게 깊이 읽는 것이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

"섬이 작으니 내도의 숲길은 다해 봐야 3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원시의 숲을 오래 즐기고 싶다면 보폭을 최대한 늦춰야 마땅하다. 급하게 걸으면 숲길은 금방 끝나고 만다. 섬 밖으로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사람들도 달팽이나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어야 한다. 느리게 걸을수록 우리는 숲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몸속의 나쁜 기운들이 더 많이 빠져 나가고 숲의 정령들이 불어넣어주는 맑은 기운은 더욱 충만하게 되리라."  -강제윤, 『당신에게, 섬』(꿈의지도, 2015년 7월) 296면

책 읽기도 그런 것 같다. 일단 재밌고, 감동이 있으면서, 술술 읽히는 그런 책은 아껴 읽게 된다. '강제윤 시인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섬 여행'이란 부제를 가진 책에서 시인은 경남 거제의 섬 내도의 비경을 소개한다. 인위적으로 만든 섬이 잘 알려진 외도라면 내도야 말로 대조되는 자연 그대로의 섬이라는 것. 내도의 편백나무 숲이 가진 탁월함을 소개하면서 숲길이 길지 않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 그래서 몸의 건강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에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 동안 생각은 더욱 깊은 어딘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을 얻는 과정(같은 책 110면). 앞서 소개한 작가 이승우의 느리게 읽는 동안 '나만의' 소설을 쓰게 된다, "유연하고 둥글로 탄력 있는 공간"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좋은 사진을 얻으려면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마저 걸림돌이 된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프레임을 정하고 하루 종일 한 순간을 위해 잠복하는 형사처럼 기다리는 사진의 대가들이 있다.

 

시인 강제윤,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

"창조적 아이디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나오는 것이 창조력이다. 열정과 고민의 산물이며, 뭔가를 개선하고 바꿔보려는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절박해야 한다."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02-25) 43면
그런데, 무엇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하는가, 관련해서 어떻게 쓰느냐와 무엇을 쓰느냐의 차이를 설명한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있어 보이게 쓸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란다. 그러나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고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 앞서 소개한 인용들과 맥락이 닿아 있다.
"글의 중심은 내용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자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 대부분은 전자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명문을 쓸까 하는 고민인 것이다. 이런 고민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감만 키울 뿐이다. 글의 감동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시인도, 소설가도 아니지 않은가."(바로 위의 책)

 

연설문작가 강원국, 글은 열정과 고민의 산물,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나오는 것“

말이 글이고 글이 말이다. 그런데 말은 잘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로는 논리정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말은 어눌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걸림'이 많은 사람도 있다. 말이란 잘 쓴 글을 읽는 것과는 다른 현장성과 임기응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듣는 이를 즐겁게 하는 '애드리브'는 독서를 비롯 숱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축적된 상태에서 터지는 것.   그럼에도 말이든 글이든 숙고 끝에 정곡을 찌르는 것이 아닐 때는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낫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수다에 관하여」가 수다쟁이는 어떤 사람이며, 폐해는 무엇이며, 처방까지 제시하지만 가장 심플한 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확실한 것은, 말을 하지 않아 이득이 된 경우는 많아도, 말을 해서 이득이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 말할 수 있어도. 일단 말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 인간이지만, 침묵하는 법은 신들이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가 비의(秘儀)에 입문할 때 침묵하는 법부터 배우기에 하는 말이다."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8장, 344~345면, 『그리스로마 에세이』(천병희 역, 숲, 2011.12.)

 

플루타르코스,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 인간, 침묵하는 법은 신들이 가르쳐“
글로 말하기보다는 말로 말하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유투브방송을 개설하고, '스피커'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방송을 하는), 콘텐츠의 부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필자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eBOOK의 '음성 듣기'도 거슬린다. 제3자가 개입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눈으로 읽으면서 생각하고, 자신의 견해와 일치(공감), 불일치(메모)를 확인하는 독서야 말로 말이든 글이든 창작으로 꽃피우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칸느영화제)을 받았다. 축하한다. 며칠 전 집 뒷편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올랐다가 중턱 전망대에서 항구 도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이곳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살다 이사갔는데, 그리워서 옛 보금자리 주변을 살피러 왔다는 부부를 만나 뜻밖의 도시의 내력에 대해 들었다. 여행 책자에는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 행운이었다.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전망대 아래에서 들려, 보통 등산객들은 가지 않는 샛길을 따라 절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산기슭에 종려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데, 꽃이 활짝 핀 상태다. 그런데 꽃이 황금색이다. 축하용 화환이건 조문용 화환이건 화환의 장식으로 종려나무 잎은 자주 사용되기에 익숙한데, 맘껏 개화한 꽃을 본 기억은 아마도 처음이었지 싶다. 다른 영화제의 그랑프리 황금사자상이나 그리스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황금양모피, 뭐 이런 식으로 '황금'을 종려나무 앞에 접두사처럼 붙인 것이려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들은 거의 읽은 상태이고, 소장 도서들이라 당연히 있겠지, 싶어 찾아보지만 없다. 아마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나 보다. 몇몇 장면은 떠오르는데, 정확히는 나무들로 변신하는 이야기, 필자에게는 익숙한 그리스-로마의 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도 아슴프레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에 푹 빠져 살던 때는 아니었다. 관련하여 어딘가에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찾을 수가 없다.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급한 김에 eBOOK으로 주문해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미리보기]로 도입부는 이미 읽은 상태, 좀더 읽어나가니 옛 기억들(첫 만남의) 새록새록 재생되기 시작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식물들도 이동을 한다. 『식물의 정신세계』(정신셰계사)에서 입증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수긍이 가는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는 '식물도 생각한다'이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중에는 「동물들에게도 이성이 있지에 관하여」가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을 읽는데 기본 바탕은 정적인 식물이 가진 식물성, 동적인 동물이 가진 동물성의 대비 혹은 대조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립과 갈등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의 감동은 많이 사라져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나무로 변신하는 이야기, 특히, 「월계수가 된 다프네」신화는 이 작품의 밑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모티브일 뿐만 아니라, 나의 형의 <나무들의 변신 이야기>라는 기록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들(34편 가량)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향연』인데, 거기 등장하는(대담자) 인물 중 하나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사랑론, 자웅동체설로 소설 속에는 직접 인용되면서 '변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는 고대 서양 고전들의 영향이랄까, 반영이랄 수 있는 모티브들이 이것 말고도 등장하는데, 동서양의 신화가 닮아 있으니 꼭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그 배경이 떠올라 '감동'이 처음 같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일단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은 독자라면, 앞서 언급한 이 작품에서도 직접 거론한 고전 두세 권쯤을 읽는 것으로 책읽기의 새로운 길을 내보시라는 것.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독자라도(희랍어) 신명, 영웅이름, 지명들이 라틴어로 표기되기에 낯설 수 있다. 그래도 오비디우스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일단 펼친 책을 덮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앞서, 황금종려상 이야기로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잘 알려졌듯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이 소설의 작가 이승우야 말로 한국 작가들 가운데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가장 근접해 있다는 찬사를 보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한 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었디. 이승우 작가에 대한 찬사와 기대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노벨문학상과 같은 상의 수상자가 선정이 되기 마련이고, 그만큼 그들의 정신세계의 원형에 해당하는 신화나 고전들을 바탕에 깔고 새롭게 창조하는 작품일수록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평할 수는 없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뭔가를 건드린 작품인지가 관람 포인트가 될 것 같다.

4인 가족이 식탁에 앉아 만찬을 한다. 『식물들의 사생활』이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여지껏 제각각 생활공간만 공유하던 구성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4인용 식탁(부부와 두 아들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간행된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2019년 4월)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모티브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4인용 식탁#1_55면/4인용 식탁#2)56면) 이안 감독의 오래된 대만 영화 <음식남녀>의 요리사인 아버지와 그 딸들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가족소설로의 면모가 확인되는 지점이다. 4인용 식탁에 앉기 위해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었구나,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 같은 장면이다. 작가의 최근 저작에서의 언급처럼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도 느리게 읽기, 단숨에 읽었더라도 그 배경이 되는 콘텐츠들을 읽으면서 다시 읽으면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다만, 한 가지 필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읽을수록 화자인 나(기현)의 캐릭터가 좀 작위적이랄까,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이 처음 선뵌 때가 200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그리스-로마 등 서양 고대 고전의 원전번역이 쏟아져나온 것은 그 이후이다) 저자의 성실한 독서에도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승우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07이라는 점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흥미롭다. 영화 007시리즈는 다시 봐도 새롭고 재밌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게, 섬 - 강제윤 시인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섬 여행
강제윤 지음 / 꿈의지도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에게, 섬』을 읽기 전에 당신은 독자들, 강제윤 시인의 가이드를 받아 섬을 여행하게 될 사람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에 몇 꼭지씩 그 섬들을 여행하듯 읽기를 다 마친 지금 내게 제호는 <섬, 당신에게>로 다가온다. 찾아간 섬 하나하나와 저자가 만나 나누는 대화, 다녀와 '인격'이 된 섬에게 보내는 편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01."다리가 생긴 섬들은 육지와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대신 섬의 정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금오도 주민들은 육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금오도를 섬으로 남겨 놓았다. 초창기에는 섬 주민들 대다수가 연육교 공사에 찬성했지만 섬의 정체성을 잃고 몰락한 타 지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끝내 섬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그 결정 덕에 금오도는 섬의 향취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62면(금오도_전남 여수)

 

#02."실상 섬에 다리가 놔져서 주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많지 않다. 육지와 소통이 쉬워지는 것 말고는. 대문 없이 살던 사람들도 늘 도둑 걱정을 해야 한다. 섬에 관광객이 많이 올 거라고 선전하지만 대부분은 차로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나간다. 섬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섬사람들도 다리가 생기면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졌었지만 직접 겪어보고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리가 놔지면 섬은 그저 육지의 또 다른 오지로 편입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섬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다리보다 섬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반환경의 조성이다."  -78면(시산도詩山島_전남 고흥)

 

#03."사람이 섬으로 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풍경일까, 휴식일까. 싱싱한 해산물들일까. 얻을 수 있다면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섬에 오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 오롯한 자신의 것은 아니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뿐이다. 새로운 '한 생각'을 얻는 일이야말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한 생각'을 떨칠 수 있는 지름길아다. 섬에서는 걷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 맡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온전히 걷기)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110면(연화도_경남 통영)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을 만나는 섬
곳곳에는 [인용3]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자신만의 '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데, 인용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좋은 글(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용1]과 [인용2]는 섬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섬이 섬인 이유를 깨닫고 섬이 섬으로 남기를 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릅답다. [인용1,2]와 같은 지킴이 없이 [인용3]과 같은 섬이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을 있을 수 없다. 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뱃길도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 난 길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섬에는 마침표가 있다. 육지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자그마한 섬들에는 한 컷의 사진, 한 편의 시가 그렇듯이 깨달음의 순간이 반드시 그리고 자주 온다고 해야 할까? 시와 사진이 그렇듯이 섬들은 시인 강제윤을 만나면서 '순간의 꽃'의 범주에 포함된다.

 

시와 사진처럼 한국의 섬들은 시인을 만나 '순간의 꽃'이 된다
그리고 섬에는 사람들이 산다. 그것도 연식이 오래된 승용차와 같은 사람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섬들에 살고 있다. 문득 메모를 하다가 '연식'이란 단어를 검색한다. 두 가지 한자가 다른 의미가 눈에 들어온다. 먼저 연식(年式)이다. '기계류, 특히 자동차를 만든 해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이다. 흔히 '연식이 오래된'이라고 비유할 때 쓰인다. 그런데 연식(年食)이 있다. '사람이나 생물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온 해의 수효'다. 이 경우는 '나이가 많은'과 같은 의미로 곧바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에게, 섬』에는 섬에서 살아가는 연식이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섬에 사는 당신들의 이야기,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