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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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아 말하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 고전들을 읽는 소회는 이와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웠던 지난 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다시 맞이한 여름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삼 세 판이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세 차례는 해야 지는 쪽의 아쉬움이 덜할 수 없다. 이기는 쪽에도 단지 운(運)만으로 이긴 건 아니라는 뿌듯함을 선사한다. 얼마 전에 고전번역가 천병희의 『일리아스』 개정판이 나왔다. 세 번째 수정판이다. 간명한 ‘옮긴이 서문’에서 3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전 하나를 우리말로 다듬고 또 다듬은 노장의 소회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의 『일리아스』 첫 우리말 원전번역은 1982년에 이뤄졌다. 1996년에 1차 수정판이 나왔고, 정년퇴임 직후인 2006년 2차 수정판부터 도서출판 숲에서 펴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한 권이라도 더 옮기고자 하는 선생의 바람과 일상생활의 거의 전부가 된 꾸준한 번역작업, 덕분에 지금 우리 독자들은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쉬운 우리말로 그리스 라틴 고전들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새로운 원전 텍스트를 한 권이라도 더 내고자 몸과 마음이 바쁜 와중에도 고전 중의 고전, 고전들의 고전 우리말 『일리아스』를 틈틈이 다듬은 결과가 이번 3차 수정판(2015년 6월)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설전에 이어 알렉산드로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 하이라이트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 이르기까지 『일리아스』에는 인류 최초의 전쟁 서사시답게, 유명한 전투들이 등장하는데, 이번 개정판 출간 또한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 속 세기의 대결이 그러하듯

개정판 출간도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
무엇보다 이번 수정판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후주 체제에서 각주 체제로의 전환이다. 선생의 뜻을 출판사가 받아들여 거의 새로 펴내는 공정을 마다하지 않은 결과다. 후주가 더 나은지 각주가 더 알맞은지는 책의 성격에 따라(주석들이 본문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무엇이 무엇보다 더 나을지 1차 판단은 저자와 출판사의 몫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好)/불호(不好)가 엇갈리는 주문이 이어졌으리라. 일반적으로 책이라는 물품을 공급하는 입장에서는 깨알 같은 주석들이 독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에 후주 체제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특히 고전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구매한 데서 그치지 않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하나까지 가급적 이른 시간에 완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고전이며, 잘된 번역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 그럴 때라야 지속적인 출간과 업그레이드, 곧 사후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번역은 이미 그 진가가 입증된 다른 문화권의 다른 언어로 된 이야기를 우리 문화권에 우리말로 접목한다는 점에서 ‘창조’에 가깝다.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의 새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결국은 주석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라야 한다. 한 차례 읽고 지나치는 소품이 아니라 소장하면서 읽고 또 읽는 걸작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후주 체제를 각주 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이었으리라.

 

주석 하나하나까지 알차게 읽어야 소화가능한 고전, 

후주체제에서 각주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
흔히 시(詩)는 문학예술의 꽃이라고 하는데, 24권 분량의 『일리아스』는 시 중에서도 서사시(敍事詩)에 해당한다. 창작은 말할 것도 없고, 운문이기에 시 번역은 흔히 반역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그리스인들에게 처음 복잡한 신(神)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두 사람은 헬라스 인들(그리스인들)에게 신을 선물해주었다고 말한다.

나보다 기껏해야 4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헬라스 인들을 위해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신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신들 사이에 직책과 활동 영역을 배분하고, 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제2권 53장)”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서사시의 두 거장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 신화를 체계화하면서 경쟁했다. 그런데 신들과 영웅들의 세계가 처음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인류사의 사건인데, 서사시라는 형식에 담았으니 우리말 번역은 오랫동안 무거운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시 장르라는 점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가중(加重)되었다. 또한 희랍어 문장구성은 곧잘 한문 문장의 구성과 비교되는데, 번역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번역을 할 수 있어 매번 난해한 공정일 수밖에 없다고. 내용을 오롯이 전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시를 시로 번역해야 하니 더욱 어렵다. 더구나 구술 형식으로 전달되던 것들이 글자로 고정된 것이라, 구어체로 다듬어진 유려함을 재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천병희 선생이 한 한 인터뷰에서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고 했겠는가.

 

시라는 장르로 펼친 복잡다단한 신(神)들의 세계,

구술로 다듬어진 유려함 재현 결코 쉽지 않아
세월이 흘러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의 시기를 살아가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다.” 고전을 최초로 쓰인 그 언어로 읽을 수 없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천병희를 이을 ‘청출어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이런 까닭에 한 작품이라도 더 기왕이면 번역이 쉽지 않은 작품을 선택하여 우리말로 옮기고자 하는 천병희 선생의 초조(焦燥)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는 번역이 잘 되었다는 영역이나 독역으로 『일리아스』를 읽어도(지난한 번역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리아스』를 다듬고 또 다듬어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에 이르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뜻이다.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 걷기라면,

우리말 번역 읽기는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또한 3차 수정판 발행은, 그동안 ‘높은 문턱’으로만 알았던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꾸준한 독서가 바탕이 되어 가능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서양 철학의 삼태성으로 불리는 세 사람도 평생 동안 호메로스의 독자로 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말과 글을 남겼다. 어렵다는 플라톤의 대화편 거의 대부분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는 고전번역가 천병희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의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다듬어낸 『일리아스』 개정판을 만나는 마음은 각별하다. 더 이상 책 후반부의 후주 등을 떼어내 별도로 제본하여 『일리아스』를 읽지 않아도 된다. 양장본의 책을 휴대하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주지만, 무엇보다 무거워서 분책(分冊)하여 읽기도 하였다. 읽고 또 읽을수록 숱하게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과 배경이 익숙해질수록 새로운 맛을 주는 『일리아스』 거듭 읽기는 명품 뮤지컬을 '보고 또 보아도' 그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아니 거듭 읽어도 매번 새로운 감동을 주는 『일리아스』 읽는 즐거움이 명품 뮤지컬에서도 발견된다고 해야겠다.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는데, 천병희 표 원전고전을 읽는 소회는 예외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운 지난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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